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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은행과 리먼과의 협상자리에서의 딕 펄드의 행동

민유성은 리먼 주식의 과반수를 살 의향이 있었다. 단, 조건은 리먼의 상업용 및 주거용 부동산 자산을 따로 떼어 배드뱅크를 만듦으로써 리먼 본체, 즉 굿뱅크에 행하는 한국산업은행의 투자가 침해받지 않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중략] 이때 펄드가 나서서 말머리를 잘랐다. “내가 볼 때 그쪽이 큰 실수를 하는 거예요.” 펄드가 민유성에게 말했다. “커다란 기회를 놓치는 거라고. 리먼의 부동산 자산에는 큰 가치가 있습니다.” [대마불사, 앤드루 로스 지음, 노 다니엘 옮김, 한울, 2010년, p363~364]

어쨌든 불발한 거래고 민유성이라는 개인 자체에 그리 신뢰가 가지 않지만, 인용한 이 부분을 보고 있자니 그래도 민유성을 포함한 산업은행 측이 나름 성의 있는 협상을 했었다는 생각이 든다. 자의식 과잉의 딕 펄드는 이전 협약당사자였던 워런 버핏, 모건스탠리, 뱅크오브아메리카 등에 그랬듯이 주제 넘는 고압적인 자세로 리먼의 자산에 대해 착각에 가까운 자부심을 가지고 산업은행에게 무리한 조건을 요구했다. 이러한 태도는 시장의 관점과도 거리가 멀었을 뿐 아니라 다른 경영진 등 내부자의 관점과도 다른 것이었다.

가격협상이라는 것이 매도희망가와 매수희망가의 간극을 좁혀나가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관점이 다른 것은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또한 당시 리먼을 포함하여 많은 투자은행들이 가지고 있던 부동산 자산이라는 것이 여러 희한한 프로세스를 거친 증권화 상품이었다는 점에서 정확한 시장가치를 실시간으로 파악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있다는 점도 충분히 감안할 수 있는 정황이다. 하지만 산업은행과 협상을 할 즈음은 이미 그 복잡한 증권화 상품의 민낯이 드러난 시기였다. 그럼에도 펄드는 저런 허풍을 떨었던 것이다.

Richard S. Fuld, Jr. at World Resources Institute forum.jpg
By World Resources Institute Staff – http://flickr.com/photos/wricontest/369118382/, CC BY 2.0, Link

매서운 외모만큼이나 투박한 성격으로 유명한 딕 펄드는 자신이 쌓아올린 제국인 리먼브라더스가 무너져 내릴 즈음에는 거의 인지부조화에 가까울 정도의 심적 상태를 보이고 있었다. 인용한 책에 보면 그가 이사회에게 당시 금융시장의 심각성을 설명하기 위해 초청한 라사드의 한 전문가가 부정적인 이야기를 이어가자 이 발언을 제지하고 나중에 “넌 해고야!”라고 했다고 한다. 산업은행과의 이 협상자리도 애초 리먼 측이 배드뱅크 설립을 전제로 협상하던 자리에 갑자기 나타나 저런 발언을 했다고 한다. 황당한 노릇이다.

사이코패스는 다른 이들보다 보상의 규칙은 재빨리 알아채고 이를 활용하는 반면, 처벌의 규칙에는 둔감하거나 그리 신경 쓰지 않았던 것이다. 또 다른 연구기관은 이런 상황이 실제 뇌활동에 어떻게 반영되는지 연구하였는데, 사이코패스 성향이 강한 집단은 쾌락과 행복감에 관련된 감정을 느끼게 해주는 신경전달물질인 도파민을 사이코패스 성향이 약한 집단에 비해 4배 이상 배출한다는 사실도 밝혀냈다. 연구팀은 “사이코패스는 타인이나 자기 자신이 생명을 위협하는 결과가 오더라도 끝까지 보상을 추구하도록 뇌의 회로가 프로그램돼있다”고 분석했다.[당신 회사의 CEO는 사이코패스일까?]

해당 전문가가 아닌지라 사이코패스가 명확하게 병적 징후로 규정할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유난히 그러한 성향이 강한 이들을 집단화할 수 있다면 딕 풀드는 당연히 사이코패스 성향의 집단에 포함시켜야 할 것이다. 처벌의 규칙에 신경 쓰지 않고 끝까지 보상을 추구했다가 망한 인물이 바로 그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뿐만 아니라 당시 많은 투자은행의 임직원들은 이런 사이코패스적 인지부조화에 전염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결과 유명한 “이익의 사유화, 손실의 사회화”란 문구가 회자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금융자본주의 혹은 신자유주의적 가치관에는 어느 정도 이런 사이코패스적인 매몰참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1980년대만 하더라도 다른 직종에 비해 보수가 많지 않았던 금융시장이 세계화/증권화되기 시작하면서 엄청난 보수를 받기 시작했다. 이렇게 되자 금융업자들은 실패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보상에 따른 쾌락을 더 중요시하기 시작했고, 그 대표적인 사례로는 LTCM 사태랄지 엔론 사태1, 그리고 결정적으로 지난 금융위기가 있다. 한 사회의 뇌 회로가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았던 것이다.

한국에 전화해달라는 펄드의 부탁을 거절한 폴슨

오후 12시 35분, 뱅크오브아메리카와의 협상이 실패했다는 것을 폴슨에게 전화로 알리며 펄드는 거의 미칠 지경이었다. 남은 대안이라고는 한국인들뿐이었다. 펄드는 폴슨에게 리먼을 위해 한국에 전화를 좀 해달라고 했다. 펄드를 위해 워런 버핏에 이어 뱅크오브아메리카에도 전화했던 폴슨은 이번에는 그 부탁을 거절했다.[대마불사, 앤드루 로스 지음, 노 다니엘 옮김, 한울, 2010년, p352]

리만브라더스가 쓰레기가 된 자산을 끌어안고 살아남기 위해 필사의 노력을 경주하던 시절의 이야기다. 리만의 오만한 독재자 딕 펄드는 침몰하는 함선 안에서도 여전히 자신의 배는 튼튼하다는 착각을 하며 구매의향자들에게 배 값을 비싸게 불렀다. 2008년 7월 21일 구매협상을 했던 뱅크오브아메리카에게 리먼이 제안한 주당 가격은 최소 25달러였는데 그날 종가는 18.32달러였다고 한다.

이런 핵노답 상황에서 펄드가 미국의 재무부 장관이었던 행크 폴슨에게 산업은행에 전화를 해달라고 요청했다는 사실이 언급되어 있어 인용해보았다. 만약 당시 폴슨이 이 부탁을 수락하고 산업은행에 – 또는 청와대에? – 전화를 했더라면 결과가 어떻게 되었을까? 시장상황으로 봐서는 도저히 성사가 어려운 딜이었지만, MB치하의 부조리한 상황을 감안하면 결과는 모를 일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나라 전체가 우리가 신정(神政)국가였음을 확인하고는 멘붕 상태다. 수많은 시행착오를 통해 공통분모로 수렴된 현대국가의 합리성이라는 요소가 송두리째 부정당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비단 이러한 극단적으로 “혼이 비정상”인 상태가 아니더라도 현대국가 역시 언제든 합리성이란 이름으로 부조리를 저지를 수 있다는 것을 잘 보여준 사례가, 개인적으로는 지난 금융위기라고 생각한다.

인용한 책의 등장인물들은 가장 뛰어난 금융전문가와 정치가들이 맨해튼 등의 미국 동부에 모여 세계 최고의 자본주의 국가를 이끌어가고 있었다. 그야말로 현대를 배경으로 한 영웅전이라 할만하다. 하지만 이야기는 이미 수많은 영웅들이 합작으로 자본주의를 망쳐놓은 시점부터 시작한다. 그러니 때로는 과연 대의민주제나 市場이 神政보다 무엇이 어떻게 우월한가 하는 망상마저 생기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