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g Archives: 자본가

세계화 혹은 ‘공간의 압축’이 만들어 놓은 세계

노동자들의 단결은 대공업에 의해 만들어지는, 서로 다른 지방의 노동자들 상호간에 연계를 맺어주는 교통수단의 증대에 의해 촉진된다. 그런데, 이러한 연계만 맺어지면 어디서나 동일한 성격을 띠고 있는 허다한 지방적 투쟁들은 하나의 전국적 투쟁, 하나의 계급투쟁으로 집중할 수 있다. 그리고 모든 계급투쟁은 정치 투쟁이다. 지방도로를 갖고 있던 중세의 시민들이 수세기를 필요로 했던 단결을, 철도를 갖고 있는 현대 프롤레타리아들은 몇 년도 안되어 달성한다.[공산주의당 선언, 칼맑스 프리드리히엥겔스 저작선집 1, 김세균 감수, 박종철출판사, p409]

맑스-엥겔스주의의 자본주의 분석에 있어 공간은 매우 중요한 요소다. 예를 들어 매뉴팩처에서 자본주의의 생산성 증대는 부르주아지가 개별 소규모 공장 혹은 가정에서 행해지던 생산기능을 대규모 공장에 모아서 분업화함으로써 가능했다. 대규모 공장이라는 공간이 가지는 의미는 또한 노동자들에게도 중요했다. 맑스와 엥겔스는 곳곳에 산재해있던 노동자들이 단일 장소에 모이고 소통하면서 이른바 “노동계급”이라는 의식이 고양된 것이라고 보았다.

교통수단의 발달도 마찬가지 이치다. 자본가에게 있어 교통수단의 발달은 시장의 확대라는 장점을 극대화시켜준다. 교통수단이 지방도로에서 철도로 바뀌게 되면 원료를 보다 안정적으로 빠르게 조달이 가능하며, 상품 역시 보다 더 많이 신속하게 소비자에게 전달될 수 있기에 자본의 거대화와 독점화는 더욱 촉진된다. 이것은 또한 인용문에서 분석한 것처럼 노동자에게 기회이기도 하다. 전국화된 투쟁을 보다 많은 규모로 진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맑스-엥겔수주의의 뛰어난 점은 이렇게 서로 적대하는 계급이 흥미롭게도 같은 수단을 통해 갈등이 전국화되고 극대화될 수 있다는 통찰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공장은 노동력 수탈의 장소이기도 하지만 계급의식을 고취하는 학교이기도 하다. 철도는 시장의 확대를 위한 수단이기도 하지만 계급투쟁을 전국화시키는 수단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자본주의는 그 폭발적인 생산성 증가만큼이나 같은 속도로 계급모순이 폭발적으로 증대되는 것이랄 수 있다.

Teplovoz Eel2 (2).jpg
By Unknown author – Центральный государственный кинофотофоноархив Украины им. Г.С.Пшеничного, Public Domain, Link

현실 사회주의 블록이 일당독재 또는 일인독재로 형해화되어 있는 21세기에 맑스-엥겔스의 통찰이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 이제 공간은 인터넷에 의해 그 한계가 더욱더 좁혀졌다는 점이 우선 눈에 띈다. 세계의 자본가와 노동자는 인터넷을 통해 실시간으로 돈을 벌고, 소통하고, 동시에 가짜뉴스에 현혹된다. 자본순환, 계급의식, 또 반대로 혐오의식은 실시간으로 공유되고 극단화된다. 맑스-엥겔스가 바라던 바람직한 투쟁의 집중도 없잖아 있지만, 세계적 우민화도 동시진행형이다.

더불어 교통수단의 발달과 현실 사회주의 블록이 자본주의 시장에 편입된 세계화로 – 즉, 공간의 압축 – 인해 지구인은 값싼 상품이라는 호재(好材)를 공유하게 되었지만, 더불어 악재(惡材), 이를테면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의 전 세계적 유행도 함께 겪게 되었다. 어찌 보면 공간의 압축은 계급모순의 심화뿐 아니라 정치극단화, 유행병과 같은 부작용까지도 함께 공유하게 되는 상황을 불러온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공간의 압축은 자본주의의 축복이자 재앙인 셈이다.

그리고 공간의 압축은 맑스-엥겔스의 생각만큼 계급의식을 평준화하진 못했다. 세계화는 제조업의 저임금 국가로의 이전을 초래했고 선진국의 노동자계급은 일자리를 뺏기며 우경화되었다. 이는 해당 국가의 정치극단화를 불러왔고 세계는 다시 나홀로 금리인상, 전쟁, 에너지 쟁탈전 등의 양상으로 블록화되고 있다. 더불어 기후변화 등 자본주의 모순을 깨닫는 여론도 공간의 압축으로 실시간 공유되는 측면도 있으나 그 추동력은 생각만큼 강하지 않은 게 현실이다.

“時間의 主人”은 누구인가?

그보다도 더 큰 이익은 노동자 자신의 시간과 고용주의 시간 사이에 드디어 명백한 구별이 생겼다는 점이다. 노동자는 이제 자기가 판매하는 시간이 언제 끝나고 언제부터 자기 자신의 시간이 시작되는가를 알고 있으며, 그리고 이것을 미리부터 정확히 알고 있음으로써 자기 자신의 시간을 자기 자신의 목적을 위해 미리 배정할 수 있게 된다.(공장감독관 보고서, 1859년 10월 31일, p52) 그것(공장법)은 노동자들을 자기 자신의 時間의 主人으로 만들어 줌으로써 그들을 정치적 권력의 궁극적 장악으로 향하게끔 하는 정신적 에너지를 그들에게 부여하였다.(같은 보고서 p47)[자본론 I상, Karl Marx 저, 김수행 역, 비봉출판사, 1994년, p384]

노동자가 노동시간을 정해놓고 노동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만으로 “時間의 主人”이라 칭하는 것은 다소 과장된 표현이라고 할 수도 있겠으나 당시의 공장감독관으로서는 – 특히 노동자에게 온정적이었을 공장감독관이라면 더욱 – 자못 감격스러운 일이었을 것이기에 그런 표현을 썼을 것이다. 영국 사회는 19세기 중반 당시 가장 선진화되었던 자본주의 시스템이었으니 이미 자본주의의 온갖 모순과 갈등이 표출되었고 결국 자본가 계급과 노동자 계급의 치열한 내전(內戰)의 결과로 노동자는 ’10시간 노동법’이나 ‘아동노동 금지’라는 전리품을 획득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제 그들은 “時間의 主人”으로서 자신의 삶을 설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Työpäivä päättyy Tampellassa.jpg
By Eino Antero Bergius – http://www.uta.fi/koskivoimaa/tyo/1900-18/index.htm, Public Domain, Link

앞서 말했듯이 노동시간의 규제는 계급투쟁의 산물이다. 또 한편으로 이러한 개혁은 기술의 발전이 가져온 부수적 효과라고도 할 수 있다. 자본주의 시스템에서의 기술의 발전으로 말미암아 자본가는 이전의 가내 수공업 중심의 상품생산 시스템을 대규모로 지어진 건물 내에서의 기술집약적인 프로세스로 개선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기술 발달로 대규모 공장에서 함께 근무하게 된1 노동자는 그들의 정치적 의지를 표현할 조직화가 용이해졌고2, 다른 한편으로 그들의 노동력은 사회적 평균의 균질화로 이어져 단일한 노동시간 제한이라는 전리품을 얻어내기에 유리한 조건이 형성된 것이다. 기술발전은 자본가와 노동자 모두들 이롭게 만들었던 셈이다.

요기요 AI는 먼저 들어온 주문을 제쳐두고 뒤에 들어온 주문을 우선 배달하라고 명령했다. 첫 번째 주문을 한 손님은 화가 날 터이지만, 욕은 라이더가 들어야 한다. 돌발 상황도 벌어졌다. 12층에 올라가야 하는데 엘리베이터가 고장 나서 계단으로 뛰어간 라이더, [중략] 주소를 잘못 적은 손님 때문에 20분 동안 헤맨 라이더, 조리가 늦어져 식당 밖에서 하염없이 기다리는 라이더까지. AI는 이런 변수를 계산하지 않는다. [중략] 누군가는 우리를 자유로운 플랫폼노동자라 부르지만 족쇄와 ‘캐삭’ 사이를 아슬아슬 달리는 평범한 노동자일 뿐이다. 디지털일터에 AI라는 컨베이어벨트가 도입됐다. AI에 대한 규제와 통제 없이 플랫폼노동 대책도 없다.[우리는 데이터가 아니다]

이제 기술발전이 자본가에게만 유리한 시스템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우리는 오늘날의 플랫폼 경제가 처음에 “공유경제(共有經濟)”라는 기만적인 이름표를 달고 사회 모두에게 이로운 시스템인 것처럼 행세했으나 이내 플랫폼이 자본에 의해 점령될 경우 “공유경제”는 그 즉시 “플랫폼은 사유(私有)지만, 사회적 비용은 공유(共有)”인 시스템으로 고착화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칼 맑스가 서술한 “자유로운 생산자들의 연합”인 것처럼 보였고 아직도 플랫폼의 점령자들은 그러하다 주장하고 있는 우리의 “자유로운 생산자”도 사실은 자신이 AI라는 신개념 콘베이어벨트에 묶여 옴짝달싹 못 하는, 19세기 노동자보다 더 퇴행적인 노동자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Manila Philippines Pizza-Taxi-in-Makati-Business-District-01.jpg
By Photo by CEphoto, Uwe Aranas or alternatively © CEphoto, Uwe Aranas, CC BY-SA 4.0, Link

이제 그들은 더 이상 “時間의 主人”이 아니다. AI는 그들의 편의대로 절대적인 노동시간을 임의로 늘려버린다. AI는 배달 과정에서 발생할 수밖에 없는 저마다의 사정을 노동시간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현 정부는 집권 초기 주52시간 근무제라는 엉성하지만, 그럼에도 살인적인 한국 노동자의 노동시간에 대해 다소 개혁적이라 할 수 있는 제도를 도입하였지만, 플랫폼 경제의 자본은 다시 노동자에게 “자유로운 플랫폼노동자(생산자)” 혹은 “개인사업자”라는 직함을 씌워주고서는 노동시간 제한의 “족쇄”로부터 그들을 해방시켜 버렸다. 그러나 그들이 해방되는 바로 그 순간에 다시 AI라는 족쇄를 씌워서 그들이 “時間의 主人”이 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제 21세기의 정부와 공장감독관은 새로운 노동법을 만들고 새로운 방식으로 자본을 감독해야 한다. 자본가의 행태와 기술은 날이 갈수록 발전하고 있기 때문에 이전의 이차산업 중심의 대규모 공장을 짓던 자본과 그곳에서 근무하던 노동자에게 적용되던 법과 제도는 한계에 부닥치고 있다. 어떤 자본은 플랫폼을 선점하자마자 지분을 일본의 사모펀드에게 넘겨 엄청난 투자금을 받아 그걸로 플랫폼을 독점하였고, 미국 주식시장에 회사를 상장시킨 후 창업자는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을 피해 모든 공식직함을 던져버렸다. 그런데 때마침 그 플랫폼의 창고에 화재가 발생하였고 화재의 진화는 한국 사회가 부담하였으며 그 보험료는 한국 보험사에 청구할 것으로 보인다.

늘 그랬듯이 자본은 “時間과 空間의 主人”이다

블록체인이 창조해낼 미래형 자본주의

비트코인(Bitcoin)과 다른 가상화폐들이 다른 어떤 것과도 비슷하지 않다면 그것들은 무엇인가? 가장 적절한 비유는 아마도 1990년대 불었던 인터넷과 닷컴 붐일 것 같다. 인터넷처럼 가상화폐 역시 혁신과 그것을 통한 그 이상을 내포하고 있다. 그것들은 어떻게 은행과 같은 말하자면 책임지는 주체가 없이 공공의 데이터베이스(“블록체인”)를 유지할 것인가에 대한 자체적인 실험이다. 예를 들어 그루지야는 정부기록을 보호하기 위해 그 기술을 쓰고 있다. 그리고 블록체인은 또 다른 실험들의 플랫폼이 되고 있다. 이더리움(Ethereum)을 예로 들자. 그것을 통해 우리는 비디오 게임에서부터 온라인 시장에 이르기까지의 온갖 프로젝트가 이 프로젝트들 내에서 거래되고 사용될 수 있는 토큰 – 필수적으로 사적인 금전을 발행하여 자금을 조달하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 그러한 ICO(initial coin offerings)들이 주의 깊게 관리돼야 하지만, 그것들을 통해 발명을 촉진할 수 있다. 팬들은 이를 통해 아마존과 페이스북과 같은 과점 체제의 기술 거인들을 겨냥하는 신생기업들을 흥하게 할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 [What if the bitcoin bubble bursts?]

비트코인의 폭등세가 연일 계속되면서 사람들이 ‘도대체 비트코인이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계속 던지고 있다.1 개인적으로는 2년여쯤 전에 비트코인을 구입하여 지갑에도 담아보고 그 동전으로 외국 업체에 서비스 사용료를 지불해보기도 했지만, 정확히 어떤 원리로 구현되는지는 아직도 오리무중이다.2 “비트코인의 창시자가 일본인이다”, “사이버 채굴을 통해 돈이 모아진다”3, “일종의 암호통화(cryptocurrency)다”라는 사이버펑크스러운 소리만 들어도 머릿속은 혼란스러워진다. 그리고 “블록체인”이라는 개념을 접하게 되면 ‘이건 작정하고 진지하게 네트워크 공부를 하지 않고서는 기초개념조차 파악이 쉽지 않겠구나’하는 좌절감을 느끼게 된다.

어쨌든 능력이 안 되는 머리를 쥐어짜서 이 글에서 그 개념에 대한 윤곽만 잡아보자면 “블록체인”은 “블록”과 “체인”의 합성어다. 개별 블록들이 체인으로 이어져있다는 의미인데, 결국 데이터베이스가 통상적인 서버처럼 중앙서버에 집중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분산되어 있고 그게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개념이다. 그리고 몇 년 전에 유행했던 개념인 “클라우드 컴퓨팅”에서 더 나아가 P2P식으로 분산된 모델로 만들어진 거대한 거래장부를 “블록체인”으로 보는 편이 이해가 쉬울 것 같다. 이 블록체인에 기록된 정보는 일방향으로 암호화되어있어 타인이 무슨 내용을 담고 있는지 볼 수 없다는 점에서 뛰어난 익명성과 보안성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또 이더리움은 무엇인가? 이더리움은 블록체인 기술에 기반을 둔 클라우드 컴퓨팅 플랫폼 또는 프로그래밍 언어다. 인용문에서 서술하고 있는 것처럼 멀지 않은 미래에 우리는 이더리움을 통해 조성된 사이버 환경에서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시킬 수 있을 것이다. 이 프로젝트 대부분에 자금이 소요될 것인데, 우리는 이 자금을 비트코인과 같은 토큰이 암호화폐를 활용한 ICO라 이름붙여진 크라우드펀딩을 통해 조달할 것이다. 이 자금은 IPO(initial public offering)와 달리 자금의 소유주를 특정할 수 없다. 그리고 IPO처럼 자금조달을 규제할 수 있는 정부규제도 없을 것이다. 소유주도 규제도 없는 스타트업이 탄생한다는 의미다.

최초의 ICO는 2013년 Mastercoin에서 활용됐다. 이후 ICO의 인기는 치솟아 새로운 웹브라우저 프로젝트인 Brave의 ICO는 30초 만에 3천5백만 달러를 모았다. ICO는 IPO와 달리 투자회수가 훨씬 쉽다. 그들은 언제든 투자지분을 암호통화에서 법정통화로 환전하여 회수할 수 있다.4 개인적으로 흥미 있는 부분은 투자자의 익명성이다.5 이 시장이 앞으로 유의미할 정도로 성장하면 이제 자본주의 체제가 지니는 전통적인 자본가의 의미는 포스트모더니즘적으로 해체되는 체제가 될지도 모른다. 단일 자본가에서 주식회사, 그리고 LBO 펀드 등으로 끊임없이 질적으로 변해왔던 자본주의 기업이 익명의 사이버 자본가 연합으로 변신하게 되는 것이다.

블록체인이 주류기술이 되지못할 것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어쨌든 금융 시스템은 이미 질적인 전환을 겪은 것으로 보인다. 비트코인은 튤립도 금(金)도 아닌 다른 어떤 새로운 개념이다. 그리고 블록체인과 이를 활용한 이더리움 등은 또 다른 새로운 형태의 무엇인가로 진화할 것이다. ICO가 좀 더 일상화되면 각국은 자금세탁방지 등 익명화 방지수단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갈수록 초현실적이고 반(反)물질적으로 진화해가는 금융시장을 개별정부 혹은 국제금융기구 등이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을 것인지, 또는 노동자는 앞으로 쟁의를 할 때 어떤 자본가에 대항해야 할 것인지 등에 상상을 하다보면 머릿속이 복잡해지는 것이 사실이다.

전 세계 노동자가 단결하는 동안 전 세계 자본가는 분산되고 있는 것인가?

Michael clayton(2007)

마이클클라이튼은 기발한 아이디어로 무장한 신세대 스릴러하고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그것은 어찌 보면 고전적인 느와르의 현대적인 오마쥬쯤으로 해석될 수 있을 것 같다. 변호사라는 좋은 직업을 가지고 있지만 도박에 빠져 살았고, 부업삼아 한 레스토랑이 망해 사채를 얻어 쓴 이혼남 마이클 클라이튼(조지 클루니), 젊은 여성이면서도 제초제를 생산하는 대기업 유노쓰의 임원에 올라 성공을 위해서라면 물불가리지 않는 카렌, 거래를 성사시켜 거액을 수수료를 버는 한편 자신의 회사를 합병시키려는 법무법인 대표 마티(시드니 폴락) 등 대충 느와르에서 볼 수 있는 얼굴들이 등장한다.

사건은 유해한 제초제로 말미암아 온 동네 사람이 입은 피해에 대한 소송에서 유노쓰의 변호를 맡은 스타 변호사 아써가 갑자기 재판도중 스트립쇼를 벌이면서 점화한다. 피해자들의 선량한 마음과 안타까운 사연을 듣는 와중에 더 이상 ‘악마의 대변자(devil’s advocate)’가 될 수 없다는 발작적인 저항이었다. 법무법인과 유노쓰는 쑥대밭이 되고 마이클 클라이튼이 아써의 마음을 돌이키려 하지만 그 와중에 아써가 의문의 죽음을 당하고 만다.

그리고 영화는 한바탕 반전(反轉)을 향해 질주한다.

The Firm, The Pelican Brief, The Insider 등 법정과 기업 또는 조직비리라는 소재가 스릴러라는 형식으로 엮여진 많은 영화에서 익히 봐온 구도다. 거대기업의 거대범죄에 대한 죄책감의 결여, 조직의 자기보호 본능, 성공에의 욕망, 순리로 풀기보다는 형식논리로 갈등을 푸는 매정한 시스템, 그 사이에 끼어 고뇌하고 갈등하는 인간군상….. 이러한 다양한 생각할 거리들이 적절한 액션과 긴장감과 버무려져 진행된다.

개인적으로는 이 영화를 보며 현대사회의 분업이 낳은 비극에 대해 다시 한번 곱씹게 되었다. 아담 스미쓰 이하 모든 경제학자들이 분업으로 인한 거대한 생산력의 향상을 칭송하였고 그것은 실존하는 혜택이었음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런 한편으로 분업은 현대사회에서 타자에 대한 무관심과 자신의 일에 대한 소외를 낳았다. 영화대사에서도 나오듯이 그들은 ‘각자 자신들의 일을 충실히 하고 있지만(you’re doing your job)’ 그렇다고 해서 이 분업이 전체의 복지로 수렴되지는 않는다. 제초제 회사는 제초제를 만들고, 법률회사는 사람들과 기업을 변호하고, 심지어 흥신소 직원은 사람까지 살해하지만 – 생활인으로서 정말 열심히들 일을 했지만 – 남은 것은 제초제로 병든 주민과 끔찍한 살인, 그리고 인간성 파괴뿐이었다.

물론 이것은 분업의 한 부작용일 뿐일지도 모른다. 영화란 원래 개연성이 적은 사례를 극화하여 사람들이 신기해하면서 극을 즐기게끔 만든 매체인 법이다. 그럼에도 오늘 날 우리네 생활에서 이렇게 자신들이 열정을 가지고 진행시킨 일들이 남들에게 득이 되기보다는 해가 되거나, 또는 득보다 실이 큰 일이 아니라는 보장은 못하는 법이다. 그러니 항상 자신의 삶을 반추하며 살아야 하는 법인가보다. 음… 이거 영화보다 득도하게 생겼다.

불량상품은 자본가의 탐욕?

여기서 말하는 불량상품은 어렸을 때 먹곤 하던 쫀드기, 번데기와 같은 불량식품이나 코 묻은 돈을 털어내려는 목적이 분명한 불량 장난감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불량상품이란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표준화되고 평준화된 대량생산 시스템에 의해 생산된, 그 중에서도 그 품질이 하향평준화된 상품 일반을 의미하기 위해 이 글에서 특별히 쓸 표현이다. 즉 사전적인 의미에서의 불량품이 아니라 대량생산을 위해 그 품질이 – 때로는 불가피하게 – 하향평준화된 상품을 말한다.

즐겨보는 만화 ‘맛의 달인’에 보면 두부에 관한 에피소드가 나온다. 이 에피소드에서 주인공 지로는 한 양심적인 두부 제조업자의 제조과정을 소개하고 있다. 그 제조업자는 두부를 만들 때에 원래 천연 간수를 넣어야 하나 요즘에는 천연 간수가 오염 우려가 있어 할 수 없이 천연 간수와 가장 비슷한 성분의 염화마그네슘을 쓰는 상황을 소개한다. 그런 한편으로 다른 제조업자도 그래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오히려 몸에 안 좋은 다른 화학약품을 사용하면서 두부의 콩 단위당 생산량을 2~3배로 늘린다는 것을 고발한다. 당연히 맛도 형편없어진다.

이 에피소드에서 볼 수 있듯이 ‘맛의 달인’은 전편에 걸쳐 음식을 만듦에 있어 맛의 비결은 정도를 지키는 것, 그것이 음식의 맛과 품질을 확보하는 철칙임을 강조하고 있다. 좋은 재료에 정성을 깃들이면 최고의 메뉴가 완성된다는 평범하지만 당연한 논리다. 그런데 그 단순한 진실을 역행하는 것은 흔히 요리사의 오만, 잘못된 요리법 등이 지적되고 있다. 한편으로 더 본질적으로 지적되는 문제점은 대량생산 사회에서의 기업의 이윤논리다. 즉 최대한 이윤을 창출하기 위해 식품관련기업들은 앞서 두부의 예처럼 잘못되고 저렴한 생산법을 택함으로써 맛을 포기하고 양을 택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만화를 보고 있자면 생산자들이 맛을 포기하게 만드는 원인이 또 하나 있다. 바로 맛에 무지한 소비자들이다. 잡지에 이름이 오르내린 맛집에 부화뇌동하여 몰려드는 소비자, 고급레스토랑의 허울 좋은 음식에 허영심을 느끼는 소비자들이 그들이다. 그리고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만화의 등장인물 다수는 어느새 일상적으로 하향평준화된 대량소비용 식품의 맛에 길들여져 있다. 조미료 맛에 물들어 조미료를 쓰지 않은 음식을 싱겁다고 여기는 우리들처럼 말이다.

만화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우미하라와 지로는 그러한 둔감한 미각을 거부하고 최고의 맛을 즐길 것을 독자에게 요구하지만 사실 그게 그리 만만한 것은 아니다. 그들은 절대미각의 소유자들이다. 그들은 온갖 재료가 섞여진 음식을 맛보며 마치 와인을 분석하는 소뮬리에처럼 음식을 분석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하지만 절대 다수의 사람들은 그런 능력이 없다. 그러므로 솔직히 말하면 대량소비를 목적으로 하는 생산업자는 절대미각을 지니지 못한 절대다수의 대중을 대상으로 맛의 수위를 조절하게 마련인 것이다. 정규분포 곡선에서 상하위의 극소수 소비자는 그들의 목표수요층에서 제외하면 그만이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공리주의가 맛을 포기한 생산자와 소비자의 암묵적인 합의 속에 달성된 것이다.

그러니 이제 톡 까놓고 생각해보면 불량상품을 만들게끔 한 장본인은 사실 불량소비자일 수도 있다. 대량생산 시대 이전에는 소수의 특권층이 맛보았거나 향유하였던 많은 것들, 예를 들면 설탕, 냉장고, 자동차와 같은 것들이 이제는 웬만한 가처분소득이 있는 집에서는 사치품이 아닌 필수품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그들이 선택한 것은 – 특히 먹거리에 있어 – 하향평준화된 또는 거짓으로 꾸며진 – 조미료나 인공향신료 등 – 상품들이다. 더 극단적으로는 항생제를 밥 먹듯이 먹은 닭고기와 돼지고기 등이다. 농약으로 떡칠을 한 채소들이다. 효용은 즉각적인 반면 폐해는 장기적이므로 이러한 해악은 극단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개 편의적으로 눈감아진다.

그러므로 적어도 이점 하나는 인정하고 들어가야 한다. 대량생산의 대량소비 사회에서 양(量)과 질(質)을 동시에 추구하기는 대단히 어렵다. 대량생산 사회에서 상품이 불량화되는 것은 자본가의 탐욕일 수도 있지만 때로 시장에서 용인할 수 있는 가격에 상품의 대량소비를 가능케 하는 고육지책일 수도 있다. 불과 몇 십 년 전의 ‘최저생계기준’과 지금의 그것을 비교해보면 소비자의 탐욕(?)도 자본가의 탐욕만큼이나 성장해왔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100년 전까지 설탕은 서구사회에서도 특권층들이 먹는 사치품이었고 50년 전까지 서울에 승용차는 손에 꼽을 정도였고 20년 전까지 인터넷과 휴대전화는 소비의 대상이 아니었다.

바로 이점이 대량생산과 대량소비의 사회에서 소비자로서 스스로에게 던져봐야 하는 실존적인 물음이다.

이어서 읽어두면 좋을 글

고전에서 마주친 자유무역론

퀴즈로 글을 시작하도록 하자. 다음 글은 어디에서 등장하는 글일까?

“당신은 당신만의 특별한 무역이나 당신의 사업이 보호관세에 의해 원조 받고 있다고 속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법률은 장기적으로 이 나라의 부를 감소시키고, 우리의 수입품의 가치를 떨어트리고, 이 땅에서의 삶의 질을 저하시키는 것입니다.”
“You may be cajoled into imagining that your own special trade or your own industry will be encouraged by a protective tariff, but it stands to reason that such legislation must in the long run keep away wealth from the country, diminish the value of our imports, and lower the general conditions of life in this land.”

Adam Smith 의 국부론? 아니다. 정답은  Arthur Conan Doyle 경이 1901년에서 1902년에 걸쳐 Strand 잡지에 기고하였고 후에 단행본으로 출간되어 추리소설의 걸작으로 남은 The Hound of the Baskervilles 이다. 조금은 의외의 공간에서 만난 경제에 관한 글이다.

소설에서 이 글은 Times 신문의 기사로 소개되고 있다. 그리고 이 기사는 음울한 전설의 희생양이 될 가능성이 있는 Henry Baskerville 경에게 배달된 익명의 경고장에 오려붙여진 단어들의 원 기사로 사용되었다. 정체모를 사람이 보내온 경고장은 다음과 같다.

“As you value your life or your reason keep away from the moor.”

이 문장을 보면 moor 라는 단어를 빼놓고는 모두 위의 기사에서 찾을 수 있는 단어들이었고 Sherlock Holmes 가 이 사실을 재빠르게 알아차린다는 설정이다.

여하튼 소설에서 등장인물들은 경제에 대해선 그다지 많이 알지 못한다는 언급만을 한 채 다시 자신들의 관심사인 범죄에 관한 대화로 돌아간다. 그렇더라도 어찌 되었든 이 장면은 그 당시 자본주의 최강국인 영국에서 펼쳐지고 있던 무역에 관한 논쟁들의 단편을 보여주는 풍속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자유무역과 보호무역에 관한 오랜 투쟁은 이 소설이 발표된 1900년 초입을 더 거슬러 올라가 1800년대 초부터 본격화된다. 대표적인 사례는 1815년에 제정하여 1846년에 폐지한 영국곡물법을 들 수 있다.

‘곡물법(穀物法 , Corn Law)’이란 무엇인가? 이 법은 곡물의 수출입을 규제하기 위한 법률로 같은 이름의 법이 중세에서부터 있었지만 19세기 초반의 영국 법률이 대표적이다. 이 법은 소맥의 가격이 일정 정도가 되기 전까지는 수입을 금지함으로써 표면상의 목적은 곡물 가격의 등락에 대해 자국의 농업을 보호하고자 하는 것이었으나 그 속을 들여다보면 영국 지주계급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한 대표적인 보호무역주의 악법이었다.

그 당시 자유무역의 선봉장 리카도 David Ricardo 를 비롯한 여러 명망가들이 법의 폐지를 주장하였으나 의회의 다수파를 이뤘던 지주계급은 이 법을 강력히 옹호하여 결국 1846년이 되어서야 법이 폐지되었다. 리카도는 생전에 법의 폐지를 볼 수 없었다.

그 이후 곡물규제는 마침 위의 소설이 발표되고 있던 시점인 1902년과 1932년에 다시 필요하게 되어, 1902년에는 수입 곡물과 밀가루에 최소한도의 관세가 부과되었으며, 1932년에는 해외 수입의존도 증가를 우려하여 제정법으로 영국산 밀을 보호했다.

요컨대 이당시 보호무역주의는 명백히 봉건시대의 지배계급인 지주계급의 계급적 이익을 보호하고자 하는 폭거였다. 즉 지나치게 높은 곡물가격은 임금상승의 요인이 되어 산업경쟁력을 해치게 된다.(주1) 이것이 당시 지주계급에 대항하는 신흥 부르주아의 일반적인 정서였다고 할 수 있다. 노동자의 생계비용의 큰 몫을 차지하는 곡물가격의 앙등은 좀 더 낮은 임금으로 노동자를 부려먹어야 하는 자본가 계급의 계급이해에 합치하지 않는 것이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 당시의 자유무역 주창자들은 당시의 지배계급인 지주들의 기득권을 깨부수기 위하여 투쟁하였던 일종의 진보주의자들이었던 셈이다. 그리고 곡물법의 폐지는 자본가 계급들이 실질적으로 경제의 헤게모니를 쥐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상징적인 사건이 되었다.

p.s. 어쩌면 이것이 그 당시의 자유무역 주창자들과 오늘 날의 주창자들의 다른 점이다. 쉽게 이야기해서 처지가 바뀌었다는 것이다. 그 당시는 아직까지 사회주류가 아니었다. 프랑스 혁명당시에는 노동자들과 함께 제3계급으로 분류되는 수모까지 겪었다. 하지만 오늘날 자본가 계급은 분명히 지배계급이다. 그리고 농업을 생업으로 하는 이들은 더 이상 지배계급이 아닌 소농들이거나 기업농, 즉 또 다른 자본가계급이다. 요컨대 계급지형이 싹 바뀌었다는 이야기다. 이에 대해서는 추후 기회 되면 이야기를 풀어 가보도록 하겠다(maybe or maybe not).

 

(주1) 한편 맬서스는 리카도와 배치되는 입장에서 농업의 보호를 주장하였는데 그 이유 중 하나가 오늘날 농업보호를 위해 많이 주장되는 농업의 비교역적 조건, 즉 농업의 식량자원으로의 이용가능성을 들고 있다. 오늘 날에는 이에 덧붙여 농축산물의 위생문제도 많이 거론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