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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통제에 대한 국가주의 이데올로기의 모순

과거에는 자본은 자유로운 노동자에 대한 자기의 所有權을 행사하기 위하여 필요할 때에는 언제나 强制法에 의거하였다. 예컨대 1815년 까지는 영국의 기계제조 노동자들의 外國移住가 중형으로써 금지되고 있었다.[자본론 I 下, 칼마르크스, 김수행 역, 비봉출판사, 2000년, pp726~727]

오늘날엔 물론 이런 야만적인 노동통제는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하지만 또한 보다 교묘한 형태로 노동자들의 이전의 자유는 제한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각국의 이주노동자에 대한 노동권 제한이다. 자국 노동조건의 보호라는 미명 하에 진행되는 이 통제는 현실에서는 결국 3D업종에 대한 저임금 노동력의 일상적인 공급으로 귀결될 뿐이다.

제조업이나 저부가가치 서비스업에 대한 위와 같은 노동통제가 일반시민들의 평균적인 정서에 다소 반하는 야만적인 형태라면, 상대적으로 고부가가치를 생산하는 연구인력 등에 대한 노동통제는 보다 교묘하고 그럴듯한 형태를 취한다. 이 주장은 보통 국가주의적 이데올로기의 옷을 입고 있어 위와 같은 노동통제보다 더 설득력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국가핵심기술을 지키는 일이 말처럼 쉽지가 않다. 설계도면이나 실험 데이터 등을 이메일이나 디스켓에 담아 빼내가는 ‘보이는 기술유출’은 수사기관을 동원해 손써 볼 기회라도 있다. 하지만 연구원들의 머리에 담아가는 ‘보이지 않는 기술유출’은 더욱 심각하다. 국가핵심기술 개발에 참여한 엔지니어가 어느 날 외국기업으로 이직한다고 가정해 보자. 그의 두뇌에 축적된 기술개발 노하우도 고스란히 함께 유출된다. 결국 기술을 지키려면 엔지니어의 외국기업 이직을 막아야 한다.[핵심 엔지니어 국가가 관리해야]

이 주장은 결국 상대적인 고급 “노동자”를 “잠재적 범죄자”로 간주하여 그들의 직업선택의 자유와 심지어 19세기 영국에서 시행했던 야만적인 거주이전의 자유까지 제한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멋모르는 칼럼니스트의 공허한 주장 일뿐이라고? 2010년 법원은 기술의 유출을 우려하여 연구원들의 이직을 일정기간 금지하는 판결을 내렸다.

서울중앙지법은 LG화학이 “2차전지 핵심기술이 유출될 우려가 있다”며 외국계 경쟁사로 이직한 연구원 6명을 상대로 낸 전직 금지 가처분신청에서 “퇴사일로부터 1년에서 1년6개월 동안 외국계 경쟁사로 이직할 수 없다”는 결정을 내렸습니다.[법원 ‘기술유출우려’ LG화학 연구원 이직 금지]

결국 공권력은 개별자본의 이익을 보호해줬는데, 이러한 결정의 근저에는 총자본의 이익을 보호하는 것이 국가의 이익이라는 이데올로기가 깔려 있다. 하지만 이러한 공포감은 자본 대 자본의 이합집산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만약 LG화학이 “외국계 경쟁사”와 기술협력을 하거나 M&A를 시도한다면 이는 경영활동으로 보호받을 것이다.

물론 일부의 경우 소위 “국부유출”이나 “국가적 자존심” 등 정치적 문제로 인해 기업의 이러한 활동이 제약을 받을 때도 있다.(이를테면 중국기업의 미국 내 인프라 자산의 인수 등) 하지만 이를 무력화시키는 양자간 투자협정 등이 FTA의 형태를 띠고 나타나면, 여하간의 정치적 프로파간다도 기업 활동의 저해되는 행동을 취하지 못한다.

쌍용자동차나 외환은행의 경우처럼 외국 기업의 한 기업에 대한 전면적 기술이전과 자본이전에 대해서는 “외자유치”라는 명목으로 보호되지만 연구 인력의 직업선택에 대한 (상대적으로) 부분적인 기술이전에 대해선 공권력의 힘으로 막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그리고 이러한 현실은 FTA등 자본의 자유를 강화하는 협약에 의해 더 빈번해질 것이다.

 

보론 :

트위터에서 aleph_k님이 아래와 같이 의견을 주셨다.

기술직 인력의 해외 유출을 막는 독소조항은 당장 FTA하면 외국에서 제소할 제0순위 중 하나 아닌가요?[출처]

이 지적은 어느 정도 타당한 것으로 판단된다. 예를 들어 한미FTA 제19.2조(기본 노동권)에 보면 “각 당사국은 작업장에서의 기본원칙 및 권리에 관한 국제노동기구 선언 과 그 후속조치(1998년)(국제노동기구선언)”에 기술된 대로 “고용 및 직업상의 차별의 철폐”를 준수하여야 한다.

표현이 추상적이긴 하지만 ‘특정고용이 자국 자본에 유리하다면’ 위에 예로 든 연구 인력의 이직금지 판결 등에 대하여 충분히 딴죽을 걸 수 있지 않을까 판단된다. 다만 이와 같은 행태는 당사국의 선의에 의한 노동의 자유 부여라 기보다는 이 또한 국가의 외피를 둘러쓴 자본의 경쟁이랄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FTA와 자본이 부여하는, 또는 부여할 수 있는 “노동의 자유”는 당사국 자본에 유리한 범위 내에서만 적용될 가능성이 높다. 이른바 저급인력은 여전히 이러한 자유에서 배제될 것인데, 이는 NAFTA를 체결했음에도 미국이 어떻게 멕시코로부터의 인력유입을 통제하고 있는가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바로 그 땅에 멕시코 사람들이 다시 몰려들고 있다. 전에도 불법 이주의 익숙한 통로가 되었던 그곳에서,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체결 뒤 급증한 멕시코의 빈민들이 매년 몇십만 명씩 새로운 삶을 찾아 목숨을 걸고 있는 것이다. 사막과 늪지대에서 국경수비대에게 발각돼 비참한 최후를 맞는 멕시코인들의 처절한 ‘생존투쟁’은, 그 맞은편에서 선조들이 빼앗은 국경을 철저히 수호하는 미국인들의 ‘애국전쟁’과 동전의 양면을 이루고 있다.[모순의 멕시코 국경]

근본적으로 FTA는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은 명시적으로 보장하고 있지만, 노동의 자유로운 이동에는 관심도 없으며 당연하게도 명시적으로 보장하고 있는 조항은 없다. 다만 어디까지나 자국의 자본에 이익이 되는 한에서 전문적인 연구 인력의 이직제한에 대해 딴죽을 걸 소지는 있으나 노동자 일반에게는 해당사항이 없다.

오히려 한미FTA에서는 변호사 등 전문직 서비스에 대해서만큼은 제12.4조(시장접근) 등에서의 제한 없는 시장접근에 대한 유보조항을 두었다. 이들 전문직의 기득권이 자본의 그것에 근접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엔지니어링 서비스 역시 자국에 사무소를 설치를 의무화하고 있어 어떤 의미에서 노동의 자유를 제한한 측면이 있다.

“마침내 35시간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

프랑스 사회주의의 가장 의미 있는 승리 중 하나로 간주되어 왔던 주35시간 근무가 최근 의회를 통과한 한 법률에 의해 사실상 무력화되었다고 한다.

상원과 하원은 1998년 사회주의자당에 의해 통과된 주 35시간 근무법을 무력화시키는 것이 주요목적이라 할 수 있는, “근무시간을 개혁하고”, “사회민주성을 갱신하는” 한 법을 함께 통과시켰다. 경제일간지인 Les Echos의 지난 2008년 5월 여론조사에 따르면 노동자의 79퍼센트가 35시간을 유지하는 것에 찬성하고 있다. 정부는 이에 따라 공식적으로는 근무시간을 주당 35시간을 유지하는 것으로 하였지만 전체 산업 차원의 협상 대신 개별 사업장에서의 협상을 통해 초과근무를 합의할 수 있도록 허용함으로써 법의 취지를 제거하였다.
The National Assembly and Senate together passed a law “reforming working hours” and “renewing social democracy,” whose main function was to dismantle the 35-hour workweek law passed by the Socialist Party (PS) in 1998. According to May 2008 workplace poll for the financial daily Les Echos, 79 percent of workers supported maintaining the 35 hours. The government decided, therefore, to formally leave the working week at 35 hours, but to eviscerate the law by allowing agreements on overtime to be negotiated in each workplace, instead of in industry-wide negotiations.[End of the 35-hour week in France: Sarkozy handed victory by the unions and “left” parties, 26 July 2008, World Socialist Web Site]

노동부 장관 Xavier Bertrand 는 공개적으로 선언하였다.

“마침내 35시간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

누가 누구로부터 자유로워졌을까? 너무 멍청한 질문인가? 어쨌든 혹자가 보기엔 배부른 소리하고 있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일주일에 35시간을 일한다면 주5일제로 가정하고 계산하면 하루 일곱 시간 근무다. 그야말로 환상적인 근무조건이다. 특히 OECD 최장의 근무시간이라는 명예를 얻은 한국에서는 말이다.

하지만 나는 그러한 근무조건이 결코 배부른 소리라는 질투 섞인 비아냥거림을 들을 일이 아니라고 본다. 노동조건의 개선을 통한 삶의 질의 향상은 인류역사에 있어 끊임없는 투쟁의 주제였고, 수많은 피를 대가로 하여 쟁취되어 왔다. 그리고 그것은 어쨌든 선진적인 성과가 나머지 세계들로 전파되는 성과를 거두어 왔다. 아동노동의 금지가 그렇고 8시간 노동 쟁취가 그러했다. 그리고 프랑스 노동계급의 주35시간 노동은 언젠가는 한국의 노동자들이 누릴 몫이었다.

어쨌든 신자유주의의 무한경쟁논리로 어쩌면 이미 프랑스내에서조차 35시간 근무라는 법적규제가 사문화되어 왔을지도 모르겠다.(십중팔구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법이 안 지켜지는 것과 법이 사문화되는 것, 나아가 온갖 예외조항으로 무력화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바로 한나라당이 지금 십자포화로 공격하고 있는 종합부동산세법이 그런 위험에 놓여있다. 그러한 만큼 이번 주35시간 노동규정의 무력화는 프랑스 사회주의의 큰 후퇴라 할 만하겠다.

American Apparel의 도발적 광고, 장삿속인가 정치적 항거인가

가만 보면 의류광고는 다른 상품광고보다 좀 튀는 면이 있는 것 같다. 일단 패션이라는 테마를 알리니 만큼 어떻게 해서든 튀는 행동으로 주위를 환기시킴으로써 브랜드이미지를 제고할 수 있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또 한편으로 패션계에 기인들이 제법 있기 때문이 아닐까도 싶기도 한데 뭐… 패션하고는 조금 거리가 멀어서 그런가보다 하는거다.

여하튼 이런 튀는 광고의 대표 격은 잘 알다시피 베네통이다. 루시아노 베네통이 1969년 한 옷매장의 문을 열면서 시작된 베네통 브랜드는 ‘United Colors of Benetton’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이후 유럽 최대의 의류업체로 성장한다. 그런데 정작 이 브랜드를 가장 유명하게 만든 것은 광고의 상식을 뛰어넘는 도발적인 주제와 형식을 담은 광고 때문이었다. 강한 정치적 메시지, 충격적인 비주얼, 대담한 아이디어는 이후 베네통 광고의 특징으로 자리 잡고 베네통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어버렸다.

베네통 광고 사진 맛보기

최근 베네통만큼 충격적이지는 않지만 보다 직접적인 정치적 메시지를 선보이는 의류광고가 미국에서 화제가 되고 있다. 바로 미국 젊은이들에게 인기 있는 브랜드인 American Apparel의 광고다. 최근 이 회사의 광고의 광고모델로 등장한 이는 바로 이 회사의 공장에서 일하고 있는 남미 출신의 노동자들이었다. 그리고 이 사진을 찍은 이는 회사의 설립자이자 CEO Dov Charney다.

뉴욕타임스에 게재된 어메리칸어패럴의 광고

LA타임스와 뉴욕타임스 등에 지난달부터 게시된 이 광고의 의도는 분명하다. 이 사진은 이주정책의 개혁을 목적으로 하는 사진이다. 즉 현재 미국의 이주정책은 일종의 차별정책이며 불법화된 이주노동자들이 법적인 지위를 얻을 수 있도록 합법적인 경로를 열어주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 사람들은 이동의 자유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 그들은 그늘에서 살고 있다.”라고 Dov Charney는 이야기하고 있다.

거의 대부분의 회사들이 광고에서 정치적인 메시지를 전하고 있지 않은 가운데 앞서 말한 베네통이나 나이키 등 일부 업체에서만 다소 도발적인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상황에서 보다 직접적인 정치적 메시지를 담고 있는 이런 광고에 대해 시장은 의아하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는 것 같다. 한 광고회사의 CEO는 “이 이슈는 선거에서 결정될 문제다.(주1) 그러나 그들은 어쨌든 매우 급진적인 회사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물론 이 광고를 좋아하는 이들도 있다. American Apparel에 따르면 회사로 그들을 지지하는 편지들이 답지하고 있다고 한다. Charney 씨는 대부분의 대기업이 자신들에게 유리한 정책을 관철시키기 위해 비밀스러운 로비를 선호하지만 자신은 공개적인 방법을 선호한다면서 자신의 광고를 옹호하였다.

“우리의 옷을 만드는 이들에 대해 분명히 하자면 그것은 미국 태생의 노동자들과 미국 이외 지역 태생의 노동자들의 협업을 통해 만들어진다. 나는 이민을 지지하는 것이 나의 브랜드에 악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사실 이러한 것들은 우리가 책임 있는 비즈니스를 하고 있는 것으로 인식되게끔 하는 면이 있다.”

어찌 보면 다분히 비즈니스적 마인드에 철저한 발언이다. 그럼에도 어쨌든 American Apparel은 오랜 동안 노동자들에게 정당한 대우를 해주어야 한다는 주창자였으며 과거에도 꾸준히 이주정책에 관한 광고를 지역신문에 게재해왔다고 한다. 좋은 일이다.

한편으로 일부 이주정책 전문가들은 이 광고에 대해 비판적이다. 코넬 대학의 Vernon M. Briggs Jr 교수는 불법이주에 대한 대응은 차별이 아니라 단순히 범법행위에 대한 단속이며 해당 광고는 법에서 금지하고 있는 저임금 노동을 영속화시키려는 자족적인 프로파간다에 불과하다고 혹평하였다.

저임금 노동착취를 목적으로 하든, 브랜드이미지 제고를 위해서든, 또는 정말 순수하게 Dov Charney의 정치적 목적이든 다 좋다. 어쨌든 일개 기업이 다분히 민감한 주제인 이주노동자 정책에 대해 도발을 한 것이다. 그것으로 의미가 있다고 본다. 한편 우리의 사정은 어떠한가. Dov Charney와 같은 사회적 이벤트는 별로 기대도 하지 않지만 사태는 미국에 비해 나쁘면 나빴지 좋을 것 하나 없다.

인권을 존중한다면서 인권위원회까지 설치한 참여정부는 이 땅의 이주노동자들을 3D 업종을 메워주는 소중한 이웃이라고 여기기보다는 범법자라고 여기고 있다. 업주의 저임금 착취노동, 과잉단속, 불법추방으로 이어지는 탄압 속에서 많은 이주노동자들은 산업재해로 죽기도 하고 심지어는 도망치는 과정에서 사고로 죽어갔다.

이천 냉장창고 사태는 그러한 한반도 이주노동자 현황의 결정판이었다. 그럼에도 현 정부는 출입국관리법 개정을 통해 단속반이 공장이든, 길가든, 집이든 ‘불법체류자’라고 의심되면 언제라도 이주노동자를 심문하고 단속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려 하고 있다. 우리의 형과 아버지가 타국에서 그러한 수모를 당했다고 생각해보라. 실제로 몇 십 년 전만해도 선진국에 광부로 일하러 갔던 우리의 선배들의 모습이 그러했을 것이다.

[인권오름] ‘인간사냥’에 쫓기는 이주노동자

흔히 이 사회의 주류는 당연하다는 듯이 자유무역을 지지한다. 물론 그것은 좋은 것이다. 그런데 자유무역은 이동성이 뛰어난 자본에게 더욱 유리한 형태인 것이 사실이다. 오늘 날 거대자본은 임금의 많고 적음, 국가의 세금이나 우대정책 등에 따라 전 세계를 무대로 자유롭게 생산기지와 오피스를 옮긴다. 그리고 이를 뒷받침해주는 서류들이 바로 WTO의 각종 조약이나 FTA들이다.

한편 노동자들은 자본에 비해 훨씬 이동성이 떨어진다. 살고 있던 곳을 떠나기 쉽지 않고 바로 대부분 국가들이 그러하듯이 타국의 노동자들은 정부의 탄압을 받기 때문이다. 무역의 자유를 신봉하는 이들이 바로 노동의 자유는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정치적 이유도 있고 또한 인간에 대한 예의를 갖추지 않은 체제적 속성이기도 하다. 사실 자국 노동자마저 생산비용으로 환원하는 이들이니 살갗이 틀린 이들에게야 더 모진 것이 당연한 일일게다.

 

(주1) 현재 미국 내 불법노동자의 수는 1천5백만에서 2천만 명으로 추산되며 이로 인한 각종 사회문제 때문에 사실상 이주노동자 문제는 2008년 대선의 최대 이슈 중 하나가 되고 있다(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