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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받지 못한 자의 변명으로써의 예술의 효용성

말론 브랜도(Marlon Brando) 주연의 ‘워터프론트(On The Waterfront)’라는 영화가 있다. 부도노동자인 테리 멀로이(Terry Malloy; 말론 브랜도)가 항구의 부패한 노조의 끄나풀로 일하다가 양심과 사랑을 위해 불의에 맞선다는 내용으로, 강렬한 스토리텔링,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력, 충격적인 사회적 메시지 등에 힘입어 미국 영화 역사상 가장 위대한 걸작에 늘 꼽히는 작품이다.

한편 이 영화의 좀 더 깊은 속내에 대해서 알고자 한다면 감독과 제작년도를 주의 깊게 봐야 한다. 이 영화를 감독한 이는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에덴의 동쪽’ 등 작품성과 상업성 양쪽에서 최고의 영예를 얻은 엘리아 카잔(Elia Kazan)이다. 제작년도는 1954년이다. 감독과 제작년도가 중요한 이유는 이 영화가 감독이 그 이전인 1952년에 겪은 일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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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lia Kazan” by Unknown – http://mythicalmonkey.blogspot.com.au/p/katie-bar-door-award-nominees-and.html. Licensed under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엘리아 카잔

1952년 엘리아 카잔은 당시 미국사회를 광풍으로 몰아넣은 매카시즘의 진원지인 하원비미활동위원회(House Un-American Activities Committee:HUAC)에 증인으로 참석해야 했다. 이 자리에서 카잔은 자신이 16년 전에 공산당 당원이었음을 밝힌다. 당시 동료들의 이름을 대라는 요구에 처음에는 거부하다, 결국 Group Theater의 멤버였던 공산주의자 여덟 명의 이름을 댄다.

이 일로 인해 카잔은 밀고자로 낙인찍힌다. 아마도 카잔의 인생에서 가장 치욕적인 순간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영화 ‘워터프론트’는 2년 후에 제작된다. 한편 흥미롭게도 영화의 아이디어는 원래 아서 밀러(Arthur Miller)의 것이었지만 아서는 카잔의 배신을 비난하며 대본 집필을 거부하고, 그 작업은 카잔과 함께 HUAC에 협조했던 버드 슐버그(Budd Schulberg)가 맡게 되었다.

영화 줄거리를 보자. 항구의 부패한 노조는 그들의 방해자를 살인도 불사하며 제거한다. 멋모르고 동참했던 테리는 차차 사건의 실상을 알고 갈등한다. 노조가 간부였던 친형마저 죽이자 마침내 청문회에 나가 진실을 증언한다. 이로 인해 밀고자로 욕을 먹지만 노조 위원장 자니 프렌들리(Johnny Friendly)와 담판을 지으며 영웅으로 거듭난다. 뭔가 이야기가 겹치는 느낌이 든다.

이것은 명백히 카잔 자신의 심정을 테리에게 투영한 것이다. 자니는 어쩌면 자신을 공개적으로 비난했던 아서를 설정한 것일지도 모른다. 카잔은 자서전 ‘인생(A Life)’에서 ‘워터프론트’가 아카데미 8개 부문을 석권한 날 “복수의 달콤한 맛을 봤고, 나를 비판하는 놈들이 처박혀서 엿을 먹어야 할 곳이 어디인지를 큰 소리로 외쳐대는 기분”이었다고 썼다. 통쾌한 복수극인 셈이다.

이 때문에 영화가 비판받기도 했다. 몇몇 평론가들은 결국 좌익을 범죄자로 치부하는 반공영화였다고 비판하거나, 영화를 자기 변호수단으로 쓴 사실을 비판하기도 했다. 평론가 수잔 손택(Susan Sontag)이라면 카잔을 옹호했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예술작품은 그것이 예술작품인 한 어떤 것도 옹호하지 않는다. 위대한 예술가는 숭고한 중립성을 획득한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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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 the Waterfront poster” by http://www.movieposterdb.com/poster/84aa1bc0. Licensed under Wikipedia.

이 반공영화스러운 포스터를 보라~

평론가도 아니고 영화도 잘 모르는 내가 보기에 둘 다 일리가 있는 말이다. 예술은 그 자체로 “자기완결적”이기 때문에 그 메시지가 무엇이건 간에 감상자에게 전해지는 그 쾌감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어떤 예술작품이 반인륜적일 경우에도 보존할 가치는 있는 것이다. 하지만 미묘한 문제는 그것이 가지는 영향력이 현실세계에 막강할 경우에 발생할 것이다.

한편, 여기 다른 영화가 있다. ‘굿나잇 앤 굿럭(Good Night, and Good Luck)’. 2005년 조지 클루니(George Clooney)가 감독한 이 영화는 카잔과 아서가 반목했던, 조지프 맥카시(Joseph McCarthy) 의원이 활개 쳤던 당시를 그리고 있다. 맥카시즘의 공포 분위기에 모두가 숨죽이고 있던 시절, 용기 있게 맞선 CBS 언론인 에드워드 머로우(Edward R. Murrow)에 관한 영화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 영화에서 에드워드는 동료 프레드 프렌들리(Fred Friendly; 조지 클루니)와 함께 ‘사람 대 사람’이라는 쇼를 통해 맥카시즘에 정면으로 맞선다. 그들이 옹호했던 것은 공산주의나 “사상의 자유”라기보다는, 한 개인을 단죄할 때에는 정해진 절차와 증거에 근거해야 한다는 인권적 차원에서의 저항이었다. 우리식 표현으로 말하자면 진정한 “자유민주주의”적 발상이다.

에드워드 머로우의 실제 방송 장면

이 영화를 ‘워터프론트’와 함께 놓고 보면 흥미롭다. ‘워터프론트’의 영웅은 테리 – 청문회에서 용감히 공산주의자를 고발한 카잔 – 이고, ‘굿나잇 앤 굿럭’에서는 공산주의자 사냥에 나선 맥카시에 대항한 에드워드다. ‘워터프론트’에서의 악의 세력은 카잔을 밀고자라 비난한 항구의 노동자들인데, 에드워드는 거꾸로 그들이 정당한 보호를 받아야 한다는 신념을 굽히지 않는다.

결국 ‘워터프론트’를 네거티브 필름처럼 색깔을 바꾸어 볼 때 두 영화는 잘 포개진다. 악당 자니가 맥카시, 테리가 맥카시에 저항한 에드워드일 경우 두 영화의 영웅주의는 크게 차이가 없다. 그런데 이 둘 간의 가치를 전복한 것이 누구인가 하는 의문에 있어서, 적어도 현재까지의 역사의 평가에 따르면 조지 클루니 보다는 엘리아 카잔이라는 점에서 큰 이의는 없을 것이다.

‘워터프론트’에서의 악인들은 살인이라는 범죄를 저질렀지만, 현실에서의 악인들은 – 몇몇은 간첩행위로 고발당했음에도 – 그렇지도 않았는데 정당한 절차 없이 단죄 받았던 것이 차이다. 불의(不義)에 맞서는 행위가 용기 있는 행위임은 두 말할 나위 없지만 사상의 자유를 침해하는 청문회에 가서 공산주의자라 고발하는 행위가 불의에 맞선 행위라 칭해지긴 곤란한 일이다.

앞서 말한 ‘현실에서 발생하는 미묘한 문제’에 대해 말해보자. 이 이슈는 세기말까지 헐리우드를 짓누르는 민감한 주제였고 어쩌면 여전히 그렇다. 체제순응적인 아카데미조차 한참을 머뭇거리다 1999년에야 엘리야 카잔에게 평생공로상을 준 것이 그 반증일 것이다. 당시 배우들의 반응도 다른 공로상과는 달리 엇갈렸다. 어떤 이는 기립박수를, 어떤 이는 침묵을 지켰던 것이다.

엘리아 카잔의 아카데미상 수상 장면

당시 워렌 비티와 메릴 스트립 등은 기립박수로 환영했지만, 에드 해리스와 닉 놀테 등은 묵묵히 앉아 있었다. 이런 상황으로 인해 그 후 서로의 인간관계가 소원해지기도 했다. 더 중요한 점은 조지 클루니 등이 여전히 당시를 소재로 영화로 만들만큼 미국사회에 미친 영향이 크다는 점이다. 그리고 반대 측에서는 부지런히 당시 고발당한 이의 간첩행위를 들추어내고 있고.

우리 역사에도 엘리아 카잔과 비슷한 행동을 한 이가 있다. 남로당 당원으로 몸담았다가 동료를 고발하고, 결국 대통령이 된 박정희가 그다. 박정희가 한반도에 미친 영향은 엘리아 카잔이 미국사회에 미친 영향보다 훨씬 크고, 스토리는 ‘워터프론트’보다 훨씬 방대하다. 그 여파는 이번 대선까지 미치고 있다. 거기에다 그 스토리에는 비극적이게도 ‘워터프론트’와 같은 예술도 없다.

예술을 자기변명의 도구로 쓴 엘리아 카잔 정도는 애교로 봐줄 수 있을 것 같다.

Michael clayton(2007)

마이클클라이튼은 기발한 아이디어로 무장한 신세대 스릴러하고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그것은 어찌 보면 고전적인 느와르의 현대적인 오마쥬쯤으로 해석될 수 있을 것 같다. 변호사라는 좋은 직업을 가지고 있지만 도박에 빠져 살았고, 부업삼아 한 레스토랑이 망해 사채를 얻어 쓴 이혼남 마이클 클라이튼(조지 클루니), 젊은 여성이면서도 제초제를 생산하는 대기업 유노쓰의 임원에 올라 성공을 위해서라면 물불가리지 않는 카렌, 거래를 성사시켜 거액을 수수료를 버는 한편 자신의 회사를 합병시키려는 법무법인 대표 마티(시드니 폴락) 등 대충 느와르에서 볼 수 있는 얼굴들이 등장한다.

사건은 유해한 제초제로 말미암아 온 동네 사람이 입은 피해에 대한 소송에서 유노쓰의 변호를 맡은 스타 변호사 아써가 갑자기 재판도중 스트립쇼를 벌이면서 점화한다. 피해자들의 선량한 마음과 안타까운 사연을 듣는 와중에 더 이상 ‘악마의 대변자(devil’s advocate)’가 될 수 없다는 발작적인 저항이었다. 법무법인과 유노쓰는 쑥대밭이 되고 마이클 클라이튼이 아써의 마음을 돌이키려 하지만 그 와중에 아써가 의문의 죽음을 당하고 만다.

그리고 영화는 한바탕 반전(反轉)을 향해 질주한다.

The Firm, The Pelican Brief, The Insider 등 법정과 기업 또는 조직비리라는 소재가 스릴러라는 형식으로 엮여진 많은 영화에서 익히 봐온 구도다. 거대기업의 거대범죄에 대한 죄책감의 결여, 조직의 자기보호 본능, 성공에의 욕망, 순리로 풀기보다는 형식논리로 갈등을 푸는 매정한 시스템, 그 사이에 끼어 고뇌하고 갈등하는 인간군상….. 이러한 다양한 생각할 거리들이 적절한 액션과 긴장감과 버무려져 진행된다.

개인적으로는 이 영화를 보며 현대사회의 분업이 낳은 비극에 대해 다시 한번 곱씹게 되었다. 아담 스미쓰 이하 모든 경제학자들이 분업으로 인한 거대한 생산력의 향상을 칭송하였고 그것은 실존하는 혜택이었음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런 한편으로 분업은 현대사회에서 타자에 대한 무관심과 자신의 일에 대한 소외를 낳았다. 영화대사에서도 나오듯이 그들은 ‘각자 자신들의 일을 충실히 하고 있지만(you’re doing your job)’ 그렇다고 해서 이 분업이 전체의 복지로 수렴되지는 않는다. 제초제 회사는 제초제를 만들고, 법률회사는 사람들과 기업을 변호하고, 심지어 흥신소 직원은 사람까지 살해하지만 – 생활인으로서 정말 열심히들 일을 했지만 – 남은 것은 제초제로 병든 주민과 끔찍한 살인, 그리고 인간성 파괴뿐이었다.

물론 이것은 분업의 한 부작용일 뿐일지도 모른다. 영화란 원래 개연성이 적은 사례를 극화하여 사람들이 신기해하면서 극을 즐기게끔 만든 매체인 법이다. 그럼에도 오늘 날 우리네 생활에서 이렇게 자신들이 열정을 가지고 진행시킨 일들이 남들에게 득이 되기보다는 해가 되거나, 또는 득보다 실이 큰 일이 아니라는 보장은 못하는 법이다. 그러니 항상 자신의 삶을 반추하며 살아야 하는 법인가보다. 음… 이거 영화보다 득도하게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