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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 삼성물산이 탄생할 날의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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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msung headquarters” by Oskar Alexanderson – originally posted to Flickr as DSC_0234. Licensed under CC BY-SA 2.0 via Wikimedia Commons.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 건은 일반의 – 그리고 개인적인 – 예상대로 합병 승인으로 1차 승부가 끝났다. 합병 건이 막 화제가 되었을 적에 회사 동료들과 이 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당시에 한 동료에게 ‘만일 네가 삼성물산에 투자하고 있는 펀드의 펀드매니저라면 이번 합병 건에 대해 어떤 의견을 내놓을 것이냐’란 질문을 했고 그는 반대하겠다고 말했다. 반대하는 이유를 물으니 그는 불공정한 합병비율도 있고 등등 운운하며 우물우물 거렸다.

불공정한 시장참여자를 응징하겠다는 “정의로운” – 또는 행동경제학적인? – 그 동료에게 나는 다시 ‘그게 펀드매니저로서의 적당한 행동인지를 판단해보라’고 조언했다. 시장의 공정성을 감시하는 시민단체라면 모를까 펀드매니저라면 합병 건이 자신이 운용해야 하는 자산의 가치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를 판단하는 것이 직업윤리라는 관점에서 한 말이었다. 합병 건에 찬성하든 반대하든 그 직업윤리의 기준에서 판단을 하는 것이, 적어도 ‘타당한’ 판단일 것이다.

그런 면에서 나는 순환출자가 아직도 재벌 소유구조에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고, 재벌 일가의 경영적 판단이 “오너”의 판단으로 둔갑하는 이 사회에서의 펀드 매니저 또는 주주의 대부분은 삼성물산이 제일모직과 합병하는 것에 찬성하는 것이 타당한 판단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통합 삼성물산이 앞으로도 삼성 “그룹”의 지주회사 역할을 할 것이 분명하고 재벌 일가는 어떡하든 앞으로도 주가를 띄우려 할 것이다. 합병이 무산되면 삼성물산은 한동안은 주가가 시원치 않을 것이다.

(삼성물산이 직접 겁박하기도 한) 이러한 정황이 오늘 삼성물산 주총에서의 – 제일모직 주총은 언급할 필요도 없고 – 시장참여자의 판단이었을 것이다. 이재용 씨가 이번 합병으로 인하여 천문학적인 경제적 이득을 얻게 된다는 것이 배 아프다고 합병에 반대하는 것은 합리적인 경제인으로서의 마인드가 아니다. 그 천문학적인 경제적 이득에 다만 얼마라도 묻어가는 것이 펀드매니저의 직업윤리에 비추어 보아도 합당한 판단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하루 우리 모두는 신고전파가 되었다.

쓰지 말아야 할 표현, “천민자본주의”

어떤 유명한 블로그에 들렀다가 대한민국의 ‘천민자본주의’를 비판하는 글을 만났다. 이 ‘천민자본주의’라는 표현은 반체제 혹은 반정부적인 비판자들이 통상 자본주의 발달과정에서 볼 수 있었던 성장일변도의 경제정책, 승자독식과 금전만능의 사회체제 등의 어두운 면을 비판하기 위해  애용하는 표현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표현은 쓰지 않는 것이 좋다. 이유는 간단하다. 자본주의의 천박성을 비판하기 위해 쓰는 이 표현이 ‘천민’이라는 단어가 포함되어 있고 그 단어가 명백히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면서, 자본주의의 천박성을 비판하는 이들이 현대 자본주의 시대까지 온존하고 있는 계급차별적인 선입견을 인정하고 있는 모순에 빠지기 때문이다.

또 하나 ‘천민자본주의’라는 표현을 쓰지 않아야 하는 이유는 첫째 이유와 연결선상이기도 하거니와 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될 수도 있는데 요즘 이 표현을 쓰는 사람의 취지와 원래 이 말을 처음 사용한 막스 베버의 취지가 다르다는 것 때문이다. 천민자본주의의 사전적 의미를 알아보자.

賤民資本主義[독, Pariakapitalismus]
(상략)이와 같이 베버는 근대 이전의 자본주의를 근대자본주의와 엄격히 구분하여 비합리적 자본주의, 정치기생적 자본주의 등으로 불렀는데 천민자본주의도 이러한 표현의 하나이다. 베버가 이 기묘한 표현을 쓰면서 염두에 두었던 것은 중세에 ‘천민민족 Pariavolk’으로 불리며 주로 상업, 금융업에 종사했던 유태인이었지만, 보통은 근대 이전의 낡은 자본주의의 특징을 가리키는 말로서 사용되고 있다. ‘천민’이라는 표현이 붙은 것은 중세의 상인금융업자가 일반적으로 특수한 신분을 형성했으며 그 직업이 종교적, 도덕적으로 천하게 여겨졌었기 때문이다. 이 용어는 많은 문제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일반적인 용어로서 사용되지는 못하고 있으며 특히 자본주의를 시대를 초월한 현상으로 보는 입장에 대해서는 많은 비판이 가해지고 있다.(경제학 사전, 풀빛편집부 편, 조용범/박현채 감수)

막스 베버가 생각하는 자본주의에서의 직업윤리는 프로테스탄트의 윤리에서 찾은 것으로 자기 직업을 천직으로 생각하고 개인의 쾌락이나 영예를 희생시키면서 엄한 규율과 조직 밑에 직책에 헌신하는 금욕주의적인 직업윤리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금전욕에서 동기를 찾는 전근대적인 자본주의, 그리고 이러한 모습을 상징하는 유태인을 천민이라고 간주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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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x Weber 1894” by This file is lacking author information. – This file is lacking source inform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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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베버는 프로테스탄트들의 금욕적 절약에 의한 투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전형적인 청교도들은 많이 벌고 적게 썼다. 그리고 그의 소득을, 절약하고자 하는 금욕주의적 열정으로부터, 매우 합리적인 자본주의적 사업에 자본으로서 재투자하였다.[The typical Puritan earned plenty, spent little, and reinvested his income as capital in rational capitalist enterprise out of an asceticist compulsion to save.]”

요컨대 베버의 사상에서 자본주의의 이해집단은 ‘돈벌이에만 집착하는 유태인 금융자본’와 ‘금욕적인 기독교적 윤리를 통해 자본주의를 발전시켜나가는 산업자본’이 대결하고 있고 후자를 자본주의를 발전시키는 동력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으로 비추어 보면 많은 사람들이 ‘천민자본주의’를 원작자의 의도에 맞지 않게 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더불어 우리는 그 어원을 살펴봄으로써 ‘천민자본주의’라는 번역이 잘못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유태인들로 대표되는 중세의 금융업자들은 신분의 높고 낮음에 개의치 않고 금융업을 통한 치부를 몰두했던 이들을 가리키는 것이다.(주1) 결국 그들은 자산가였고 그들은 군주의 돈줄이었다. 그런데 ‘천민자본주의’에서의 천민은 말 그대로 “고려 ·조선 시대 양천제(良賤制)라는 신분관념하에서 양인(良人)과 대비되는 하급신분을 가리키는 말”로 이들은 유태인 금융업자와 닮은 구석이 없는 피착취 계급이었을 뿐이다.

결국 우리가 현대 물질문명의 부정적인 측면을 비판함에 있어 ‘천민자본주의’라는 표현을 쓰는 순간, 그것은 원작자 베버의 의도에도 맞지 않으면서도 오히려 그가 저지르고 있는 인종차별 혹은 계급차별에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여 동승하는 모순에 빠지게 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주1) 그러므로 사실 셰익스피어의 작품에서의 샤일록을 우리는 고리대금업자로 알고 있지만 그는 그저 금융업자였을 뿐이고 기독교 사회는 이자를 받는 행위 자체를 죄악시, 금기시하여 왔다. 물론 그렇다고 수도원이나 기독교 성직자가 그런 짓을 하지 않았다는 것은 절대 아니다. 그들은 가장 적극적인 금융업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