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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제와 인센티브가 생겨나는 과정

18세기 중반까지 도로의 통행량은 매우 많았다. 그리고 고속도로를 수리하는 데에 사용된 수단이 가장 효율적이라면, 당시 널리 쓰이던 좁은 바퀴의 마차가 무거운 짐을 싣는 것을 허용되지 않은 것으로 여겨진다. 이에 따라 1753년의 법은 유료도로를 이용하는 짐마차, 객차들의 바퀴는 9인치 폭이어야 할 것을 규정하고, 이를 어길 시 5파운드 혹은 말 한 필의 벌금을 물어야 했다. 조합은 광폭의 바퀴를 단 마차는 특별요금을 경감시켜줄 수 있었고 마차 바퀴의 폭을 지정하여 도로 입구에서 이를 측정할 수 있었다.[The Development of Transportation in Modern England, W. T. Jackman, Cambridge at the University Press, 1916, pp 75~76]

18세기 영국에서는 유료도로에 관한 법적 근거가 좀 더 명확히 제정되어 이전 세기에도 존재했던 유료도로가 더욱 성행했다. 도로의 유지관리는 통행료를 징수하는 ‘유료도로 조합(turnpike trustee)’의 의무였다. 유지관리에 있어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는 바로 인용문에서와 같은 폭이 좁은 바퀴를 단 과적차량이었다. 이런 마차는 당연히 도로의 바퀴가 지나는 부분을 더 깊게 파이게 할 것이었기 때문이다. 인용문을 보며 규제와 인센티브가 어떻게 형성되어 가는가에 대해 알 수 있었기에 번역하여 여기 옮겨 적어 둔다.

사회기반시설의 공급과 유지관리, 누구에게 맡길 것인가

1663년 영국의 도로 관련 법규에 또 다른 이정표가 등장한다. 최초의 유료도로법(Turnpike Act)이 “하트퍼드, 캠브리지, 헌팅턴 주내의 고속도로 보수를 위한 법”이란 이름으로 통과된 것이다. [중략] 이 법의 서문이 말하길 “이 지역에 대한 법령에서 정한 통상의 과정이 도로의 효과적인 보수에 불충분”하기 때문에, 그리고 도로가 놓인 지역의 거주민들이 더 많은 자금 지원 없이는 이를 고칠 수 없기 때문에, 법에 정한 수단을 통해 이러한 상황을 최대한 치유하는데 조력하는 것이 이 법에서 고려되었다. [중략] 이들 세 개 주의 도로를 보다 신속하게 보수하기 위해 각 주의 감찰관은 사법관의 동의하에 현재가치로 자금을 내는 이에게 9년 이하의 범위에서 그 이윤을 저당 잡힐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다.[The Development of Transportation in Modern England, W. T. Jackman, Cambridge at the University Press, 1916, pp 61~62]

이 도로들과 법률이 오늘날 흔히 “민자도로”라고 불리며 민간자본에 의해 건설 및 유지·관리되는 도로와 – 예를 들면 신공항 고속도로나 천안~논산간 고속도로와 같은 – 이 사업을 규정하는 법률의 원조 격의 법률이다. 도로와 같은 사회기반시설은 통행하는 이들에 의해 자연발생적으로 생기거나 무역의 필요에 의해 인공적으로 만들어지기도 했지만, 이들 도로에 대해 통행인이 직접 대가를 지불하게끔 하는 법률적 근거가 마련된 것은 이 시기가 처음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이보다 더 이른 시기에 통행료가 징수된 역사도 존재한다. 시대를 거슬러 올라간 13세기 경 잉글랜드와 웨일스의 일부 성은 왕의 허가 하에 성에 들어오고자 하는 상인들에게 일종의 통과세인 이른바 “성벽세(城壁稅, Murage)”를 징수하였다. 이 돈은 주로 성벽의 보수에 사용되었으나 또한 성 주변의 도로의 보수에도 이용되었기 때문에 넓은 의미의 통행료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도로에 대해 본격적으로 통행료를 걷은 것은 앞서의 유료도로법에 의해서가 처음이다.

여하튼 도로 이용자가 통행료를 지불하는 원칙, 이른바 “오염자 부담원칙(Polluter Pay Principle)”이 영국에서 시도된 데에는 이전의 법령과 권위로 도로의 건설과 유지·관리가 한계에 부닥쳤기 때문이다. 사회기반시설은 여러 특징이 있지만 대표적인 특징 중 하나가 외부효과다. 이러한 특성 때문에 기꺼이 도로를 건설 혹은 관리하려는 이가 없었기에 당국은 꽤 오랜 기간 지주, 교구 등에 그 의무를 부담시키고 주민의 강제노역을 부과하는 등의 수단을 동원해 왔다.

A toll bar in Roumania, 1877.jpg
By The Graphic – The Graphic, Public Domain,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20435592

하지만 이것이 가지는 한계는 명백했다. 즉, 강제적인 경제행위 – 물론 자발적인 노동으로 미화되었겠지만 – 가 가지는 인센티브 부여의 실패가 그것이다. 그래서 나온 대안이 사회기반시설의 또 하나의 특징인 비배제성(非排除性)1을 배제성으로 전환하여 그 비용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유료도로의 영단어 turnpike는 창(pike)을 길 가운데 설치하여 돈을 낸 이가 지나갈 수 있게 돌린다(turn)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 권한을 민간에게 위양한 것이 중세의 민자도로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볼 때 이 유료도로가 저항 없이 순탄하게 유지된 것은 아니다. 대표적인 실패 사례가 19세기 중반 남부와 중부 웨일스 지역에서 발생한 레베카 폭동이다. 영국에서의 유료도로로 돈을 버는 유료도로 기금(turnpike trust)는 한때 1천개 이상일 정도로 흥했다. 그런데 어느새 준조세가 된 이들의 징수요금이 가난에 시달리는 농민 계층에게 분노의 대상이 된 것이다. 이 폭동의 결과로 당국은 입법을 통해 부당한 요금의 인하 등을 시행하여 민심을 달랬다.

자원의 강제동원 실패가 “정부의 실패”의 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면 레베카 폭동의 사례는 “시장의 실패”의 한 사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 날의 사회기반시설은 이러한 역사의 양측에서의 실패 경험을 바탕으로 계속 그 시행방식을 바꾸어가고 있다. 우리의 상황을 보면 정부주도의 공급이 정치적 요소에 따라 지역편중적인 폐단이 있다면 민간주도의 공급은 비싼 서비스 가격에 대한 저항의 폐단이 있다. 어느 것이 정답인지에 대한 고민은 아직 현재진행중인 것 같다.

인프라스트럭처에 관해 존재했던 “사회적 합의”

최근 서울시의 지하철9호선 민간투자사업이 “자금재조달”을 통해 금융비용을 크게 낮추고 요금도 현행을 유지하는 등의 내용을 골자로 하는 변경 실시협약을 체결하였다. 이로써 몇 달 전 민간사업자가 “기습적으로” 지하철 요금을 인상하려던 계획을 서울시가 저지하면서 빚어졌던 갈등이 일단락됐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이 과정에서 “시민의 발”을 민간사업자의 횡포로부터 지키는 수문장 역할을 하는 정치적 승리를 거두게 되었다.

“민영화”라는 키워드는 오늘날 진보-보수 논쟁에서 핵심적인 키워드로 등장하였다. 신자유주의 시대에 접어들면서 계속 진행되어 온 국유기업의 민간매각, 그리고 전통적으로 국가가 담당하였던 것으로 알려진 인프라스트럭처의 – 또는 사회간접자본 – 민영화, 즉 민간투자사업은 이전 세대가 겪어왔던 것과는 또 다른 경험을 안겨주면서 갈등의 요인이 되고 있다. 앞서 예로 든 지하철을 둘러싼 市정부와 민간사업자의 갈등이 대표적 사례다.

하지만 통념과 달리 민간투자사업이 문명세계에 있어 전혀 새로운 풍경인 것은 아니다.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아직 국가의 정체성이나 공권력이 형성되지 않았던 시기에는 오히려 민간이 오늘날 “인프라스트럭처”라 말하는 대부분의 것을 만들었을 것이다. 다만 우리가 “인프라스트럭처”라 칭할만한 정도의 시설이 등장하는 시기와 장소는 아무래도 대량생산과 대량소비가 싹을 틔우는 중세 이후의 시기의 선진국, 예를 들면 영국과 같은 나라에서다.

대량생산의 시대에 접어들면서 영국의 자본가들은 생산지, 공장, 그리고 시장을 잇는 데 필요한 운하나 도로를 직접 건설하거나 국가가 건설하여줄 것을 요구한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미 이 당시에 도로와 같은 인프라스트럭처가 민간 사업자에 의해 건설되고 요금을 징수하는 방식이 도입된다. 영국에는 이미 13세기 초반부터 포도세(鋪道稅, Pavage) 제도가 있었는데 민간이 도로를 건설하여도 통행자들에게 요금을 징수할 수 있었다.

이러한 민간도로가 본격화된 것은 17세기부터다. 당시엔 “유료도로 위탁업자(turnpike trusts)”가 국가의 양허권을 얻어 자신이 만든 도로에 차단기와 담을 설치하고 지나다니는 이들에게 통행료를 받았다. 오늘 날의 도로 민간투자사업의 사업방식과 별로 다르지 않다. 요금수준은 도로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수준으로 한정했지만 때로는 폭리도 있었던 모양으로 아담 스미스는 국부론에서 “두 배 이상의 요금을 받고 있다”고 꾸짖을 정도다.

이러한 민간도로는 이후 18세기 들어 국가가 직접 간선도로를 짓기 시작하고 레베카 폭동 등 요금에 대한 저항이 거세지면서 – 다만 이 폭동은 자연재해와 학정 등 일반적으로 열악한 인민의 삶에 대한 저항이었다 – 19세기 이후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특이한 것은 민간도로의 쇠퇴에 아담 스미스를 비롯한 고전적 자유주의 경제학자의 역할도 컸다는 점이다. 이들이 민간도로의 통행료를 자유무역의 걸림돌, 즉 관세로 보았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자들에게는 당연한 이치인 것처럼 여겨지는 인프라스트럭처에 대한 민간의 사업권이 실은 고전적 자유주의 경제학자에게는 불편한 풍경이었던 셈이다. 아담 스미스는 국부론에서 적지 않은 지면을 할애하여 “공공시설(public works)”은 국가에 의해 관장되는 것이 바람직한데, 영국정부에게 이미 프랑스와 중국은 그렇게 하고 있다고 훈계하기도 한다. 아담 스미스가 이런 주장을 하는 이유는 “상업 일반의 촉진에 유리”하기 때문이었다.

오늘 날도 마찬가지지만 당시에도 도로, 철도, 운하 등이 없이 상업 일반의 발전은 상상할 수 없었다. 오늘 날에는 이와 더불어 통신, 발전 등의 인프라스트럭처가 제대로 갖춰져야 상업 일반의 발전이 가능하다. 그런데 이 인프라스트럭처들이 민영화 등을 통해 시장가격化 된다면 그것은 과거 자유무역을 가로막았던 관세처럼 상업, 나아가 산업 일반의 발전을 저해할 것이기에 고전경제학은 인프라스트럭처의 국가 관리를 지지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사실 인프라스트럭처의 민영화가 전례 없이 진행된 요즘에도 국가는 여전히 산업과 가계의 인프라스트럭처 소비에 대해 차별적인 정책을 취하며 산업의 발전을 돕는다. 전기, 철도 등 주요 시설의 이용요금은 민영화 여부와 상관없이 가계보다 산업이 더 적은 비용을 지불한다. 이쯤 되면 결국 인프라스트럭처를 둘러싼 논의에 관리주체로 인한 정당성 논의도 필요하지만 그 소비의 차별에 대한 정당성 논의도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산업에 대한 특혜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은 산업이 그만큼 세수에 책임을 진다는 명분이다. 하지만 기업들이 초국적으로 활동하며 특정국에서 누리는 이익에 상응하는 대가를 회피한다는 비판도 높다. 또는 세수에 있어서도 상응하는 대가를 치르고 있는지도 의문이다. 2013년 1~6월까지 우리나라의 법인세 실적은 25.6조원인데 소득세 22.8조원을 약간 넘는 수준이다.1 사실상 가계 부담인 부가세 27.9조원을 감안하면 그 비중은 더 낮아진다.

하버드의 경제학자에서 의원으로 변신한 엘리쟈베스 워렌은 저 유명한 가정집에서의 연설에서 기업이 자유로운 상업 활동을 할 수 있도록 국가가 배려하는 배경에는 그들이 상응하는 사회적 책임을 진다는, 일종의 사회적 합의가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비록 그 합의는 서명이 된 합의서가 존재하지는 않지만 많은 이들이 그것을 전제로 경제활동을 하였거나 또는 자신의 사상을 펼쳤을 것이다. 지금은 일상적으로 무시되고 있는 그 합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