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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리핀의 딜레마 vs 역(逆)트리핀의 딜레마

<트리핀의 딜레마>는 기본적으로, 브레턴 우즈 체제가 경제성장의 결과 증가하는 화폐 수요를 달러 증발을 통해 만족시키는 비대칭적(즉 미국 중심의) 체제라는 사실에 기인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대칭적이고 평등한, 즉 <국제적인> 유동성 공급 메커니즘이 마련되지 않는다면 트리핀의 딜레마는 해결할 수 없는 것이었다.[차명수, 금융 공황과 외환 위기 1870-2000, 대우학술총서, 2000년, p156]

그렇게 어려운 개념은 아니다. 우선 간단히 브레튼우즈 체제의 기본원리를 설명하자면 그것은 전 세계에서 금보유고가 가장 많은 미국이 ‘강력한’ 달러를 금본위제로 운용하고 나머지 ‘화폐의 힘’이 소진된 나라들이 달러에 페그하여 환율을 운용한다는 원리였다.

그 당시로서는 일정부분 불가피한 선택이었는데 문제는 전 세계 경제가 발전함에 따라 기축통화인 달러에 대한 수요가 많아지면서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달러 유동성의 증가가 미국의 국제수지 적자를 불러오고 달러의 가치를 떨어트리면서 금 태환성을 위협하게 된다는 점이다. 이에 대처하기 위해 달러 공급을 줄이면 유동성이 줄어들게 되는 딜레마에 빠지는데 이것이 바로 예일대학의 R.트리핀 교수가 그의 저서 `금과 달러의 위기’에서 처음으로 제기한 트리핀의 딜레마다.

이 딜레마는 사실 조금만 머리를 굴려보면 충분히 예상 가능했던 문제점이라는 생각이 든다. 한 나라의 화폐는 대개 한 나라의 주권이 미치는 범위와 겹친다. 이 범위를 넘어서는 데에까지 그 화폐의 힘이 미치게 되면 그것이 그 정치경제적인 – 특히 경제적인 – 주권이 나라밖까지 확대되어 무역흑자든지 자본수지의 흑자로 밖으로 나가는 화폐를 다시 불러 모아야 한다는 당위성을 가진다. 그런데 경제력이 그렇게까지 받쳐주지 못한 채 계속 화폐발행만 진행이 되다보면 필연적으로 그 화폐의 기축통화로써의 가치는 소모되게 마련이다.

단위 : 백만달러
금보유고
단기채무
1950
22,820
10,410
1960
17,804
21,029
1971
10,206
67,858

돈은 어떻게 세계를 지배하는가, 클라우스 뮐러, 편집부 옮김, 들불, 1988년, p252

위 표를 보면 한때 전 세계 금의 70%를 차지할 정도로 막강했던 미국의 금 보유고 현황이 어떻게 몰락했는지를 알 수 있다. 결국 미국은 이전 통화패권국이었던 영국의 전철을 밟게 될 운명이었던 것이다. 물론 잘 알다시피 닉슨 행정부는 금태환을 포기하는 초강수로 트리핀의 딜레마를 돌파한다. 아직은 식민지를 잃으면서 쇠락한 제국주의 국가로 전락한 영국보다 더 경제적으로 경쟁력이 있었고, 무엇보다 막강한 군사력이 뒷받침되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여하튼 앞서 말했듯이 이러한 전후 자본주의 금환본위제의 모순과 그 갈등양상은 굳이 트리핀 교수의 말을 빌지 않더라도 예상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하기에 영국은 미국에게  국제중앙은행을 만들어 금과 연계된 별도의 국제통화(bancor)를 발행하자고 주장했고, IMF는 1969년 브레튼우즈의 고정환율제를 지원한다는 명분하에 특별인출권(SDRs ; The Special Drawing Rights)를 주창하기도 했다. 즉 일국의 통화가 아닌 상호신용에 의한 국제통화면 금환본위제, 즉 달러본위제의 모순을 해결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거기에 끝없이 묻어가는 미달러의 전 세계에 대한 세뇨리지, 즉 주조이익도 해결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이 이상은 바로 그 모순을 해결할 생각이 없는 미국에 의해 저지된다. 부르주아 국가의 권력이 파편화되어 있는 이상 많은 이들이 지적하듯이 전 세계 국가 및 인민의 공동의 이해를 담보할 수 있는 통화체제를 수립한다는 것은 사실상 공상에 가깝다. 개별 자본주의 국가의 계급적 이익이 분열되어 있는 세상에서 통화패권을 지니게 됨으로써 한 나라가 가질 수 있는 특권을 공공의 이익을 위해 포기할 수 있는 나라가 있을까? 미국이 아니라도 말이다.

미국은 SDR을 만드는 데 반대했다. 그 이유는 SDR가 달러의 기축 통화 지위를 약화시키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기축 통화를 발행하는 미국은 개별 나라의 정부가 그 나라 국민들로부터 주조 이득을 거두는 것처럼 세계 경제 전체를 대상으로 주조 이득을 올릴 수 있을 뿐 아니라 다른 나라들처럼 대외 균형에 얽매이지 않고 국내의 경제 정책 목표를 추구할 수 있는 특권을 누려왔다. 그러므로 슈퍼 파워 미국은 세계 화폐를 좋아하지 않았던 것이다.[차명수, 금융 공황과 외환 위기 1870-2000, 대우학술총서, 2000년, pp157~158]

금융위기, 또한 이로 인해 심화되고 있는 화폐의 위기를 맞이하여 전 세계가 합심하여 새로운 브레튼우즈 체제를 수립하여 진정으로 공공선을 도모할 수 있는 국제화폐 체계를 수립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발상도 순진한 것이지만, 미국과 나머지 선진국들이 전후 자연스럽게 달러를 기축통화로 선택하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관점도 순진하긴 마찬가지다. 미국은 기를 쓰고 당연히 그들이 누려야할 지위를 차지한 것이고, 이후 금태환을 포기하는 난리를 피우면서까지 기축통화의 지위를 포기하지 않은 것이다. 계급이 깡패인 셈이다. 그리고 그것의 현재 버전은 중국과의 환율전쟁이다.

뉴욕타임스의 칼럼에 따르면 오바마 대통령은 중국이 환율을 조작하고 있고, 이것이 공정무역(fair-trade) 원칙을 해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고 한다. 중국은 이에 대해 즉각적이고 민감한 반응을 보였는데 원자바오 총리는 다보스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에서 미국의 “금융 감독의 실패(the failure of financial supervision)”를 언급하면서 집안단속이나 잘 하라는 쓴 소리를 내뱉었다고 한다. 요컨대 오바마와 가이스너의 중국에 대한 비난은 이 블로그에서도 몇 번 지적하였고 뉴욕타임스의 해당칼럼에서도 지적하고 있지만(주1) 결국은 누워서 침뱉기다.

즉 중국은 지난 세기 낮은 위안화 환율과 저임금을 바탕으로 전 세계 자본주의의 공장 역할을 해내면서 선진국 자본주의 세계의 골디락스를 가능케 한 장본인이다. 지난 반세기 미국이 전 세계에 달러를 통해 화폐의 유동성을 공급하였다면 중국은 더 짧은 시기이긴 하지만 전 세계에 저가상품을 보내면서 상품의 유동성을 공급한 셈이다. 그러다보니 미국과는 반대로 국제수지흑자가 누적되고 결국 상품 유동성 지속을 위해 잉여 달러로 미재무부 채권을 사게 되는 역(逆)트리핀의 딜레마의 상황에 빠지게 된 것이다.

그러니 이제 중국이 오바마와 민주당의 소원대로 위안화의 가치를 올리면 어떠한 현상이 벌어질까? 중국상품의 가격이 올라갔으니 월마트가 중국상품의 수입을 줄이고, 미국인들이 미국상품을 선호하게 되고, 미국의 제조업이 부흥하게 될까? 그러한 즐거운 상상은 마치 기축통화로써의 달러를 포기하게 되면 유로와 옌등이 지역통화권을 자연스럽게 형성하여 달러 없는 좋은 세상이 오게 될 것이라는 부질없는 상상과 비슷한 헛된 망상이 아닐까? 그것이 오바마식의 공정무역이라면 아직 이 경제위기는 가야할 길이 멀어보인다.

(주1) 오바마와 민주당의 보호무역주의를 거세게 비난하는 이 칼럼의 작성자는 부시의 경제자문을 맡았던 하버드 교수다

공정무역

네덜란드의 비정부기구에 소속되어 커피 재배 농민들과 함께 일하고 있는 신부 한 사람은 재배 농가에 좀 더 나은 이익 배분을 보장해줄 특별 브랜드 커피를 생각해냈다. 1988년에 네덜란드에 처음 소개된 막스 하벨라르(Max Havelaar) 커피(네덜란드 식민지에서 커피 열매를 따는 원주민들의 착취에 저항했다는, 가공의 인물 이름을 땃다)는 곧바로 시장의 3퍼센트를 점유했다. 많은 유럽인이 소농민들과 직접 연계관계를 맺음으로써 다국적기업의 과도한 중간 이익 착취를 피한다는 아이디어에 공감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공정 무역’ 상표를 내건 또 다른 상품들이 차와 초콜릿 시장에 등장했다. 그러나 서로 다른 기준과 상표는 혼란을 가져왔다. 1997년, 17개국에서 온 집단들이 ‘공정 무역 상표 인증 국제기구(Fairtrade Labeling Organization International, FLO)’를 발족, 세계 여러 나라에서 공정 무역 기준을 표준화하고 그 인증과 실행 과정을 조정하게끔 했다. 이는 공정 무역 운동에 추가로 기폭제가 되었다. 옥스팜과 다른 비정부 기구에서 설립한 카페다이렉트(Cafedirect)는 영국에서 여섯 번째로 큰 커피 브랜드가 되었으며, 코스타커피나 프레타망제 같은 체인점에서도 공정 무역 커피를 팔기 시작했다.[죽음의 밥상(원제 : The Ethics of What We Eat), 피터 싱어/짐 메이슨 지음, 함규진 옮김, 산책자, 2008년, p231]

자유무역 對 공정무역

전에 “新냉전 시대의 도래?”라는 글에서 이렇게 적은 적이 있다.

한편 ‘자유무역’과 ‘세계화’는 또 하나의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해지곤 한다). 바로 경제권 통합을 통한 국가간 분쟁의 종식이었다. 즉 양차 세계대전을 통해 서구는 경제권의 통합이 각 나라간의 분쟁을 줄여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으며 그렇지 않을 경우, 나치와 파시스트의 등장에서 보듯이 또 다른 분쟁의 불씨를 증폭시키리라는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다음 글이 바로 그러한 “두려움”에 대한 묘사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 미국과 영국의 관리들은 국제 무역을 촉진시키는 새로운 시스템, 포괄적이고 유례없는 시스템을 만드는 데 선도적인 역할을 한 바 있다. 그들은 무엇을 피해야만 하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고율의 관세, 특혜 조약, 무역 장벽, 무역 통제, 그리고 “인근국 무력화(beggar thy neighbor)” 정책 등으로 양 대전 사이에 무너지고 만 무역 시스템을 되살리는 것이 그들의 주안점이었다. 그런 무시무시한 보호주의로는 전지구적 불황과 그에 따르는 정치적 문제들 그리고 끊임없는 전쟁만 일으킬 것이라는 것이 그들의 확신이었다. 그들의 꿈은 당시 전지구적 성장을 촉진시킨 19세기 후반의 개방적 무역 시스템의 회복이었다.[시장對국가(원제 The Commanding Heights), Daniel Yergin and Joseph Stanislaw, 주명건譯, 세종연구원, 1999, pp63~64]

지금의 유럽 상황을 – 특히 서유럽 상황 – 떠올려보면 지나치게 공포감이 과장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법도 하다. 이제 독일은 더 이상 가공할만한 세계대전을 일으킬 만큼 ‘나쁜 나라’도 아니지 않은가 말이다. 하지만 시간을 거슬러 양차대전의 후유증과 소비에트의 침략야욕(?)에 시달리고 있는 유럽인들과 바다건너 자본주의 세계의 최강자로 군림한 미국인들에게 위와 같은 논리가 비약만은 아니었을 것이라고 공감이 가기도 한다.

시간을 다시 되돌려 현재를 보자. 그들이 실현해낸 자유무역은 지구적 차원에서 안보를 지켜냈을까? 전쟁을 막아냈는가? 궤멸적인 제1세계에서의 집단전쟁은 막아냈을지 몰라도 지역분쟁은 끊이지 않았다. 꼭 그것이 역설적으로 자유무역이 원인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

또 자유무역이건 보호무역이건 간에 제1세계의 최강자 미국은 – 서유럽의 분쟁을 막아내고자 했던 그 나라 – 자국의 경제적 이익과 정치적 이니셔티브를 위해 거의 유일하게 전 세계 곳곳에서 대놓고 대량학살로 이어지는 전쟁을 수행한 악의 전도사를 자처했다. 그리고 자유무역이 전 세계를 통합한 이후 – 특히 금융에 대한 장벽해체 이후 – 많은 신흥국들이 전쟁에 준하는 경제폭탄을 맞아 신음하기도 했다. 급기야는 자유무역이 금융 강국 본토인 미국과 서유럽마저 혼절시키고 말았다.

그러니 어쩌면 딱 이 시점이 자유무역이 과연 지구촌을 평화와 번영으로 이끄는 유일한 대안인가 하는 고민을 해볼 시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전쟁도 못 막고 경제위기도 가속화시키는 것으로 강하게 추측되는 자유무역이 과연 신주단지처럼 모셔야할 절대진리인가 하는 의문 말이다. 미국의 새 대통령 오바마도 자유무역(free trade)보다는 공정무역(fair trade)이란 표현을 즐긴다고 하지 않던가. 물론 그것이 좌파진영에서 쓰는 같은 표현과는 다른 뉘앙스를 강하게 풍기지만 말이다.

자본주의로 세상을 구원하려는 실험

은행이 담보도 없이 돈을 빌려준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그것도 가난하고 미천한 방글라데시의 여인네들에게? NO WAY!

미시신용

바로 그러한 선입견을 깬 이가 무함마드 유누스 Muhammad Yunus 다. 그는 세계 최빈국 방글라데시에서 태어났지만 유복한 보석세공사의 집안에서 태어나서 공부도 잘한 덕택에 영국에서 경제학 공부를 하고 돌아와 고국에서 교수로 편안한 삶을 살게 되어 있었다. 하지만 가난한 이들이 빈곤의 악순환에 빠져드는 모습을 보고 이른바 미시신용 microcredit 의 개념의 효시라 할 수 있는 금융제도를 착안한다.

그의 돈 빌려주는 방식은 가난한 이들에게 – 특히 여성들에게 집중적으로 – 무담보 소액대출을 통해 일종의 가족 사업을 벌일 밑천을 대주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자선의 성격이 짙었겠으나 의외로 회수율이 99%에 달할 정도로 상식을 깨는 수준이었기에 그의 사업(?)은 번창일로에 접어들었다. 그리고 그의 ‘그라민은행 프로젝트(Grameen Bank Project)’의 성공의 보답으로 2006년 노벨상까지 수상하게 되었다.(주1)

소셜비즈니스

그는 최근 Common Dreams 웹사이트에 “어떻게 소셜비즈니스가 가난 없는 세상을 창조할 수 있는가(How Social Business Can Create a World Without Poverty)”라는 글을 기고했고, 이글을 통해 그가 실천해낸 미시신용이 어떻게 제1세계, 나아가 전 세계에 적용할 수 있는 가를 설명하였다.

그의 핵심적인 주장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제행위를 함에 있어 이윤추구는 정당한 것이지만 그만으로는 반쪽짜리이며 배려, 관심, 나눔, 동정 등의 요소들도 고려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갖추고 있는 개념이 바로 소셜비즈니스(주2) 라 할 수 있다.

Muhammad Yunus at Chittagong Collegiate School.JPG
Muhammad Yunus at Chittagong Collegiate School” by Hossain Toufique Iftekher – Own work. Licensed under CC BY-SA 3.0 via Wikimedia Commons.

자본주의는 세상을 구원할 수 있는가

소셜비즈니스의 핵심은 다음 문장을 통해 파악할 수 있다. 즉 그것은 자선은 아니되 사회효용적인 차원에서 이익이 되는 방향을 의도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문장에서 ‘돈빌려주는 사람(owner)’은 이익을 취할 생각을 하지 말라고 되어 있는데 이 부분이 논란의 여지가 있어 보인다.

A social business is not a charity. It is a nonloss, nondividend company with a social objective. It aims to maximize the positive impact on society while earning enough to cover its costs, and, if possible, generate a surplus to help the business grow. The owner never intends to take any profit for himself.

그렇다면 그가 소셜비즈니스를 통해 꿈꾸는 사회는 어떠한 사회일까? 분명 가난이 추방된 사회일 것이다. 그러나 또한 그것은 자본주의 체제가 극복된 사회는 아니다. 그는 자본주의가 인간의 본성을 너무 편협하게 해석하였지만 번영을 가져다주었고 산업을 자극시켰다는 점에서 분명 매력적이라고 보고 있다. 비록 그것이 미국의 유럽 사회에만 집중적으로 번영을 가져다주었지만 이제 그가 발전시킨 미시신용을 통해 제3세계 국가의 빈민들도 이 번영을 누릴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말하고 있다.

Capitalism has the capacity to do good in the world, provided we recognize that the motivation for the entrepreneur need not be exclusively economic and personal.

의미 있는 실험, 그러나

그의 실험은 분명히 의미 있는 것이었다. 예전에 본 그에 관한 다큐멘터리에서 초근목피로 연명하던 이들이 그의 은행에서 돈을 빌려 어엿한 자산가(주3)가 되기도 하는 광경을 직접 보았고 실제로 그의 프로젝트를 통해 약 600만 명이 혜택을 보았다고 한다. 그리고 최근엔 미시신용이라는 이러한 그의 아이디어를 원용한 사업도 창출되고 있다. 일례로 웹사이트에서도 이러한 사이트가 많이 생겨나고 있는데 Prosper.com 을 한 예로 들 수 있다.

하지만 비판도 있다. 그의 프로젝트 성과가 실제보다 부풀려 졌다는 이야기도 있고 프로젝트의 지속가능성에 대해서도 의구심을 갖는 이들도 있다. Common Dreams 에 유누스가 쓴 글에 댓글을 단 alexnosal 이라는 누리꾼은 방글라데시에는 미시신용이 있겠지만 미국 주식회사에는 이미 거시신용 macrocredit 이 버티고 있는데다 모든 것은 프랜차이즈化 되어 있어 미국에 유누스의 방법을 적용하기에는 너무 많은 장벽이 있다고 정확히 지적하고 있다.

어느 무정부주의자의 비판

방글라데시와 같이 금융의 인프라가 절대부족한 곳에서는 그의 프로젝트가 마치 먹물이 백지에 스며들듯 효과를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소상인들도 금방 기반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alexnosal 라는 이의 글처럼 제1세계 – 미국이 아니라 우리나라만 보더라도 -에서 과연 품앗이로 빌린 소액의 돈으로 할 만한 마땅한 사업이 있을까? 동네빵집? 파리바께뜨 아니면 장사가 안 되는데 그게 한두 푼으로 되는가?

보다 근본적인 비판은 kropotkins이라는 이가 제기하고 있다. 무정부주의자임이 분명한 이 누리꾼은 사회적으로 이익이 되는 체제라면 왜 여전히 ‘주인(owner)’와 ‘금전의 문지기(monetary gatekeeper)’가 존재하여야 하는가라고 묻고 있다. 또한 그는 결국 국가와 자본주의의 절멸만이 진정으로 인간적인 사회의 전제조건이라고 일갈하고 있다.

If the point is to have a socialy benificial system then why would we still need owners and monetary gatekeepers.

그럼에도 의미 있는 실험

무정부주의자는 그를 쓰레기로 폄하하였지만 분명 그의 실험은 의미 있다. 또한 제1세계에서도 이른바 사회책임투자 펀드가 조금은 다른 방식으로 실험을 하고 있다. 나는 이것이 우리에게 또 다른 개념을 던져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자유(free)로운 경제’도 중요하지만 ‘공정(fair)한 경제’도 중요하다는 사실이다. 즉 유누스가 말한 배려와 나눔이 없이 오직 돈벌 자유만 판치는 경제가 아닌 서로 골고루 분배하는 경제가 이 사회에서는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인간적인 자본주의자’ 유누스가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애초에 GATT 가 출범할 적에 그 본래 목적은 사실 ‘자유무역’의 촉진이 아닌 ‘공정무역’의 촉진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공정무역’이라는 개념은 사라지고 그 자리를 ‘자유무역’이 대체하고 있다. 경제학자는 자유무역이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것이라고 복잡한 수식을 써가며 설명하여 왔다. 하지만 그 무한자유가 제1세계, 제3세계 공히 피착취 계급에게는 ‘공정한 게임’이 아니었음이 이제 드러나고 있지 않은가. 이를 설명할만한 수식을 경제학자들이 만들어주었으면 한다. 아니면 유누스처럼 가난한 이들에게 돈이라도 빌려줘 보던가.

그런데 한 실험에 의하면 경제학과 학생들이 가장 이타적인 행위에 인색하다고 한다. 수업을 너무 충실하게 들은 탓(덕택)인지….(주4)

(주1) 그런데 노벨 경제학상이 아니라 노벨 평화상이다. 세계는 아직도 가난한 이에게 돈을 빌려주어도 떼먹히지 않을 것이라는 그의 경제학 이론을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되어 있는 모양이다.

(주2) 우리 말로 하면 ‘사회사업’이 될 것인데 그렇게 되면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사회사업과 너무 혼동되어서 그냥 원어 식으로 표현한다

(주3) 그들 동네에서 자산가였는데 사실 여전히 궁핍하긴 했다

(주4) 혹시 경제학도시라면 화내지 마시길… 실험은 실험일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