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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장인생

사람들이 ‘막장인생’, ‘이거 완전 막장이네요’ 할 때 별 생각 없이 지나가곤 했는데 언제부턴가 생각해보니 별로 좋은 표현이 아니었다. 하나하나 그렇게 꼬치꼬치 따지는 것도 피곤하긴 하지만 어딘가 꺼림칙한 면은 있다. 막장의 뜻은 이렇다.

막장 [명사]<광업> 1. 갱도의 막다른 곳. 2. 같은 말: 막장일.

결국 ‘막장인생’은 ‘광부의 삶’을 뜻한다. 지금은 사양화된 – 고유가 시대에 또 모르지 – 광산에서 일하던 광부의 삶은 70~80년대 저임금 노동자의 전형적인 모습을 상징하였다. 툭하면 ‘지하갱도에 몇 명의 광부가 갇혔네’ 하는 기사가 보도되곤 했었다. 그러니 잘 안 풀리는 인생을 ‘막장인생’으로 표현하면 그 뜻은 통하는 셈이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기왕이면 쓰지 않았으면 하는 표현이다. 광부들의 인생은 고단했을지 몰라도 그들이 없었으면 우리는 엄동설한에 모두 얼어 죽었을 것이다. 고마운 분들이다.

적어도 나는 이 표현은 쓰지 않으련다.

쓰지 말아야 할 표현, “천민자본주의”

어떤 유명한 블로그에 들렀다가 대한민국의 ‘천민자본주의’를 비판하는 글을 만났다. 이 ‘천민자본주의’라는 표현은 반체제 혹은 반정부적인 비판자들이 통상 자본주의 발달과정에서 볼 수 있었던 성장일변도의 경제정책, 승자독식과 금전만능의 사회체제 등의 어두운 면을 비판하기 위해  애용하는 표현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표현은 쓰지 않는 것이 좋다. 이유는 간단하다. 자본주의의 천박성을 비판하기 위해 쓰는 이 표현이 ‘천민’이라는 단어가 포함되어 있고 그 단어가 명백히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면서, 자본주의의 천박성을 비판하는 이들이 현대 자본주의 시대까지 온존하고 있는 계급차별적인 선입견을 인정하고 있는 모순에 빠지기 때문이다.

또 하나 ‘천민자본주의’라는 표현을 쓰지 않아야 하는 이유는 첫째 이유와 연결선상이기도 하거니와 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될 수도 있는데 요즘 이 표현을 쓰는 사람의 취지와 원래 이 말을 처음 사용한 막스 베버의 취지가 다르다는 것 때문이다. 천민자본주의의 사전적 의미를 알아보자.

賤民資本主義[독, Pariakapitalismus]
(상략)이와 같이 베버는 근대 이전의 자본주의를 근대자본주의와 엄격히 구분하여 비합리적 자본주의, 정치기생적 자본주의 등으로 불렀는데 천민자본주의도 이러한 표현의 하나이다. 베버가 이 기묘한 표현을 쓰면서 염두에 두었던 것은 중세에 ‘천민민족 Pariavolk’으로 불리며 주로 상업, 금융업에 종사했던 유태인이었지만, 보통은 근대 이전의 낡은 자본주의의 특징을 가리키는 말로서 사용되고 있다. ‘천민’이라는 표현이 붙은 것은 중세의 상인금융업자가 일반적으로 특수한 신분을 형성했으며 그 직업이 종교적, 도덕적으로 천하게 여겨졌었기 때문이다. 이 용어는 많은 문제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일반적인 용어로서 사용되지는 못하고 있으며 특히 자본주의를 시대를 초월한 현상으로 보는 입장에 대해서는 많은 비판이 가해지고 있다.(경제학 사전, 풀빛편집부 편, 조용범/박현채 감수)

막스 베버가 생각하는 자본주의에서의 직업윤리는 프로테스탄트의 윤리에서 찾은 것으로 자기 직업을 천직으로 생각하고 개인의 쾌락이나 영예를 희생시키면서 엄한 규율과 조직 밑에 직책에 헌신하는 금욕주의적인 직업윤리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금전욕에서 동기를 찾는 전근대적인 자본주의, 그리고 이러한 모습을 상징하는 유태인을 천민이라고 간주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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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x Weber 1894” by This file is lacking author information. – This file is lacking source inform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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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베버는 프로테스탄트들의 금욕적 절약에 의한 투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전형적인 청교도들은 많이 벌고 적게 썼다. 그리고 그의 소득을, 절약하고자 하는 금욕주의적 열정으로부터, 매우 합리적인 자본주의적 사업에 자본으로서 재투자하였다.[The typical Puritan earned plenty, spent little, and reinvested his income as capital in rational capitalist enterprise out of an asceticist compulsion to save.]”

요컨대 베버의 사상에서 자본주의의 이해집단은 ‘돈벌이에만 집착하는 유태인 금융자본’와 ‘금욕적인 기독교적 윤리를 통해 자본주의를 발전시켜나가는 산업자본’이 대결하고 있고 후자를 자본주의를 발전시키는 동력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으로 비추어 보면 많은 사람들이 ‘천민자본주의’를 원작자의 의도에 맞지 않게 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더불어 우리는 그 어원을 살펴봄으로써 ‘천민자본주의’라는 번역이 잘못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유태인들로 대표되는 중세의 금융업자들은 신분의 높고 낮음에 개의치 않고 금융업을 통한 치부를 몰두했던 이들을 가리키는 것이다.(주1) 결국 그들은 자산가였고 그들은 군주의 돈줄이었다. 그런데 ‘천민자본주의’에서의 천민은 말 그대로 “고려 ·조선 시대 양천제(良賤制)라는 신분관념하에서 양인(良人)과 대비되는 하급신분을 가리키는 말”로 이들은 유태인 금융업자와 닮은 구석이 없는 피착취 계급이었을 뿐이다.

결국 우리가 현대 물질문명의 부정적인 측면을 비판함에 있어 ‘천민자본주의’라는 표현을 쓰는 순간, 그것은 원작자 베버의 의도에도 맞지 않으면서도 오히려 그가 저지르고 있는 인종차별 혹은 계급차별에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여 동승하는 모순에 빠지게 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주1) 그러므로 사실 셰익스피어의 작품에서의 샤일록을 우리는 고리대금업자로 알고 있지만 그는 그저 금융업자였을 뿐이고 기독교 사회는 이자를 받는 행위 자체를 죄악시, 금기시하여 왔다. 물론 그렇다고 수도원이나 기독교 성직자가 그런 짓을 하지 않았다는 것은 절대 아니다. 그들은 가장 적극적인 금융업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