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g Archives: 모럴해저드

“컨틴전시 사회주의(Contingency Socialism)”

민스키는 규제자들에 대항하는 은행가들이 벌인 게임과 모럴해저드와 대마불사의 문제 사이에 연계가 있음을 언급했다. 대마불사를 언급하면서 민스키는 “미국은 일종의 컨틴전시 사회주의의 한 형태를 띠고 있는데, 특정한 조직들의 부채는 공공연한 정부 개입이나 독점적 가격결정권의 부여를 통해 보호받는다. 크거나 거대한 기업들은 그들의 채무에 대해 묵시적인 공공적 보증을 (예 : 컨틴전시 부채) 보유하고 있다. 이로 인해 은연중에 공공적 성격을 갖는 부채는 우선적인 시장적 치유로 이어질 것이기에 거대 기업이나 거대 은행을 선호하는 금융적 편견이 발생한다.”(, Hersh Sheferin/Meir Statman, Santa Clara University, Nov. 2011, p51)

금융위기를 맞이하여 새로이 주목받고 있는 경제학자 Hyman Minsky가 사용한 “컨틴전시 사회주의(Contingency Socialism)”이라는 표현은 약간 낯설지만 이 표현에서 쓰인 ‘사회주의’가 지난 금융위기 당시 “부자를 위한 사회주의, 빈자를 위한 자본주의”라는 표현에서 사용된 ‘사회주의’와 비슷한 맥락이라고 간주해도 크게 무리가 없을 것 같다. 그리고 맥락상 그가 ‘사회주의’라는 단어를 사용한 뉘앙스는 그리 긍정적이지 않은 것 같다.

한편 민스키는 이렇듯 “부자를 위한 사회주의”가 도래할 수 있는 위기상황을 피할 방법 몇 개를 제시했는데, 그는 정부의 크기, 고용정책, 산업정책, 그리고 금융개혁 등의 범주에서의 대안을 각각 제시했다. 우선 정부의 크기나 고용정책에 있어서 그는 비교적 진보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즉 정부의 적극적인 역할에 긍정적이다. 산업정책에 있어서는 뉘앙스가 다른데 대마불사가 불가능한 규모로 기업의 크기를 제한 할 것을 제안했다.

시장주의 경제학과 거리를 두는 민스키지만 기업에 대한 생각은 시장주의 원칙과 다르지 않아 보인다. 그는 불공정한 이득과 모럴해저드를 초래할 수 없도록 기업의 크기를 제한하는 공격적인 반독점 정책을 지지했다. 사견으로 그의 대안이 가지고 있는 문제점은 시장주의 대안과 같다는 점이라기보다는 지나치게 순진한 대안이라는 점이다. 즉, 자본주의 소비선순환을 받들고 있는 기업이 모럴해저드를 초래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기업이 바로 프레디맥과 패니메다. “정부보증회사(government-sponsored enterprise)”라는 특수한 지위에서 금융위기를 거치며 국유화된 이 회사들은 부동산 소유사회라는 “미국인의 꿈”을 실현할 “항구적인 의무”를 자임하던 회사들이다. 이 의무를 실천하는 과정에서 그들은 모럴해저드를 유발하며 엄청난 이득을 취했다. 하지만 그 모럴해저드가 없었더라면 미국 자본주의는 “컨틴전시 사회주의”로 이행하기도 전에 망했을지도 모른다.

반독점 정책이 구글이나 애플의 규모를 제어하는 문제와 이 회사들의 규모를 제어하는 문제는 다른 접근이 필요하다. 그들은 사실상 ‘미국의 자본주의’를 유지하기 위한 ‘항상적인 사회주의’ 시스템의 핵이기 때문이다. 만에 하나 패니메와 프레디맥, 또는 신용사회를 떠받치고 있는 거대 금융기관의 규모를 모럴해저드를 유발하지 않을만한 규모로 제한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아무도 현재의 낮은 금리수준으로 그들의 채권을 인수하지 않을 것이다.

“손실을 볼 수 있다는 공포”가 대안일까?

도덕이나 숭고한 가치로는 탐욕을 통제할 수 없다. 탐욕은 오로지 손실을 볼 수 있다는 공포로 통제돼야 한다. 그리고 이 공포란 무모한 금융기관이나 대리인이 절대 국민 세금으로 구제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나온다. 최근 위기 동안 이뤄진 구제조치는 도덕적 해이 문제를 심화시켰다. 대형 금융회사는 망하지 않고 구제받을 것이라는 생각을 강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인수를 통해 금융 회사들이 몸집을 불림으로써 시장의 왜곡 현상은 더 커졌다. 만약 기업이 너무 커서 망하지 않는다면, 지나치게 큰 기업은 쪼개야 한다.[“탐욕은 선하다”던 게코가 돌아왔다]

누리엘 루비니가 조선비즈에 기고한 칼럼 내용 중 일부다. 자본주의 경제에서 늘 반복되는 주제인 이른바 “대마불사(大馬不死)” 신화를 종식시켜야 한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이러한 주장이 그동안 얼마나 실제로 관철되었는지도 의문일뿐더러, 이러한 주장이 옳은 것인지도 잘 모르겠다.

적어도 미국 자본주의 역사에서 보면 중앙은행이라는 최종대부자가 생긴 이래 멕시코 모라토리엄 사태, S&L사태, LTCM사태 등 주요국면에서 채권자들은 언제나 구제금융을 통해 보호를 받았다. 구제금융의 논리는 시스템 붕괴 방지였다. 부실채권이 여타 우량 채권을 오염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

문제는 루비니가 걱정하는바 투자자들이 이 과정에서 모럴해저드에 빠져 자신들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초과하는 위험을 부담하게 되어 위기가 반복된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는 근본적으로 자본의 소유가 사유화되어 있는 반면, 그 자본의 부실화에 대한 비용이 사회화되어 있다는 모순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만약 소유와 비용부담이 일원화되면 모순이 상당수 제거될 수 있을 것이다. 소유와 비용부담을 다 사유화시키거나 다 사회화시키면 될 것이다. 루비니의 주장은 해당 인용문으로만 보면 이 중 전자의 대안을 연상시킨다. 즉, 최종대부자로서의 중앙은행이나 정부의 존재를 부정하는 시장 자유주의자의 뉘앙스가 느껴진다.

사실 어느 정도는 이미 “손실을 볼 수 있다는 공포”가 전파되어 있다. 미국에서 올해만 해도 118개의 은행들이 문을 닫았다. 리만브라더스나 베어스턴스 등과 같은 대형은행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러므로 문제는 “대대마(大大馬)” 골드만삭스나 패니메/프레디맥같은 핵심(!)기관만 차별적으로 구제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이유는 앞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이 들 기관의 붕괴가 금융시스템의 붕괴로 이어질 수 있다는 공포 – 사회 “전체가 손실을 볼 수 있다는 공포” – 때문이며, 또 하나 – 더 근본적인 원인일 수도 있는데 – 사적자본과 공적통제기관의 인맥들이 긴밀하게 얽혀있는 미국의 금권정치의 병폐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공포를 느끼기에는 심판과 너무 친하다.

나심 니콜라스 탈렙의 양심선언

Last year, in Davos, during a private coffee conversation that I thought aimed at saving the world from, among other things, moral hazard, I was interrupted by Alan Blinder, a former Vice Chairman of the Federal Reserve Bank of the United States, who tried to sell me a peculiar investment product. It allowed the high net-worth investor to go around the regulations limiting deposit insurance (at the time, $100,000) and benefit from coverage for near unlimited amounts. The investor would deposit funds in any amount and Prof. Blinder’s company would break it up in smaller accounts and invest in banks, thus escaping the limit; it would look like a single account but would be insured in full. In other words, it would allow the super-rich to scam taxpayers by getting free government sponsored insurance. Yes, scam taxpayers. Legally. With the help of former civil servants who have an insider edge.
작년에 세계를 다른 그 무엇보다도 모럴해저드에서 구하자는 목적인 것으로 개인적으로 여겼던 다보스에서, 사적인 커피 담화를 가졌는데 미국 FRB의 부의장이었던 알란 블라인더가 나에게 어떤 특이한 투자상품을 팔려고 했었다. 이 상품을 통해 높은 순자산 투자자들은 예금보험의 한도(그 당시 10만 달러)를 제한하는 규정을 우회하여 무제한에 가까운 보장을 누릴 수 있었다. 투자자는 임의의 액수를 맡기면 블라인더 교수의 회사는 이를 더 작은 계정으로 쪼개서 은행들에 투자한다. 그렇게 한도를 피하는 것이다. 한 개의 계정으로 보이지만 전체가 보장되는 것이다. 달리 말해서 이 방법으로 수퍼리치는 공짜로 정부가 보장하는 보험을 갖게 되면서 납세자를 속이는 것이다. 그렇다. 납세자 사기. 합법적으로. 내부자로서의 이점을 가지고 있는 전직 공무원의 도움을 얻어서.[The Regulator Franchise, or the Alan Blinder Problem]

블랙스완으로 유명한 경제학자 나심 니콜라스 탈렙이 허핑턴포스트에 기고한 고발장이다. 세계경제를 구하려고 모인 것으로 알려진 다보스 포럼의 은밀한 커피타임에서 오고간 이야기가 실은 모순되게도 공익을 위해서가 아닌 사익을 위한 비즈니스에 가까웠던 – 적어도 알란 블라인더에게는 – 셈이다.

예금자 보호 제도는 예금보험공사가 평소 피보험기관인 금융기관으로부터 받아 적립해둔 예금보험료로 지급불능이 된 금융기관을 대신하여 지급하는 제도다. 대공황 시절 겪은 대량인출사태가 얼마나 심각하게 금융시스템을 교란시키는지 경험한 세계 각국이 대안으로 만든 제도다. 보호한도는 나라마다 다르다.

블라인더 교수는 바로 이러한 한도를 피해 무제한의 보호를 받을 수 있는 합법적 서비스를 투자자에게 제공한다. 우리나라야 인적조회로 각 금융기관으로의 총예금이 금방 조사가 가능하니 저런 방법이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 미국은 어떤 식으로 그 방법을 피해 가는지는 모르겠다. 가능한가보다.

여하튼 이 방법은 우리가 ‘도덕적해이’라고 다른 – 잘못된? – 뉘앙스로 번역하는 모럴해저드에 정확히 해당되는 사례다. 원금의 무제한 보장은 투자자로 하여금 고위험 투자를 용인하여 투자 실패 시 더 많은 사회적 비용을 지불하여야 할 것이다. 이 경우가 탈렙이 말하는 바로 납세자에 대한 사기다.

탈렙은 블라인더의 행위에 비춰볼 때 너무 복잡한 규제는 오히려 내부자의 이를 활용한 나쁜 행위만을 부추기므로 지양해야 한다고 적고 있다. 하지만 언뜻 보기에 위와 같은 개구멍은 내부자가 아니라도 쉽게 드나들 것 같다. 그보다 공직사회와 시장이 거의 한 몸이 된 자본주의 관료문화가 문제가 아닐까?

골드만삭스 CEO가 재무부 장관이 되고 퇴직 후 다시 다른 투자은행의 CEO가 되고 자기들끼리 수시로 통화하며 국정을 논하는 문화 속에서 블라인더 교수의 저런 행동은 그저 작은 에피소드에 불과할 수도 있다. 헨리 폴슨이나 로버트 루빈 정도면 쩨쩨하게 커피마시며 투자를 권유하고 다니지도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