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보관물: 액션

The Dark Knight

WARNING!! 스포일러 만땅

히스레저의 급작스러운 죽음과 그가 이 영화에서 보여준 광적인 연기가 입소문으로 퍼지면서 개봉도 하기 전에 준(準,quasi)신화적인 존재가 되어 블록버스터 컬트라는 새로운 길을 개척해버린 영화.  The Dark Knight을 오늘 화면발 죽이는 아이맥스로 감상했다.

보통 이런 액션영화는 좀 근사한 크레딧타이틀이나 큰 줄거리와는 상관없지만 보는 이의 심장박동수를 증가시키는 호쾌한 액션씬을 첫머리에 집어넣기도 하는데 – 007시리즈의 특기지 – 이 영화는 어영부영하지 않고 바로 본문으로 들어가 조커가 은행을 털면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장면부터 시작한다.(주1)

영화는 이후 배트맨과 조커, 그리고 또 하나 외연을 확장하자면 정의감 넘치는 검사에서 투페이스로 전락해버린 하비 덴트의 삼각구도로 진행된다. 이 셋은 기묘하게도 서로 서로 공유하는 것들이 겹친다. 배트맨과 하비 덴트는 정의감을 공유한다. 배트맨과 조커는 어둠을 공유한다. 그리고 조커와 하비 텐트(정확하게는 투페이스가 되어버린 하비 덴트)는 광기(狂氣)를 공유한다.

이렇게 한 인물이 다른 두 인물의 공통점을 결여하고 있다는 점 때문에 셋은 끊임없이 반목하게 된다. 조커는 알량한(!) 정의감이 없어서 도시를 휘젓고 다닐 수 있다. 하비 덴트는 어둠 속에 존재할 수 없는 시스템의 남자여서 배트맨에게 불법적인 납치를 부탁한다. 배트맨은 어쩔 수 없는 냉정함 때문에 조커의 광기와 하비 덴트가 투페이스가 되면서 폭발한 광기를 말리기 위해 혼자 오지랖 넓게 동분서주 바쁘기만 하다.

그러면서도 정작 조커를 죽일 수 있는 순간이 되어도 정의감이라는 후천적 뇌종양 증세 때문에 무슨 아시모프 소설에 나온 인간을 죽일 수 없는 로봇이라도 되는 마냥 주먹을 거둔다. 게리 올드맨이 열연한 고든 경찰서장은 아들에게 이런 배트맨을 ‘어둠의 기사(Dark Knight)’라고 칭송하지만 내게는 왠지 냉소적인 조롱으로 느껴진다.(주2)

조커는 비이성(非理性)과 비합리(非合理)가 무기인 녀석이다. 그의 행동반경은 랜덤하고 생각역시 그러하다(물론 계획은 치밀하다. 이러한 점에서 그 역시 절대적인 혼돈 그 자체는 아니다). 오죽하면 돈을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불을 질러버린다. 전통적인 악당들에게도 경악 그 자체다. 오직 하나의 동기가 있다면 배트맨과 재밌게 놀고 싶었을 뿐이다.(주3)

그래서 조커는 배트맨이 모토사이클을 몰고 달려드는 순간에도, 빌딩에서 집어 던져버려도 재밌어서 깔깔 웃어대기만 한다. 죽일 테면 죽여보라는 심산이었다. 그저 재밌어서 배 두 척을 상대로 ‘죄수의 딜레마’게임을 벌이기도 했고(주4), 하비 덴트를 투페이스로 만들어버렸다. 그런데 결국 배트맨은 그런 행동반경이 파리 같은 녀석 하나 처치를 못했다. 결국 어찌 보자면 패자는 배트맨이다.

결국 이 영화는 수많은 명배우들의 연기경합, 제이슨 본 시리즈를 연상시키는 ‘낮은 톤(low tone)’의 연이어지는 긴장감, 그리고 수퍼히어로의 맛깔스러운 재해석으로 – 전문가가 아닌지라 걸작까지는 잘 모르겠고 – 수작의 반열은 거뜬히 뛰어넘은 것으로 여겨진다.

추.

이 영화가 현실 자본주의, 또는 문명세계의 메타포인지는 잘 모르겠다. 어떤 유명한 리뷰어는 배트맨이 자경단이자 자본가라는 사실을 이야기의 발화점으로 삼고 있던데 이건 원작이 생겨먹기를 그렇게 생겨먹은 것이고 원작자가 그러한 것에 큰 염두는 두었다고는 여태까지 생각해본 적이 없다. 다만 뭔가 프로이트적인 분석을 하기 시작하면 혐의를 둘 수도 있겠다. 더불어 현실세계는 영화가 그리고 있는 것처럼 ‘정의’라는 것이 순수결정체도 아니다. 분명한 사실 하나는 실존하는 배트맨이 하나 있긴 하다는 것이다. 바로 자본주의로 거부가 되고도 끊임없이 자본주의를 저주하는 조지 소르스

 

주1) 이 은행털이 에피소드에서 호기 있게 강도와 대적하는 아저씨가 바로 프리즌브레이크2에서 석호필 형과 맞장 뜨는 형사 아저씨기에 적잖이 기대했는데 맥없이 당하고 만다.

주2) 기사(Knight)가 또 원래 그렇게 정의감 넘치는 족속들도 아니다.

주3) 현대 소프트웨어 운동의 그루로 추앙받는 리누스 토팔즈(Linus Torvalds)가 쓴 책 제목이 ‘그냥 재미로’인데 그는 궁극적인 발전의 동기를 ‘재미’라고 보았다. 그는 그저 재미있어서 Linux 소스를 공개했고 많은 이들이 이 소스를 역시 재미로 같이 손보아서 이 정도로 만들어 놓았다. MS적인 이윤동기로 설명되지 않는 대목이다. 무언가를 재미로 하는 애들은 못 말린다. 이를테면 블로거나 오타쿠

주4) 나도 이 장면을 보면서 ‘죄수의 딜레마’를 떠올렸고 집에 와서 검색해본 리뷰에서도 ‘죄수의 딜레마’가 언급되어 있는 글이 꽤 있으나 엄밀히 말해 정통적인 ‘죄수의 딜레마’와는 다른 상황이라고 판단된다. 즉 정통적인 상황에서 수사관, 즉 죄수를 징벌할 수 있는 이는 죄수에 대한 정보의 비대칭성으로 말미암아 수세적 상황에 놓여있다. 그러나 조커는 이 상황을 완벽하게 콘트롤하고 있었다. 양쪽 배에서 죄수의 딜레마 게임을 이겼다고 치더라고 조커가 기폭장치 한번 눌러버리면 상황 끝이다. 그들의 정의감은 헌 신짝만도 못한 것이 되는 것이었다. 게다가 그 상황에서 죄수가 기폭장치를 강물로 던져버리는 설정은 너무 작위적이었다. 감독 조차도 인간성을 신뢰한 것인지 아니면 제작사의 압력이었는지는 모르겠다.

주5) 개인적으로는 게리올드맨과 마이클케인의 등장이 반가웠다. 마이클 옹 너무 늙으셔서 안타까웠고 레이첼의 편지를 펼쳐볼 때 발견한 그의 산도적 같은 손은 약간 실망이었다.

추격자

감독은 피해자들을 착취한 포주와 피해자들을 살해한 연쇄살인자와의 싸움을 하는 부조리한 상황을 연출해놓고 우리에게 포주를 편들도록 하는 상황으로 몰아붙이고 있다. 포주의 행동이 피해자들에 대한 복수라기보다는 자신의 재산권에 대한 보호 차원임일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말이다. 한편으로 감독은 영리하게도 포주는 전직경찰에다 인간쓰레기라는 설정을 통하여 포주가 형사 못지않은 추리력을 선보여도, 범죄자 못지않은 야비한 폭력을 휘둘러도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도록 복선을 깔아놓았다.

이토록 포주의 개인사가 복잡다단한데 반해 정작 연쇄살인자의 살인동기는 너무 식상하고 그의 트라우마는 놀랍도록 단순하다. 사실 이는 영화의 단점이자 동시에 미덕이기도 하다. ‘양들의 침묵’이래 우리는 연쇄살인자의 기묘하고 충격적인 삶의 그림자에 대해서는 익히 알만큼 알고 있고 또 다른 영화에서 또 그 고리타분한 살인의 변명을 듣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냥 망치로 조지는 장면만 연출하면 나머지는 관객들이 알아서 상상하면 된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는 ‘텍사스 전기톱 연쇄살인사건’의 담백함을 오마주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특히 시체를 쇠꼬챙이에 걸어놓는다는 설정에서 더욱 그런 생각이 들었다.

김윤식은 ‘타짜’에서 선보였던 야비함을 extended version 으로 무리 없이 선보였고 하정우는 비록 박해일이 자꾸 오버랩 되기는 했지만 나름의 훌륭한 연기를 선보였다. 특히 경찰서에서 수줍은 듯한 미소를 지으며 범행을 자백하는 장면이 일품이었다.

The Italian Job[1969]

요즘 60~70년대 영국 영화를 즐겨 보다보니 이 시기에 Michael Caine이 없었더라면 영국 영화계는 – 특히 액션물이나 스릴러물 – 어떻게 버텨냈을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그에 대한 의존도가 절대적임을 알게 되었다. 1967년부터 1년에 한 번씩 나온 Harry Palmer 삼부작, 형의 죽음에 잔인하게 복수극을 펼치는 Get Carter, 그리고 지금 소개하는 The Italian Job 에 이르기까지 이 시기에 James Bond 역만 안했다 뿐이지 웬만한 액션물 캐릭터는 전부 그의 차지였던 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감옥에서 갓 출옥한 Charlie에게 자동차 사고로 죽은 친구의 미망인이 소포를 하나 전해준다. 그것은 이탈리아의 FIAT 회사 소유의 400만 달러어치 금을 강탈할 수 있는 계획이 담긴 가방이었다. 굴러들어온 행운을 거머쥐기 위해 그는 같은 감옥에 있었던 암흑계의 거물 Bridger씨에게 재정적 지원을 부탁한다. 사업성을 검토하고 가능성을 확인한 Bridger씨는 사업을 승인하고 Charlie는 여기저기 사람들을 끌어 모으고 필요한 장비들을 갖추기 시작한다.

그가 계획하고 있는 것은 금괴호송차량을 고의로 유발시킨 교통체증에 가둔 뒤 금을 강탈하여 기동성이 뛰어난 미니 쿠페로 빠져나와 스위스까지 도망친다는 것. 이탈리아 마피아의 위협도 있었고, 팀원들 간의 반목도 있었지만 Charlie의 배짱과 순발력으로 마침내 금괴를 탈취하고 일행은 스위스로 향하는 산맥을 버스로 건너며 신나게 샴페인을 터뜨린다. 과연 이들은 이 대담한 작전을 성공시킬 것인가?

이 작품은 비전형적인 캐릭터로 가득 찬 전형적인 영국식 블랙코미디다. 범죄자들은 마치 귀족이라도 되는 마냥 멋진 양복 차림에 깔끔한 매너를 지닌 이들이다. 범죄 집단은 마치 대기업의 사무실처럼 깔끔한 환경에서 비서를 거느려가며 범죄를 모의하는 회의를 진행한다. 반면에 감옥의 간수들은 죄수인 Bridger가 마련해준 집에 살면서 그의 몸종이나 다름없는 비굴한 직장인들일뿐이다. 냉소적인 유머의 하이라이트는 Charlie 일행이 이탈리아에서 금괴를 빼돌리는데 성공한 순간이다. 그 순간 Bridger가 갇혀 있던 감옥에서는 죄수, 간수 할 것 없이 작전의 성공을 축하하며 환호하며 Bridger를 칭송한다. 통상적인 권선징악의 영화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장면이다.

잠시 옆길로 새자면 이 영화의 제작목적은 어쩌면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인류의 탐욕의 역사의 진실을 일깨워주고자 함일지도 모른다. 이른바 근대 이전의 역사에서 사실 이 영화에서 보는 것과 같은 약탈행위는 범죄가 아니었다. 대부분의 영화나 소설에서 보는 것과 달리 악랄한 해적과 정당한 공권력은 다른 집단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한 나라의 무역선은 다른 나라의 무역선을 보면 얼마든지 약탈을 감행하였고 그 다른 나라 역시 그러했다. 그래서 심지어 이들은 해적선을 정당한 포로로 대우하기까지 했다.

왕실은 겉으로는 해적행위를 비난하였지만 그들의 해적행위에 투자해 배당금을 받기까지 했다. 합법적 수탈행위와 불법적 수탈행위 사이에는큰 차이가 없었던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비추어보면 컬럼버스는 사실 위대한 모험가가 아닌 약탈자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를 위대한 영웅으로 조명하고 있는 역사에 비추어 보면 Charlie는 영국의 국익을 위해 이탈리아의 금괴를 탈취해온 신중상주의적인 영웅이고 Bridger는 그에게 투자한 왕실이다. 그러니 사실 감옥에서의 환호는 당연한 것이었다.

Mark Walberg 주연으로 리메이크된 작품에서도 그렇듯이 역시 이 영화의 볼거리는 (영화 덕에 매출이 엄청 뛰었을) 미니 쿠페의 활약이다. 좁은 이탈리아 소도시의 골목을 누비는가 하면 심지어 건물의 옥상, 하수관, 그리고 강둑까지 종횡무진 하는 미니 쿠페의 카레이스는 대형차량으로 저돌적으로 직진하는 미국영화의 카레이스 장면과는 또 다른 독특한 맛의 카레이스 장면을 연출하여 영화의 재미를 배가시켰다. 그러다보니 쓸데없는 스턴트까지 선보이고 있기는 하지만…

결론적으로 이 작품은 Get Carter와같이음울하고 비정한 범죄 액션물이라기보다는 Austin Powers가 재현하려고 했던 흥청망청거리는 60년대 영국의 분위기를 고스란히 담아내면서 동시에 약간의 애국주의적 정서를 담고 있는 액션 코미디물이라 할 수 있다.

** 그들의 범죄가 성공했는지 실패했는지의 여부를 알 수 없는 엔딩 장면은 권선징악적인 반전을 선보이던 일링 스튜디오의 블랙코미디와는 또 다른 관점을 선보이고 있다. 특히나 황금을 선택할 것인가 생명을 선택할 것인가의 갈등을 시각적으로 표현했다는 점에서 너무나 멋진 상황설정이 아닌가 싶다.

자본주의 경영학 지침서, American Gangster

<주의 : 스포일러 덩어리>

American Gangster는 일종의 경영학 지침서다. 할렘의 흑인 보스의 보잘 것 없는 운전사가 어떻게 거물로 성장하였는지 그리고 어떻게 인재를 활용하여 자기 인생을 개척해나가는지에 대한 케이스스터디용이라 할 수 있다.

영화는 흑인임에도 전설적인 마약상으로 활약하였던 실존인물 Frank Lucas 의 인생을 다루고 있다. Denzel Washington 이 맡은 이역은 – 개인적으로는 Jamie Foxx가 이 역을 맡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 영화 ‘대부’의 Vito Corleone와 같은 일가를 이루고 싶었던 야심찬 인물이었다.

죽은 보스의 구역을 물려받은 Frank 가 채택한 경영(?)방식은 바로 중간상을 배제한 직거래를 통한 비용절감이었다. 그는 베트남전이 한창이던 시절, 베트남에서 생산되던 마약을 중간상이 아닌 군인들을(!) 이용하는 획기적인 방법을 통해 경쟁력을 확보한 것이다. 당시 막 골목길을 차지하기 시작한 할인점이나 양판점에서 채택한 소매업의 구매파워를 마약거래에 이용했다는 점에서 그는 어둠의 경영자라 할 수 있었다.

한편으로 결코 화려한 옷차림이나 과시적인 거드름으로 자신을 내세우지 않음으로써 수사당국으로부터는 철저하게 미지의 인물이었다. 이것은 또 하나의 경영학이었다. 적이나 경쟁자에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음으로써 그렇지 않을 경우 발생되는 기회비용을 최소화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결국 그는 한 권투시합장에서 실수로 화려한 모피 차림으로 나타나 그를 뒤쫓는 Richie Roberts(Russell Crowe) 라는 강직한 형사와 그에게 돈을 뜯어내려는 더러운 마약수사대에게 동시에 존재를 노출시키고 만다. Richie Roberts의 끈질긴 수사 끝에 그와 그의 가족들은 줄줄이 교도소로 향한다.

Frank는 수사당국 역시 썩을 대로 썩었다고 생각했기에 Richie 역시 매수하려 든다. 하지만 강직한 Richie는 – Russell Crowe 자체가 좀 그렇게 생겼다. 말 안 듣게… – 이에 굴하지 않았고 결국 Frank를 통해 경찰의 비리 커넥션까지 밝혀내는 개가를 올린다.

세월이 흘러 Richie는 변호사가 되었고 이번에는 Frank의 변호사가 되어 그의 형기를 줄여준다. 또 하나의 경영학이다. 사람은 어떻게 만날지 모르니 인간관계를 잘 가져라. 줄거리만 들어도 Frank Lucas의 인생이 무척이나 드라마틱했음을 잘 알 수 있다.

많은 감독들이 연출에 탐을 냈을 것이고 그 공은 명감독 Ridley Scott에게 돌아갔다. 당연히 영화는 일단 기본은 한다. 탄탄한 연기력을 가진 주연배우들, 끈적끈적한 시간과 공간, 흡인력 있는 에피소드 들이 나무랄 데가 없다.

문제는 짧은 러닝타임에 한 드라마틱한 인물의 생애를 담으려다보니 여러 디테일이 생략되었다는 점이다. Denzel Washington 의 연기는 여전히 듬직하지만 비천한 인물에서 거물로 성장하기까지의 드라마틱한 변화를 담기에는 솔직히 처음부터 너무 귀티가 났다. 그의 아내와의 사랑이랄지 Richie와의 타협과정도 지나치게 생략된 느낌이다. 만약 마음먹고 대부처럼 3부작으로 기획되었더라면 이러한 문제는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북한은 탐크루즈의 적?

비가 참 지저분하게 오네요. 이런 날은 그저 방구들에 몸을 파묻고 만화책 스무 권 쌓아놓고 노는 것이 최고죠. 여기저기 예전 발자국을 뒤지다보니 2002년에 썼던 글이 있어서 퍼다 나릅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정말 글발 후지네요.

요즘 매주 일요일 저녁이면 MBC스페셜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연속기획으로 “미국”에 대한 관찰기를 방영하고 있다. 찾아서 보진 않았어도 채널을 돌려 나오면 찬찬히 보는 편이었는데 의외로 내 자신이 미국에 대해 아는게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만큼 신선한 기획이 돋보였다. 미국을 “절대악”이나 “절대선” 어느 한쪽으로 몰지 않으면서도 우리와 다르다는 다양성의 원칙에 기초한 객관적 시각이 돋보이는 프로그램이다. 사실 절대악이라는 시각으로는 절대 다룰 수 없는 노릇이지만 그동안의 “선진국 컴플렉스”로 일관하던 구미선진국에 대한 겉핧기식 프로그램과는 다르다는 면에서 높이 사줄만하다.

특히 어제 방영했던 ‘헐리웃의 신화’는 영화라는 대중문화를 소재로 했다는 점에서 특히 흥미로웠는데 제작진이 파고들고자 했던 핵심주제는 헐리웃과 펜타곤과의 밀월관계이다. 카메라는 진주만 공습에서부터 시작된 미군부의 ‘프로패간다’로서의 영화의 역할에 주목하게 되었고 – 구소련은 건국부터 인지하고 있었던 – 이후 촬영협조를 미끼로 어떻게 헐리웃 영화의 의식형성에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이미 사상이 좀 삐딱한 사람이라면 의례 짐작할 수 있듯이 이 프로그램에서는 미국식 ‘배달의 기수’ 영화의 제작에 시나리오 작업부터 펜타곤이 깊이 관여하고 있음이 최근 공개된 국방부 문서나 현 펜타곤의 헐리웃 담당관의 인터뷰를 통해서 밝혀냈는데 특히나 흥미로운 사실은 우리가 추억의 80년대 영화로 기억하고 있는 Top Gun의 주적은 원래 ‘북한’이었다는 사실이다.

펜타곤은 70년대의 반전분위기 이후 악화일로를 걷고 있던 군에 대한 일반의 이미지를 개선하기 위한 수단으로 영화 탑건을 선택하였고 희대의 섹시남 탐크루즈와 베를린의 멋진 테마곡으로 무장한 이 전형적인 ‘미국판 배달의 기수’는 그야말로 대히트를 기록하며 당초 펜타곤의 의도를 150% 달성하는 수확을 거두었다(다음해 사관학교 입학자가 전년 대비 5배 증가하였다 한다 -_-;). 그런데 시나리오 작업부터 밀착개입하였던 펜타곤은 시나리오 팀이 당시 화해 분위기에 있던 북한을 주적으로 설정한 사실을 알고 이를 지적 소련으로 바꾸었다는 사실이 탑건의 시나리오 작가와의 인터뷰에서 밝혀진 것이다.

참 재미있기도 하고 씁쓸하기도 한 사실이다. 우리가 아무런 생각없이 웃으며 즐기는 영화, 음악 등의 대중문화 – 특히나 구미의 대중문화 – 의 뒷면에 숨겨져 있는 그 문화적 오만함, 인본주의에 대한 무신경이 우리를 당황스럽게 하는 장면이다. Take My Breath Away의 뮤직비디오에 삽입된 우리의 주인공 탐크루즈의 멋진 기관총 난사에 의해 폭파된 전투기에 탑승한 조종사가 북한군일 수 있다는 사실은 ‘악의 축’이면서도 ‘대중문화의 축’인 미국의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굴욕감과 무력감을 느끼게 한다.

얼마전 새 007 시리즈에 북한군 장교로 출연을 제의받은 차인표의 행동은 그런 면에서 소극적인 저항이라고 할 수 있을까? 우리가 메이저 레코드사의 상업적 의도나 헐리웃 영화의 친미적인 프로파간다에 저항하면서 – 적어도 물들지 않으면서 – 서구 대중문화의 단맛만을 향유할 수 있을까?

그러한 시도는 영화계에서나 음악계에서 주로 ‘인디’라는 형용사가 붙은 생산자들에 의해 주도되기는 하였다. 영화에는 Michael Moore 와 같은 반골이 있고 음악계에서도 The Clash 등 소위 좌파 밴드들이 예술적 성취와 사상적 성취를 동시에 이룬 케이스가 있지만 이 역시도 소위 메인스트림이라는 거대한 괴물과 상대하기에는 너무 왜소한 다윗일 뿐이다. 또한 사실 나 자신도 매사에 그렇게 심각하게 문화를 즐기고 싶은 것도 아니다. 다만 일상을 자연스럽고 꾸밈없이, 그러면서도 “정치적으로 올바른(!)” 그런 영화와 음악을 즐기고 싶을 따름이다.

너무 거대한 소망일까?

결국은 ‘미국만세’, ‘자본주의 만세’라는 자가당착식 지뢰를 피해 가는 소극적인 소비행태를 취할 수 밖에 없는게 나의 한계인듯 하다. 🙂 

살파랑 (殺破狼 SPL, 2005)

피비린내와 살 냄새 진하게 나는 ‘싸’나이들의 홍콩 느와르 액션영화다.

영화는 처절한 교통사고현장을 비추면서 시작된다. 암흑계의 거두 왕보(홍금보)를 평생 감옥에서 썩게 할 재판의 중요한 증인이 탄 차였다. 증인과 그의 부인은 즉사하였고 함께 타고 있던 형사 진국충(임달화)과 증인의 딸은 살아남는다. 왕보는 결국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나고 진국충은 뼈를 깎는 분노에 떨며 복수를 다짐한다. 그로부터 3년후, 암으로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는 진국충의 공직생활도 얼마 남지 않고 팀장 직도 새로 부임한 마장관(견자단)에게 건네줄 판이다. 그 와중에 그들이 왕보의 조직에 심어두었던 형사가 살해당한 채 발견되고 이를 몰래 찍은 필름을 손에 얻게 된다. 하지만 불행히도 왕보의 폭행 장면에 이어 결정적인 한 방은 다른 하수인의 짓임을 알게 된다. 왕보를 살인죄로 잡아넣기 위해 진국충 팀은 증거를 조작하려 시도하고 이를 안 마장관은 그들과 충돌한다.

이 작품은 확실히 보다 진보한 홍콩 느와르 액션의 현 주소를 말해주고 있다. 많은 영화에서 조연과 조감독으로 잔뼈가 굵은 엽위신 감독은 블루톤의 현란한 영상, 유려한 선의 호쾌한 무술, 군더더기를 배제한 명확한 갈등구조(그래서 어설픈 면도 있지만), 이를 받쳐주는 다소 과장되고 연극적이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극의 호소력을 불어넣는 연기 등을 총지휘하며 탐미주의적인 액션 영화의 가능성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 특히 견자단의 박력 넘치면서도 물 흐르듯 유연한 무술연기는 정말 오랜만에 브르스리의 포쓰가 느껴질 정도로 매력만점이다. 프라이드, UFC 등 신종 격투기의 세계에 익숙한 이들이라면 그와 홍금보, 오경 등이 벌이는 이종격투기를 결합한 현란한 무술연기에 환호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막판에 상상을 초월하는 반전은 다소 작위적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지만, 그럼에도 잠시 멍해질 정도로 충격적이고 감독의 삶에 대한 철학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는 장면이다. 2005년 개봉되어 흥행과 비평 모두 성공을 거두었고 2편까지 제작되었다.

The Bourne Ultimatum(2007)

The Bourne Ultimatum (2007 film poster).jpg
The Bourne Ultimatum (2007 film poster)” by International Movie Poster Awards (Direct link). Licensed under Wikipedia.

아마도 개인적으로 시리즈로 개봉된 영화중에서 유일하게 모든 작품들을 개봉관에서 감상한 케이스가 아닌가 싶다. 제목도 ‘본 : 최후통첩(The Bourne Ultimatum)’인데다가 이제 그 없이 다른 Jason Bourne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확실히 팬들의 뇌리에 자리 잡은 Matt Damon이 더 이상의 Bourne은 없다고 선언했으니 더더욱 그러하다.

Robert Ludlum의 베스트셀러에 기초하긴 했지만 기억을 잃은 스파이라는 기본줄기만을 남겨두고 새롭게 각색되어 2002년 개봉되었던 The Bourne Identity는 나름 신선한 매력이 있긴 했지만 그저 이전의 007유의 블록버스터형의 스파이 물과는 다른 안티히어로형의 스파이물이 등장했다는 – 선배 Harry Palmer가 있긴 하지만 – 사실만 인지시키는 수준이었던 것이 사실이다. 어떤 면에서는 Geena Davis가 호쾌한 액션을 선보였던 1997년작 The Long Kiss Goodnight의 남성 버전 정도가 아닌가 생각도 들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2004년 개봉된 The Bourne Supremacy는 이러한 ‘짝퉁’ 의혹을 일소한 청출어람의 속편이었다. 전편이 고뇌하는 Jason Bourne이 자신의 정체도 몰라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면 이제 이 작품에서는 악이 오른 Bourne의 액션이 제대로 펼쳐지기 때문이다. 특히 느닷없는 연인 Marie의 초반의 비명횡사는 Bourne뿐만 아니라 관객들까지 황당했을만한 과감한 시도였고, 이 뼈아픈 분노가 Bourne의 전투력을 몇배 증가시키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리고 2007년 개봉된 The Bourne Ultimatum은 이전의 두 작품 모두를 합친 것보다 더 강렬한 액션씬을 선보이며 Bourne 시리즈의 종결을 자축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자신이 킬러였다는 사실을 깨달은 한편으로 이를 후회하는 Bourne의 방어적인, 그럼에도 전광석화 같은 무술솜씨가 관객들에게 묘한 쾌감을 불러일으킨다. 화장실에서 한때 동료였을 암살자를 목 졸라 죽이고 나서 순간적으로 비치는 그의 자괴감 섞인 표정은 ‘살인면허’가 있다고 자랑하던 007시리즈에서는 절대 볼 수 없는 Bourne 시리즈만의 장점이기도 하다. 또 한편으로 이전 작품과 같이 첨단무기와는 거리가 먼 Bourne의 임기응변적인 무기를 보는 것도 매력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매력적인 요소는 바로 마치 현장에 있는 것같은 착각이 느껴질 만큼 긴박감 넘치는 핸드헬드 영상으로 잡아낸 각종 추격장면이다. 런던의 워털루역, 모르코의 탕헤르, 그리고 뉴욕 한복판에서 펼쳐지는 추격신은 완급의 조절이 완벽하게 이루어진 명장면들이다. 사실 거의 모든 장면들이 핸드헬드로 찍은 것들인데 출연진들의 대화장면에서 흔들거리는 숄더샷 너머로 비춰지는 반쯤 가린 얼굴과 같은 장면들은 숨 가쁜 액션씬에 감추어진 또 다른 감칠맛 나는 볼거리이기도 하다.

‘궁극적으로’ 이 영화가 스파이물의 걸작으로 자리매김하게 될 미덕은 아이러니칼하게도 스파이물 자체에 대한 ‘수정주의적인 자기성찰’이다. 냉전이 끝나 자본주의가 전 세계를 지배하는 작금의 현실에서 북한이나 이란 같은 몇몇 잔챙이를 제외하고는 더 이상 ‘현존하고 분명한 위험’을 찾기 어려운 이 시점만큼 Bourne과 같은 캐릭터가 어울리는 시점이 있을까싶을 정도다. 그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외부의 적이 아닌 내부의 적을 향해 이빨을 드러냈고 그 결과 자신의 전 직장 CIA의 불법적인 암살 작전의 거대한 음모를 밝혀내고 만다.

한때 드러내놓고 자랑삼아 사람을 죽이던 스파이물들이 모두 이 작품에서 까발려지는 불법적인 블랙브라이어 작전의 일환이거나 짝퉁임이 밝혀졌으니 이건 흡사 마술사의 영업상의 기밀인 마술 속임수를 공개한 거나 진배없다. 그리고는 Bourne은 깨끗이 양심선언 해버렸으니 어찌 보면 이 작품은 Bourne 시리즈의 종결뿐 아니라 스파이물의 종결까지도 선언해버린 것이다. Clint Eastwood가 서부영화 가게 문을 닫게 한 장본이라면 Matt Damon은 스파이물의 가게 문을 닫게 하는 장본인이 될 확률이 농후해졌다. 지난번 Syriana까지 연타석 홈런이다.

결국 Sunday Bloody Sunday 등 사회비판적인 시각을 견지해오던 영국 감독 Paul Greengrass가 헐리웃에 건너와서 맡은 장르가 흥미롭게도 스파이물이었는데 그 작품이 오히려 장르의 해체를 주장하는 꼴이니 딴에는 그가 트로이의 목마일지도 모를 일이다. 헐리웃 스파이물을 무력화시키라는 특명을 받고 온 영국 ‘스파이’ 감독. -_-;; 비록 본인은 상업적 장르니만큼 정치적인 의미는 부여하지 말라고 했지만 그 멘트 또한 정치적인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정도로 이 영화가 주는 메시지는 적어도 장르적으로는 심각하다는 생각이다.

어쨌든 이번 Bourne 시리즈는 역대 Bourne 시리즈 중에서도 최고의 흥행성적을 세웠으니 당연히 제작사 입장에서야 당연히 다음 편 욕심이 날 터인데 그게 그리 쉬울지는 잘 모르겠다. Jason Bourne 이 다른 누군가의 얼굴로 성형수술을 하고서 활동한다는 The Bourne Surgery 정도가 나오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그렇게 되면 시리즈 모두를 극장에서 본 개인적인 기록은 깨지겠지만….

* 엔딩타이틀에 흐르는 Moby의 Extreme Ways는 최고의 엔딩곡 중 하나이다. 마치 화룡점정과 같은 곡이었다. 한편으로 Moby의 곡이 주제곡이라는 사실은 좀 비틀어 생각하면 의미심장하기도 하다. Moby는 사회비판적인 메시지의 곡을 자주 선보여 한때 그의 곡들은 ‘사회비판적인 이들이 죄책감 없이 클럽에서 춤출 수 있는 춤곡’이라는 평을 듣기도 했다. 그러니 ‘사회비판적인 이들이 죄책감 없이 극장에서 스파이물을 감상할 수 있는 영화’에 이 이상 딱 어울리는 아티스트가 있겠느냐 말이다.(비틀어도 너무 비틀었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