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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프라스트럭처에 관해 존재했던 “사회적 합의”

최근 서울시의 지하철9호선 민간투자사업이 “자금재조달”을 통해 금융비용을 크게 낮추고 요금도 현행을 유지하는 등의 내용을 골자로 하는 변경 실시협약을 체결하였다. 이로써 몇 달 전 민간사업자가 “기습적으로” 지하철 요금을 인상하려던 계획을 서울시가 저지하면서 빚어졌던 갈등이 일단락됐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이 과정에서 “시민의 발”을 민간사업자의 횡포로부터 지키는 수문장 역할을 하는 정치적 승리를 거두게 되었다.

“민영화”라는 키워드는 오늘날 진보-보수 논쟁에서 핵심적인 키워드로 등장하였다. 신자유주의 시대에 접어들면서 계속 진행되어 온 국유기업의 민간매각, 그리고 전통적으로 국가가 담당하였던 것으로 알려진 인프라스트럭처의 – 또는 사회간접자본 – 민영화, 즉 민간투자사업은 이전 세대가 겪어왔던 것과는 또 다른 경험을 안겨주면서 갈등의 요인이 되고 있다. 앞서 예로 든 지하철을 둘러싼 市정부와 민간사업자의 갈등이 대표적 사례다.

하지만 통념과 달리 민간투자사업이 문명세계에 있어 전혀 새로운 풍경인 것은 아니다.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아직 국가의 정체성이나 공권력이 형성되지 않았던 시기에는 오히려 민간이 오늘날 “인프라스트럭처”라 말하는 대부분의 것을 만들었을 것이다. 다만 우리가 “인프라스트럭처”라 칭할만한 정도의 시설이 등장하는 시기와 장소는 아무래도 대량생산과 대량소비가 싹을 틔우는 중세 이후의 시기의 선진국, 예를 들면 영국과 같은 나라에서다.

대량생산의 시대에 접어들면서 영국의 자본가들은 생산지, 공장, 그리고 시장을 잇는 데 필요한 운하나 도로를 직접 건설하거나 국가가 건설하여줄 것을 요구한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미 이 당시에 도로와 같은 인프라스트럭처가 민간 사업자에 의해 건설되고 요금을 징수하는 방식이 도입된다. 영국에는 이미 13세기 초반부터 포도세(鋪道稅, Pavage) 제도가 있었는데 민간이 도로를 건설하여도 통행자들에게 요금을 징수할 수 있었다.

이러한 민간도로가 본격화된 것은 17세기부터다. 당시엔 “유료도로 위탁업자(turnpike trusts)”가 국가의 양허권을 얻어 자신이 만든 도로에 차단기와 담을 설치하고 지나다니는 이들에게 통행료를 받았다. 오늘 날의 도로 민간투자사업의 사업방식과 별로 다르지 않다. 요금수준은 도로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수준으로 한정했지만 때로는 폭리도 있었던 모양으로 아담 스미스는 국부론에서 “두 배 이상의 요금을 받고 있다”고 꾸짖을 정도다.

이러한 민간도로는 이후 18세기 들어 국가가 직접 간선도로를 짓기 시작하고 레베카 폭동 등 요금에 대한 저항이 거세지면서 – 다만 이 폭동은 자연재해와 학정 등 일반적으로 열악한 인민의 삶에 대한 저항이었다 – 19세기 이후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특이한 것은 민간도로의 쇠퇴에 아담 스미스를 비롯한 고전적 자유주의 경제학자의 역할도 컸다는 점이다. 이들이 민간도로의 통행료를 자유무역의 걸림돌, 즉 관세로 보았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자들에게는 당연한 이치인 것처럼 여겨지는 인프라스트럭처에 대한 민간의 사업권이 실은 고전적 자유주의 경제학자에게는 불편한 풍경이었던 셈이다. 아담 스미스는 국부론에서 적지 않은 지면을 할애하여 “공공시설(public works)”은 국가에 의해 관장되는 것이 바람직한데, 영국정부에게 이미 프랑스와 중국은 그렇게 하고 있다고 훈계하기도 한다. 아담 스미스가 이런 주장을 하는 이유는 “상업 일반의 촉진에 유리”하기 때문이었다.

오늘 날도 마찬가지지만 당시에도 도로, 철도, 운하 등이 없이 상업 일반의 발전은 상상할 수 없었다. 오늘 날에는 이와 더불어 통신, 발전 등의 인프라스트럭처가 제대로 갖춰져야 상업 일반의 발전이 가능하다. 그런데 이 인프라스트럭처들이 민영화 등을 통해 시장가격化 된다면 그것은 과거 자유무역을 가로막았던 관세처럼 상업, 나아가 산업 일반의 발전을 저해할 것이기에 고전경제학은 인프라스트럭처의 국가 관리를 지지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사실 인프라스트럭처의 민영화가 전례 없이 진행된 요즘에도 국가는 여전히 산업과 가계의 인프라스트럭처 소비에 대해 차별적인 정책을 취하며 산업의 발전을 돕는다. 전기, 철도 등 주요 시설의 이용요금은 민영화 여부와 상관없이 가계보다 산업이 더 적은 비용을 지불한다. 이쯤 되면 결국 인프라스트럭처를 둘러싼 논의에 관리주체로 인한 정당성 논의도 필요하지만 그 소비의 차별에 대한 정당성 논의도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산업에 대한 특혜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은 산업이 그만큼 세수에 책임을 진다는 명분이다. 하지만 기업들이 초국적으로 활동하며 특정국에서 누리는 이익에 상응하는 대가를 회피한다는 비판도 높다. 또는 세수에 있어서도 상응하는 대가를 치르고 있는지도 의문이다. 2013년 1~6월까지 우리나라의 법인세 실적은 25.6조원인데 소득세 22.8조원을 약간 넘는 수준이다.1 사실상 가계 부담인 부가세 27.9조원을 감안하면 그 비중은 더 낮아진다.

하버드의 경제학자에서 의원으로 변신한 엘리쟈베스 워렌은 저 유명한 가정집에서의 연설에서 기업이 자유로운 상업 활동을 할 수 있도록 국가가 배려하는 배경에는 그들이 상응하는 사회적 책임을 진다는, 일종의 사회적 합의가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비록 그 합의는 서명이 된 합의서가 존재하지는 않지만 많은 이들이 그것을 전제로 경제활동을 하였거나 또는 자신의 사상을 펼쳤을 것이다. 지금은 일상적으로 무시되고 있는 그 합의.

이 글의 출처는?

우리의 상인과 제조업자는 높은 임금의 나쁜 영향에 대해 크게 불평하면서도, 높은 이윤의 나쁜 영향에 대해서는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기 자신의 이윤이 미치는 해로운 영향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타인들의 이득이 미치는 해로운 영향에 대해서만 불평하고 있다.

왠지 굉장히 좌파적인 냄새가 풍겨나는 이 글은 어느 책에 등장하는 글일까? 흥미롭게도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에 나오는 글이다. 아담 스미스는 정치경제학자이자 또한 윤리철학자였다. 그러하기에 그는 매뉴팩처 자본주의 시대에 이제 막 자산가로 군림하고 있는 자본가들이나 제조업자들의 이기적인 행태가 못마땅하였음이 분명하다. 책의 전반적인 분위기도 이러하지만 오늘날의 주류경제학자들의 눈엔 그러한 면은 보이지 않고 오직 ‘보이지 않는 손’만 보일 뿐이다.

위 글의 출처는 국부론 상권, 애덤 스미스 著, 김수행 譯, 두산동아, 1992, p104

탐욕은 좋은 것이다

Oliver Stone 의 1987년 작품 Wall Street 의 한 장면. 기업사냥꾼 Gekko가 자신이 최대주주로 있는 Teldar Paper 의 주주총회에서 주주들에게 행한 연설이다.

나는 기업의 파괴자가 아닙니다. 나는 그들의 해방자입니다. 요점은, 신사숙녀 여러분, 그 탐욕은, 다른 좋은 말이 생각나지 않아서, 좋은 것입니다. 탐욕은 옳은 것입니다. 탐욕은 행해지게 합니다. 탐욕은 뚜렷하게 하고, 헤치고 나가고, 그리고 진보적인 정신의 정수를 획득합니다. 탐욕, 그 모든 것들 중에서, 인생, 돈, 사랑, 지식에 대한 탐욕은… 인류를 급격히 고양시켰습니다. 그리고 탐욕은… 제 말 잘 들어보세요.. 텔다 제지를 살릴 뿐 아니라 U.S.A라고 불리는 다른 삐걱거리는 기업도 구할 것입니다.

I am not a destroyer of companies. I am a liberator of them! The point is, ladies and gentlemen, that greed, for lack of a better word, is good. Greed is right. Greed works. Greed clarifies, cuts through, and captures the essence of the evolutionary spirit. Greed, in all of its forms… greed for life, for money, for love, knowledge… has marked the upward surge of mankind, and greed… you mark my words… will not only save Teldar Paper, but that other malfunctioning corporation called the U.S.A.

아담 스미스가 현세에 태어나 기업의 주주총회에 나가서 연설을 하라면 이런 식으로 연설을 하지 않을까싶다. 물론 영화에서 Gekko의 연설은 주주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는다. 탐욕(또는 욕망)은 어떤 인간에게서든 잠재해있는 본능이고, Gekko는 뛰어난 언변으로 그 본능을 자극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 탐욕이 역사를 움직여온 것이 사실이다. 탐욕은 수많은 희생을 발밑에 깔고 문명을 헤쳐 왔지만 어쨌든 Gekko의 말대로 진보를 이룩한 것도 사실이다. 다만 문제는 – 영화의 스토리 진행도 그렇지만 – 절제되지 않는 탐욕이다. Gekko의 제동장치 없는 탐욕은 타인의 삶을 앗아가는 탐욕이었고 결국 그의 충복 Bud의 배신을 초래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영화가 만들어진 후 20년 후 실제 세상에서 통제되지 않는 탐욕은 미국이라는 삐걱거리는 기업을 더욱 망치고 있다.

추. Oliver Stone 의 아버지 Louis Stone은 50년 넘게 Wall Street에서 일했고 이 작품은 그에게 헌정되었다.(관련 글 보기)

고전에서 마주친 자유무역론

퀴즈로 글을 시작하도록 하자. 다음 글은 어디에서 등장하는 글일까?

“당신은 당신만의 특별한 무역이나 당신의 사업이 보호관세에 의해 원조 받고 있다고 속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법률은 장기적으로 이 나라의 부를 감소시키고, 우리의 수입품의 가치를 떨어트리고, 이 땅에서의 삶의 질을 저하시키는 것입니다.”
“You may be cajoled into imagining that your own special trade or your own industry will be encouraged by a protective tariff, but it stands to reason that such legislation must in the long run keep away wealth from the country, diminish the value of our imports, and lower the general conditions of life in this land.”

Adam Smith 의 국부론? 아니다. 정답은  Arthur Conan Doyle 경이 1901년에서 1902년에 걸쳐 Strand 잡지에 기고하였고 후에 단행본으로 출간되어 추리소설의 걸작으로 남은 The Hound of the Baskervilles 이다. 조금은 의외의 공간에서 만난 경제에 관한 글이다.

소설에서 이 글은 Times 신문의 기사로 소개되고 있다. 그리고 이 기사는 음울한 전설의 희생양이 될 가능성이 있는 Henry Baskerville 경에게 배달된 익명의 경고장에 오려붙여진 단어들의 원 기사로 사용되었다. 정체모를 사람이 보내온 경고장은 다음과 같다.

“As you value your life or your reason keep away from the moor.”

이 문장을 보면 moor 라는 단어를 빼놓고는 모두 위의 기사에서 찾을 수 있는 단어들이었고 Sherlock Holmes 가 이 사실을 재빠르게 알아차린다는 설정이다.

여하튼 소설에서 등장인물들은 경제에 대해선 그다지 많이 알지 못한다는 언급만을 한 채 다시 자신들의 관심사인 범죄에 관한 대화로 돌아간다. 그렇더라도 어찌 되었든 이 장면은 그 당시 자본주의 최강국인 영국에서 펼쳐지고 있던 무역에 관한 논쟁들의 단편을 보여주는 풍속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자유무역과 보호무역에 관한 오랜 투쟁은 이 소설이 발표된 1900년 초입을 더 거슬러 올라가 1800년대 초부터 본격화된다. 대표적인 사례는 1815년에 제정하여 1846년에 폐지한 영국곡물법을 들 수 있다.

‘곡물법(穀物法 , Corn Law)’이란 무엇인가? 이 법은 곡물의 수출입을 규제하기 위한 법률로 같은 이름의 법이 중세에서부터 있었지만 19세기 초반의 영국 법률이 대표적이다. 이 법은 소맥의 가격이 일정 정도가 되기 전까지는 수입을 금지함으로써 표면상의 목적은 곡물 가격의 등락에 대해 자국의 농업을 보호하고자 하는 것이었으나 그 속을 들여다보면 영국 지주계급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한 대표적인 보호무역주의 악법이었다.

그 당시 자유무역의 선봉장 리카도 David Ricardo 를 비롯한 여러 명망가들이 법의 폐지를 주장하였으나 의회의 다수파를 이뤘던 지주계급은 이 법을 강력히 옹호하여 결국 1846년이 되어서야 법이 폐지되었다. 리카도는 생전에 법의 폐지를 볼 수 없었다.

그 이후 곡물규제는 마침 위의 소설이 발표되고 있던 시점인 1902년과 1932년에 다시 필요하게 되어, 1902년에는 수입 곡물과 밀가루에 최소한도의 관세가 부과되었으며, 1932년에는 해외 수입의존도 증가를 우려하여 제정법으로 영국산 밀을 보호했다.

요컨대 이당시 보호무역주의는 명백히 봉건시대의 지배계급인 지주계급의 계급적 이익을 보호하고자 하는 폭거였다. 즉 지나치게 높은 곡물가격은 임금상승의 요인이 되어 산업경쟁력을 해치게 된다.(주1) 이것이 당시 지주계급에 대항하는 신흥 부르주아의 일반적인 정서였다고 할 수 있다. 노동자의 생계비용의 큰 몫을 차지하는 곡물가격의 앙등은 좀 더 낮은 임금으로 노동자를 부려먹어야 하는 자본가 계급의 계급이해에 합치하지 않는 것이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 당시의 자유무역 주창자들은 당시의 지배계급인 지주들의 기득권을 깨부수기 위하여 투쟁하였던 일종의 진보주의자들이었던 셈이다. 그리고 곡물법의 폐지는 자본가 계급들이 실질적으로 경제의 헤게모니를 쥐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상징적인 사건이 되었다.

p.s. 어쩌면 이것이 그 당시의 자유무역 주창자들과 오늘 날의 주창자들의 다른 점이다. 쉽게 이야기해서 처지가 바뀌었다는 것이다. 그 당시는 아직까지 사회주류가 아니었다. 프랑스 혁명당시에는 노동자들과 함께 제3계급으로 분류되는 수모까지 겪었다. 하지만 오늘날 자본가 계급은 분명히 지배계급이다. 그리고 농업을 생업으로 하는 이들은 더 이상 지배계급이 아닌 소농들이거나 기업농, 즉 또 다른 자본가계급이다. 요컨대 계급지형이 싹 바뀌었다는 이야기다. 이에 대해서는 추후 기회 되면 이야기를 풀어 가보도록 하겠다(maybe or maybe not).

 

(주1) 한편 맬서스는 리카도와 배치되는 입장에서 농업의 보호를 주장하였는데 그 이유 중 하나가 오늘날 농업보호를 위해 많이 주장되는 농업의 비교역적 조건, 즉 농업의 식량자원으로의 이용가능성을 들고 있다. 오늘 날에는 이에 덧붙여 농축산물의 위생문제도 많이 거론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