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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정교화 서비스의 위기

셜리 슈미트는 위험한 범죄자와는 거리가 멀다. 그는 아이오와의 농장에서 말을 기르고 딸을 키우며 조용히 살고 있었다. 2006년 남편이 죽자, 우울해지고 만성적인 통증으로 고통 받으면서 그는 메스암페타민(속칭 “히로뽕”)에 의지하기 시작했다. 중독에서 벗어나지 못하자 그와 친구들은 약을 개인적인 복용 목적으로 제조하기 시작했다. 그는 2012년 체포되어 마약치료 과정을 이수했고 그 이후 정상이 됐다. 그는 돈벌이를 위해 마약을 판 적이 없으나 연방의 의무적인 최소형량 법칙(federal mandatory minimum rules)에 따라 – 이전의 마약소유에 따른 판결들이 무시된 채 – 판사는 10년형을 선고해야만 했다. 그를 복역시키는 데에는 납세자의 돈이 연간 3만 불 정도 드는데, 이는 아이오와에 있는 학비로 곤란한 학생 세 명의 학비를 내주기에 충분한 돈이다. 그가 출소하면 연금을 받을 만한 나이가 될 것이다.[America’s prisons are failing. Here’s how to make them work]

엄벌주의로 인해 감옥이 중죄인으로 가득 들어차 있는 미국의 교정 서비스 현황, 그리고 미국을 포함한 서구사회의 획일적인 교정 서비스 문화를 비판한 이코노미스트 기사의 일부다. 사례로 든 사안은 타인에게 가한 유해한 범죄가 아닌 본인의 중독을 통제하지 못한 의지박약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마약을 직접 제조할 정도로 – 마치 브레이킹배드를 연상시킨다 – 희귀한 범행을 저지른 자조(自助) 행위에 가깝지만, 어쨌든 판매를 하지 않았다면 적어도 자유주의적 관점에서는 범죄로 볼 것이냐 하는, 적어도 10년 형을 받을 정도로의 중죄로 볼 것이냐 하는 것에는 의문이 있을 수 있다.

이코노미스트조차 미국은 “아웃라이어(outlier)”라고 규정할 만큼 미국의 교정시설에는 수감자들로 차고 넘친다. 미국의 교정시설 수감자는 1970년에서 2008년 사이의 기간 동안 다섯 배 증가했다. 인구 대비 수감자수로 봤을 때 미국의 수감자 수는 프랑스의 수감자 수의 7배, 네덜란드 수감자 수의 11배, 일본의 수감자 수의 15배에 달한다고 한다. 이러한 과도한 수감 상태의 원인이 무엇인가 하는 데에는 양극화 현상의 심화로 인한 범죄증가, 교정시설의 민영화 추세, 보수정권의 엄벌주의1 등을 들 수 있을 텐데, 적어도 인용한 사례는 우선 표면적으로는 엄벌주의로 인한 부작용으로 보인다.

이코노미스트는 수감 위주의 교정 서비스가 전반적으로 실패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전자발찌 등 다양한 교화 프로그램으로도 교정이 가능하다면 세금을 절약하면서 교화라는 본래의 목적도 달성할 대안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살인, 강간 등 격리가 불가피한 범죄 이외의 기결수에게 사용해볼만한 할 것이다. 또 하나 지적하고 싶은 것은 장기적으로 사례와 같이 타인에게 위해를 가하지 않는 행위에 대한 비(非)범죄화도 병행돼야 한다는 점이다.. 대마초 소지에 대한 각국의 비범죄화가 대표적인 사례다.. 단죄가 사회에 의한 복수가 아닌 교화가 목적이라면 이러한 방향이 바람직할 것이다.

“철도 민영화”에 관한 트윗 모음

# 사실 “철도 민영화”로 눙쳐지는 이 난국은 노태우 정권의 KTX 부채, 철도시설과 운영 단위의 분리, 이 과정에서의 정부의 부채 떠넘기기, 용산 사업 실패로 인한 코레일 부채 위기 등이 복합적으로 얽힌 상황인데, 꼬여도 너무 꼬인 사안이다.

# 수서발 KTX노선은 민간이 제안했었고 – 두산으로 기억 – 국토부가 아마도 코레일 군기 잡기 차원에서 적극 검토하지 않았나 싶은데 이번에 전면 민자사업이 아닌 별도법인으로 가는 것은 공항공사처럼 향후 지분매각 시나리오 등을 염두에 둔 포석으로 여겨진다.

# ‘왜 굳이 수서발KTX를 별도법인으로 할까?’ 하는 의문이 드는데, 그러한 공공서비스에 대한 별도 법인화가 행정부의 공기업 길들이기에 유리한 것이 사실이다. 시설관리공단과 코레일의 분리, 전력분야에서 발전과 배송의 분리는 특히 노동통제에도 유리하니까.

# 공무원의 관성도 있는 것 같다. 여태 경쟁시켜서 서비스의 질을 재고하겠다는 주장을 해왔는데 갑자기 없던 일로 해버리면 과거 주장이 틀린 꼴이 될 우려도 있으니만큼 민영화에 대한 나쁜 여론과 원점 회귀의 중간, 향후 지분매각까지 고려한 각본 채택?

# 수서발KTX 별도 법인을 만들면 분명 가격이 낮을 것이다. 흑자노선인데다 독립채산제고 코레일의 약점인 부채에서도 자유로울 테니 말이다. 통합채산제인 코레일의 평균요금에 비해서도 경쟁력 있을 것이고 이것이 국토부의 이데올로기 공세의 무기가 될 것이다.

공공서비스, 불평등 심화, 그리고 “연대적 의무”

미국인의 삶에서 불평등 심화를 걱정하는 더 중요한 세 번째 이유는, 빈부 격차가 지나치면 민주 시민에게 요구되는 연대 의식을 약화시킨다는 사실이다. [중략] 상류층 지역에서는 경찰에 의존하기보다는 사설 경비업체와 계약한다. 자동차도 한집에 두세대가 되다보니 대중교통을 이용할 필요가 없어진다. 이처럼 부유층이 공공장소나 공공서비스를 이용하지 않게 되면서, 그것들은 달리 대신할 수단이 없는 서민들만의 몫이 되어버린다.[정의란 무엇인가, 마이클 샌델, 이창신 옮김, 김영사, 2010년, p368]

마이클 센델의 베스트셀러 – 한국에서 인문학 서적의 돌풍을 일으킨 –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사회의 불평등 심화가 가지는 핵심적인 문제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유사 이래의 위대한 철학자들이 더 좋은 사회을 위한 시민의 도덕적 책임의 세 범주들, 즉 “자연적 의무”와 “자발적 의무”에 덧붙여 센댈과 같은 “공동체주의자”들이 주장한 “연대적 의무”가 부의 불평등으로 말미암아 희미해지는 상황을 묘사한 구절이다.

공공서비스는 실제로 자본주의 물질문명의 비약적인 발전에 결정적 기여를 한 재화이자 서비스다. 고속도로, 철도, 항만, 학교, 경찰, 군인 등의 인프라스트럭처 및 각종 서비스들은 사회가 발전하면서 필연적으로 늘어날 수밖에 없는 집합소비재에 대한 소요/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국가가 제공한 재화 및 서비스다. 이러한 재화/서비스는 지난 시절 시장에서 공급되기 어려운 제약조건 때문에 주로 국가가 공급해왔다.

덕분에 우리는 우리의 전 세대가 지불한 도로를 이용해 자동차 여행을 즐기고, 치안의 보호를 받고, 공립학교에서 교육을 받을 수 있게 됐다. 알래스데어 매킨타이어는 우리가 도덕적 행위자로서 도달하는 방법론으로 “서사”라는 개념을 제시했다고 센델이 말하고 있는데, 이런 공공서비스에서도 일종의 서사의 개념이 적용될 수 있을 것 같다. 우리 세대는 전 세대의 땀으로 만들어진 공공서비스를 이용하였고, 이에 따라 유사한 공공서비스를 다음 세대에 물려줄 “연대적 의무”가 발생한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이런 “연대적 의무”는 희미해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가장 우선적으로는 공공재정의 위기다. 이로 말미암아 많은 공공서비스는 민영화/사유화되었는데 여기에서 강조되는 것은 오염자부담원칙(polluter pay principle)이다. 개인적으로는 무임승차를 방지하기 위한 효율적인 방편으로 지지하는 바이지만, 역시 다음 세대에게 빚을 떠넘긴다는 점에서 고유의 “연대적 의무”에서는 멀어지고 있다.

공공서비스에 대한 “연대적 의무”는 美민주당의 진보적 투사로 떠오르고 있는 엘리자베스 워렌이 한 가정집에서 했던 연설에서 잘 설명되고 있다. 그는 그 연설에서 자본가들이 “우리가 낸 세금으로 만든 도로로 운송”해서 돈을 벌었으니 “다음 세대를 위해 내놓는 것이 사회의 암묵적 계약이 아니었냐”고 묻고 있다. 탈세와 이로 인한 공공재정의 위기를 질타한 이 연설에서 그는 서사적인 “연대적 의무”를 잘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의무감의 퇴색은 센델이 지적하는 것처럼 동시대의 소비영역에서도 진행되고 있다. 경찰기능이 완전 민영화된 것은 아니지만 오늘날 많은 이들이 사설경찰 서비스를 이용하고 있다. 자동차가 늘어나면서 대중교통 확충보다는 기름 값 추이에 더 신경을 쓰는 형편이다. 실제로 런던에서는 한때 부자동네 의회가 시의 지하철 확충에 자신들의 돈을 내지 못하겠다고 우긴 적도 있었다. 부의 편중에 따른 의무감 퇴색의 전형적 예다.

이러한 관점을 아까 올린 목동의 사례로 보면 흥미로워진다. 학교라는 공공서비스가 – 사립학교라 할지라도 여전히 공공적 기능이 있다 – 목동에 위치하면서 주민들은 교육 혜택을 누려왔다. 여러 요인에 의해 “귀족 학군”으로 분류되며 집값 상승이라는 부수적 효과도 거둔다. 이 과정에서 주민들은 교육을 “목동 학군”의 일종의 사적재(私的才)로 향유하려는 욕망이 생겼다. 저소득층과 그 사적재를 나누기가 싫다고 한다.

요컨대 물질문명의 발달에 따른 재화/서비스 공급방식을 보면 대개의 자기서비스(self-help)가 주를 이루었고, 사회가 발달하면서 정부에 의한 공공서비스의 공급이 활성화되다가 이제 여러 서비스들이 분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다시 사적재와 공공재가 분화되는 길을 걷고 있다. 이 과정에서 공동체의 서사적인 연대의식은 희미해져가고 있다. 또는 심지어 특정 공공재를 사적재나 되는 것처럼 착각하기까지 한다.

인간을 아는 것이 경제학의 최후과제

이 테잎들은, 엔론의 서부해안 트레이딩데스크으로부터의, CBS가 몇 년 전에 보도한 사실을 확인해주고 있다 : 즉 전력생산자와 거래자들 간의 비밀스러운 계약에서 발전설비를 끄도록 명령함으로써 가격을 의도적으로 올린 것이다.

“만약 스티머를 끄면, 그것들이 복구되는 것은 얼마나 걸릴까요?” 엔론의 한 노무자가 말하는게 들린다.

“오, 매시간 켜고 끄는 것을 원하는 것이 아닐 텐데요. 그냥 놔둡시다.” 다른 이가 말한다.

“음. 그냥 가서 차단해버리지 그래요?”

시애틀 근처의 스모미쉬 공공유틸리티지구의 공무원들은 이 테잎을 법무부로부터 받았다.

“이것은 우리가 기다리던 그 증거다. 이는 그들이 시장을 조작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그 유틸리티의 대변인 에릭 크리스텐슨의 말이다.[Enron Traders Caught On Tape]

反민영화론자들이 공공서비스를 민영화할 경우 얼마나 끔찍한 재앙이 초래되는지 자주 거론하는 사례가 엔론의 사례다. 발전 및 자원 분야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속도로 성장하며 에너지 서비스 민영화의 선두주자로 나섰던 이 기업은 지극히 복잡한 투자구조와 이에 따른 기상천외한 분식회계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회사다. 인용한 부분은 이 이윤만을 쫒는 회사가 지역에 공급하여야할 전기서비스를 가지고 어떻게 장난을 쳤는지 고발하고 있는 상황의 묘사다. 전력은 거래되는 것인데 전력을 차단하면 공급이 줄어 가격이 올라갈 것이고 거래자는 이를 갈취한다는 이치다.

특이하게도 우익이든 좌익이든 –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모르나 – 인간과 그 인간들로 구성된 기업은 이윤추구를 어떠한 행동의 가장 주요한 동기로 간주한다는 것에 동의한다. 경제학자들은 개인(個人)이든 법인(法人)이든 여태 경제 흐름을 제대로 파악해 합리적인 경제 전망을 하는 ‘경제적 인간(Homo Economicus)’라는 인간상을 경제 시스템의 주역으로 간주한다. 좌우익의 입장차가 있다면 우익은 이러한 합리적 이윤추구행위가 시장을 통해 검증되며 공공선에 도달한다는 것이고, 좌익은 개별적 이윤추구행위가 통제되지 않아 자본주의의 모순을 증폭시킬 것이라는 정도일 것이다.

특히 예로 든 공공서비스의 민영화에 대해 좌우익의 이러한 입장차는 첨예하게 드러난다. 당초 우익들은 – 또는 집권세력 – 민영화가 당장의 비용지불을 이연시키는 동시에 시장경쟁을 통해 시설과 서비스를 값싸게 공급할 것이라는 주장을 하여 민영화를 추진하였고, 좌익은 민영화가 공공서비스에 이윤추구 동기를 제공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비용의 증대와 이로 인한 수혜자의 배제 및 서비스 질 저하를 불러올 것이라고 주장했다. 두 주장 모두 어느 면에서는 동일한 이윤추구 동기에 대한 동전의 양면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라 생각된다. 엔론은 당연히 동전의 더러운 면을 상징한다.

이 글에서는 민영화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은 유보하도록 하겠다. 그보다는 시장에서의 이윤추구 행위가 공공성과 가장 첨예하게 부딪히는 그 민영화 서비스가 과연 상당수 경제학자들이 – 앞서 말한바 좌우익 공히 공유하는 – 특정한 목적, 즉 이윤동기에서만 움직이는 것인가 하는 질문을 던져보고자 한다. 그 물음에 대해 엔론을 예로 들 경우 답은 분명하다. 위에 묘사한 소름끼치는 풍경에서 전기를 차단할 경우 고통 받을 주민들에 대한 배려는 어디서도 느낄 수 없다. 이는 시장 안에서의 조화된 이기적 인간들의 행위가 공공선을 초래한다는 우익들의 주장을 무색케 한다.

2005년 8월, 미국 역사상 최악의 허리케인으로 기록된 카트리나가 루이지애나를 강타했다. 당시 그 지역에서 전력 공급 사업을 맡고 있던 엔터지는 정전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이미 100만 가구에 전력 공급이 끊긴 상태였고 엔터지 직원 1,500명 역시 집을 버리고 다른 곳으로 대피해 있었다. 엔터지의 CEO 웨인 레오나드(Wayne Leonard)는 직원들에게 개인적인 상황이 모두 해결될 때까지 직장에 나오지 않아도 된다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중략] 힘든 상황에도 불구하고 엔터지 직원들은 대부분 직장으로 복귀했고, 최악의 상황이던 그 일주일 내내 하루에 16시간씩 일했다. [중략] 그들이 이렇게 행동하게 된 중심에는 레오나드의 거대한 비전이 자리 잡고 있다. 레오나드의 비전은 ‘더 좋은 세상을 만드는데 기여한다’는 것이었고 그의 비전을 가슴에 품은 직원들에게 직장은 월급 이상의 것이었다.[스티브잡스 무한혁신의 비밀, 카민 갤로 지음, 박세연 옮김, 권영설 감수, 비즈니스북스, 2011년, pp123~124]

민영화 서비스가 반드시 나쁘지 만은 않다는 다른 예로 쓰일 수 있는 경우다. 같은 민간 에너지 기업이지만 적어도 엔터지는 카트리나 사태로 인한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노력을 함에 있어 이윤추구를 유보하였다. ‘더 좋은 세상을 만드는데 기여한다’라는 CEO의 비전은 어쩌면 좌우익 모두 마음에 들지 않을 것 같다. 물론 그가 일관되게 그러한 비전을 추구하였는지는 의문이지만 어떤 면에서 그는 ‘자비로운 자본가’, ‘공익을 배려하는 자본가’로 규정할 수 있을 것 같고, 이는 경제학자들이 규정하는 ‘경제적 인간’과는 거리가 있다. 어쨌든 민영화 기업임에도 불구하고 이 회사는 공익을 추구했다.

인용한 저서는 저 유명한 애플의 CEO 스티브 잡스에 관한 성공비결을 다룬 책인데, 이 사례는 그의 동기와 유사한 동기로 기업을 운영하는 다른 기업을 사례로 들기 위해 언급된 것이다. 요컨대 스티브 잡스의 모티브는 돈이 아니었다. 그에게는 세상을 바꾸겠다는 열정이 있었고 이를 구현하기 위해 노력하였으며, 돈은 그것에 대한 부산물로 따라온 것이다. 경제학자들의 인간상과 동떨어진 이야기라 이례적이라 여길 수 있을 것 같은데, 사실 상당히 많은 경영학/성공학 저서들이 이런 맥락을 강조한다. ‘돈이 아니라 열정이다.’ 그렇다면 경제학과 경영학이 바라보는 인간상은 전혀 다른 것인가?

정리를 해보자면, 민영화든지 인간상이든지 앞서 언급하였다시피 동전의 양면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된다. 큰 기조에 있어 시스템이 인간의 행위를 규정하고 좀 더 인간적인 시스템을 갖추면 보다 나은 행동을 기대할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여건 속에서도 – 예로 이윤추구가 지상과제인 민영화 서비스 내에서도 – 사람들은 이타적 행위를 곧잘 한다는 것이다. 이를 완전히 비합리적인 행위로 몰아세우기 어려운 것이, 바로 스티브 잡스가 혁신적인 제품을 만들어 세상을 바꾸겠다는 이타적(또는 적어도 非이윤추구적인) 행위를 했고 그것이 물질적 성공까지 이어진 사례가 있기 때문이다.

결국 인간의 이기적인 이윤추구 행위와 그 행위의 합인 시장에서 우익 경제학자들이 기대하는 조화(‘보이지 않는 손!’)를 기대하기에는 그 안에 채워져야 할 것이 아직도 많다는 사실은 여전하고, 반대로 좌익 경제학자들이 비판하는 끔찍한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그래도 인간들이 숨 쉬며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이윤추구 행위와 시장 사이에 부족하게나마 무언가가 채워져 가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그래서 경제학자들은 ‘준합리적 경제이론’이랄지 ‘행동경제학’과 같은 이론을 내놓아 지나치게 각진 인간에 대한 정의를 세심하게 다듬으려 한다. 결국 인간을 아는 것이 경제학의 최후과제인 것 같다.

“불난 집의 불을 끄고 싶으면 돈을 내라”

집에 불이 나서 황급하게 소방서에 전화했는데 정작 도착한 소방관들은 내 집이 타거나 말거나 방치한 채 옆집에 불이 번지지 않도록 주변에 물만 뿌리고 있는 상황이 발생하면 기분이 어떨까? 아마도 ‘이게 악몽이 아닐까?’하고 손등을 꼬집어보지 않을까? 그런데 이러한 일이 얼마 전 미국의 한 카운티에서 실제로 발생했다.

당신의 집에 불이 났는데 지역의 소방서는 대응하지 않고 불타없어지는 것을 지켜보고 있다고 상상해보라. 오늘밤 지역의 한 가족에게 일어난 그대로다. 한 지역근린에서는 테네시주의 오비온 카운티의 소방관들이 주택이 전소하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은 후에 분노가 일고 있다. 집주인 진 크래닉은 소방관들이 불을 끄는데 돈이 얼마가 들더라도 지불하겠다고 했지만 너무 늦었다는 대답만을 들었을 뿐이라고 말했다. 그들은 집이 불타버리는 동안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Imagine your home catches fire but the local fire department won’t respond, then watches it burn. That’s exactly what happened to a local family tonight. A local neighborhood is furious after firefighters watched as an Obion County, Tennessee, home burned to the ground. The homeowner, Gene Cranick, said he offered to pay whatever it would take for firefighters to put out the flames, but was told it was too late.  They wouldn’t do anything to stop his house from burning.[Firefighters watch as home burns to the ground]

이런 황당한 일이 발생한 것은 카운티 당국의 독특한 소방 서비스 정책 때문이다. 카운티의 정책에 따르면 소방 서비스를 제공받고 싶은 주민들은 매년 75달러의 요금을 지불하여야 한다. 타버린 집의 소유주 진 카닉은 이 요금을 지불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집은 소방서비스의 혜택에서 ‘배제’된 것이다.

카운티의 이런 잔인한(!) 방침에는 저간의 사정이 있긴 하다. 그들이 당초 소방서를 만들 당시 관련기관으로부터 적절한 지원을 받지 못했다. 즉 얼마간의 지원금을 받긴 했지만, 이후의 운영에 필요한 비용은 자체적으로 해결해야만 했던 것이다. 그리고 카운티는 별도의 예산책정이 아닌 시민에게 돈을 받아 해결하기로 맘먹었다.

오비온 카운티의 비극은 크게 두 가지 시사점을 가지고 있다. 첫째, 지방자치단체의 재정위기가 현실화될 경우 해당단체는 전통적으로 당연히 제공할 것이라 여겨지던 서비스를 제공하지 않을 개연성이 있다는 것, 둘째, 배제가 가능한 서비스는 이와 같이 차별화된 서비스를 제공하는 방식으로 진화할 것이라는 점이다.

두 가지 시사점이 어쩌면 혼재된 방향으로 진행될 것인데, 가장 전형적인 진행방향은 역시 민영화다. 오비온 카운티의 경우는 아니지만 미국에서는 이미 이런저런 이유 때문에 소방서비스가 민영화되고 있다. 이미 민간의 영역이 상당수 침투한 체신, 교정, 방범 서비스와 마찬가지로 소방서비스도 차별화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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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rport-firefighters-drill” by DVIDSHUBhttp://www.flickr.com/photos/dvids/5159639328/. Licensed under CC BY 2.0 via Wikimedia Commons.

향후 이러한 민영화의 경향은 – 또는 공공이 제공하더라도 서비스 형태가 달라지는 – 재정위기, 부유층의 차별화된 서비스 요구 등의 다양한 요인으로 강화될 개연성은 충분하다. 이는 공공성을 띈 서비스라 여겨지는 것들의 상당수는 공공서비스의 교과서적 특성인 비배제성/비경합성의 성질이 약한 것도 있다는 점을 무시할 수 없다.

예를 들어 전기나 도로는 배제성이 강한 서비스이므로 우선적으로 민영화가 가능하다. 방송은 비배제성이 강하므로 공공영역에 더 많은 비중을 두고 있다. 소방은 예로 우리나라처럼 아파트가 많으면 배제가 매우 어려울 것이나 미국처럼 단독주택이 넓은 나라는 충분히 배제할 수 있다. 넓은 집이 오히려 비극의 소재를 제공한 셈이다.

여하튼 개인적으로 ‘공공성’이란 냉정하게 볼 때에 어떠한 휴머니즘적인 측면에서만 호소하기에는 다소 불분명한 영역이 있다고 생각하는 편임에도 불구하고 예로 든 사건은 충격적이다. 내 눈앞에서 내 집이 타고 있는데 소방관과 함께 그 광경을 지켜봐야 하는 상황은 정서적으로 동의가 안 되는 측면이 너무 많기 때문일 것이다.

앞으로 세상이 어떻게 바뀌어 나갈지 살짝 두렵기도 하다.

재정위기, 그 지출측면에서의 해법에 대한 좌우의 시각차

아직도 해소되지 않은 위기

미국의 금융위기가 전 세계에 전파되는 과정에서 웬만한 국가들은 예외 없이 구제금융 등 천문학적인 재정지출, 초저금리라는 통일된 해법으로 경제난국을 헤쳐 나가려 노력하고 있다. 이런 노력의 결과 – 혹자는 닷거브(dot gov)버블이라 함 – 경제침체가 어느 정도 반전되어 제2의 대공황으로 추락할지 모른다는 공포심은 다소 잦아들었고, 서서히 출구전략을 검토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다소는 배부른(?) 주장들이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데 이 와중에 세계경제의 청신호를 교란시키는 잡음이 (주로) 자본주의 주변부에서 들려오고 있어서 우리의 신경을 거스르고 있다. 아이슬란드의 은행원들이 어부로 전직했다는 소식은 소국(小國)의 가십 정도로 여겨졌지만, 이후 구름도시 두바이나 남유럽 등에서 안 좋은 소식이 들려오고부터는 시장이 바짝 긴장하고 있고 각종 지표도 요동치고 있는 상황이다. 점점 위기가 중심부로 접근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 때문이리라.

세계 공통의 위기, 재정적자

세계경제에 대한 낙관의 의지를 꺾는 이러한 양상의 근저에는 재정적자라는 필연적인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 특히 남유럽의 위기는 해프닝에 가까운 아이슬란드와 두바이의 모험주의와 달리 유로존의 일원으로서의 나름 합리적인 가이드라인에 의한 재정운용의 행태를 보였을 것임에도 국가살림이 악화되고 있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물론 재정통계 분식회계와 같은 꼼수도 있기는 했지만 두바이와 같은 터무니없는 뜬 구름은 아니었을 텐데 말이다.

하지만 사실 이러한 위기는 남유럽만의 문제도 아니다. 대표적으로 자본주의 중심부인 미국, 영국, 일본 등도 사상 최대의 부채와 재정적자에 신음하고 있다. 다만 남유럽과는 다른 나름의 면책사유 덕분에 간신히 신용등급을 유지하여 체면을 유지하고 있는 형편이다. 어쨌든 이들 국가의 재정적자의 원인은 공급 측면에서는 경상수지 악화 및 세수감소, 지출 측면에서는 구제금융 등 재정방출, 고착화된 악성 재정지출구조를 들 수 있을 것 같다.

재정적자에 대한 좌우의 현저한 시각차

경상수지는 일본 등 일부국가를 제외하고 공통으로 마이너스다. 자연히 세수도 줄었다. 그런 와중에 각국은 위기 진화를 위해 양적완화를 시행했다. 향후 일부 투입자금이 회수되겠지만 당분간 재정에 부담이 된다. 또한 신자유주의 기조에도 불구하고 지속된 경직성 지출은 재정악화의 주요원인 중 하나다. 다만 이 비용의 삭감은 민심이반과 연결되기에 우익이 집권하더라도 쉽게 줄일 수 없었다. 민심이반의 결과는 그리스가 현재 잘 보여주고 있다.

이런 상황에 대한 보수진영의 해법은 명쾌하다. 지출을 줄이는 것이다. 그들은 천문학적인 구제금융 등에는 불가피성을 옹호하면서도 복지지출은 포퓰리즘으로 폄하한다. 조선일보는 그리스 퇴직자가 연금으로 임금의 90%를 받는다고 비아냥거렸다. 진보진영은 자연히 반대 입장이다. 그들도 재정적자에 대한 뾰족한 해결책이 있는 건 아니지만 – 굳이 들자면 증세 – 여하튼 복지축소 등을 통한 재정수지 개선은 답이 아니라는 입장이다.

한 쪽에겐 금과옥조, 다른 쪽에겐 절대악

이렇게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의 우익과 좌익의 구분은 연금, 건강보험과 같은 공공서비스의 공급주체에 대한 관점으로 나뉘는 경향이 강하다. 당연히 우익은 시장에 의한 공급, 좌익은 비(非)시장에 의한 공급을 선호한다. 전자는 효율성을, 후자는 공익성을 준거가치로 내세운다. 예를 들어 민영화에 대한 이들의 호불호도 극명하게 갈라진다. 한 쪽에선 금과옥조인 것이 다른 쪽에서는 절대악으로 전락해버린다. 접점이 별로 없다.

영국의 대처 수상이 기간산업에 대한 민영화를 단행한 데에는 하이에크의 팬으로서 관치에 대한 혐오라는 이념적 동기도 분명 작용했을 것이다. 그런 한편으로 자본주의 국가에서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재정위기에 대한 처방도 한 요인이라는 것을 무시할 수 없다. 복지지출 등 공공서비스 공급이 단기간 내에 소비를 진작시켜 선순환 되는 상황이 가시적이지 않는 상황에서는 케인스주의적인 낙관만으로 버틸 수는 없다는 위기감도 작용한 것이다.

그럼 복지삭감이 정답인가?

대처리즘 이후 금융위기 전까지 대세를 이루었던 신자유주의 흐름에 대한 사회적 저항은 만만치 않았다. 복지축소와 맞물린 자본의 세계화가 화학적 상승작용을 일으켜 각국의 인민들을 더욱 피폐한 삶으로 내몰고 있다는 정황이 곳곳에서 터져 나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2차 대전 이후로 국한하여 보자면 ‘국가 개입확대 – 개입축소 – 개입확대’로, 공공서비스나 국가역할에 대한 사회적 시각의 사이클이 형성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아직 체제 내에서 어느 특정 모델이 다른 모델을 압도한 것 같지는 않다. 또한 특정 모델의 채택이 반드시 특정 정권의 이념적 성격을 촘촘하게 규정하는 것인가 하는 의문도 든다. 즉, 통념과 달리 국가에 의한 공공서비스 공급은 자본주의 기업의 임금압박을 완화해주기 위한 ‘좌익적’ 변주곡, 실제로는 고도의 ‘우익적’ 대안에 불과할 수도 있는 것이다. 몇몇 공공서비스가 내포하고 있는 소득형평성 재고효과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공공서비스의 대안은? 재정위기에 대한 대안은?

연금제도가 체제순응을 목적으로 비스마르크에 의해 도입되었다는 사실은 제쳐두고라도 오늘날 연금운용이 일부의 희망사항처럼 그리 진보적이지 않음에 주목할 필요도 있다. 예전 한 진보정당의 유력인사가 ‘국민연금을 통한 기업 사회화’라는 다소 비현실적인 공약을 내놓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오히려 자금이 주가부양에 투입되는 등 체제 순응적으로 작동하고 있다. 또한 이러한 유동성 공급은 금융위기를 심화시키는 역할을 했다.

요컨대 복지모델이 실패했다고, 또 그것이 위기를 가중시키고 있다 해서 우익이 고소해하고 좌익이 실망할 상황인가 하고 묻고 싶다. 원초적으로 현 체제에서 노동자가 ‘착취 없이’ 정당한 임금을 받고 있다면 그런 공적 부조가 없더라도 무리 없이 생활해야하는 것이 상식적이지 않은가? 그리고 그것이 국가재정의 짐이 된다면, 은밀하게 혜택을 받고 있던 누군가에게 전향적으로 더욱 많이 부담 지워야 하지 않을까?

정부가 직면한 재정위기, 그리고 대안

비즈니스에 대한 국가의 점증하는 개입은 이 위기의 가장 큰 특징이다. 정책결정자는 대규모의 경기부양 패키지를 시행하고, 비틀거리는 기업들을 지원하고, 규제개혁을 맹세하고 있다. 그들은 한때 경영자들이나 이사회의 고유영역이던 의사결정에 참여하고 있다. 이전의 위기로 정부의 역할은 영원히 바뀌었고, 이번에도 똑같을 것이다. 경영자들은 다음의 두 가지 점에 대해 그들의 전략을 재고하여야 할 것이다.

첫째, 새로운 규제 체제를 형성하는데 돕고 그 아래서 경쟁하는 것을 준비하라.
둘째, 여러 산업에서의 급격하게 지출을 늘리고 있는 주요고객으로써 공공부문의 중요성은 증가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라.

그러나 현재의 위기를 넘어 점증하는 적자와 인구 노령화 현상은 많은 나라에서 미래의 재정 위기를 예고하고 있다. 정부는 보다 저렴한 비용으로 공공서비스를 제공하여야 할 막대한 압력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공공과 민간 부문 간의 창조적인 파트너십이 이러한 도전에 응하는 데 있어 중요하게 될 것이다.

[원문출처 Trend to Watch: A Bigger Government Role]

인용문에도 서술되어 있다시피 정부가 각 산업분야의 주요고객이라는 사실은 이제 돌이킬 수 없다.(주1) 그 정부가 경제정책에 있어 자유주의(또는 진보주의) 정부이건 보수주의 정부이건 간에 마찬가지다. “이전의 위기”, 즉 대공황으로 말미암아 현대 자본주의는 정부 또는 국가가 더 이상 야경(夜警) 국가에 머물러 있을 수만은 없다는 사실에 양 측 모두 동의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미국은 1930년대에 발생해 여론을 분열시키고 혼란을 야기했던 몇몇 문제들에 대한 국가적 합의를 이루어냈다. 경제가 자동적으로 안정을 이루면서 만족스런 수준의 낮은 실업을 유지하지는 않는다는 생각이 받아들여졌고, 그래서 경제 안정과 높은 고용에 공헌해야 하는 정부의 역할도 인정되었다. 이를 위한 기본적 임무가 총수요의 성장을 안정시키는 것임도 합의되었다. 그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중요 도구가 정부예산이라는 점도 인정되었다.[대통령의 경제학, 허버트 스타인 지음, 권혁승 옮김, 김영사, 1999년, p89]

물론 아직도 극단적인 보수주의자들은 정부의 개입이 오히려 위기를 심화시킨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이러한 시장의 완결성과 자주성에 대한 신화는 거의 지탱하기 어렵다. 역사적으로 볼 때에 미국 자본주의에서 복지예산 지출 등을 포함한 공공서비스의 증가와 해외에서의 전쟁수행을 위한 군비지출이라는 – 정치적으로 상반되지만 경기부양이란 효과측면에서는 유사한 – 정부지출의 두 가지 축은 그 효과를 이미 입증하였고, 정치적 고려사항에서도 돌이킬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 저항도 만만치 않다. 공공서비스에 관해 현재 미국은 헬스케어 개혁을 둘러싼 거대한 이데올로기 전쟁에 직면하여 있고, 그것을 넘어서서 인구노령화 및 사회간접자본 노후화와 이로 인한 소요비용 증가라는 과제가 기다리고 있다. 군비지출은 2차 대전이나 베트남전 등에서 국내 경기부양 효과는 입증되었지만 원초적인 문제는 국지전이 경기부양을 위해 주기적으로 일어나 주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을 일으키려 조작하면 – 부시처럼 – 그것이 바로 전쟁범죄다.

일단 오바마 정부는 어느 면에서는 전통적이지만 이전과는 뉘앙스가 다른 정부의 역할을 수행하려 하고 있다. 즉, 환경친화에 대한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는 녹색경제 – 예를 들면 고속철도 -, 헬스케어 개혁에 박차를 가하는 한편, 세제개혁을 통한 재정건전화를 노리고 있다. 문제는 하바드비즈니스가 지적한 것처럼 공공서비스 제공에 있어 막대한 재정 압력에 시달릴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현재 금융위기 때문에 쏟아 부은 돈이 그 압력을 가속화시킬 것이다.

지난 번 글에서 살펴보았듯이 오바마 정부 들어서도 변함없이 국가채무는 늘어나고 있고(그래프 보기) 재정적자는 갈수록 증가하고 있다. 이는 비단 미국만의 현상이 아니다. 우리나라 역시 이명박 정부 들어서서 재정적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고, 이와 더불어 국가채무도 위험한 상태로 다다르고 있다. 균형예산이 불변의 진리처럼 받아들여지는 시대는 아니지만 늘어나는 빚에는 장사가 없는 법이다. 그러한 면에서 현재의 경제호조 분위기는 다분히 일시적인 착시현상 일뿐이라는 심증이 강하게 든다.

궁극적인 재정건전화 및 이를 넘어선 경제건전화는 소모적인 예산 및 자원낭비를 통한 눈가림식의 경기부양이 아니라 – 애맨 땅을 팠다가 다시 묻어도 GDP는 증가한다 – 선순환적인 생산 프로세스에 도움이 되는 곳으로의 자원투입을 통해 달성할 수 있다는 것이 평범하지만 당연한 진리다. 물론 공공서비스에로의 투입방식(목적 및 투자주체)의 정당성 여부와 순환효과에 대해선 갑론을박의 여지가 많은 것은 사실이고, 이에 대한 사회적 합의는 다분히 정치적일 수밖에 없는 한계는 여전히 존재한다. 미국의 헬스케어나 한국의 4대강 정비처럼 말이다.

(주1) 원문에 따르면 1903년 GDP대비 6.8%에 불과하던 정부지출은 2010년 예산 기준 GDP대비 41.3%로 증가하였다(그래프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