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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돗물 민영화에 관한 오해 몇 가지 (4)

뉴욕타임즈에 따르면 최근 캘리포니아 주의 터미네이터 슈바르츠네거 주지사가 주 차원에서는 지난 1991년 만에 처음으로 ‘공식적으로 주차원에서의 가뭄(official statewide drought)’을 선포하였다고 한다.(원문 보기) 관련 공무원들은 상황이 매우 이례적임을 실토한 상황에서 주 전체적으로 물 부족 현상으로 인해 각종 개발계획이 뒤로 미뤄지고 있다고 한다. 즉 여하한의 개발계획도 현재로서는 장기간의 물공급 계획이 확실히 뒷받침되지 않고서는 허가를 받을 수 없다고 한다.

이러한 캘리포니아의 물부족 사태의 원인은 물론 자연재해적인 성격을 띠고 있으나 ‘비효율적인 인프라스트럭처(compromised infrastructure)’나 ‘지나치게 낮은 가격(seriously under-priced)’(주1) 과  같은 공급 및 유지관리적 측면과 ‘도시 지역보다 훨씬 물을 많이 쓰는 주의 농업(the state’s agriculture industry, which uses far more water than urban areas)’으로 인한 수요적 측면도 지적되고 있다.

잭 니콜슨이 주연한 로만 폴란스키의 걸작 ‘차이나타운(Chinatown)’이 바로 로스엔젤레스의 상수도 자원을 둘러싼 음모를 그린 느와르다. 그만큼 물 자원은 예전에도 이미 권력의 핵심적인 도구였거니와(주2) 차이나타운이 그린 1930년대에도 그러했고 현재도 역시 그러하다. 캘리포니아에서도 그러하고 서울에서도 그러하다. 21세기에 들어와서는 특히나 그 희소성이 높아질 것으로 보여 자본가들은 그것을 ‘파란 황금(blue gold)’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가뭄과 같은 자연현상이 인간이 통제하기 어려운 영역에 있다면 우리는 결국 공급과 수요에 있어서의 변화를 통해서 현재의 위기에 대처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선 수요에 있어서는 그것의 조절은 산업정책을 통한 해결방법이 있을 수 있고(주3) 개별 소비자들의 인식전환(주4)이 병행되어야 할 것이다.

공급 측면에서의 대안은 대규모 공급라인의 개발 등의 개발방식에서도 시민사회와 공급자 간의 이견이 존재하거니와 그 조달방식도 민영화냐 국가 또는 지방정부의 직접공급이냐에 따라 엄청난 갈등이 예상된다. 분명한 팩트 하나는 ‘비효율적인 인프라스트럭처(compromised infrastructure)’로 고생하는 것은 캘리포니아뿐 아니라 우리 역시 마찬가지라는 사실이다. 우리의 상하수도 시설 역시 우리가 살림살이에 신경 쓰느라 ‘삶의 질’에 신경을 못 쓰는 사이 급격하게 노후화된 것이 현실이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땅 속에 묻힌 상하수도관의 누수율은 비참할 정도로 높아서 상수나 하수시설에서의 비용증대뿐만 아니라 국토오염이라는 엄청난 기회비용까지 지불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최근 몇 년간 진행되어온 하수관거 BTL 민간투자사업이 바로 이러한 문제인식 하에 다소 무리하게 진행했던 사업이다. 상수관 역시 하수관과 비슷한 처지이고 현재 이에 대해 유수율 제고 사업이라는 타이틀로 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가가 그동안 공공서비스의 공급과 유지관리에 있어서 제대로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지 않았느냐는 비판을 제기하는 것은 타당하다. 그러나 한편으로 공공서비스의 양(量)적인 측면과 질(質)적인 측면의 계획과 공급, 그리고 유지관리가 과거 몇 십 년 간의 폭발적인 경제성장기에(주5)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 하는 것 또한 감안하여야 할 것이다.

여태 쓴 ‘수돗물 민영화에 대한 오해’ 시리즈가 이런저런 사이트에 퍼 올려진 것을 몇 개 보았다. 그런데 퍼다 나르신 분들 중 어떤 분들은 내 졸문에 대해 수돗물 민영화를 “찬성”하는 글이라면서 소개한 것을 보았다. 이것은 상당 부분 나의 졸렬한 글 솜씨 탓이기도 하지만 퍼다 나르신 분도 맥락을 조금은 잘못 이해하신 측면이 있다.

즉 이 시리즈의 기획 의도는 공공서비스의 조달방식에 있어서 ‘민영화’와 ‘국가 또는 지자체에 의한 직접공급’으로 나누고 전자를 절대악, 후자를 절대선으로 몰아가는 단순 이분법을 경계하는 것일 뿐이다. 이것은 자본주의 국가의 공공서비스 공급마저 계급성이 존재한다는 측면도 있거니와 특히 우리나라와 같은 개발독재 국가에서의 공급과 유지관리의 비효율성은 섣부른 민영화 못지 않게 비용낭비적인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주6) 또한 그 조달방식의 세세한 부분에 들어가서는 보다 기술적으로 미묘한, 그러하기에 우리가 세심히 접근하여야할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보다 근본적으로 의료서비스, 상하수도 서비스 등 현재 거론되고 있는 각종 공공서비스의 공급과 유지관리는 이전의 세기에서 계획하고 유지하였던 것보다 공급, 유지관리, 그것을 위한 우리가 감내하여야 할 비용측면에서 더 복잡한 양상을 띠게 될 것이고 사실 시기적으로 그것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시급한 실정이다. 그런데 지금 수구적이고 전근대적인 정부의 등장이 논의를 진전시키지 못한 채 이 사회를 ‘민영화’라는 단어 자체만으로 선악의 구분을 해야만 하는 ‘소통부재의 장’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 현재의 비극이다.

p.s. 오늘 어떤 기사를 보고 노무현 씨가 참 같잖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1) 이 표현은 본래 글의 맥락상으로 전 세계에서의 상하수도 민영화로 인한 가격폭등과 같은 차원이전에 물과 같은 희소자원에 대한 지나치게 싼 가격책정으로 인한 과소비적인, 결과적으로는 그것의 가격인상이 경제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는 현재와 같은 진퇴양난의 상황에서의 딜레마를 묘사한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주2) 모든 문명에서 가뭄이 닥쳤을 경우 기우제는 국가적인, 그리고 종교적인 행사였다

(주3) 대규모 플랜트 농업방식의 지양이나 산업현장에서의 중수도 사용의 적극적 장려 등

(주4) 이제 웬만한 도시인들은 10여분이 훨씬 넘는 샤워를 하지 않고서는 개운함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위생의식이 투철해졌지만 이 정도의 물의 엄청난 소비는 불과 몇십년 전만 하더라도 절대 다수의 사람들에게 상상도 못할 사치임은 분명하다. 이로 인한 물 부족 현상의 증가 예상치도 절대 무시 못 한다. 결국 상수 공급 계획은 인구에 대한 원단위로 계산되는데 최근 몇 십년간 이 원단위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였다.

(주5) 이는 비단 우리나라와 같은 신흥공업국의 이야기가 아니라 전체 인간의 문명사에 비추어 볼 때 자본주의 문명의 폭발적인 발전 추세를 말하는 것이다

(주6) 물론 소위 ‘효율성’이라는 단어를 쓸 적에는 ‘공공성’이나 ‘사회효용’과 불가피하게 충돌하는 측면에 대해서도 고려해야 하는 측면도 있긴 하다. 그럼에도 공익적이라고 해서 비효율적인 것이 용인될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