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g Archives: 천민자본주의

단테의 신곡에 등장하는 경제사범에 대한 인식

카센티노의 푸른 언덕에서 아르노 강으로 서늘하고 잔잔하게 흘러내리는 실개천들이 언제나 눈앞에 속절없이 아른거립니다. 그것을 머리에 떠올리는 일이 얼굴 살을 뜯어내는 병보다 나를 더 애타게 목을 태우고 있소. 나를 괴롭히는 엄격하기 그지없는 정의가 하필 내가 죄를 지은 곳을 떠올리게 하며 더 깊은 한숨을 내쉬게 만드는구려. 거기는 로메나, 내가 세례자의 얼굴로 주화를 찍어 위조화폐를 만들던 곳이오. 나는 그 때문에 저 위에 불에 탄 육신을 남겼소.[신곡, 단테 엘리기에리 지음, 박상진 옮김, 민음사, 2008년, pp306~307]

지옥에 떨어진 이 죄인은 스스로를 “장인(匠人)”이라 부르는 아다모1다. 그는 당시 로메나 성2의 군주였던 귀도와 알레산드로의 꾐에 빠져 쇠로 피오리노(fiorino)3라는 – 중세유럽의 부국이었던 피렌체에서 1252년부터 주조하여 통용시키던 – 금화의 위조화폐를 만들었고, 그 탓에 지옥에 오게 됐다는 것이 단테의 신곡에 등장하는 한 일화다. 이 장에서 단테가 묘사하는 것을 보면 당시 화폐 위조를 중한 범죄로 다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Gouden florijn.jpg
By FruitpunchlineOwn work, Public Domain, Link

예를 들어 인용문의 뒤쪽을 보면 같이 지옥에 떨어진 시논이라는 다른 죄인4은 아다모에게 “내가 거짓말을 했으면, 넌 돈을 위조했어! 난 한마디 말 때문에 여기 있지만, 넌 다른 어떤 마귀보다도 나쁜 놈이야!”라고 거칠게 힐난한다. 당시 피렌체는 백년 전쟁 동안에 잉글랜드 왕에게 자본을 대기도 하는 등 유럽 각국에 자본을 대주는 금융도시였다. 자연히 위조화폐를 주조하는 죄는 중죄로 다루었으리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들의 고통은 눈에서 눈물이 되어 터져 나왔다. 그들은 비처럼 떨어지는 불꽃과 뜨겁게 달구어진 모래를 손으로 내저으며 이리저리 피해 다녔다. 마치 여름날에 벼룩, 파리, 빈대에 물어뜯기는 개가 주둥이와 발목으로 버둥대는 것 같았다. 고통스러운 불길이 떨어지는 가운데 몇 사람을 눈여겨보았지만, 아무도 알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모두가 목에 주머니를 걸고 있음을 깨달았다. 색깔과 문장(紋章)이 선명하게 보였다. 그 와중에도 그들의 눈은 주머니를 흡족하게 여기는 것 같았다.[같은 책, pp167~168]

한편 이들은 고리대금업자다. 그들이 차고 있는 주머니가 바로 고리대금업자임을 상징하고 있다.5 교회는 1179년 제3차 라테란 공의회를 통해 고리대금업자는 영성체를 비롯한 교회의 구원을 받을 수 없도록 정하였다. 따라서 단테가 신곡을 쓴 14세기 초 고리대금업자가 사후에 갈 곳은 지옥밖에 없었다. 금융업으로 성장한 도시에 살면서 위폐범을 단죄하면서도 고리대금업자를 지옥에 보내는 혼돈된 세계관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여하튼 고리대금업에 면죄부를 준 것은 먼 훗날이 지나서였고 위폐범은 아직도 극악한 중죄다.

Giotto, scrovegni, enrico scrovegni dona agli angeli una riproduzione della cappella degli scrovegni (1302).jpg
Pubblico dominio, Collegamento

물론 고리대금업자라도 교회에 재산을 바치면 성화에도 등장하고 천국도 갈 수 있다

이렇듯 종교적 관념은 언뜻 우리의 경제활동과는 별로 관계가 없어보일지 몰라도 실은 다른 여타 분야에서 그렇듯 우리의 경제관념에도 끈끈하게 얽혀 있다. 이자를 받는 것을 금지한 것은 기독교나 이슬람 모두의 교리였고 앞서 보는 것처럼 기독교 교리는 그런 고리대금업자를 지옥으로 보냈으며 이슬람은 여전히 이자수취를 원칙적으로 금지하고 있다6. 금융 등 3차 산업을 “노동”으로 여기지 않는 관념도 아담 스미스7, 막스 베버8, 심지어 칼 맑스9에 이르기까지 서양 경제학자들의 경제관에 일관되게 반영되어 있다.

신용위기 단상

결국은 시스템적인 모순이지만 이번 사태는 또한 윤리의 문제이기도 하다. 이번 구제금융 법안의 부결도 상당부분 월스트리트의 그간의 비도덕적 행태에 대한 유권자들의 분노를 반영한 것이다. 막스 베버가 월스트리트에 한 2박3일 머물렀다면 어떤 말을 했을까? 이래서 금융자본은 유태인의 천민자본주의라고 하지 않았느냐고 자신의 주장이 옳았음을 기뻐 소리쳤을까?

월街에서 잘나간다는 CFA라는 자격증 공부는 윤리학(ethics)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만큼 금융인들의 윤리의식이 애당초 마비되었다는 반증일까? –; 중요하다는 이야기겠지. 그럼에도 언제부터인가 – 아마 처음부터겠지만 – 자본주의, 특히 월스트리트의 자본주의에서는 윤리는 교과과목일 뿐 실제업무와는 별 관계없는 것으로 치부되어 왔다. 승자독식과 한탕주의가 숭배의 대상일 뿐이었다.

그들은 경영진만 되면 천문학적인 보수를 받아 챙겼다. ‘황금낙하산’이라는 어이없는 제도는(주1) 경영진에게 회사를 말아먹어도 한 몫 챙길 기회를 주었다. 경영진이 되지 않더라도 남들이 원리를 이해할 수 없는 첨단금융상품을 만들어 한 몫 크게 챙길 기회는 곳곳에 널려 있었다. 그래서 계속 신상품을 만들어 팔았다. 언제까지? 시장이 폭발할 때까지.

그런데 자꾸 윤리의 문제로 사태의 본질을 파악하려 하면 매듭이 지어지지 않는다. 결국은 인간은 탐욕의 동물이라는 환원론적인 철학논쟁밖에 안된다. 인간의 탐욕이 시너지 효과로 승화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 자본주의의 운영철학이었다면 그것이 선순환적으로 기능할 수 있도록 했어야 하는 것은 시스템이었다. 지금 보다 비판받아야 할 것은 그 탐욕을 악순환의 고리로 내몬 시스템일 것이다.

‘만리장성(Chinese Wall)’이 있다. 갑자기 웬 중국이야기냐고? 그게 아니고 투자은행에 관한 용어다. 원래 투자은행은 기초자산의 증권매도자와 그 증권의 매수자를 중개해주는 기능이 본연의 역할이었다. 그런데 자신의 고유계정(prop trading)으로 직접 매수자가 되기 시작하면서 이해상충의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했다. 중개도 하는 것이 매수도 하면 곤란하지 않은가. 그래서 나온 것이 이해상충의 여지가 있는 부서는 사내에서도 정보공유가 금지되도록 하겠다는 취지의 제도다. 좀 웃기긴 하다. 그만큼 탐욕을 통제할 수 있는 제도가 허술하다.

보다 거시적으로 접근하면 칼 마르크스가 지적했듯이 국가기구는 처음부터 불편부당한 기구가 아닌 계급차별적인 기구였다. 다수결에 의한 대의제의 도입은 이러한 정치의 본질을 – 정치와 경제가 자웅동체라는 – 희석시켰다. 극우들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노동계급은 변화를 두려워했고, 결과적으로는 소비에트의 일당독재를 비웃는 이들이 양당독재와 시장독재는 용인하는 아이러니한 세상이 되었다. 자본가와 정치가가 구별이 안 되는 워싱턴정가가 그 하이라이트다. 이런 상태에서 시스템의 근본적인 수술은 요원한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실 구제금융은 죽어가는 시스템의 일시적인 연장에 불과하다.

이번 사태를 자본주의의 종말로 생각하는 이들도 있을 텐데 그렇게 될 것 같지는 않다. 신자유주의, 금융자본주의라는 이름조차도 사라질 것 같지는 않다. 잘해야 앵글로-색슨 자본주의, 즉 미국과 기축통화로서의 US달러 이니셔티브가 ‘다소’ 약화될 것이다. 결국에는 노동계급, 넓게 보아 유권자들의 ‘혁명적’ 각성이 없이는 도돌이표일 것 같다. 월스트리트의 더러운 자본가들을 욕하고는 선거 때 다시 그들에게 돈을 받아먹은 매케인과 공화당을 찍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메케인의 절반만(!) 받아먹었다는 오바마를 대안이랍시고 찍는 것도 난감하긴 마찬가지다.

(주1) 이 제도는 회사가 장기적인 발전을 위해 M&A당하는 것이 바람직함에도 피인수 기업의 경영진이 이를 반대할 수 있기에 그에게 어느 정도 회유성의 보수를 준다는 의미로 생겨났다. 웃긴다.

쓰지 말아야 할 표현, “천민자본주의”

어떤 유명한 블로그에 들렀다가 대한민국의 ‘천민자본주의’를 비판하는 글을 만났다. 이 ‘천민자본주의’라는 표현은 반체제 혹은 반정부적인 비판자들이 통상 자본주의 발달과정에서 볼 수 있었던 성장일변도의 경제정책, 승자독식과 금전만능의 사회체제 등의 어두운 면을 비판하기 위해  애용하는 표현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표현은 쓰지 않는 것이 좋다. 이유는 간단하다. 자본주의의 천박성을 비판하기 위해 쓰는 이 표현이 ‘천민’이라는 단어가 포함되어 있고 그 단어가 명백히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면서, 자본주의의 천박성을 비판하는 이들이 현대 자본주의 시대까지 온존하고 있는 계급차별적인 선입견을 인정하고 있는 모순에 빠지기 때문이다.

또 하나 ‘천민자본주의’라는 표현을 쓰지 않아야 하는 이유는 첫째 이유와 연결선상이기도 하거니와 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될 수도 있는데 요즘 이 표현을 쓰는 사람의 취지와 원래 이 말을 처음 사용한 막스 베버의 취지가 다르다는 것 때문이다. 천민자본주의의 사전적 의미를 알아보자.

賤民資本主義[독, Pariakapitalismus]
(상략)이와 같이 베버는 근대 이전의 자본주의를 근대자본주의와 엄격히 구분하여 비합리적 자본주의, 정치기생적 자본주의 등으로 불렀는데 천민자본주의도 이러한 표현의 하나이다. 베버가 이 기묘한 표현을 쓰면서 염두에 두었던 것은 중세에 ‘천민민족 Pariavolk’으로 불리며 주로 상업, 금융업에 종사했던 유태인이었지만, 보통은 근대 이전의 낡은 자본주의의 특징을 가리키는 말로서 사용되고 있다. ‘천민’이라는 표현이 붙은 것은 중세의 상인금융업자가 일반적으로 특수한 신분을 형성했으며 그 직업이 종교적, 도덕적으로 천하게 여겨졌었기 때문이다. 이 용어는 많은 문제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일반적인 용어로서 사용되지는 못하고 있으며 특히 자본주의를 시대를 초월한 현상으로 보는 입장에 대해서는 많은 비판이 가해지고 있다.(경제학 사전, 풀빛편집부 편, 조용범/박현채 감수)

막스 베버가 생각하는 자본주의에서의 직업윤리는 프로테스탄트의 윤리에서 찾은 것으로 자기 직업을 천직으로 생각하고 개인의 쾌락이나 영예를 희생시키면서 엄한 규율과 조직 밑에 직책에 헌신하는 금욕주의적인 직업윤리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금전욕에서 동기를 찾는 전근대적인 자본주의, 그리고 이러한 모습을 상징하는 유태인을 천민이라고 간주하였던 것이다.

Max Weber 1894.jpg
Max Weber 1894” by This file is lacking author information. – This file is lacking source information.
Please edit this file’s description and provide a source.. Licensed under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한편 베버는 프로테스탄트들의 금욕적 절약에 의한 투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전형적인 청교도들은 많이 벌고 적게 썼다. 그리고 그의 소득을, 절약하고자 하는 금욕주의적 열정으로부터, 매우 합리적인 자본주의적 사업에 자본으로서 재투자하였다.[The typical Puritan earned plenty, spent little, and reinvested his income as capital in rational capitalist enterprise out of an asceticist compulsion to save.]”

요컨대 베버의 사상에서 자본주의의 이해집단은 ‘돈벌이에만 집착하는 유태인 금융자본’와 ‘금욕적인 기독교적 윤리를 통해 자본주의를 발전시켜나가는 산업자본’이 대결하고 있고 후자를 자본주의를 발전시키는 동력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으로 비추어 보면 많은 사람들이 ‘천민자본주의’를 원작자의 의도에 맞지 않게 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더불어 우리는 그 어원을 살펴봄으로써 ‘천민자본주의’라는 번역이 잘못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유태인들로 대표되는 중세의 금융업자들은 신분의 높고 낮음에 개의치 않고 금융업을 통한 치부를 몰두했던 이들을 가리키는 것이다.(주1) 결국 그들은 자산가였고 그들은 군주의 돈줄이었다. 그런데 ‘천민자본주의’에서의 천민은 말 그대로 “고려 ·조선 시대 양천제(良賤制)라는 신분관념하에서 양인(良人)과 대비되는 하급신분을 가리키는 말”로 이들은 유태인 금융업자와 닮은 구석이 없는 피착취 계급이었을 뿐이다.

결국 우리가 현대 물질문명의 부정적인 측면을 비판함에 있어 ‘천민자본주의’라는 표현을 쓰는 순간, 그것은 원작자 베버의 의도에도 맞지 않으면서도 오히려 그가 저지르고 있는 인종차별 혹은 계급차별에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여 동승하는 모순에 빠지게 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주1) 그러므로 사실 셰익스피어의 작품에서의 샤일록을 우리는 고리대금업자로 알고 있지만 그는 그저 금융업자였을 뿐이고 기독교 사회는 이자를 받는 행위 자체를 죄악시, 금기시하여 왔다. 물론 그렇다고 수도원이나 기독교 성직자가 그런 짓을 하지 않았다는 것은 절대 아니다. 그들은 가장 적극적인 금융업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