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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지 말아야 할 표현, “천민자본주의”

어떤 유명한 블로그에 들렀다가 대한민국의 ‘천민자본주의’를 비판하는 글을 만났다. 이 ‘천민자본주의’라는 표현은 반체제 혹은 반정부적인 비판자들이 통상 자본주의 발달과정에서 볼 수 있었던 성장일변도의 경제정책, 승자독식과 금전만능의 사회체제 등의 어두운 면을 비판하기 위해  애용하는 표현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표현은 쓰지 않는 것이 좋다. 이유는 간단하다. 자본주의의 천박성을 비판하기 위해 쓰는 이 표현이 ‘천민’이라는 단어가 포함되어 있고 그 단어가 명백히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면서, 자본주의의 천박성을 비판하는 이들이 현대 자본주의 시대까지 온존하고 있는 계급차별적인 선입견을 인정하고 있는 모순에 빠지기 때문이다.

또 하나 ‘천민자본주의’라는 표현을 쓰지 않아야 하는 이유는 첫째 이유와 연결선상이기도 하거니와 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될 수도 있는데 요즘 이 표현을 쓰는 사람의 취지와 원래 이 말을 처음 사용한 막스 베버의 취지가 다르다는 것 때문이다. 천민자본주의의 사전적 의미를 알아보자.

賤民資本主義[독, Pariakapitalismus]
(상략)이와 같이 베버는 근대 이전의 자본주의를 근대자본주의와 엄격히 구분하여 비합리적 자본주의, 정치기생적 자본주의 등으로 불렀는데 천민자본주의도 이러한 표현의 하나이다. 베버가 이 기묘한 표현을 쓰면서 염두에 두었던 것은 중세에 ‘천민민족 Pariavolk’으로 불리며 주로 상업, 금융업에 종사했던 유태인이었지만, 보통은 근대 이전의 낡은 자본주의의 특징을 가리키는 말로서 사용되고 있다. ‘천민’이라는 표현이 붙은 것은 중세의 상인금융업자가 일반적으로 특수한 신분을 형성했으며 그 직업이 종교적, 도덕적으로 천하게 여겨졌었기 때문이다. 이 용어는 많은 문제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일반적인 용어로서 사용되지는 못하고 있으며 특히 자본주의를 시대를 초월한 현상으로 보는 입장에 대해서는 많은 비판이 가해지고 있다.(경제학 사전, 풀빛편집부 편, 조용범/박현채 감수)

막스 베버가 생각하는 자본주의에서의 직업윤리는 프로테스탄트의 윤리에서 찾은 것으로 자기 직업을 천직으로 생각하고 개인의 쾌락이나 영예를 희생시키면서 엄한 규율과 조직 밑에 직책에 헌신하는 금욕주의적인 직업윤리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금전욕에서 동기를 찾는 전근대적인 자본주의, 그리고 이러한 모습을 상징하는 유태인을 천민이라고 간주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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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베버는 프로테스탄트들의 금욕적 절약에 의한 투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전형적인 청교도들은 많이 벌고 적게 썼다. 그리고 그의 소득을, 절약하고자 하는 금욕주의적 열정으로부터, 매우 합리적인 자본주의적 사업에 자본으로서 재투자하였다.[The typical Puritan earned plenty, spent little, and reinvested his income as capital in rational capitalist enterprise out of an asceticist compulsion to save.]”

요컨대 베버의 사상에서 자본주의의 이해집단은 ‘돈벌이에만 집착하는 유태인 금융자본’와 ‘금욕적인 기독교적 윤리를 통해 자본주의를 발전시켜나가는 산업자본’이 대결하고 있고 후자를 자본주의를 발전시키는 동력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으로 비추어 보면 많은 사람들이 ‘천민자본주의’를 원작자의 의도에 맞지 않게 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더불어 우리는 그 어원을 살펴봄으로써 ‘천민자본주의’라는 번역이 잘못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유태인들로 대표되는 중세의 금융업자들은 신분의 높고 낮음에 개의치 않고 금융업을 통한 치부를 몰두했던 이들을 가리키는 것이다.(주1) 결국 그들은 자산가였고 그들은 군주의 돈줄이었다. 그런데 ‘천민자본주의’에서의 천민은 말 그대로 “고려 ·조선 시대 양천제(良賤制)라는 신분관념하에서 양인(良人)과 대비되는 하급신분을 가리키는 말”로 이들은 유태인 금융업자와 닮은 구석이 없는 피착취 계급이었을 뿐이다.

결국 우리가 현대 물질문명의 부정적인 측면을 비판함에 있어 ‘천민자본주의’라는 표현을 쓰는 순간, 그것은 원작자 베버의 의도에도 맞지 않으면서도 오히려 그가 저지르고 있는 인종차별 혹은 계급차별에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여 동승하는 모순에 빠지게 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주1) 그러므로 사실 셰익스피어의 작품에서의 샤일록을 우리는 고리대금업자로 알고 있지만 그는 그저 금융업자였을 뿐이고 기독교 사회는 이자를 받는 행위 자체를 죄악시, 금기시하여 왔다. 물론 그렇다고 수도원이나 기독교 성직자가 그런 짓을 하지 않았다는 것은 절대 아니다. 그들은 가장 적극적인 금융업자였다.

차별금지법인지 차별보호법인지

동성애자도 아니고 더군다나 레즈비언도 아닌데 언제부터인가 레즈비언권리연구소라는 곳에서 메일을 보내온다. 내가 언제 이들의 메일링 리스트에 가입했을까 기억이 나지 않고 스팸 처리할까도 생각했지만 사실 이런 곳의 정보를 알아두어도 나쁠 것 없다고 생각하고 (사실은 게을러서) 메일오면 가끔씩 열어보기나 하는 정도로 해두었다.

차별금지법이란?

며칠 전 온 편지는 꽤 흥미로웠다. 그들의 성명서였는데 성명서에 따르면 “법무부가 입법예고한 차별금지법에서 결국 성적지향 항목이 삭제” 될 것이라고 한다.

먼저 차별금지법에 대해서 알아보자.

차별금지법은 당초 2002년 대선 당시 노무현 현 대통령의 공약 중 하나로 처음 언급되었다. 이후 2006년 7월 국가인권위원회가 정부에 법안을 제정토록 권고하는 과정을 거쳐, 올 10월 법무부가 입법을 예고하였다. 이후 법무부는 당초 인권위가 제안한 20개의 차별금지 조항 중 성적지향 항목 등 7개 항목이 삭제된 차별금지법안을 2일 규제개혁위원회로 제출했으며, 이 위원회에서는 심의에 들어간 것으로 알려졌다. 통상 법안은 법제처의 심사 이후 대통령 차관회의, 국무회의를 거쳐 국회에서 입법을 결정한다.

문제는 앞서와 같이 앞서 연구소의 주장처럼 현재까지의 법안에는 ‘성적지향’이 빠져있다는 것으로  담당 서기관은 “(규제개혁위원회로) 넘어간 법안에서 ‘성적지향’이라는 단어는 전혀 찾아볼 수 없을 것”이라고 분명히 확인하고 있다.

동성애자는 차별해도 된다?

이에 대해 레즈비언권리연구소는 “동성애자에 관한 기초적/사회적 안전망이 전무한 상황에서 차별금지법의 제정은 당연”한데도 “법무부의 이번 결정은 그 동안의 노력을 일순간에 물거품으로 만드는 처사”라고 강력히 반발하고 있다.

반면 기독교계에서는 한국기독교총연합회, 성시화(聖市化)운동 등의 보수단체들로 이루어진 저지의회선교연합이 서명운동 등을 벌였으며 이들은 “동성애는 윤리도덕에 어긋난 성적행위로써 결코 용납될 수 없는 사회악”이며, “동성애차별금지법안은 동성애 확산을 막으려는 모든 건전한 노력을 금지시키며 오히려 처벌하는 법안”이라는 것, “동성애차별금지법안은 동성애확산을 조장하여서 결혼율의 감소, 저출산 문제, AIDS의 확산 등의 사회병리현상을 심화”시키기 때문이라고 주장하였다. 동성애에 대한 기존 사회의 편견을 모두 담고 있는 내용이다.

교계가 이렇게 동성애에 대해 반대하는 것은 앞서 주장에서 알 수 있듯이 그들이 동성애를 성경에서 금기하는 죄악이자 가족해체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동성애 차별금지법안 반대 운동에 앞장서 왔던 부산대 길원평 교수는 “동성애자들을 위한 보호와 치료가 필요”하다고 말하여 동성애를 생물학적인 특성이 아니라 질병으로 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차별금지법인지 차별보호법인지

‘성적지향’이외에도 인권위의 20개 차별금지 조항에서 삭제된 조항은 학력, 병력, 가족형태 및 가족상황, 출신국가, 언어, 범죄 및 보호 처분 등 총 7개 사항이다. 내용을 보면 이 사회의 보편타당한 상식에 비추어 차별하여서는 안 되는 부분이 많다. 그런데도 이를 차별금지 범위에서 삭제한 조치는 이제 법으로 명백하게 위의 사항에 대하여 차별을 해도 된다는 면죄부를 발행해준 셈이다.

사실 어쩌면 이 법안의 맹점은 보다 근본적인 것일 수 있다. 즉 개인적으로 차별금지 법안이라면 ‘어떠어떠한 범위 내에서는 일정정도 차등을 두는 것이 맞고 나머지는 모두 차별을 하여서는 안 된다’라는 네가티브 방식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그런데 현행법안은 인권위 권고안에서부터 포지티브 방식을 당연시 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 리스트 안에 들어있지 않은 다른 것은 차별해도 된다는 인식을 갖게 되는 것이다. 사회가 발전함에 따라 발생하는 다양한 변수를 법안이 포용할 수 없는 것이다.

더불어 현 법안에는 차별시정기구가 차별 가해자에게 시정명령과 강제이행금을 부과할 수 있도록 한 규정이 제외되어 실효성도 떨어질 것으로 보인다. 차별이 악의적인 경우 법원이 차별로 인한 재산상 손해액의 2~5배 배상금을 물릴 수 있도록 한 ‘징벌적 손해배상’제도도 시기상조라는 논란 끝에 조정안에서 빠졌다. 또한 입증책임을 피해자에게도 물린 점도 법의 적용을 더욱 어렵게 만드는 조항이다.

이번 법안은 위헌적인 법안이다

일부 전문가들은 결국 이번 차별금지법안이 차별을 조장하는 법안이라고 의견을 밝히고 있다. 또한 동성애 조항 관련 삭제도 “대선을 앞두고 표에는 영향을 주지 않을 거라 생각되는 가장 주변부에 있는 사람들을 제외시킨” 법안마련 자체에서의 차별이 아닌가 하는 의견까지 나오고 있다.

회남의 귤을 회북으로 옮기어 심으면 귤이 탱자가 된다는 격언이 있다. 이번 법안을 보니 탱자 정도가 아니라 아예 썩은 과일이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럴 바에 차라리 법을 만들지 않는 것이 낫다. 왜냐하면 헌법에는 이미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누구든지 성별·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

라는 조항이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지금 법무부는 선언적이라 할지라도 그나마 헌법에 호소할 수 있는 약자와 소수자를 위헌적인 법안으로 더욱 차별을 심화시키려 하고 있다. 마치 비정규직 보호법이라 자처하는 법들이 비정규직을 옥죄는 악법이 되었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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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cbs.co.kr/chnocut/show.asp?idx=659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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