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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받지 못한 자의 변명으로써의 예술의 효용성

말론 브랜도(Marlon Brando) 주연의 ‘워터프론트(On The Waterfront)’라는 영화가 있다. 부도노동자인 테리 멀로이(Terry Malloy; 말론 브랜도)가 항구의 부패한 노조의 끄나풀로 일하다가 양심과 사랑을 위해 불의에 맞선다는 내용으로, 강렬한 스토리텔링,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력, 충격적인 사회적 메시지 등에 힘입어 미국 영화 역사상 가장 위대한 걸작에 늘 꼽히는 작품이다.

한편 이 영화의 좀 더 깊은 속내에 대해서 알고자 한다면 감독과 제작년도를 주의 깊게 봐야 한다. 이 영화를 감독한 이는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에덴의 동쪽’ 등 작품성과 상업성 양쪽에서 최고의 영예를 얻은 엘리아 카잔(Elia Kazan)이다. 제작년도는 1954년이다. 감독과 제작년도가 중요한 이유는 이 영화가 감독이 그 이전인 1952년에 겪은 일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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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lia Kazan” by Unknown – http://mythicalmonkey.blogspot.com.au/p/katie-bar-door-award-nominees-and.html. Licensed under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엘리아 카잔

1952년 엘리아 카잔은 당시 미국사회를 광풍으로 몰아넣은 매카시즘의 진원지인 하원비미활동위원회(House Un-American Activities Committee:HUAC)에 증인으로 참석해야 했다. 이 자리에서 카잔은 자신이 16년 전에 공산당 당원이었음을 밝힌다. 당시 동료들의 이름을 대라는 요구에 처음에는 거부하다, 결국 Group Theater의 멤버였던 공산주의자 여덟 명의 이름을 댄다.

이 일로 인해 카잔은 밀고자로 낙인찍힌다. 아마도 카잔의 인생에서 가장 치욕적인 순간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영화 ‘워터프론트’는 2년 후에 제작된다. 한편 흥미롭게도 영화의 아이디어는 원래 아서 밀러(Arthur Miller)의 것이었지만 아서는 카잔의 배신을 비난하며 대본 집필을 거부하고, 그 작업은 카잔과 함께 HUAC에 협조했던 버드 슐버그(Budd Schulberg)가 맡게 되었다.

영화 줄거리를 보자. 항구의 부패한 노조는 그들의 방해자를 살인도 불사하며 제거한다. 멋모르고 동참했던 테리는 차차 사건의 실상을 알고 갈등한다. 노조가 간부였던 친형마저 죽이자 마침내 청문회에 나가 진실을 증언한다. 이로 인해 밀고자로 욕을 먹지만 노조 위원장 자니 프렌들리(Johnny Friendly)와 담판을 지으며 영웅으로 거듭난다. 뭔가 이야기가 겹치는 느낌이 든다.

이것은 명백히 카잔 자신의 심정을 테리에게 투영한 것이다. 자니는 어쩌면 자신을 공개적으로 비난했던 아서를 설정한 것일지도 모른다. 카잔은 자서전 ‘인생(A Life)’에서 ‘워터프론트’가 아카데미 8개 부문을 석권한 날 “복수의 달콤한 맛을 봤고, 나를 비판하는 놈들이 처박혀서 엿을 먹어야 할 곳이 어디인지를 큰 소리로 외쳐대는 기분”이었다고 썼다. 통쾌한 복수극인 셈이다.

이 때문에 영화가 비판받기도 했다. 몇몇 평론가들은 결국 좌익을 범죄자로 치부하는 반공영화였다고 비판하거나, 영화를 자기 변호수단으로 쓴 사실을 비판하기도 했다. 평론가 수잔 손택(Susan Sontag)이라면 카잔을 옹호했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예술작품은 그것이 예술작품인 한 어떤 것도 옹호하지 않는다. 위대한 예술가는 숭고한 중립성을 획득한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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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 the Waterfront poster” by http://www.movieposterdb.com/poster/84aa1bc0. Licensed under Wikipedia.

이 반공영화스러운 포스터를 보라~

평론가도 아니고 영화도 잘 모르는 내가 보기에 둘 다 일리가 있는 말이다. 예술은 그 자체로 “자기완결적”이기 때문에 그 메시지가 무엇이건 간에 감상자에게 전해지는 그 쾌감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어떤 예술작품이 반인륜적일 경우에도 보존할 가치는 있는 것이다. 하지만 미묘한 문제는 그것이 가지는 영향력이 현실세계에 막강할 경우에 발생할 것이다.

한편, 여기 다른 영화가 있다. ‘굿나잇 앤 굿럭(Good Night, and Good Luck)’. 2005년 조지 클루니(George Clooney)가 감독한 이 영화는 카잔과 아서가 반목했던, 조지프 맥카시(Joseph McCarthy) 의원이 활개 쳤던 당시를 그리고 있다. 맥카시즘의 공포 분위기에 모두가 숨죽이고 있던 시절, 용기 있게 맞선 CBS 언론인 에드워드 머로우(Edward R. Murrow)에 관한 영화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 영화에서 에드워드는 동료 프레드 프렌들리(Fred Friendly; 조지 클루니)와 함께 ‘사람 대 사람’이라는 쇼를 통해 맥카시즘에 정면으로 맞선다. 그들이 옹호했던 것은 공산주의나 “사상의 자유”라기보다는, 한 개인을 단죄할 때에는 정해진 절차와 증거에 근거해야 한다는 인권적 차원에서의 저항이었다. 우리식 표현으로 말하자면 진정한 “자유민주주의”적 발상이다.

에드워드 머로우의 실제 방송 장면

이 영화를 ‘워터프론트’와 함께 놓고 보면 흥미롭다. ‘워터프론트’의 영웅은 테리 – 청문회에서 용감히 공산주의자를 고발한 카잔 – 이고, ‘굿나잇 앤 굿럭’에서는 공산주의자 사냥에 나선 맥카시에 대항한 에드워드다. ‘워터프론트’에서의 악의 세력은 카잔을 밀고자라 비난한 항구의 노동자들인데, 에드워드는 거꾸로 그들이 정당한 보호를 받아야 한다는 신념을 굽히지 않는다.

결국 ‘워터프론트’를 네거티브 필름처럼 색깔을 바꾸어 볼 때 두 영화는 잘 포개진다. 악당 자니가 맥카시, 테리가 맥카시에 저항한 에드워드일 경우 두 영화의 영웅주의는 크게 차이가 없다. 그런데 이 둘 간의 가치를 전복한 것이 누구인가 하는 의문에 있어서, 적어도 현재까지의 역사의 평가에 따르면 조지 클루니 보다는 엘리아 카잔이라는 점에서 큰 이의는 없을 것이다.

‘워터프론트’에서의 악인들은 살인이라는 범죄를 저질렀지만, 현실에서의 악인들은 – 몇몇은 간첩행위로 고발당했음에도 – 그렇지도 않았는데 정당한 절차 없이 단죄 받았던 것이 차이다. 불의(不義)에 맞서는 행위가 용기 있는 행위임은 두 말할 나위 없지만 사상의 자유를 침해하는 청문회에 가서 공산주의자라 고발하는 행위가 불의에 맞선 행위라 칭해지긴 곤란한 일이다.

앞서 말한 ‘현실에서 발생하는 미묘한 문제’에 대해 말해보자. 이 이슈는 세기말까지 헐리우드를 짓누르는 민감한 주제였고 어쩌면 여전히 그렇다. 체제순응적인 아카데미조차 한참을 머뭇거리다 1999년에야 엘리야 카잔에게 평생공로상을 준 것이 그 반증일 것이다. 당시 배우들의 반응도 다른 공로상과는 달리 엇갈렸다. 어떤 이는 기립박수를, 어떤 이는 침묵을 지켰던 것이다.

엘리아 카잔의 아카데미상 수상 장면

당시 워렌 비티와 메릴 스트립 등은 기립박수로 환영했지만, 에드 해리스와 닉 놀테 등은 묵묵히 앉아 있었다. 이런 상황으로 인해 그 후 서로의 인간관계가 소원해지기도 했다. 더 중요한 점은 조지 클루니 등이 여전히 당시를 소재로 영화로 만들만큼 미국사회에 미친 영향이 크다는 점이다. 그리고 반대 측에서는 부지런히 당시 고발당한 이의 간첩행위를 들추어내고 있고.

우리 역사에도 엘리아 카잔과 비슷한 행동을 한 이가 있다. 남로당 당원으로 몸담았다가 동료를 고발하고, 결국 대통령이 된 박정희가 그다. 박정희가 한반도에 미친 영향은 엘리아 카잔이 미국사회에 미친 영향보다 훨씬 크고, 스토리는 ‘워터프론트’보다 훨씬 방대하다. 그 여파는 이번 대선까지 미치고 있다. 거기에다 그 스토리에는 비극적이게도 ‘워터프론트’와 같은 예술도 없다.

예술을 자기변명의 도구로 쓴 엘리아 카잔 정도는 애교로 봐줄 수 있을 것 같다.

Viva Venezuela! : 베네수엘라 대선에 관한 짧은 다큐멘터리

베네수엘라에 대한 깊이 있는 내용이 담긴 것은 아니고 지난 선거에서의 풍경을 스케치한 정도의 비디오지만, 노래와 풍경이 좋아서 공유한다. 🙂 리듬이 살아있는 남미, 언제나 가볼 수 있을까?

최근 본 영화 몇 편의 短評

Doubt
최근 본 영화들 중에서 가장 긴 여운이 남았던 작품. 카톨릭 학교에서 벌어진 한 사건을 둘러싸고 교장 수녀와 사제가 겪는 갈등을 소재로 하고 있는데, 메릴 스트립, 필립 세이무어 호프만 등 연기력 뛰어난 배우들의 열연으로 긴장감이 화면에 꽉 차는 느낌이었다. 특히 아들을 지키고자 하는 어머니 역으로 바이올라 데이비스는 10분 정도의 짧은 출연에도 불구하고 존재감을 뚜렷하게 각인한다. 최근 ‘사건의 전후가 데칼코마니처럼 접히는 그런 스릴러를 만들면 재밌겠다’란 생각을 했었는데, 이 작품이 어느 정도 그런 분위기다. 영화의 첫 장면과 끝 장면이 잘 포개진다.

Brokeback Mountain
이안 감독의 명성을 높였던 또 하나의 수작. 거친 서부의 사나이들이지만 동성애 관계에 휘말린(말 그대로) 두 남자의 인생을 다룬 작품. 아름다운 풍광, 두 배우의 멋진 연기, 안타까운 사연 등이 영화의 매력 포인트지만 오랜 세월을 짧은 상영시간에 담느라 영화가 좀 서두른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오히려 먼저 저 세상으로 간 히스 레저의 비극적인 삶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슬퍼하는 그의 연기를 보며 기분이 묘했다. 영화 속에서 이혼한 아내로 나오는 미쉘 윌리엄스도 실제로는 히스 레저와 연인이었고 그의 죽음 뒤에도 오랫동안 방황했던 것으로 알려져 더 안타까웠다.

Arthur
부잣집 바람둥이 아써가 가족의 정략결혼을 앞두고 가난한 여인과 사랑에 빠져, 결국 진실한 사랑을 찾게 된다는 코미디. 통속적인 스토리지만 더들리 무어, 라이자 미넬리의 매력적인 연기와 버트 바카락이 작곡한 멋진 주제가 Best That You Can Do 때문에 보고 있자면 저절로 흥이 나는 작품. “When you get caught between the moon and New York city”는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팝송 가사 중 하나다.

Matewan
메이트원이라는 탄광도시에서 펼쳐지는 20세기 초 미국의 노동운동을 다룬 영화. 감독 John Sayles가 근처를 들렀다가 이 무용담을 듣고 영화화했다고 한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탄광도시의 모습은 전설적인 미국의 노동영웅 Mother Jones의 평전에서 그리던 것과 거의 유사하다. 회사는 노동자의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임대료를 받는다. 그의 노동도구, 그의 집, 그리고 가재도구까지. 이에 분노하여 백인들이 노조를 결성하자 회사는 유색인종 노동자를 데려온다. 전국노조에서 파견된 조 캐너헌이 백인 노동자와 유색인종 간의 갈등을 봉합하면서 투쟁을 본궤도로 올려놓으려 한다. 미국영화의 사회주의 리얼리즘 걸작이라 할만한 작품.

Searching For Sugarman
로드리게즈라는 1970년대의 가수가 있었다. 디트로이트에서 두 장의 앨범을 냈지만 아무도 모른다. 놀랍게도 이역만리 남아프리카공화국에 그의 음악이 흘러들어가 엄청난 인기를 끌고 후대 음악가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하지만 당시 남아공은 전 세계로부터 고립되어 있던 지라 로드리게즈는 그 사실을 모르고, 남아공의 팬들은 그가 죽은 것으로 알고 있다. 후에 한 기자가 그의 행적을 추적하던 중에 그가 살아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고 그를 남아공에 데려온다. 팬들은 콘서트 장에서 10여분이 넘는 기립박수로 그를 응원한다. 이런 놀라운 이야기가 담긴 다큐멘터리다. 더 놀라운 사실은 로드리게즈는 그러한 열광적인 호응을 뒤로 한 채 다시 디트로이트에 돌아와 노동자로서의 삶을 이어간다는 점이다. 전설적인 가수이기도 하지만 노동의 가치를 알고 노동자들을 위해 살아가고자 했던 노동영웅이기도 한 분이다.

Thin Red Line
Terrence Malick의 1999년 작. 2차 대전 와중에 태평양의 한 섬을 둘러싸고 의미 없는 살육을 반복하는 상황을 묘사한 영화다. 이 영화의 전투씬에서는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서의 화면처럼 그 동안의 시점과는 또 다른 박진감 있는 화면으로 시각적 쾌감을 극대화한다. 거기에다 담긴 메시지도 ‘라이언 일병 구하기’과 같은 고루한 관점이 아닌, 보다 차원 높은 철학적 주제에 접근하고 있다는 점을 높이 사줄만 하다. 영화의 메시지는 이미 제목에서 드러나 있는데, ‘얇고 붉은 선’은 원래 크림 전쟁 당시 러시아군에 무모하게 대항했던 소수의 英-佛-트루크 연합군을 가리킨다. 그리고 이들의 전투는 무의미한 희생자만을 낳은 사상 최악의 졸전으로 평가받는 전투였다.

영어로 쓴 The Dark Knight Rises 감상문

그저께 “The Dark Knight Rises”를 아이맥스로 감상했다. 전작보다 실망스러운 작품이라 특별히 리뷰를 쓰지 않을 생각이었는데 영작 연습 사이트에 글 쓸 주제를 찾다보니 결국 리뷰를 쓰게 됐다.(그것도 영어로!) 원어민의 도움으로 수정된 글을 여기에 (귀찮아서) 재번역 없이 올려둔다. 

I saw “The Dark Knight Rises” the day before yesterday. I concluded that the movie has been somewhat overvalued. The film surely is a great movie for entertainment purposes. Once you, however, try to read some metaphors being reflected from the real world, you would have difficulties with the work because the points of view of the director are not so profound and are shallow. Although Christopher Nolan currently is one of the hottest movie directors in the industry around the world and has made some great films like “The Dark Knight” and “Inception”, his latest work failed to reach the level that his previous works archived in my humble opinion. The weakest point of the film is the disappointing character of the enemy of Batman. Without Heath Ledger, Nolan had to give up on the ‘Joker’ character and create a new character. The result is ‘Bane’, who came from an underground prison and argued that he tried to liberate the people of Gotham City. This character looks like a heroic revolutionary leader of the 3rd world or ‘Occupy Wall Street’ movement. Bane’s purpose is surely different from that of ‘Joker’ because Joker only wanted to create chaos in Gotham City for fun. But Bane’s actions and intentions are getting confused as he obsesses about a neutron bomb to blow up the city. His contradictory actions resulted from the director’s obsession with giving the movie a unique twist. As a result, a character which could have been a fantastic one in the trilogy of Batman became an ordinary character. Also, the movie became just a normal action film just like ‘Die Hard’ revoking an old-fashioned patriotism.

George Harrison과 Monty Python

George Harrison: Living in the Material World 의 감상문을 적으면서 언급하지 않았던, 그러나 개인적으로 무척 놀랐던 에피소드 하나는 George와 Monty Python과의 관계다. Monty Python은 이 블로그에서도 몇 번 소개했던, 특히 스팸 에피소드로 유명한 영국의 코미디 집단이다. 지극히 영국적인 냉소를 담고 있는 이 코미디의 매력은 무엇보다도 그 집단의 걸출한 연기실력과 웃기기 위해서는 어떤 상황도 마다하지 않고 망가지겠다는 투철한 직업정신이다.

이 집단이 배출한 인물 중에서 우리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이는 아무래도 Brazil 등을 감독한 Terry Gilliam 이다. George 의 다큐에서도 이 감독을 인터뷰했다. 그리고 그가 밝힌 사실 하나는 George가 Monty Python의 대단한 팬이었다는 점이다. 왠지 비틀즈의 심오한(?) 음악세계와 진지한 종교적 성찰이 Monty 사단의 제대로 엉망인 코미디와는 어울릴 것 같지 않지만 Monty 사단의 코미디가 가지고 있는 내공을 생각해보면 적당한 지점에서 접점을 찾을 수도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어쨌든 역시 Monty를 좋아하는 나로서도 흥미로운 접점이었다.

Terry의 인터뷰로 돌아오면 George는 단순한 Monty의 팬을 넘어 이들이 만들려고 했던 영화의 제작자로 직접 나서기도 했다고 한다. 그 작품은 이들이 극장 개봉용으로 만든 몇몇 작품 중 하나인 Life of Brian 이다. 신약성서와 예수의 삶을 Monty 식으로 패러디한 이 작품은 제작 당시 反기독교적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 비난을 받았다. 이 때문에 투자자도 끊긴 상황이었는데 이때 George가 제작자로 나선 것이다. 그는 제작비를 대기 위해 집까지 담보로 잡았다고 하는데 Terry는 영화 한편 보겠다고 가장 많은 돈을 지불한 사람이라며 낄낄거렸다.

그런데 왜 George는 왜 이 논란이 많은 영화 Life of Brian의 제작자로 나섰을까? 영화 한편이 보고 싶어서? Monty의 팬이어서? 영화제작을 통해 돈을 벌려고? 당시 인도의 종교에 심취해있는 그인지라 기독교에 냉소적인 영화내용이 맘에 들어서? 어느 하나일수도 있고 이 모두일수도 있다. 어쨌든 여러 가지 정황은 그가 난데없이(?) 영화제작자로 나선 것에 대해 뜬금없다는 느낌을 주지는 않는다. 또한 다큐에서 말하는 George의 이중적인(?) 캐릭터를 – 한없이 다사롭기도 하고 무례할 정도로 직설적이기도 한 – 감안해도 이해가 가는 행동이기도 하다.

어쨌든 분명한 사실은 우리는 그의 존재로 말미암아 비틀즈의 위대한 작품과 함께 또 하나의 선물을 받았다는 점이다. 감사합니다. 🙂

영화 일부 보기

최근에 본 영화들 단상

밀양
홍상수의 영화 속 등장인물은 영화에 나올 것 같지 않은 인물들이 현실에서는 하지 않을 것 같은 행동을 하는 반면, 이창동의 영화 속 등장인물들은 영화에 나올 것 같지 않은 인물들이 영화 속에서 하지 않을 것 같은, 진짜 일상생활에서 할 것 같은 행동들을 한다는 것이 개인적인 생각이다. ‘박하사탕’, ‘시’에서도 느껴지는 그의 공력이 이 작품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된다. 줄거리를 알고 봤음에도 주인공이 느끼는 슬픔이 고스란히 전해져 온다. 특히 살인자뿐만 아니라 주변인물 모두가 보여주는 그 뻔뻔한 넓은 오지랖들은 너무 현실적이어서 소름이 끼칠 정도다. 특히 송강호가 전도연의 허락도 없이 피아노 교실에 가짜 상장을 못 박는 장면.

피아노
이 작품이 유명해진 이후에도 왠지 칙칙하다는 느낌 때문에 일부러 찾아보지 않다가 최근에야 보았다. 한마디로 멋진 영화. 세상과 피아노를 통해서만 대화를 나누는 여인과 그를 둘러싼 주변 인물들과의 갈등이 입체적으로 그려져 있었다. 그들에게서 공통적으로 찾을 수 있는 감정은 집착이다. 피아노에 대한 집착, 땅에 대한 집착, 사랑에 대한 집착. 이 세 가지가 얽혀서 끔찍한 비극을 탄생시킨다. 마지막 장면은 만약 내가 연출했더라면 조금 다르게 했을 것 같다는 아쉬움이 남는 장면.

The Ruling Class
교수형 매듭을 만들어 놓고 거기서 노는 것을 즐기는 한 괴짜 부자가 실수로 정말 매듭에 매달려 죽고 만다. 이후 저택에 돌아온 그의 후계자는 자신을 예수라고 생각하는 과대망상의 Jack. 부르주아 사회에 대한 조롱으로 가득 찬 흥미로운 작품. Jack은 어쨌든 자신이 예수가 아니라 Jack 이란 사실을 인정하지만, 그마저도 또 하나의 과대망상이라는 점이 反轉.

Death on The Nile
최근에 원작소설을 읽고 있어서 다시 꺼내본 영화. 아가사 크리스티 작품 특유의 고풍스럽고 긴장감 넘치는 세팅이 매력적으로 묘사된 작품. 다른 에큘 포와르를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의 캐릭터에 독특하고 인상적인 해석을 부여한 피터 유스티노프와 수많은 명배우들이 등장하는 것도 매력적이고, 이집트의 찬란한 유물들도 즐거운 눈요깃거리. 범인을 알아도 재밌다.

Zelig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인종, 직업, 행동들을 마치 카멜레온처럼 흡수하여 동화된다는, 독특한 정신병에 시달리는 레나드 젤릭이라는 인물에 관한 가짜 다큐멘터리. 언제나 그렇듯 우디 알렌 특유의 유머코드가 곳곳에 촘촘하게 박혀 있고 수잔 손택과 같은 진지한 학자들이 인터뷰를 통해 천연덕스럽게 젤릭이란 인물의 성격을 분석한다. 그런데 젤릭이란 인물에 열광하는 대중의 이중적인 태도도 어떻게 보면 젤릭이 겪었던 그 정신병 증상과 다르지 않다는 점이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아닌가 생각된다. 하긴 멀리 가지 않더라도 우리 사회도 비슷한 증상이 많다.

George Harrison : Living In The Material World
3시간이 넘는 상영시간이 지루하지 않은 – 물론 내 옆의 고등학생은 보는 내내 몸을 배배 꼬았지만 – 조지 해리슨에 관한 다큐멘터리. 메이저 중의 메이저, 비틀즈에서 약간은 마이너인 조지 해리슨이란 독특한 캐릭터에 주목한 마틴 스콜세지. 영화를 다 보고 나면 그 선택이 탁월한 선택이었음을 알 수 있다. 조지 해리슨이 비틀즈의 음악과 멤버들의 삶에 결코 지워지지 않는 뚜렷한 각인을 남긴 이었음을 이 작품을 보면 분명히 알 수 있다. 어느 음악프로에 영화전문 기자가 나와서 에릭 클랩톤과 조지 해리슨, 그리고 그의 아내 사이에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아는 것만으로도 이 다큐를 볼 가치가 있다고 했다는데, 뭐 딴에는 틀린 말도 아니다. 그 사건 역시 조지의 삶에 있어 중요한 변곡점이었으므로. 영화를 본 후 에릭 클랩톤의 Layla를 들어보면 감회가 새로울 것이다.

Billion Dollar Brain
해리 팔머 시리즈에 대해선 예전에 한번 종합적으로 설명한 바 있다. 어쨌든 오랜만에 다시 찾아봤는데 볼수록 매력적인 작품. 당시 어떻게 이런 삐딱한 작품을 만들 생각을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 제작과정이 결코 순탄하지 않았을 듯. 1967년에 제작된 스파이물인데 주적이 반공(反共)주의자 자본가다!

Memorias del subdesarollo(저개발의 기억)
쿠바 혁명에 적극 동참하였으면서도 ‘관료주의자의 죽음’ 등을 통해 사회주의에서 만연한 관료주의를 비판하는 등 반골기질을 잃지 않았던 토마스 구티에레스 알레아의 대표작. 혁명 이후 그의 지인들이 모두 쿠바를 떠나는 와중에도 하바나에 남은 부르주아 세르지오의 눈을 통해 바라본 쿠바를 그렸다. 이 영화는 어찌 보면 정치와 성(性)에서 공통적으로 찾아볼 수 있는 긴장감과 무료함을 다뤘다는 점에서 오시마 나기사 감독의 ‘감각의 제국’과도 비슷하다. 그렇지만 굳이 그러한 정치적인 함의를 따지지 않더라도 그 자체로 매력적인 플롯이다. 정치와 사랑에 희망은 있을까? 그건 영화를 본 사람이 답해야 할 몫인 것 같다.

Midnight in Paris
입소문을 타고 꾸준하게 인기를 모으고 있는 우디 알렌 감독작. 소설 쓰기를 꿈꾸는 주인공이 여자 친구와 함께 들른 파리에서 시간여행을 통해 헤밍웨이나 스콧 핏츠제랄드와 같은 인물들을 만난다는, 어찌 보면 좀 식상한 설정. 하지만 그 식상함이 우디 알렌 식의 프리즘을 거쳐 일정 수준 이상의 만족도는 보장하고 있다. 개인적인 느낌으로는 우디 알렌의 과거 작품 중 ‘카사블랑카여 다시 한 번’과 ‘라디오데이즈’를 합쳐놓은 듯한 느낌.

Cléo de 5 à 7(다섯 시부터 일곱 시까지의 클레오)
건강검진의 결과를 기다리는 여가수 클레오의 감정 기복을 실시간 진행에 따라 보여주는 영화. 이 흥미로운 시도는 매우 성공적이다. 인간이란 찰나에도 감정이 왔다 갔다 하는 동물인데 두 시간이라면 얼마나 더 많은 인생의 희로애락이 담겨져 있을 것인가? 불행한 것 같고, 행복한 것 같고, 세상 사람이 다 나를 미워하는 것 같고… 이런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OOO인 것 같다.

“아버지를 위한 노래” 후기

영화 전체적으로는 그다지 후한 점수를 주고 싶지 않은 작품이다.

30년간 아버지를 만나지 않았고 자신의 노래 때문에 자살한 이들 때문에 더 이상 노래를 부르지 않은 흘러간 팝스타 셰이언이 아버지의 죽음에 즈음하여 그의 임종을 목격하고, 그가 생전에 집요하게 찾아 헤매던 한 나치 군인을 찾아 나선다는, 그럼으로써 결국 일종의 영혼의 치유를 받는다는 흔하고 상투적인 가족영화, 로드무비 스타일이다.

중간 중간에 극 전개와 별로 관련 없는 캐릭터들이 등장하여 잔재미를 주는데, 이런 캐릭터들은 바로 영화의 원제 This must be the place와 같은 이름의 곡을 만들었고, 음악감독과 카메오를 맡은 David Byrne의 영화 True Stories에서 등장하는 괴상한한 캐릭터들을 흉내 낸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상투적인 스토리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아버지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그 나치군인을 찾아내어 그를 통해 왜 아버지가 그토록 그를 찾아 헤맸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장면과 (여기에서 그 늙은 나치군인이 보여준 연기는 맘에 들었다) 연출에서 오버한 감이 보이지만 그에게서 셰이언만의 복수를 하는 장면은 그래도 볼만 했다. 하지만 말미에서는 공항장면에서 다시 상투성을 재연한다.

p.s. 1. Talking Heads의 팬으로서는 당연히 극의 백미는 This must be the place를 부르는 David Byrne 의 막간 공연.

p.s. 2. 극중 David Byrne과 셰이언이 대화를 나누는 장소는 David Byrne이 실제로 그의 예술품으로 만든 연주가 가능한 빌딩.

p.s. 3. 셰이언의 분장은 많이들 아시겠지만 The Cure의 Robert Smith를 흉내 낸 것.

p.s. 4. 국내 출시명 “아버지를 위한 노래”는 정말 재앙이다. 아버지를 위한 여정도 아니었고, 셰이언은 노래를 부르지도 않는다.

p.s. 5. 영화를 상영하는 시네큐브 홈페이지에는 Talking Heads가 “1981년 해체한 것”으로 나온다. 실제로는 1991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