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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연금은 과연 주식시장의 ‘큰 손’인가? 아니면 ‘봉건적 자본주의’의 맥거핀인가?

국민연금은 국내 상장기업 261개사에 대해 각각 지분 5% 이상을 갖고 있다. [중략] 국내 주식시장 시가총액의 6.4%를 혼자 차지하고 있는 자본시장의 ‘큰손’이다. [중략] 하지만 국민연금관리공단은 자신들의 지분에 따른 권리를 제대로 행사하지 않고 있다. [중략] 국민연금의 작년 배당수익률은 1.1%다. 최근 5년 평균치가 1.4%로 2% 중반인 미국의 절반 수준에 불과한데도 적극적으로 배당 확대를 요구하지 않고 있다.[화제의 인물 국민연금공단 상대로 ‘나홀로 소송’ 중인 김병희 씨, 건설경제신문, 2014년 2월 20일]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한 미친 사람들이 결국 세상을 바꾸는 사람들이다.”라는 1997년 애플의 광고 카피를 되새기며 국민연금의 주주행동주의를 위한 소송을 진행 중인 김병희 씨의 인터뷰 중 일부다. 그는 헌법 제23조가 말하는 ‘모든 국민의 재산권은 보장된다’는 조항에 따라 국가가 국민연금을 이용하여 대기업들의 독점적 전횡을 막아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고 있다며 헌법소원을 제기했고, 이의 승리를 위해 엔지니어 일자리까지 그만둔 상태라고 한다. 카피 그대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 미친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김 씨의 무모한 도전이 성공을 거둘 것인지는 아직 오리무중이지만 적어도 변화는 감지된다. 이번 달 초 국민연금의 작은 반란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국민연금기금 의결권행사 전문위원회는 6일 다음날 예정된 만도 주주총회에서 대표이사 선임에 대해 반대 의결권을 행사하기로 했다. 그 이유는 만도가 100% 자회사 마이스터를 통해 한라건설의 유상증자에 참여한 것은 부실 모기업을 지원하기 위한 것이고, 이것이 주주의 가치를 훼손하기 때문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적어도 이 소식은 김병희 씨의 마음을 흡족하게 할 만한 사건이었다.

지분 13.12%을 차지하고 있는 대주주 국민연금의 이러한 방침을 적지 않은 언론이 제법 비중 있게 보도했지만 결과는 썩 좋지 않았다. 주주총회에는 전체 주주의 59%가 참석했으며 72%의 찬성률로 신사현 현 대표이사 재선임안이 가결됐다. 정확한 사실관계는 더 면밀히 들여다봐야겠지만 만도의 한라건설 유상증자 참여가 본질적으로 주주의 가치를 훼손하지 않는다고 본 주주가 3분의 2가 넘는다는 것을 의미한 셈이다. 또는 주주의 가치를 훼손하더라도 상관이 없는 주주가 그렇다는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둘 중 어떤 생각이었던 것일까?

주식시장의 가장 ‘큰 손’인 국민연금공단이 주식 투자를 크게 늘리며 투자기업의 지분을 확대해가고 있지만 미국 유럽 등 선진국 연기금과 달리 순환출자로 인한 대주주 우호지분에 막혀 제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식물 주주’에 머물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30대 그룹 상장사 중 국민연금이 5% 이상 지분을 갖고 있는 87개사의 국민연금 평균 지분률은 7.98%인데 반해 이들 기업의 대주주 및 특수 관계 우호지분은 37.01%로 4.6배에 달해 국민연금이 의사를 관철할 수 있는 가능성이 거의 막혀 있는 셈이다. 또 국민연금이 대주주 우호지분을 넘어서는 실질적 최대주주인 회사도 전혀 없었다.[국민연금, 무늬만 ‘큰 손’, 금융경제신문, 2014년 03월 13일]

이 기사에서 위의 물음에 대한 답변의 단초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국민연금이 주식시장의 ‘큰 손’으로 불리고 있지만 기사에 따르면 그건 겉치레뿐이고 우리나라 특유의 순환출자 등을 통한 대주주 우호지분과 비교하면 사실 상 ‘식물 주주’일 뿐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국민연금의 주주권 행사는 점점 더 강해지고 있다. 2011년 이전에 찬성률이 90%가 넘었던 연금은 2012년 이후 두 자릿수가 넘는 반대 비중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만도의 예에서 보듯이 그러한 적극적 행동주의는 우호지분의 공동행동에 의해 저지되고 만 것이다.

연기금의 주주행동주의가 바람직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다양한 의견이 있다. 김병희 씨처럼 위헌이라고까지 말하는 이도 있을 것이고 본질적으로 전문적 식견이 없는 연기금이 의사결정에 개입하는 것은 월권이라고 판단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 사실은 분명하다. 주주라는 것이 1주1표의 권리를 가지고 대주주가 더 많은 권력을 가지는 것이 자본주의 기업의 철칙이라고 한다면 순환출자를 통한 우호지분이라는 것은 자본주의 기업원리와 부합하지도 않고 결국 국민연금이 ‘큰 손’이라는 착시효과만 일으킨다는 점이다.

그런 면에서 순환출자는 봉건적인 작태다.

연기금의 주주행동주의

국내 최대 기관투자가인 국민연금이 KB금융지주의 사외이사를 직접 추천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KB금융지주는 최근 강정원 국민은행장의 회장 내정 과정에서 사외이사들만으로 회장 후보추천위원회를 구성,사외이사들의 집단 권력화 논란을 불러일으켰다.[중략] 국민연금이 투자 기업의 사외이사를 직접 추천한 적은 없다. 국민연금은 KB금융지주 지분 5.49%(9월2일 기준)를 보유한 최대주주이기 때문에 추천 인사들은 큰 이변이 없는 한 사외이사에 선임될 것으로 보인다. 사실상 파견과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국민연금 “KB금융 사외이사 추천하겠다”]

속 보이는 해프닝으로 끝난 KB금융지주 회장 선임 건과 연계하여 흥미로운 일이 하나 진행되고 있다. 상기한 바와 같이 국민연금이 “KB금융지주의 사외이사를 직접 추천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국민연금은 지분 5% 이상을 가진 국내 상장사가 140여개에 달하지만 내가 아는 한은 사외이사 추천 등의 적극적인 의사결정 개입은 매우 드문 일이다. 다른 보도를 보면 이러한 국민연금의 행동이 일회성에 그칠 것 같지는 않다.

국민연금공단은 18일 제12차 이사회에서 내놓은 ‘2010년도 사업운영계획보고’에서 내년 국민연금이 주요주주로 있는 기업에 대한 의결권 행사를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국민연금은 이날 “기업의 장기적 가치를 높이기 위해 국민연금이 주요주주인 기업에 대해 주주권 행사를 강화하겠다”고 전했다.[국민연금 “내년 투자기업 의결권 행사 강화”]

즉, 국민연금이 이전의 소극적으로 행사해오던 주주권을 앞으로는 적극적으로 행사하겠다는 의지인데, 이는 사회책임투자나 주주행동주의를 주장하는 서구의 행동주의자들의 의견과 비슷하다. 기업윤리운동 등을 주도하는 시민단체들의 의견과는 미묘한 차이가 있지만 사회책임투자 주창자들은 결국 적극적인 투자행태, 그 중에서도 주주로서 의사결정에 적극 참여하는 행위가 투자수익의 향상으로도 이어진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이를 경험적으로 증명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한편 연기금 중 주주행동주의로 유명한 곳은 세계최대의 연금펀드라 할 수 있는 캘퍼스다.

이러한 기업지배구조는 일반적으로 주주행동주의라는 미국 전통에 없어서는 안 될 부분으로 인식된다. 이러한 인식은 1980년대 후반 이래 가장 큰 기관투자가로 군림해온 캘리포니아 공무원 퇴직연금에 의해 강제적으로 미국 내에 생겨났다. 이 연금은 캘퍼스(Calpers)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들은 수익률을 높이기 위한 수단으로서 주주행동주의를 이끈 선구자 중 하나다.[사회책임투자 세계적 혁명, 러셀 스팍스 지음, 넷임팩트 코리아 옮김, 홍성사, 2007년, p252]

결국 국민연금이 국민은행에 사외이사를 추천한다는 계획과 ‘2010년도 사업운영계획보고’의 내용은 이들이 캘퍼스가 추진해오던 주주행동주의 노선을 다져나가겠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흥미롭게도 이러한 개입주의적 노선이 국가의 개입을 최소화하는 것을 당연한 노선으로 하여야 하는 이른바 우파 정부 하에서 추진되고 있다는 점이다. 한나라당은 과거 정권에서 민주당도 지적하였듯이 연기금의 주식 투자를 ‘경기 부양용 도박자금’, ‘연기금 사회주의’라고 비판했던 적이 있기 때문에 일면 모순된 행동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실 이러한 모습은 어쩌면 당연한 모습이다. 이명박 정부는 이미 시작부터 대운하 건설, 금융시장에 대한 적극적 개입, 노동운동에 대한 적극적 개입 등을 통해 국가개입주의적 노선을 분명히 해왔다. 이전의 두 정부가 신자유주의 노선에 연성의 개입주의를 구가하였다면 이 정부는 과거 정부가 박아놓은 못 – 이를테면 좌파적 정책? – 을 빼야한다는 강박관념이 금융위기 상황과 맞물려 그 개입주의의 정도가 심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남한의 우익들은 개입주의적 모델을 당연시 했던 박정희식 모델의 전력도 있거니와 ‘연기금 사회주의’를 부르짖은 것도 박근혜였지(주1) 이명박은 아니다.

그렇다면 국민연금의 이번 주주권 강화 계획을 이명박 정부의 어떤 흑심이 있는 음모로 간주하고 반대하여야 할까? 엄밀하게 ‘주주권 강화’ 자체만 놓고 보자면 나는 그것에 찬성하는 입장이다. 사실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주주권의 행사는 당연한 권리인데, 국가의 의사결정능력은 시장의 그것보다 열등하다는 선입견으로 말미암아 국가 혹은 국가에 준하는 기관의 투자는 당연히 의사결정을 나머지 주주에게 일임한다는 식으로 간주하였던 것은 그리 바람직하지 않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문제는 제도 혹은 노선 그 자체는 가치중립적이지만 그것을 운용함에 있어 결국 국민연금 혹은 그 의사결정 위임자가 주주권을 어떠한 목적으로 행사하느냐가 중요한 가치편향적인 시각을 제공하게 된다는 점이다. 이번 2010년 사업운영계획 보고에서는 주주권 행사의 목적이 “기업의 장기적 가치를 높이기 위해”라고 밝혔다. 문구상으로만 보자면 그것은 캘퍼스의 주주권 행사 목적과 유사하다. 특히 ‘장기적 가치’를 높이겠다는 것을 문구 그대로 받아들이면 단기적 이익에 주력하는 주주자본주의의 맹점도 보완할 수 있다는 가능성도 엿볼 수 있다.

다만 위 인용기사의 다른 부분을 보면 우려스러운 점도 있다. 기사에 따르면 “기금운용본부장의 하부조직으로 있던 준법감시인을 이사장 직속으로 확대·개편해 내부통제기능을 강화”하겠다고 했는데, 솔직히 나는 이것이 내부통제기능을 강화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얼핏 이사장의 권한이 강화되는 것으로 여겨질 뿐이다. “사회간접자본(SOC)과 민영화 기업 등 대체투자 분야로 투자를 넓힐 방침”도 수자원공사의 4대강 투자와 맞물려 괜히 찝찝해지는 대목이다. 과연 국민연금은 정부의 4대강 투자요청을 뿌리칠 자신이 있을까?

예전에 민주노동당 시절 심상정씨의 한 팸플릿에도 국민연금을 활용한 기업사회화의 시나리오를 제시한 적이 있다. 이를 사회주의적 본원적 축적이라고 여긴다면 그리 터무니없는 이야기가 아닌 만큼, 연기금은 좌우익 모두에게 명분 있는 주요 투자재원으로 여길 건더기가 많다. 문제는 어느 진영이든지 그것을 주주(즉 연금가입자)의 투자이익 극대화를 목적으로 하지 않은, 자신의 정치적 계산에 따른 투자사업에 활용하고픈 유혹에서 자유스럽지 못하다는 점이다. 그런 면에서 연기금을 통한 주식시장 부양은 박근혜씨가 표현한바 ‘연기금 사회주의’가 아니고 그저 ‘연기금 오용(誤用)’일 뿐이다.

(주1) 그렇다면 박근혜씨는 아버지가 사회주의자였음을 인정하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