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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banon(2009)

Buried 란 영화가 있다. 카메라는 지독하게도 처음부터 끝까지 산채로 관속에 묻힌 한 사나이의 모습만을 앵글에 담고 있다. 주인공이 미국의 이라크 침공 이후 한 미국회사의 직원으로 이라크에서 일하다가 이라크 저항세력에 납치당해 관속에 묻혔다는 설정이었다. 이 집요하리만치 극단적인 폐소공포증을 자극하는 영화의 주인공은 어쩌면 우리의 자화상일지도 모른다. 굳이 관속이 아니더라도 탈출하지 못하는 어떠한 가혹한 현실에 놓인 우리. 그 원인은 자기 자신 때문일 수도, 가족 때문일 수도, 국가 때문일 수도 있다. 사실 이 사회는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이상으로 어떠한 거대한 시스템에 의해 강제되고 그에 따라 개인이 행동하는 사회라는 점에서, 우리는 어쩌면 이 세상에 “묻혀” 지내는 것일지도 모른다.

1982년 6월 6일 이스라엘 방위군은 레바논 남부를 침공한다. 영화는, 뿌리 깊은 중동 및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간의 갈등에서 배태된 이 전쟁에 배치된 이스라엘 탱크 병들의 시선을 담고 있다. 탱크 속에 들어앉아 보병들의 전투를 뒤에서 지원해주는 역할을 하는 네 명의 군인들. Buried 의 주인공이 느끼는 것만큼은 아니지만 탱크라는 좁은 공간에서의 폐쇄적이고 답답한 분위기는 서로의 존재가 귀찮으리만큼 눅진하고 짜증스럽다. 카메라의 앵글은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을 제외하고는, 시종일관 조준병 슈물릭이 바라보는 조그만 조준망원경을 통해서만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 시야는 무척 좁지만 그러한 때문에 관찰대상이 주는 인상은 더욱 강렬해진다. 죽어가는 당나귀의 눈물이 선명히 보일만큼 말이다.

출발 후 얼마 되지 않아 비행기 공습이 지나간 곳이므로 소풍이나 다름없으리라는 소대장의 말은 허풍이었음이 곧 드러난다. 저항세력은 여기저기서 튀어나오고, 탱크는 시리아 군인으로부터 미사일 공격까지 받는다. 그럼에도 탱크병들은 오물과 담배꽁초가 뒤섞여 있는 탱크 안에서 빠져나가지 못하고 오히려 시체의 보관소로, 시리아 군인의 감옥으로 둔갑하기도 한다. 결국 자신들의 위치가 시리아군의 수중에 놓여있음을 알고 한밤중에 탈출을 기도하면서 이 시작도 모르고 끝도 모르는 전쟁에서의 단순기능공들의 공포는 극에 달한다. 왜 그곳에 갔어야 하는지, 왜 민간인까지도 공격해야 하는지를 모르는 그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 가해자임에도 불구하고 –  “탱크 속에 묻힌” 시스템의 희생자에 불과한 것이었다.

마지막 장면의 넓은 해바라기 밭이 인상적이다.

‘탱크’의 어원

사실 여기에 기적은 없다. 하데자는 예로부터 내려오던 전통을 현대적으로 발전시킨 것이다. 인도의 농촌과 도시 외곽에서는 지금도 곳곳에서 버려진 연못을 볼 수 있다. 19세기 초반까지 인도의 대부분 지역에서는 계곡 아래에 진흙을 바른 얕은 저수지를 만들어놓고 몬순 기간에 내린 빗물을 모아 농업용수로 이용했다. 인도에서는 이 저수지를 ‘탄카tanka’라고 불렀고, 이 단어가 영국에 가서 ‘탱크tank’라는 외래어로 정착했다.[중략]
그러나 서구식 모델을 기반으로 한 관개체계가 인도 전역에서 실패하고 농민들이 지하수를 얻기 위해 점점 더 땅속 깊이 파 들어가는 오늘날, 구시대의 유물인 탄카가 다시 주목을 받기 시작하고 있다.[강의 죽음, 프레드 피어스 지음, 김정은 옮김, 브렌즈, 2010, pp433~435]

‘강의 죽음’ 읽기가 거의 막바지로 가고 있다. 소름끼치는 재앙에 대한 부분을 넘어서 이제 ‘그렇다면 과연 대안은 무엇인가’하는 부분을 배회하고 있다. 작가는 대안으로 대규모 관개시설 대신 고대의 지혜를 본받자고 주장하고 있다. 마을단위에서 빗물을 받아 재활용하는 이 방식은 현대인이 보기에는 원시적으로 보이지만 그것이야말로 ‘지속가능한’ 물 확보책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나 역시 생태적으로 조화로운 이러한 방식이 도시와 농촌에서 적용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생각이 든다.

어쨌든..

인용한 부분은 또 다른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인용한 것이다. 즉, 우리가 당연히 영어로 알고 있었던, – 물론 나같이 무식한 것이나 그랬을지도 모르겠지만 – ‘탱크’라는 단어가 사실은 인도의 언어였고, 바로 물 부족을 해결할 대안이라는 사실이 흥미로웠기 때문에 인용했다. 실제로 지금도 우리나라 고지대 동네에 보면 옥상에 노란 탱크를 만들어두어 갈수기에 사용하는 사례가 적지 않으니 과거 ‘탄카’의 모습이 일부 남아있는 셈이다. 물론 그 안에 채워지는 것은 빗물이 아니라 수돗물 내지는 지하수다.

온라인에서 ‘탄카’의 흔적은 찾아보기 어렵다. 지식의 보고 위키피디어마저 ‘탄카’에 대해 “Tanka (reservoir), as found in India”라 적혀 있을뿐 아무도 본문은 채워놓지 않았다. 오히려 tank를 검색했더니 우리가 잘 아는, 무시무시한 전쟁무기 탱크에 대한 장황한 설명이 나온다. 물론 같은 어원이니 당연한 이야기지만, 한편으로 인도 시골에서 평화적 목적으로 만들어놓은 저수지의 이름이 바다 건너 서양에 가서 전쟁무기의 이름으로 발전(?)한 양상을 보고 있자니 쓴 웃음이 입가에 번진다.

끝까지 읽고서 독후감을 다시 한번 쓸까 생각중이지만 결국 ‘강의 죽음’은 우리가 자연의 정복자 행세를 하며 자연을, 특히 강을 지배하려 할 때에 어떠한 불행을 자초하는지를 잘 설명해주고 있다. 뉴올리언스 지방의 카타리나 피해가 그 사례인데, 물론 직접적 원인은 부시 정부의 무능력하고 미흡한 대처였지만 근저에는 애초에 범람지역이었던 곳에 도시를 세운 인간의 아집이 그 원인이기도 하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저자는 그러므로 자연에 저항하거나 정복하려 하지 말고 자연에 순응하여 살아온 옛사람의 지혜에 귀를 기울이라고 충고하고 있다. 대규모 저수지가 아닌 주거에 근접한 소규모 저수지가 훨씬 유용하다는 것이다. 더 근본적으로 따지고 들어가자면 그 체제의 여부를 떠나서 현대경제의 대량생산/대량소비의 메커니즘에 대한 반성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무정부적’으로 강을 파괴했고 사회주의는 ‘계획적’으로 파괴했을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