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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기업은 이윤을 내면 안 된다?

지난번 “美모기지 시장의 두 거인, 법정관리 임박?” 에서 나는 오바마의 프레디맥/패니메에 관한 발언을 인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논평한바 있다.

언뜻 명쾌한 논리인 것처럼 보이나 실은 수익성 사업을 영위하는 공기업은 꽤 많으며, 아무리 자유방임을 표방하는 정부일지라도  시장을 크게 교란시킬 정도 파괴력을 가진 대마(大馬)를 어떤 식으로든 그대로 방치하지는 않았다는 점에서 지나치게 교조적(?)이거나 단순하거나 또는 순진한 발언으로 느껴진다.

다음은 인용했던 오바마의 발언

민주당의 대권후보 오바마 의원은 그 회사들이 “기묘하게 섞여 있다”고 말하면서 “만약 그들이 공기업이라면 이윤을 내는 사업을 하면 안 되었고, 만약 그들이 사기업이라면 우리는 그들을 구제해주지 않아야 한다.”
Sen. Barack Obama, the Democratic nominee, has said the companies are a “weird blend” and that “if these are public entities, then they’ve got to get out of the profit-making business, and if they’re private entities, then we don’t bail them out.”

이 글에 대해 친절한 답변 남겨주셨던 Inigo님은 다음과 같이 언급하셨다.

전 (종류에 따라 다르겠지만) 대부분의 공기업은 ‘경제적’ 이익을 거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때때로 ‘회계적’ 손실을 보는 건 너무 당연하다고 생각하구요(KBS).

이상에서 다음과 같이 간단히 두 가지 기본적인 생각을 정리할 수 있다.

1) 공기업은 이윤을 내는 사업을 하면 안 된다.(Inigo님은 “종류에 따라 다르”다고 전제함)
2) 사기업은 구제해주면 안된다.

이는 비단 오바마뿐만 아니라 거리를 오가는 일반적인 시민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일 것이다. 특히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재벌이 망쳐놓은 부실기업에 수많은 공적자금이 투입되는 꼴을 묵묵히 봐야만 했던 우리나라 서민들은 2번 생각에 상당수가 동의하지 않을까 싶다.

어쨌든 간결하고 깔끔한 표현으로 명성이 높은 오바마이니만큼 그의 발언의 한 부분을 맥락을 고려하지 않고 이렇게 뚝 떼어내어 그를 평가하는 것은 그에게는 억울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비단 이 발언을 다시 언급하는 이유는 비단 오바마의 경제에 대한 무지를 탓하고자 함이 아니라 그의 발언을 계기로 일반화되어 있는 위와 같은 두 가지 생각을 다시 반추해보고자 함이다. 오바마씨 이해하세요~

공기업은 이윤을 내는 사업을 하면 안 된다

모르긴 몰라도 자본주의 내에서 국가의 공공적 역할을 지지하는 체제내 좌파들도 상당히 동조할 발언이 아닐까 싶다. 공기업(그가 영어로 표현하길 public entities)의 정의에 대해 우선 한번 돌아보자.

사기업(私企業)과 대조적인 기업 형태이다. 공기업의 목적에 관해서는 ① 공기업이라 할지라도 다른 사적 기업(私的企業)과 똑같이 이윤추구를 직접 목적으로 한다는 설(說)과, ② 공기업의 직접적인 목적은 이윤이 아니라 생산이나 서비스에 있다는 설이 있다. 대체로 ②의 설이 통설(通說)로 되어 있으나,[하략]

이 정의가 맘에 든다. 어떤 공공적 기능이니 뭐니 하는 잔가지붙이지 않고 간단하게 “사기업과 대조적인 기업 형태”라고 정의하고 있다. 즉 공기업은 사기업의 형태를 띰으로서 비효율성을 초래하는 재화나 용역에 대해 공공이 소유하는 형태를 띤다. 이때 소유의 주체는 국가, 지방자치단체 또는 연기금이나 각종 국가투자기관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정의를 염두에 두고 공기업의 역할을 되돌아보자. 오바마는 공기업이 “이윤을 내는 사업을 하면 안 되었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하지만 현실은 이와 상당히 다르다. 사실은 자본주의 발달 단계에서 수많은 이윤창출기업이 공기업의 형태를 띠었다. 이는 시급히 육성하여야 할 필요가 있는 유치산업에 대해 국가적인 차원에서의 보조와 지원을 유지하여야 할 필요성에 의해서였다. 이는 ‘시장의 실패’로 말미암아 불가피하게 국가가 공급하여야 했던, 그리고 Inigo님의 의견처럼 회계적 손실을 감수할 수 있는, 이른바 사회간접자본(infrastructure) 등 공공서비스와는 다른 성격을 가진다.(주1)

장하준 교수의 ‘나쁜 사마리아인’을 보면 이러한 공기업의 역사를 상술하고 있다. 책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포항제철을 비롯하여 싱가포르의 싱가포르항공, 프랑스의 르노, 독일의 폭스바겐, 브라질의 페트로브라스 등 전 세계에서 (이윤을 엄청나게 창출하는) 수많은 일류 기업들이 공기업이거나 공기업이었다. 다만 이 중 여러 기업들은 1980년대 신자유주의의 맹공에 따라 민간에 매각되기도 했다.

이쯤에서 왜 자본주의 국가는 ‘시장의 효율’대신 공기업을 선택했는지를 다시 한번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장하준 교수는 경제적 상황과 기술의 격차가 현저한 국가들 사이에서 자유무역 또는 시장의 자유를 통한 경쟁을 부르짖는 것은 미취학 아동이 경쟁력을 갖게끔 학교도 보내지 말고 바로 일터로 보내 일을 시키자는 주장과 진배없는 논리라고 주장한다. 이에 따라 (근대화에 성공한) 대다수의 국가들은 경제발전기에 유치산업 보호를 위해 노력했다.

결정적으로 이러한 유치산업 육성론의 이론과 실천을 다진 나라는 – 꼭 공기업의 형태는 취하지 않더라도 – 오늘 날 예외 없는 자유무역을 주장하는 영국과 미국이다. 영국은 18세기 무렵 자국의 면직물 산업을 육성하기 위해 고율의 관세, 수입조건 제한 등 보호무역을 강화하였을 뿐 아니라 노예무역을 통한 노동인력 충원, 군사력을 동원한 시장의 개척 등 무차별적이고 폭력적으로 자국의 산업을 보호하였다. 그리고 유치산업이란 표현은 미국의 초대 재무부 장관 알렉산더 해밀턴의 작품이다.

요컨대 “이윤을 내는 공기업”은 자본주의 역사에서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특히 2차 세계대전 이후 경제 강국이었던 미국을 제외하고는 대다수의 나라들이 강대국의 일정정도의 용인 하에 자국의 산업을 일정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한 노력을 경주하였고 그 핵심적인 거시 전략은 수입대체 전략/수출지향 공업화 전략 등이었고 그 플레이어들은 자본과 기술의 축적이 일천한 민간기업의 경쟁력을 능가하는 공기업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공기업들이 ‘이윤을 내지 않으면’ 그냥 망하는 것이다.

이제 다시 왜 공기업은 이윤을 내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잠깐 알아보자. 이는 위에서 잠깐 언급한바 공공서비스를 제공하는 공기업에 대한 일반인들의 선입견이다. 즉 자본주의 사회일지라도 비배제성과 비경합성으로 인해 시장이 적절하게 제공할 수 없는 도로, 통신, 국방, 의료, 치안과 같은 공공서비스는 국가에 의해 제공되었다. 이중 일부는 국가기구 그 자체이기도 했지만 일부는 공기업의 형태를 띤다. 요즘 들어 공기업화된 통신, 철도, 체신 등이 대표적인 예였다.

그리고 이들 기업들은 실제로 시장가격보다 낮은 가격에 ‘수요(demand)’가 아닌 ‘소요(needs)’에 부응하는(주2) 서비스를 제공하였다. 이를 통해 지불능력이 없는 저소득층들은 생활수준을 유지할 수 있었다. 임금이 형편없이 낮아도 국가에서 의료보험을 제공하기에 그나마 의료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것이었다. 이러한 서비스를 민영화함으로써 이윤을 창출하겠다는 것에 요즘 사람들이 분노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공기업의 이윤창출 불가론의 정서다.

그 정서에 공감하는 한편으로 그 이면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자본주의에서의 공공서비스는 – 공기업의 의한 것도 마찬가지거니와 – 소위 복지의 실현이라는 국가목표에 부응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결정적으로 자본주의 사기업이 임금수준을 낮게 유지하여 이윤을 초과 창출할 수 있게 만드는 기제기도 하다. 국가에서 의료서비스를 제공하지 않았다고 가정해보라.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임금으로 건강도 유지할 수 없다는 사실에 분노하거나 반항하였을 것이다. 그것은 자본주의 시스템에 대한 위협이다. 모든 것은 사적(私的) 시장에 맡기자는 이에게 그럼 너희가 주는 임금에 노동자들의 의료비용도 포함시키라고 주문한다면 질색을 할 것이다. “그런 것은 국가가 알아서 해줘야지!” 하면서 말이다.(주3)

또 다른 방식으로 공공서비스는 사기업에 봉사한다. 통신, 체신 등의 낮은 비용은 저소득층에게만 혜택을 주는 것은 아니다. 사기업 역시 이들 싼 가격에 양질의 서비스를 이용하면서 원가를 절감한다. 특히 기업이 이용하는 공공서비스는 오히려 더욱 싸다. 전력요금은 산업용이 더 싸다. 철도 역시 마찬가지다. 철도가 적자라고 해서 몇 해 전 살펴본 바에 따르면 여객운송 부문은 흑자였는데 화물수송 부문이 적자였다. 이것이 무엇을 말하는지는 잘 알 것이다.

요컨대 자본주의 국가에서 제공되는 공공서비스는 그것의 필요성에도 불구하고 이를 꼭 지켜내야 할 지고지순한 ‘공공의 이익(public interest)’이라고 신성화하는 것도 또 하나의 편견이다. 공공서비스의 민영화 논리 중 하나인 ‘수익자부담원칙(polluter pay principle)’이 완전 헛소리만은 아니다. 시장가격보다 낮게 책정된 공공서비스 요금에는 분명 누군가 ‘무임승차자(free rider)’가 있게 마련이다. 가장 어처구니없는 무임승차자가 바로 사기업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2) 사기업은 구제해주면 안된다.”에 대해서는 쓰다 지쳐서 다음에 이야기하겠다.(sooner or later or forever)

 

(주1) 바로 이러한 성격의 공기업이 일반인이 생각하는 이윤을 내서는 안 되는 공기업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주2) 수요는 willing to pay, 즉 시장가격을 주고라도 서비스를 제공받을 용의가 있는 경우를 말한다. 소요는 서비스를 제공받고자 하나 지불능력이 없는 경우를 말한다

(주3) 같은 이치로 공공적 성격이 강한 부동산 역시 산업경쟁력을 위해 가격을 적정수준으로 유지시키는 것이 국가의 이해관계이기도 하다. 바로 그러한 취지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은 “또한 전세값이나 집값이 오르게 되면 이것이 근로자의 임금인상 요구로 이어져 경제의 경쟁력 저하요인이 되는 등 그 부작용이 매우 큽니다. 그래서 부동산 가격안정을 최우선 정책과제 가운데 하나로 삼아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코자 하는 것입니다.”라고 발언하였다.(관련 글 보기)

수돗물 민영화에 관한 오해 몇 가지 (4)

뉴욕타임즈에 따르면 최근 캘리포니아 주의 터미네이터 슈바르츠네거 주지사가 주 차원에서는 지난 1991년 만에 처음으로 ‘공식적으로 주차원에서의 가뭄(official statewide drought)’을 선포하였다고 한다.(원문 보기) 관련 공무원들은 상황이 매우 이례적임을 실토한 상황에서 주 전체적으로 물 부족 현상으로 인해 각종 개발계획이 뒤로 미뤄지고 있다고 한다. 즉 여하한의 개발계획도 현재로서는 장기간의 물공급 계획이 확실히 뒷받침되지 않고서는 허가를 받을 수 없다고 한다.

이러한 캘리포니아의 물부족 사태의 원인은 물론 자연재해적인 성격을 띠고 있으나 ‘비효율적인 인프라스트럭처(compromised infrastructure)’나 ‘지나치게 낮은 가격(seriously under-priced)’(주1) 과  같은 공급 및 유지관리적 측면과 ‘도시 지역보다 훨씬 물을 많이 쓰는 주의 농업(the state’s agriculture industry, which uses far more water than urban areas)’으로 인한 수요적 측면도 지적되고 있다.

잭 니콜슨이 주연한 로만 폴란스키의 걸작 ‘차이나타운(Chinatown)’이 바로 로스엔젤레스의 상수도 자원을 둘러싼 음모를 그린 느와르다. 그만큼 물 자원은 예전에도 이미 권력의 핵심적인 도구였거니와(주2) 차이나타운이 그린 1930년대에도 그러했고 현재도 역시 그러하다. 캘리포니아에서도 그러하고 서울에서도 그러하다. 21세기에 들어와서는 특히나 그 희소성이 높아질 것으로 보여 자본가들은 그것을 ‘파란 황금(blue gold)’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가뭄과 같은 자연현상이 인간이 통제하기 어려운 영역에 있다면 우리는 결국 공급과 수요에 있어서의 변화를 통해서 현재의 위기에 대처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선 수요에 있어서는 그것의 조절은 산업정책을 통한 해결방법이 있을 수 있고(주3) 개별 소비자들의 인식전환(주4)이 병행되어야 할 것이다.

공급 측면에서의 대안은 대규모 공급라인의 개발 등의 개발방식에서도 시민사회와 공급자 간의 이견이 존재하거니와 그 조달방식도 민영화냐 국가 또는 지방정부의 직접공급이냐에 따라 엄청난 갈등이 예상된다. 분명한 팩트 하나는 ‘비효율적인 인프라스트럭처(compromised infrastructure)’로 고생하는 것은 캘리포니아뿐 아니라 우리 역시 마찬가지라는 사실이다. 우리의 상하수도 시설 역시 우리가 살림살이에 신경 쓰느라 ‘삶의 질’에 신경을 못 쓰는 사이 급격하게 노후화된 것이 현실이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땅 속에 묻힌 상하수도관의 누수율은 비참할 정도로 높아서 상수나 하수시설에서의 비용증대뿐만 아니라 국토오염이라는 엄청난 기회비용까지 지불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최근 몇 년간 진행되어온 하수관거 BTL 민간투자사업이 바로 이러한 문제인식 하에 다소 무리하게 진행했던 사업이다. 상수관 역시 하수관과 비슷한 처지이고 현재 이에 대해 유수율 제고 사업이라는 타이틀로 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가가 그동안 공공서비스의 공급과 유지관리에 있어서 제대로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지 않았느냐는 비판을 제기하는 것은 타당하다. 그러나 한편으로 공공서비스의 양(量)적인 측면과 질(質)적인 측면의 계획과 공급, 그리고 유지관리가 과거 몇 십 년 간의 폭발적인 경제성장기에(주5)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 하는 것 또한 감안하여야 할 것이다.

여태 쓴 ‘수돗물 민영화에 대한 오해’ 시리즈가 이런저런 사이트에 퍼 올려진 것을 몇 개 보았다. 그런데 퍼다 나르신 분들 중 어떤 분들은 내 졸문에 대해 수돗물 민영화를 “찬성”하는 글이라면서 소개한 것을 보았다. 이것은 상당 부분 나의 졸렬한 글 솜씨 탓이기도 하지만 퍼다 나르신 분도 맥락을 조금은 잘못 이해하신 측면이 있다.

즉 이 시리즈의 기획 의도는 공공서비스의 조달방식에 있어서 ‘민영화’와 ‘국가 또는 지자체에 의한 직접공급’으로 나누고 전자를 절대악, 후자를 절대선으로 몰아가는 단순 이분법을 경계하는 것일 뿐이다. 이것은 자본주의 국가의 공공서비스 공급마저 계급성이 존재한다는 측면도 있거니와 특히 우리나라와 같은 개발독재 국가에서의 공급과 유지관리의 비효율성은 섣부른 민영화 못지 않게 비용낭비적인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주6) 또한 그 조달방식의 세세한 부분에 들어가서는 보다 기술적으로 미묘한, 그러하기에 우리가 세심히 접근하여야할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보다 근본적으로 의료서비스, 상하수도 서비스 등 현재 거론되고 있는 각종 공공서비스의 공급과 유지관리는 이전의 세기에서 계획하고 유지하였던 것보다 공급, 유지관리, 그것을 위한 우리가 감내하여야 할 비용측면에서 더 복잡한 양상을 띠게 될 것이고 사실 시기적으로 그것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시급한 실정이다. 그런데 지금 수구적이고 전근대적인 정부의 등장이 논의를 진전시키지 못한 채 이 사회를 ‘민영화’라는 단어 자체만으로 선악의 구분을 해야만 하는 ‘소통부재의 장’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 현재의 비극이다.

p.s. 오늘 어떤 기사를 보고 노무현 씨가 참 같잖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1) 이 표현은 본래 글의 맥락상으로 전 세계에서의 상하수도 민영화로 인한 가격폭등과 같은 차원이전에 물과 같은 희소자원에 대한 지나치게 싼 가격책정으로 인한 과소비적인, 결과적으로는 그것의 가격인상이 경제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는 현재와 같은 진퇴양난의 상황에서의 딜레마를 묘사한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주2) 모든 문명에서 가뭄이 닥쳤을 경우 기우제는 국가적인, 그리고 종교적인 행사였다

(주3) 대규모 플랜트 농업방식의 지양이나 산업현장에서의 중수도 사용의 적극적 장려 등

(주4) 이제 웬만한 도시인들은 10여분이 훨씬 넘는 샤워를 하지 않고서는 개운함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위생의식이 투철해졌지만 이 정도의 물의 엄청난 소비는 불과 몇십년 전만 하더라도 절대 다수의 사람들에게 상상도 못할 사치임은 분명하다. 이로 인한 물 부족 현상의 증가 예상치도 절대 무시 못 한다. 결국 상수 공급 계획은 인구에 대한 원단위로 계산되는데 최근 몇 십년간 이 원단위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였다.

(주5) 이는 비단 우리나라와 같은 신흥공업국의 이야기가 아니라 전체 인간의 문명사에 비추어 볼 때 자본주의 문명의 폭발적인 발전 추세를 말하는 것이다

(주6) 물론 소위 ‘효율성’이라는 단어를 쓸 적에는 ‘공공성’이나 ‘사회효용’과 불가피하게 충돌하는 측면에 대해서도 고려해야 하는 측면도 있긴 하다. 그럼에도 공익적이라고 해서 비효율적인 것이 용인될 수는 없다.

민영화는 절대악인가

이 글은 현재 뜨거운 논쟁거리가 되고 있는 민영화 논리에 대한 반대급부로 국가의 공공서비스 기능을 수호하자는 주장에 대해 보다 세세한 면에서 그러한 주장에 대한 대안을 내놓아야 되지 않을까 하는 문제인식에서 쓴 글이다. 필자 역시 아직은 걸음마 수준으로 생각하는 주제이기에 논리가 다소 튈 수도 있고 모순될 수 있지만 아이디어 공유차원에서 공개하기로 한다. 따라서 생산적인 딴죽은 언제든지 환영합니다!

공공서비에 대한 민영화(또는 사유화) 또는 공공기관 매각은 80년대 신자유주의의 물결 속에 본격화되었다. 사실 더 올라가자면 수에즈 운하, 미국의 철도사업들도 공공서비스이면서도 민간에 의해 건설, 자금조달, 운영이 되었던 민간위주의 사업이었다. 또한 프랑스의 경우 나폴레옹 시절부터 상하수도를 민간기업에 맡겨 운영하였다.

그렇지만 그러한 민영화 현상이 범세계적인 보편으로 받아들여진 것은 영국 쌔처 정부의 정부조달 사업에 대한 민간의 참여허용, 제3세계에서 공공시설의 설치에 민간의 자금을 끌어들인 BOT(Build-Operate-Transfer) 등을 통해서이다. 그리고 이러한 추세를 가속화시킨 것은 WTO, FTA 등 자유무역협정과 무역의 세계화다. 이를 통해 각국은 자본자유화, 공공서비스의 표준화의 작업 등을 거쳐 해외투자자의 투자를 수월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민영화는 1990년대 초반에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현재 공급되는 사회기반시설의 10%이상이 민간에 의해 서비스를 제공받게 되어 있다. 세계적으로는 물산업(상수도 및 하수도 건설 및 운영)을 예로 들면 현재 전 세계 인구의 9%가 민영화된 서비스를 공급받고 있으며 2015년에는 약 12%의 인구가 민영화 서비스를 받게 될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이명박 인수위가 대운하, 금융기관, 방송, 의료보험 등 광범위한 분야에서 민영화의 이슈를 제기하자 블로고스피어 등 여러 곳에서 저항의 목소리가 높아져 가고 있다. 어쩌면 반가운 현상이지만 한편으로 이에 대한 대안도 마련해야 하는 문제도 있다.

1) 공공서비스의 형평성, 또는 계급편향의 문제

자본주의라고 해서 모든 것이 다 시장에 의해 공급될 수 없는 이유는 이른바 통신, 도로와 같은 공공재는 비배제성, 비경합성이라는 고유의 특성 때문에 시장에서 공급될 수 없는 ‘시장의 실패’의 특성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그동안 자본주의 체제에서도 보편적으로 국가에서 공급을 해왔고 상대적으로 싼 가격을 유지하여 인플레이션을 차단하였다.

문제는 이러한 서비스 공급체계가 이른바 무임승차(free ride)의 문제를 발생시킨다는 것이다. 이것은 오염자부담원칙(polluter pay principle)과 배치되는 개념인데 한편으로 계급간 형평성 또는 평등주의 논리에 의해 보완되기도 한다. 예컨대 건강보험같은 경우 부자들의 소득으로 빈자들의 의료비를 채우는 고통분담의 차원에서 공공서비스를 바라봐야한다는 취지기에 수긍이 가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충분히 부담능력이 있는 이가 무임승차할 수 있는 개연성은 남는다. 예를 들어 서울과 인천간 고속도로를 국가보조금으로 지었다면 이 도로를 이용하지 않는 지방 사람들에게는 억울할 노릇이다.

또한 도로공사가 직영하는 도로와 민자도로가 가격에서 차이가 나는 점은 근본적으로 민자도로가 시설의 투자비를 상각하여 통행료에 반영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면 도로공사처럼 투자비를 반영시키지 않는 방식이 좋은 것인가.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결국 어떤 식으로든 빚으로 남든지 국가가 보조하든지 해서 현 세대와 미래세대에게 부담을 주는 행위다. 도로 만들 돈이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 하나가 자본주의 체제에서도 국가는 결국 지배계급의 지배도구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들이 공급하는 공공서비스 역시 계급편향적일 수밖에 없다는 문제다. 예를 들자면 지속적으로 적자가 나는 철도운영에 있어 예전에 찾아본 바에 의하면 여객부문은 흑자인데 수송부문은 적자였다. 이는 결국 기업의 물류비용을 국가가 개인의 여객부문에서 보충하고 있다는 것이나 다름없다. 사회복지적 성격이 강한 의료보험 등도 역시 어떻게 보면 기업이 책임져야 할 노동재생산비용임에도 국가가 책임지는 구조라 볼 수도 있는 것이다.

2) 공공서비스의 비효율 문제

이는 특히 환경관련 시설의 공공서비스에서 제기될 수 있는 문제인데 현재 상수도 민영화 등을 골자로 하는 정부의 물산업 육성정책과 관련 있다. 결국 정부의 민영화 논리는 우리나라의 상하수도 서비스가 기초자치단체에 의해 공급되고 있어 비효율과 시스템의 부재로 인해 불필요한 비용이 과다지출되고 있고 관리와 효율적인 투자 또한 제때 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이는 일정정도 사실이다. 상하수도의 누수율은 심각한 지경이고 시설도 노후화되었다. 그리고 이를 타개하기 위해 정부가 내놓은 대안이 민영화, 광역화를 통해 규모의 경제를 실현하겠다는 것이다.

관리주체의 난립이나 영세성으로 인한 비효율의 문제는 실제로 심각한 문제다. 어찌 하였든 사실은 공공서비스의 과점체제를 인정하는 문제를 논의선상에 올려야 하는 것도 사실인데 실은 이러한 논의는 진보진영에게 있어 일종의 계륵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필연적으로 해당 공무원의 고용불안의 문제, 공정경쟁 우선논리와의 상충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로 지난 세기 현실 사회주의 등 진보적인 대안이 제시했던 사회상은 사실 똑 까놓고 말해 국가가 주인인 독점자본주의 시스템과 유사함을 인정하여야 한다. 진정한 사회화를 통한 대안경제 체제는 이러한 독점자본의 형태에서 점차적으로 각 사회세력이 통제능력을 갖춘 이후에나 가능할 것으로 생각된다. 여기에서 바로 독점과 공정경쟁의 모순이 작동하는 것이다.

3) 갈수록 높아져만 가는 유지비용의 문제

구체적인 수치를 제시할 수는 없지만 전 세계적으로 사회기반시설이나 공공서비스의 양은 급격하게 늘어났다. 제1세계나 제3세계나 모두 보편적인 현상이다. 이로 인해 어떠한 문제가 발생하는가. 바로 지속적으로 늘어나는 유지관리비용이다. 양적으로뿐만 아니라 질적으로도 서비스의 내용이 달라지기에 그 유지관리비용이 이전과는 다른 수준임에는 분명하다. 도로만 하더라도 이전의 도로와는 질적으로 다른 기능을 제공하니 그만큼 비용이 증가될 수밖에 없다.

그러다보니 국가로서는 이러한 비용이 예산에 차지하는 비율이 늘어나 이를 감당하기 어렵게 되고 그 위험비용 또한 엄청나다. 얼마 전에 미국에서도 다리가 무너진 사건은 현재의 사회기반시설 유지체제가 한계점에 도달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그러할 때 국가로서는 어떠한 유혹에 빠지는가 하면 바로 민간에게 상당수의 반대급부를 주고서라도 민영화하여 위험을 이전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계량적으로 측정되기는 어렵지만 이러한 위험이전효과도 상당할 것이다. 민간이 실제로 그 위험을 감내할 수 있는 가는 또 다른 문제지만 말이다.

그러므로 향후에 공공서비스를 계속하여 국가가 책임지는 구조로 가져가 달라고 요구할 것 같으면 이에 대한 재원마련의 대안도 내놓아야 할 것으로 판단된다. 즉 국민들이 세금을 더 내서라도 이러한 부분에 대한 가격 차이를 메워줘야 하는 것이다. 이를 어떻게 조세저항 없이, 그리고 세금의 무임승차 없이 예산을 마련하는가가 관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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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보면 올바른 공공서비스 제공의 모습은 그 형식에 있다기보다는 그 내용에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든다. 예를 들어 실제로 어느 공사가 주인 없는 회사라고 방만한 경영을 일삼는다면 그것은 차라리 국민세금 더 들어가기 전에 매각해버리는 것이 나을 수도 있다. 민간 기업이 제공하는 공공서비스라도 국가가 통제를 통해 가격과 서비스를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방향으로 조정할 수 있다면 고려될 수 있는 것이다.

문제는 현재 privatization 이 민영화로 이해되는 현상일 것이다. 즉 민(民)이라 불리는 주체 중 개인이나 사회운동단체 들은 실제 민영화에서 할 수 있는 역할이 극히 제한적인 반면 자금조달 능력이 있고 이윤추구가 목적일 수밖에 없는 기업들이 민영화의 이슈를 독점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부분은 현실적으로는 일종의 사회적 타협의 방법을 통해 올바른 방향으로 유도할 수도 있을 것인데 현재의 상황은 녹록하지 않다. 특히 한미FTA 등 자유무역협정은 오히려 사회적 타협의 가능성을 원천봉쇄하는 한편으로 기업에게는 국가를 제소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다는 것이다.

영국 체신 노동자들의 파업

영국에서 10만 명 이상의 체신 노동자들이 10월초 두 번에 걸친 48시간 파업을 진행하였다. 이 파업으로 영국의 우편 서비스는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13만 명의 체신 노동자를 대표하는 ‘통신노동자연합(the Communications Workers Union : CWU)’와 영국체신공사는 10월 12일 그들의 협상이 합의에 도달하였다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몇몇 도시의 노동자들은 CWU가 무슨 합의를 했건 간에 파업을 지속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동맹파업의 주된 이유는 서비스의 민영화에 대한 반대다. 임금인상도 주요 이슈중 하나다. 노동자들은 임금인상이 인플레이션에도 미치지 못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연금지급 방식의 변경도 갈등요인이다. 체신공사의 새로운 계획은 신규노동자에 대한 연급지급 중단, 기존노동자의 연금 삭감이기 때문이다.

근무규칙의 개정도 주요 이슈이다. 체신공사는 보다 많은 “유연성”을 부여할 계획으로, 근무방법에 있어 많은 변화를 주려하고 있다. 이전까지 노동자들은 일찍 출근하여 정해진 분량의 일을 마치면 빨리 퇴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체신공사는 더 늦게 일을 시작하기를 강요하고 있다고 한다. 이에 따라 가족을 돌보는 일정에 노동시간을 맞춘 많은 노동자들은 분노하여 동맹파업에 적극 나서게 되었다. 또한 노동자들은 이러한 문제를 결정함에 있어 CWU와 사전협의가 없었다고 분통을 터트리고 있다.

체신공사는 이러한 변화들은 세계 시장에서의 경쟁력 강화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경영층에서는 상당한 규모의 해고를 계획하고 있다. 한 관리에 따르면 체신공사는 과잉인력이 40%이상이 되며 4만 개의 일자리가 없어질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미 가장 강한 노조 성향으로 명성이 자자한 옥스퍼드 메일센터가 문을 닫았다. 경영층은 이 센터가 비효율적이고 고비용적인 센터였기 때문에 문을 닫았다고 주장했다. 그렇지만 대다수 노동자들은 이러한 조치가 노동자들에 대한 도발이자 협박이라고 간주하고 있다.

체신공사의 민영화에 대한 투쟁은 또한 노동당이 이끄는 정부에 대한 반정부 투쟁의 성격을 띠고 있다. 고든 브라운 수상은 공공부문 노동자들에 대한 최근의 공격을 뒤에서 주도하고 있다. 최근 노조의 컨퍼런스 석상에서 브라운은 공공부문 노동자들은 2% 이하의 임금인상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물가인상률을 하회하는 수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CWU의 총서기 빌리 헤이즈는 노동당 정부와 우호적인 파트너쉽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내년 정기총회에서 CWU는 노동당에 대한 금전적 지원에 대해 뜨거운 논쟁이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결국 ‘경쟁력의 제고’라는 강력한 이데올로기적 주장이 공공 부문에까지 손을 뻗치고 있는 현실인데 문제는 각국의 집권층과 기업주들이 서로의 노동자들에게 ‘너희의 경쟁상대는 이웃나라의 노동자다’라는 노노간의 경쟁심을 부추기고 있고 이것이 고용불안의 정당한 논리로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오랜 시기 공공부문의 비효율성과 예산낭비는 문제점으로 지적되어 왔다. 하지만 그것이 공공성의 약화로 귀결된다면 그러한 ‘경쟁력’이 누구를 위한 경쟁력인지 재고하여야 한다. 경쟁력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오지산간에로의 체신서비스를 포기한다면 그것은 공공서비스의 기본전제인 ‘차별 없는 서비스’를 포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공공 서비스에의 ‘경쟁력’이란 가격 경쟁력 뿐만 아니라 ‘공익’에 봉사하는 경쟁력도 있게 마련이다.

여하튼 현재의 투쟁이 승리로 귀결될지는 불확실하나 현재의 민영화 계획과 구조조정 계획이 강력한 저항과 분노에 직면하고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기사출처 http://www.socialistworker.org/2007-2/649/649_06_BritishPostal.s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