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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본 영화들 단상

밀양
홍상수의 영화 속 등장인물은 영화에 나올 것 같지 않은 인물들이 현실에서는 하지 않을 것 같은 행동을 하는 반면, 이창동의 영화 속 등장인물들은 영화에 나올 것 같지 않은 인물들이 영화 속에서 하지 않을 것 같은, 진짜 일상생활에서 할 것 같은 행동들을 한다는 것이 개인적인 생각이다. ‘박하사탕’, ‘시’에서도 느껴지는 그의 공력이 이 작품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된다. 줄거리를 알고 봤음에도 주인공이 느끼는 슬픔이 고스란히 전해져 온다. 특히 살인자뿐만 아니라 주변인물 모두가 보여주는 그 뻔뻔한 넓은 오지랖들은 너무 현실적이어서 소름이 끼칠 정도다. 특히 송강호가 전도연의 허락도 없이 피아노 교실에 가짜 상장을 못 박는 장면.

피아노
이 작품이 유명해진 이후에도 왠지 칙칙하다는 느낌 때문에 일부러 찾아보지 않다가 최근에야 보았다. 한마디로 멋진 영화. 세상과 피아노를 통해서만 대화를 나누는 여인과 그를 둘러싼 주변 인물들과의 갈등이 입체적으로 그려져 있었다. 그들에게서 공통적으로 찾을 수 있는 감정은 집착이다. 피아노에 대한 집착, 땅에 대한 집착, 사랑에 대한 집착. 이 세 가지가 얽혀서 끔찍한 비극을 탄생시킨다. 마지막 장면은 만약 내가 연출했더라면 조금 다르게 했을 것 같다는 아쉬움이 남는 장면.

The Ruling Class
교수형 매듭을 만들어 놓고 거기서 노는 것을 즐기는 한 괴짜 부자가 실수로 정말 매듭에 매달려 죽고 만다. 이후 저택에 돌아온 그의 후계자는 자신을 예수라고 생각하는 과대망상의 Jack. 부르주아 사회에 대한 조롱으로 가득 찬 흥미로운 작품. Jack은 어쨌든 자신이 예수가 아니라 Jack 이란 사실을 인정하지만, 그마저도 또 하나의 과대망상이라는 점이 反轉.

Death on The Nile
최근에 원작소설을 읽고 있어서 다시 꺼내본 영화. 아가사 크리스티 작품 특유의 고풍스럽고 긴장감 넘치는 세팅이 매력적으로 묘사된 작품. 다른 에큘 포와르를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의 캐릭터에 독특하고 인상적인 해석을 부여한 피터 유스티노프와 수많은 명배우들이 등장하는 것도 매력적이고, 이집트의 찬란한 유물들도 즐거운 눈요깃거리. 범인을 알아도 재밌다.

Zelig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인종, 직업, 행동들을 마치 카멜레온처럼 흡수하여 동화된다는, 독특한 정신병에 시달리는 레나드 젤릭이라는 인물에 관한 가짜 다큐멘터리. 언제나 그렇듯 우디 알렌 특유의 유머코드가 곳곳에 촘촘하게 박혀 있고 수잔 손택과 같은 진지한 학자들이 인터뷰를 통해 천연덕스럽게 젤릭이란 인물의 성격을 분석한다. 그런데 젤릭이란 인물에 열광하는 대중의 이중적인 태도도 어떻게 보면 젤릭이 겪었던 그 정신병 증상과 다르지 않다는 점이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아닌가 생각된다. 하긴 멀리 가지 않더라도 우리 사회도 비슷한 증상이 많다.

George Harrison : Living In The Material World
3시간이 넘는 상영시간이 지루하지 않은 – 물론 내 옆의 고등학생은 보는 내내 몸을 배배 꼬았지만 – 조지 해리슨에 관한 다큐멘터리. 메이저 중의 메이저, 비틀즈에서 약간은 마이너인 조지 해리슨이란 독특한 캐릭터에 주목한 마틴 스콜세지. 영화를 다 보고 나면 그 선택이 탁월한 선택이었음을 알 수 있다. 조지 해리슨이 비틀즈의 음악과 멤버들의 삶에 결코 지워지지 않는 뚜렷한 각인을 남긴 이었음을 이 작품을 보면 분명히 알 수 있다. 어느 음악프로에 영화전문 기자가 나와서 에릭 클랩톤과 조지 해리슨, 그리고 그의 아내 사이에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아는 것만으로도 이 다큐를 볼 가치가 있다고 했다는데, 뭐 딴에는 틀린 말도 아니다. 그 사건 역시 조지의 삶에 있어 중요한 변곡점이었으므로. 영화를 본 후 에릭 클랩톤의 Layla를 들어보면 감회가 새로울 것이다.

Billion Dollar Brain
해리 팔머 시리즈에 대해선 예전에 한번 종합적으로 설명한 바 있다. 어쨌든 오랜만에 다시 찾아봤는데 볼수록 매력적인 작품. 당시 어떻게 이런 삐딱한 작품을 만들 생각을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 제작과정이 결코 순탄하지 않았을 듯. 1967년에 제작된 스파이물인데 주적이 반공(反共)주의자 자본가다!

Memorias del subdesarollo(저개발의 기억)
쿠바 혁명에 적극 동참하였으면서도 ‘관료주의자의 죽음’ 등을 통해 사회주의에서 만연한 관료주의를 비판하는 등 반골기질을 잃지 않았던 토마스 구티에레스 알레아의 대표작. 혁명 이후 그의 지인들이 모두 쿠바를 떠나는 와중에도 하바나에 남은 부르주아 세르지오의 눈을 통해 바라본 쿠바를 그렸다. 이 영화는 어찌 보면 정치와 성(性)에서 공통적으로 찾아볼 수 있는 긴장감과 무료함을 다뤘다는 점에서 오시마 나기사 감독의 ‘감각의 제국’과도 비슷하다. 그렇지만 굳이 그러한 정치적인 함의를 따지지 않더라도 그 자체로 매력적인 플롯이다. 정치와 사랑에 희망은 있을까? 그건 영화를 본 사람이 답해야 할 몫인 것 같다.

Midnight in Paris
입소문을 타고 꾸준하게 인기를 모으고 있는 우디 알렌 감독작. 소설 쓰기를 꿈꾸는 주인공이 여자 친구와 함께 들른 파리에서 시간여행을 통해 헤밍웨이나 스콧 핏츠제랄드와 같은 인물들을 만난다는, 어찌 보면 좀 식상한 설정. 하지만 그 식상함이 우디 알렌 식의 프리즘을 거쳐 일정 수준 이상의 만족도는 보장하고 있다. 개인적인 느낌으로는 우디 알렌의 과거 작품 중 ‘카사블랑카여 다시 한 번’과 ‘라디오데이즈’를 합쳐놓은 듯한 느낌.

Cléo de 5 à 7(다섯 시부터 일곱 시까지의 클레오)
건강검진의 결과를 기다리는 여가수 클레오의 감정 기복을 실시간 진행에 따라 보여주는 영화. 이 흥미로운 시도는 매우 성공적이다. 인간이란 찰나에도 감정이 왔다 갔다 하는 동물인데 두 시간이라면 얼마나 더 많은 인생의 희로애락이 담겨져 있을 것인가? 불행한 것 같고, 행복한 것 같고, 세상 사람이 다 나를 미워하는 것 같고… 이런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OOO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