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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가 삶의 토대가 된 현대사회

기업 활동의 결과는 (항상 현실의 단면만 제공할 뿐인) 컴퓨터로 기록되고 요약된 후 묻지도 않고 처리된다. “컴퓨터는 ‘노’라고 하지 않는 법이다.” 그런 후 수치를 기초로 결정을 내린다. 정반대 결정을 수십 번 반복할 수 있을 만큼 유연한 수많은 인간의 머리는 아무도 쳐다보지 않는다. 결국 숫자가 자신의 토대가 되는 현실을 강조한다. 이를 두고 물화(reification)라 부른다.(‘res’는 ‘사물’, ‘facere’는 ‘만들다’라는 뜻이다.) 한 대기업이 예상보다 적은 수익을 올렸다는 발표 하나가 미미한 공포를 몰고 오더니 곧장 주식 폭락으로 이어져 결국 공포가 자기충족적 예언이 되고 마는 지금의 증시가 대표 사례일 것이다.[우리는 어떻게 괴물이 되어가는가, 파울 페르하에허 지음, 장혜경 옮김, 반비, 2015년, p138]

어제 글의 같은 작가가 주장한 것처럼 경제는 – 혹은 신자유주의적 서사는 – 현재 우리 사회의 문화와 정체성을 정의하는 주된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그리고 이 새로운 서사의 영웅들은 다윗이나 삼손이 아니라 애플이나 엑슨모빌과 같은 기업 – 또는 루크 스카이워커? – 이다. 이 슈퍼히어로의 파워를 확인할 수 있는 가늠자는 재무제표를 통해 알 수 있는 영업수익이나 이런 실적 등이 반영된 주식가격이다. 현대 사회에서 슈퍼히어로가 슈퍼히어로로 인정받으려면 저자가 말한 물화(reification)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문제는 이 물화 과정이 우리가 통상 믿는 것처럼 그렇게 정확하지 않거나 심지어 조작되기도 한다는 점이다. 고대 수학자가 수학을 연구한 이유가 신의 세계가 숫자로 표시되므로 연구를 통해 신의 섭리를 깨달으려 했다는 일화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일단 숫자로 표현된 것에 우리는 보다 객관적이라 여기고 강한 믿음을 갖는 게 인지상정이다. 그런 믿음을 발전시켜 현대 경제에서 기업은 재무제표를 만들고, 신용평가사는 그런 기업의 신용등급을 매기고, 정부는 경제와 관련된 숫자를 모아 이를 토대로 정책을 수립한다.

물론 이러한 과정들은 경제가 발달하면서 어느 정도 객관성이 검증된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기업에 대한 복식부기를 통해 자산의 내용을 파악할 수 있고, 신용평가가 기업이나 국가의 건전성을 가늠하는 유효한 잣대가 됨을 경험적으로 알게 되고1, 인구센서스 등을 통해 경제계획을 수립함이 타당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문제는 이런 제도의 아웃라이어들이 점점 늘어날 때다. 물화의 과정이 더 이상 내적으로 누적되어온 아웃라이어를 통제할 수 없어서 체제가 붕괴된 경험이 바로 지난 금융위기다.2

그 물화 과정을 통한 통제의 어려움에 대해서 좀 더 이야기하자면 금융위기 이전에도 그런 사례는 여러 번 있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인용문의 저자도 따로 예로 든 엔론(Enron) 사태다. 에너지 기업에서 금융 기업으로 거듭 나면서 매년 ‘미국에서 가장 혁신적인 기업’으로 거론되곤 했던 엔론이 실천했던 “혁신”은 물화 과정을 무력화시키기 위한 분식회계 혹은 수많은 도관체를 활용한 “첨단금융기법”이었다. 이런 슈퍼히어로의 붕괴는 위험조정영업이익도, 재무제표도, 이사회도, 신용평가도, 감독기관도 막지 못했다.

그 뒤 금융위기라는 자본주의가 거의 붕괴될 뻔한 – 어쩌면 지금 그저 고사중인 – 사태가 발생했어도 나를 포함한 경제주체들은 제도를 버리지 못하고, 그 근간을 이루는 숫자와 경험주의적 데이터를 버리지 못하고 있다. 심지어 이는 경제학 분야에서도 두드러진 경향이라고 한다. ‘경제나 경제학이란 것이 원래 그런 것이 아닌가?’라고 묻는다면 경제학에서도 과거에는 이론적인 부분이 다수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던 것이 요즘에는 숫자에 의존한 이른바 “실증적” 연구로 비중이 옮겨가고 있는 상황이라고 한다.

이 실증적 연구가 갖는 문제점은 현실경제에서 숫자로 구성된 제도가 갖는 문제점과 유사하다. 실증적 연구는 “정반대 결정을 수십 번 반복할 수 있을 만큼 유연한 수많은 인간의 머리”가 뒤에 숨어있다는 점이 편의적으로 무시된다는 점이다. 재무제표에 담긴 자산의 가치평가, 충당금 규모, 부외금융에 대한 숫자가 작성자에 따라 바뀔 수 있는 것처럼 실증적 연구가 연구자의 가치평가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수 있음은 우리가 숫자에 대해 갖는 경외심에 의해 압도당하는 것이 문제다. 숫자는 사회전반을 지배해가고 있다.

요는 회귀분석기법을 통한 논문이 통과되기가 쉽다는 점이다.

경제학에 있어서의 ‘평균’과 ‘정의’

회사를 인수할 때는 변호사들이 마지막 서류를 고급호텔에서 작성하는 동안 파티를 하면서 한 병에 백만 원짜리 샴페인을 마신다. 하지만 그 서류에는 생계를 잃는 수천 명의 직원들 이름이 들어 있었다. 그때는 그냥 얼굴도 없는 ‘이름’뿐이었다. [중략] 한번은 GE캐피탈이 어느 회사를 인수한 후 계열사인 다른 생명보험사로 자산만 옮긴 다음, 단 1명의 직원도 남기지 않고 모두 해고됐다. 지금 생각해보면 가슴이 너무 아프다. 너무 잔인했다. 내가 결정한 일은 아니지만 같이 했으니…..[김경준 저, BBK의 배신, (주)비비케이북스, 2012년, p251]

BBK사건으로 유명한 김경준 씨가 시카고 대학교 경제학 석사를 마치고 들어간 GE캐피탈에서 했던 일에 관한 묘사다. 당시 그는 GE만이 할 수 있는 가치분석 기법을 동원해 저평가된 생명보험사를 인수하는 일을 담당했다고 한다. 2년 동안 20여개의 생명보험사를 인수하였고, 이를 통해 GE는 단숨에 미국 최대의 생명보험사가 되었다고 한다. 당시 GE의 CEO는 중성자탄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잭 웰치 Jack Welch 였다. 건물은 그대로 남겨둔 채 사람만 없애는 중성자탄의 실력이 보험사의 인수에도 그대로 드러난 셈이다.

사람들이 정확하게 미리 인식해야 할 사실은, 경제학은 ‘평균’을 강조하기에 ‘Justice’, 즉 정의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다. 예를 들어보자.

Scenario #1 : 2사람 중 사람A는 100억 원이 있고 사람B는 0원이 있다.

Scenario #2 : 2사람이 각자 50억 원씩 있는 상황.

위 두 가지 상황을 비교할 때, Scenario #1에서 사람A에게 101억 원이 있으면 평균적으로 Scenario #1이 높으니 Scenario #2보다 더 좋다고 판단한다. 하지만 Scenario #1은 정의 또는 정당하게 볼 수가 없다.[같은 책, pp245~246]

앞서의 인용문을 읽고 생각난 그 앞의 글이다. 평균을 강조하는 경제학의 입장이1 생명보험사의 M&A 과정에서의 참여자들의 행태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해준다는 면에서 흥미롭다. 즉 호텔에서 서류를 작성하던 변호사들에게 그들의 작업으로 인해 직장을 잃을 이들이 눈에 밟히지 않은 이유는 그들의 눈앞에 “백만 원짜리 샴페인”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변호사 개인으로서야 당연히 한계수익이 한계비용보다 훨씬 컸을 것이고, 중성자탄 잭 웰치나 또는 평균을 강조하는 경제학자에게 실직은 문제가 될 것이 없었을 것이다.

세계 최대의 사모펀드 중 하나인 블랙스톤에 관한 책을 읽어보면 저자는 M&A 과정에서 반드시 위와 같은 살인적인 해고 등을 통한 단기이익 실현에 주력한 것만은 아니라고 항변한다. 실제로 기존 주주들과 마찬가지로 장기적인 경영전략을 통해 기업 가치를 재고하려는 노력도 적잖다. 문제는 M&A 또는 일상적인 기업 경영에서 기업 가치를 단기적으로 극대화시키는 가장 좋은 전략은 여전히 사람자르기라는 점이다. 그리고 주류 경제학이 정의에 대한 고려 없는 평균에 의한 최적화만 신경 쓴다면 이런 행태는 줄어들지 않을 것 같다.

“과학혁명의 구조”를 읽으며 드는 상념

위기에 처한 패러다임으로부터 정상과학의 새로운 전통이 태동할 수 있는 새로운 패러다임에로의 이행은 옛 패러다임의 명료화나 확장에 의해서 성취되는 과정, 즉 누적적 과정과는 거리가 멀 것이다. 그러한 변화는 오히려 새로운 기반에 근거해서 그 분야를 다시 세우는 것으로서, 그 분야 패러다임의 많은 방법과 응용은 물론이고, 가장 기본적인 이론적 일반화조차도 변화시키는 재건 사업이다. 그 이행 시기에는 옛 패러다임과 새 패러다임에 의해서 풀릴 수 있는 문제들이 크게 중복될 것이나, 그렇다고 해서 결코 완전히 중복되지는 않을 것이다. [중략] 최근에 통찰력 깊은 어느 과학사학자는 패러다임 변화에 의한 과학의 재편성에서의 고전적 사례를 고찰하면서, 그런 변화는 “지팡이의 다른 쪽 끝을 집어 올리는 것”으로서, 그것은 “똑같은 자료 더미를 이전처럼 다루되 그것들에 종전과는 다른 테두리를 부여함으로써 각각의 자료들을 새로운 관련 체계 속에 놓이도록 하는 것이 포함되는 과정이라고 묘사한 바 있다.[토머스 S. 쿤 지음, 김명자/홍성욱 옮김, 과학혁명의 구조, 2013, 까치, p175]

“패러다임의 전환”이라는 표현은 토머스 S. 쿤을 모르는 이들조차도 즐겨 쓰는 표현이다. 주로 쓰는 이들은 기존 여당을 물리치고 새로 권력자가 된 야당 지도자랄지, 회사가 위기에 빠졌거나 혹은 직원들이 너무 나태하다고 생각하는 기업 경영인이다. “처자식만 빼고 다 바꿔라”라고 주문한 어떤 유명한 재벌 총수도 당시 “패러다임의 전환”이란 표현을 적시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이 표현이 풍기는 뉘앙스를 염두에 두고 했던 말일 것이다.

인용한 부분은 저자가 이 “패러다임의 전환”이 가지는 의미를 핵심적으로 서술한 부분이다. 저자의 의미 해석에 따르면 “한 동안 연구자들의 커뮤니티에 모델의 문제점과 해결책을 제시해주는,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과학적 성취”를 의미하는 패러다임이 전환되는 과정은 ▲ 누적적인 과정과는 거리가 멀며 ▲ 풀릴 수 있는 문제가 중복될 수는 있으나 완전히 같지는 않을 것인데, 그 이유는 ▲ 지팡이의 다른 쪽 끝을 집어 올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패러다임의 전환의 가장 대표적인 예로 쓰이는 코페르니쿠스 혁명 이전의 천문학계를 지배했던 프톨레마이오스 체계는 고대의 체계 중에서 가장 자연에 잘 들어맞는 이론이었다고 한다. 심지어 행성에 대한 프톨레마이오스 체계의 예측은 코페르니쿠스의 것만큼이나 잘 들어맞아 그 계산법은 오늘날까지도 쓰이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그것이 프톨레마이오스의 패러다임이 옳다는 증거는 아닌 것이다. 지팡이의 다른 끝을 들어 올린 것이니 말이다.

스스로를 일종의 사회“과학”으로 여기고 있을 경제학계에도 물론 이러한 패러다임이 존재한다. 크게 보아 아담 스미스, 칼 맑스, 존 메이나드 케인즈, 밀턴 프리드만과 같은 경제학자들이 기존 패러다임을 파괴하고 새로운 패러다임을 세운 이들일 것이다. 다만 경제학계가 다른 과학계와 다른 점은 그러한 패러다임이 한 시대를 압도할 수는 있어도, 과학의 패러다임이 그러한 것처럼 이전의 패러다임을 폐기시킬 수 있을 정도는 아니라는 점이다.

과학에서는 이론의 발전과 더불어 관찰도구의 발전도 병행한다. 연구는 제반 변수들이 제거된 순도 높은 환경에서 이루어진다. 그렇기에 기존 패러다임이 새로운 변칙현상을 설명할 수 없는 것이 자명해진다면 폐기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경제학에서 한 패러다임이 다른 패러다임을 폐기시킬 정도의 파괴력이 없는 이유는 이러한 순도 높은 환경의 조성이 어렵다는 이유일 것이다. 더 중요하게 경제는 정치적 의지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인 것이다.

정치적 의지를 지니고 있는 집단, 특히 경제적 사익을 추구하고자 하는 동기가 강한 집단이 권력을 갖게 되면 그들은 대개 그러한 사익에 복무할 자세가 되어 있는 관변학자를 동원해 과학으로 둔갑한 경제이론으로 그들의 사익추구를 정당한 공익적 행위, 심지어는 자연의 이치에 부합하는 행위로 둔갑시키고는 한다. 대표적인 것이 부자가 잘 살아야 빈자도 잘 살게 된다는, 그들 스스로도 믿지 않는 “적하이론(trickle-down theory)”일 것이다.

즉, 경제학이라는 “과학”을 연구하는 이들이 유념해야 할 점은 그들이 관찰하는 환경은 자연과학에서의 그것처럼 순도 높은 환경이 아니며, 많은 비합리적인 인간들이 – 또는 연구를 진행하는 본인조차도 – 그 환경 안에 들어가 행동한다는 점일 것이다. 자연과학은 그래도 때가 되면 자신이 지팡이의 다른 쪽 끝을 잡고 있었음을 인정하겠지만, 경제학에서는 오히려 지팡이를 잡은 적도 없는 이들조차도 지팡이가 자기 것이라고 우길지도 모른다.

자본주의형 인간의 합리성

전(前)자본주의적 인간은 경제활동을 단지 자연적 욕망을 채우는 것으로 생각한 ‘자연인’이었다. [중략] 이와 대조적으로 자본가는 ‘원시적인 본래의 모습’의 ‘자연인’을 ‘뿌리채 뽑고’, ‘인생의 모든 가치를 전도시켜’ 자본의 집적을 경제활동의 주된 동기로 생각하고, 냉정한 합리적 태도로 정확한 수량계산의 방법을 사용하여 인생의 모든 것을 이 목적에 종속시켰다.[자본주의 이행논쟁, 모리스 돕 등, 김대환 편역, 동녘, 1984년, p12]

In last week’s post I argued that the analytic structure through which economists behold the world is based on certain quasi-religious beliefs on the rationality of human beings and the efficiency of markets. These beliefs can blind economists to the foibles of the real world. Matters are worse when, wittingly or unwittingly, economists infuse their analysis with their own (or a political client’s) preferred ideology.
지난주의 글에서 나는 경제학자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분석적 구조는 인간의 합리성과 시장의 효율성에 대한 확고한 유사종교적인 믿음에 기초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믿음들은 경제학자들이 진짜 세계의 결점을 바라보지 못하게 한다. 설상가상으로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간에 경제학자들은 그들의 분석을 그들 자신이 (또는 그들의 정치적 고객들이) 선호하는 이데올로기에 주입시켜버린다.[출처]

두 글을 비교해보니 “냉정한 합리적 태도”를 지닌 인간은 자본가가 창조해냈는지 경제학자가 창조해냈는지 알쏭달쏭하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어쨌든 모든 합리적인 경제인들이 수익을 내지는 않지만 수익을 내는 이는 합리적으로 인정받는다. 그러니 아래와 같은 인생역정이 성공신화로 미화되는 사회가 되어버린다.

폐암 선고 이후, 원형지정은 자포자기 상태로 카지노에서 돈을 쓰기도 하고, 이틀 내내 술만 마시기도 했다. 그리고 다시 컴퓨터 앞에 앉은 원형지정은 이미 ‘평정심’을 잃은 상태였고, 그는 홧김에 옵션에 배팅을 해 50억원을 순식간에 날렸다. 눈앞에서 수십 억원의 돈이 사라지고 나니 제 정신이 아니었다. 그는 어머니의 집에 몰래 들어가 돈을 들고나와 다시 주식에 쏟아 부었고, 사채업자한테 돈을 빌려 주식에 털어 넣었다.[중략]그러던 2007년, 그는 대세상승장에서 현물 매매를 통해 승승장구해 그동안의 빚 50억원을 모두 청산하고도 남을 만큼 돈을 벌었다. 기적 같은 일이 벌어진 것이다. “절박한 한계 상황에서 독기를 품으니까 놀라운 집중력이 생기더라고요. 게다가 하늘이 도왔는지, 2007년은 주식시장이 굉장히 좋았잖아요. 빚을 갚고 돈이 생기니까, 인간관계도 다시 살아나더라고요.”[[위기를 극복한 부자들]430만원으로 50억원 빚 청산 ‘3초의 승부사’ 원형지정]

이건 합리성이 아니라 도박이지.

“진화학 자체가 진화하지 못한다면 더 이상 과학이 아니다”

“지금을 경제위기라 하지만, 그 근본에는 경제학의 위기가 도사리고 있다. 경제학이 그토록 소망하는 ‘과학’이 되기 위해서는 다시 과학의 근본으로 돌아가, ‘싸가지 없는 학문’이 돼야 할 것이다.”

[전문보기]

The prediction business

Economics learns a thing or two from evolutionary biology
by Massimo Pigliucci

“내 생각에 세상이 어떻게 기능하는지를 규정한 주요 작동구조라고 인지한 모델이 흠이 하나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는 불명예스럽게도 전직 연방준비제도 의장이었던 알란 그린스펀의 말이다. 그는 경제가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한 그의 견해가 크게 잘못되었다고 인정하였다. 그리고 여전히 지난 시절의 그의 “흠 있는” 모델에 근거한 연방준비제도 차원의 개입에 (또는 그러함으로써의 불개입) 대해서는 사과하지 않았다. 전 세계 수 억 명의 사람들이 잘못된 가정에 근거한 정책적 결정을 내리는 누군가의 결과로 인해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다.

어떻게 이러한 일이 가능할까? 경제학은 복잡한 수학적 모델 (그리고 우리 모두는 수학이 매우 매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다)에 기초한 굳건한 규율로 간주되어 왔다. 그들은 심지어 큰 소리를 내는 경제학자들에게 노벨상까지 쥐어준다! 그리고 여전히 경제학은 언제나 사회학, 심리학, 그리고 어떤 면에서는 생태학이나 진화 생물학과 같은 생명과학 일부까지도 아우르는 “연성의(soft)” 과학이라는 동류의 대접에서 벗어나기 위해 싸워야만 했다. 참으로 그러한 다른 연구 분야의 종사자들처럼 몇몇 경제학자들 역시 “물리학을 부러워하는(physics envy)”, 즉 물리과학을 그들 분야가 그래야 하는 것 인양의 모델로써 사용한다는 혐의를 인정한다. 심지어 그린스펀의 영리한 화술을 이용하자면 좋은 과학은 물리학에 의거 모델화되어야 한다는 그 가정마저 “흠이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첼시 월드 Chelsea Wald 는 사이언스지에서의 최근 논문에서 (2008년 12월) 어떻게 금융부문에서의 그렇게 수많은 똑똑한 사람들이 분명히 문제가 있고 결국에는 자본주의 그 자체의 기저를 흔들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쑤셔대는 전 세계의 경제위기를 이끌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명백한 데이터에도 불구하고 수십 년에 걸쳐 비합리적인 결정을 내렸는가를 물음으로써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이 대답으로 일부는 “시장”은 사람들이 그들 스스로의 자기이해에 따라 행동하고, 그들이 투자를 고려하고 있는 비즈니스에 대한 적정한 정보에 완벽하고 즉각적인 반응을 보이는 합리적인 이들이기 때문에 기능한다는 경제학의 고집스러운 아이디어에서 찾아볼 수 있다. 경제학자들은 멍청하지 않다. 그리고 그들은 완벽한 합리성, 완벽한 정보, 그리고 즉각적인 접근이라는 것들이 시장이 기능하는 실재와는 1광년 동떨어져있다는 사실을 매우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사실 최근 모델들에서는 이러한 가정들이 일정정도 느슨해지고 있다. 그러나 사물을 그런 식으로 모델링한다는 것은 너무나 큰 유혹이다! 결국 물리학자들도 역시 그렇게 한다. “둥그런 소를 가정하면..(consider a spherical cow)”(주1)으로 시작하는 물리학 개론의 문제를 상기하라.

그러나 이제 새로운 녀석이 나타났다. : “인지행위적 재무론(behavioral finance)”은 사람들이 어떤 때는 다소 합리적으로 행동하지만 또 어떤 때에는 노골적인 공포감에 빠져들 수도 있다는 아이디어를 진지하게 고려한다. 이 새로운 접근은 심리학이나 사회과학과 같은 인간행동의 특징에 관해 가장 많이 우리에게 말하는 바가 큰 “연성의” 과학을 포함하는 여러 분야의 학제적 환경에서 도출되었다. 아마도 그리 놀랍지 않게도 이제 때때로 경제학자들을 자극시키는 또 다른 과학이 있다. : 진화생물학. 고전적인 모델을 채택하는 종래의 “효율적 시장가설”은 아담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이 자연선택(natural selection)과 더 직접적으로 유사성을 가지는 “적응적 시장가설”로 대체되고 있다.

진화생물학자들은 자연선택이 최적화 과정이 아니며 만족화의 과정이고 그것은 어떠한 결과물이든 간에 특정한 역사적 순간에 달성 가능한 것을 생산하고 그 문제를 “매우 충분하게” 다루는 것을 의미한다. 나아가 이것은 다소는 많은 자원을 “낭비”하고 때로 막다른 길로 치닫기도 한다.(현존하는 종의 99%가 멸종되었다는 것만을 상기하라) 떠오르는 그림은 합리주의자 패러다임보다 훨씬 더 현실적이다. 그러나 또한 확실하게 훨씬 더 혼란스럽다.

진화생물학에서 배울 점이 또 하나 있는데 이를 통해 경제학자들 또는 일반대중이 특별히 행복해지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복잡계(complex systems)가 시간을 두고 진화하면 그들이 취하는 경로들은 (양자 역학 테두리 바깥 결정론적인 거시 물리학 법칙과 반대로) 역사적 사건들에 대해 우발적(contingent)이다. 사회학자, 심리학자, 생태학자, 그리고 진화생물학자들은 언제라도 그들의 경제학의 친구들에게 충분히 복잡한 임의의 역사적 모델을 통해 (공룡의 멸종, 닷컴 버블과 같은) 과거의 사건들을 설명하는 것이 분명히 가능하다고 말해줄 수 있다. 그러나 능력 밖에 있는 것은 정확히 경제학자들이 가장 원하는 것이다. : 미래의 예측, “좋은” 과학의 인증표.

나는 여기서 일반적인 것이 아니라 특정한 실행 가능한 예측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예를 들어 기상학은 그것이 12월과 2월의 기간 동안 뉴욕의 낮은 온도일 것이 매우 확률이 높다는 것을 당신에게 말해준다는 의미에서 예언적이다. 그러나 그것이 내일 당신이 두꺼운 코트나 또는 우산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해줄 능력은 별로 없다.(주2) 유사하게 생태학자는 예를 들어 가용영역의 크기 또는 (초계체 역학에 영향을 미치는) 인접한 유사영역과의 연계 등 특정 환경인자들이 변할 때, 멸종의 가능성이 증가한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그러나 개별 종이 언제 어디서 멸종할 지에 대해 예언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유사하게 새로운 경제적 모델들은 그들이 예를 들어 가치측정이 어려운 주식들이 “낙관적인” 시기에는 잘 나갈 것이라는, 반면 가치측정이 쉬운 주식은 “비관적인” 시기에 좀 더 잘 나갈 것이라는 것은 이야기할 수 있는 의미에서만 “작동”할 것이다. 그들은 심지어 주식들이 얼마나 잘 나가는지에 대한 분산이 두 번째 것보다는 첫 번째 타입에서 보다 높다는 것도 이야기해줄 수 있다. 그러나 어느 것도 당신이 당신 브로커에게 오늘 이따가 이야기할 것에 대해서나 지금 이 시점에서 무엇을 사고팔아야 할지에 대한 결정을 내려야 하는 것에 대한 용도로는 쓸 수 없을 것이다.

이 이야기의 교훈은 위의 모든 것들이 경제학, 사회학, 심리학, 생태학, 진화생물학의 실패는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과학들이 물리학의 (모든 것은 아닐지라도) 많은 것들과는 다르게 복잡하고, 역사적인 시스템을 다루고 있다는 사실에서 예견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제거할 필요가 있는 진정한 가정은 물리학이 모든 다른 과학들이 비교되어지는 금표준(golden standard)이라는 매우 집요하고 해로운 가정이다. 이제 우리가 연방 자금조달 관료들에게 이러한 사실을 납득시킬 수만 있다면…

매우 재밌는 글이어서 어설프게나마 번역해보았다. 요즘 유행하는 복잡계 경제학의 단초를 엿볼 수 있기도 하거니와 경제학이 끊임없이 접점을 찾아가고 있는 여타 자연과학들과의 상호관련성도 함축성 있게 설명하고 있다. 또한 이글이 알려주는 바는 어떠한 학문이건 간에 ‘예측’ 더 나아가 ‘예언’(사실 위 번역문의 원문으로 보자면 위 글에서 예언이라고 한 것들은 예측이 더 정확할 것이나 그것의 의미를 살리기 위해 예언이라고 하였다.)에 대한 유혹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는 사실이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주위의 사람들에게 ‘넌 왜 비싼 학비 내가면서 그 공부 했느냐’는 또는 ‘경제학 공부한 놈이 주식은 왜 까먹냐’는 핀잔에 시달릴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위의 글의 취지에서 다른 것을 떠나 분명하게 동의하는 것은 특히나 경제학에서 ‘예언’ 심지어 ‘예측’은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물론 요즘 그렇게 예언에 성공(?)해서 명성을 얻은 이들이 월스트리트나 아고라에 여럿 있다. 그렇지만 그 사실이 경제학은 예측이 가능한 학문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은 아니다.

‘Adam Smith’s Lost Legacy’라는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는 Gavin Kennedy 라는 경제학자는 내가 번역한 위 글을 부분 인용하면서 현재 경제학계 또는 경제계에서 만연해 있는 그런 풍토를 “예언 비즈니스(the prediction business)”라고 통렬하게 비판하고 있다. 상당 부분 공감하는 바이다. 과거의 경험과 학문의 틀 내에서 현재의 위기에 대한 새로운 대안과 해법을 모색하는 것은 유용할 것이다. 그러나 마치 자신의 입장이 전지적인 것 인양 행세하며 자신의 프레임을 한 치도 벗어나지 않으려는 아집은 logger 님의 표현에 따르면 불쏘시개로 써도 시원치 않을 쓰레기일 것이다.

(주1) 모든 실재하는 현상을 가급적 둥글게, 즉 모나지 않게 가정하고 시작하려는 과학적 모델링의 행태를 꼬집는 농담(참고하기) : 역자 주

(주2) 기상청 직원 소풍가는 날 비 온다는 농담의 맥락에서 : 역자 주

“마르크스 경제학 전공교수 채용을 호소합니다”

서구 지성사에서 가장 걸출한 지식인이자 실천가였던 카알 마르크스. 여전히 그의 주장이 유효함에도 이 땅의 최고학부라는 서울대학교에서 김수행 교수의 퇴임으로 말미암아 그 학문적 전통이 씨가 마를 위기라고 한다. 대학의 직업양성소화 경향에 비추어 볼 때 당연한 일인가? 어쨌든 마르크스 경제학 전공교수의 채용을 호소하는 서울대학교 경제학부 대학원생들의 호소문을 전재한다.

마르크스 경제학 전공교수 채용을 호소합니다!

지금은 겨울방학 중입니다. 그러나 ‘경제학 연구자’로서 자신의 사명을 소중히 생각하며 자신의 배움을 사회에 바람직하게 기여코자 고뇌하는 많은 대학원생들이 밤늦도록 연구실들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런 저희들의 연구를 헌신적으로 지도해주실 뿐만 아니라 인생의 선배이자 스승으로서 늘 소중한 가르침을 주시는 경제학부 교수님들께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그런데 그 스승 중 한 분으로서 마르크스경제학을 지난 20여 년 동안 가르쳐 오신 김수행 교수께서 올해 2월 정년퇴임을 하십니다. 그와 더불어 서울대 경제학부에서 마르크스경제학의 존폐 여부를 놓고 많은 이들이 설왕설래하고 있습니다. 설마 마르크스경제학이 서울대에서 없어지겠냐면서도, 후임 교수에 대한 논의조차 교수님들 사이에서 거론되지 않거나 언급을 애써 삼가시는 상황을 보며 저희들은 우려스러운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지난 20년 동안 마르크스경제학은 경제학부 뿐만 아니라 서울대 전체의 학문 발전과 다양성 유지에 큰 기여를 했으며 수많은 연구자들을 양성하여 한국사회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경제학 전공 교수가 사라질지도 모르는 오늘의 상황에 저희는 무척 안타깝습니다. 더 나아가 저희는 마르크스경제학이 사라질 위기에 놓인 상황 자체를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는 단순히 서울대 경제학부에서 전공 영역 하나가 사라진다는 의미를 넘어 우리 학부, 나아가 서울대와 한국사회에도 큰 손실을 야기할 사안이기 때문입니다. 저희가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마르크스경제학 전공 교수가 채용되지 않고 마르크스경제학이 서울대에서 사라진다면, 경제학부는 스스로 학문의 다양성을 포기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입니다. 다양한 학문의 섭렵은 진정한 학문적 발전의 기본 조건입니다. 마르크스경제학은 주류경제학의 이론과 논리와는 다른 관점에서 경제현상을 이해하고 분석하는데 중요한 기여를 했습니다. 이는 신고전학파 중심의 주류경제학 이론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주류경제학에서 다루고 있지 않거나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문제들을 자본주의 비판과 사회적 평등이라는 시각에서 분석하면서 한국사회의 변화에 기여하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마르크스경제학 전공 교수가 사라지게 되면, 주류경제학만을 가르치고 연구하는 경제학부에서 학문적 다양성은 점점 더 위축될 것이며, 이에 따라 학문의 창의적 발전은 크게 저해될 것입니다.

둘째, 마르크스경제학이 사라진다면 관련 석·박사 연구자들에게 매우 심각한 영향을 줄 것입니다. 평생 자신의 업적이자 연구자로서의 삶의 길잡이가 될 학위 논문을 지도해 줄 마르크스경제학 전공 후임 교수가 없다는 것 자체가 그들 자신의 삶에서 매우 큰 시련이 될 것이며, 사실상 학문적인 ‘사망선고’를 받는 것과 같습니다. 만일 지도교수를 잃어 대학원생들의 연구가 인위적으로 단절되는 이런 상황을 경제학부에서 방관한다면, 대학원 사회는 앞으로도 이와 유사한 일로 매우 심각한 고통을 겪게 될 것 입니다.

셋째, 마르크스경제학 전공 교수를 뽑지 않는다면, 이는 학문의 수요자인 학생의 권리를 철저하게 무시하는 일입니다. 마르크스경제학은 지난 20여 년 동안 많은 수강생들이 배우고 고민해온, 경제학부의 공식 교과목입니다. 그런데도 이 과목을 담당할 교수가 없다면, 정작 수업의 가장 큰 당사자인 학생들은 부실한 수업을 들을 수밖에 없습니다. 시간강사를 활용하는 방안은 장기적인 처방이 될 수 없습니다. 강의와 논문지도를 담당할 교수가 없다는 것은 곧 마르크스경제학 연구 및 교육의 실질적인 폐지를 의미합니다. 결국 마르크스경제학을 비롯한 더 다양한 시각을 접하고 탐구하고자 하는 수많은 학생들의 기본적인 권리조차 박탈하는 좋지 않은 선례를 남기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저희들은 다음과 같이 정중하게 부탁드립니다. 마르크스경제학을 강의하고, 학문적 재생산을 보장할 마르크스경제학 전공 교수는 서울대 경제학부에 반드시 필요합니다. 학문의 다양성과 경제학부 학문 재생산의 안정성, 학생들의 기본적 권리를 위해 서울대 경제학부는 마르크스경제학 교수를 반드시 채용해야 합니다. 저희 경제학부 대학원생들은 존경하는 교수님들께 마르크스경제학 전공 교수 채용을 간곡히 호소합니다.

2008년 2월 18일

마르크스경제학 전공 교수 채용을 바라는 서울대학교 경제학부 대학원생 일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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