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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적완화는 우리 금융위기의 치료법인가?”

정책결정자들은 전통적으로 금리를 내림으로써 축 늘어져 있는 경제를 자극한다. 이러한 금리인하는 다양한 방향에서 경제에 영향을 미치지만 특별히 더 많은 대출과 (그리고 더 적은 예금) 이를 통한 더 많은 소비를 독려한다. 금리가 높았던 때에는 그것은 영국 경제, 그리고 다른 곳들의 경제의 관리에 관한 성공적인 방법임이 증명되었다. 그러나 영국 금리는 9월의 5%에서 급격히 떨어져 이제 2%이다.

영국과 지구경제의 급격한 경기침체 현상으로 말미암아 더 많은 금리인하가 예상되는데 내년 초에는 1% 이하일 것으로 예측된다. 일단 금리가 0%가 되면 경제촉진 정책이 깨끗이 바닥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제기되는 질문은 이렇다. 다음은 무엇인가?

이 단계에서 중앙은행은 ‘양적완화(量的緩和, quantitative easing, 줄여서 QE)’ 방식을 채택하기 시작했다. QE는 일단 금리가 제로금리가 될 때 쓰는 통화정책의 자연스러운 연장이다. 신용의 가격을 바꿈으로써 대출수준에 영향을 미치기보다 중앙은행은 (전체 경제에 걸친 신용수준이 주되게 기초하고 있는) 상업은행의 적립금(reserve)를 증액함으로써 대출수준에 영향을 미치고자 하고 있다. 그래서 이른바 “양적완화”다.

중앙은행은 특히 통화창출을 통해 대차대조표의 양쪽을 증가시킴으로써 이를 실천한다. 그 돈은 상업은행이 중앙은행에 맡겨놓는 초과적립금 수준을 증가시키는데 사용된다. 그러면 상업은행은 그 적립금에 의지하여 사적부문에 돈을 비려줄 수 있고, 그러면 대출수준이 높아지게 된다. 기술적으로 중앙은행은 상업은행(또는 다른 기관들)으로부터 자산을 (통상 정부부채) 매입하고 중앙은행에의 상업은행의 적립금을 보증한다. 이는 물가상승 압력에서 상승으로 이끌 수 있는 통화 기초 (유통되고 있는 화폐에 중앙은행에서의 적립금이 더해져) 증가로 귀결된다.

QE는 새로운 게 아니다. 몇몇 학자들은 이것의 활용이 1930년대 미국의 대공황으로부터의 탈출의 한 주요원인으로 간주하기도 한다. 보다 최근에 일본은 2001년부터 2006년까지 QE를 채택했고 금리가 0.25%에 이르자 중앙은행의 대차대조표를 급격하게 확장시켰다. 가혹한 디플레이션은 피할 수 있었고 산출 곡선의 금리는 어느 때보다 낮았다. 그러나 부채수준은 수축했고 경제는 충격에 고스란히 노출되었었다.

그러서 영국에서 사용하기 좋은 종책인가?

많은 면에서 이것은 영국 정책결정자들의 현 정책선택의 단순한 확장일 뿐이다. 현재까지 현재의 위기에 모든 것들이 시도되었었다. 금리인하, 재정적 자극, 금융시스템의 재자본화, 2007 수준의 대출을 유지하기 위한 정부의 시도, 그리고 주택가격의 약화를 거스르려는 수단들이 집중적으로 일어났다.

그러나 이 위기는 최근의 영국 역사에서의 다른 위기들과는 다르다. 이 위기는 영국이 전체적으로 너무 많이 빌려서 발생한 것이다. 노동당 정부 하에서 가구당 부채는 두 배 증가했다. 정부는 2002년 3분기 회계연도 이후 (쓰기 위해 빌리는) 재정적자가 증가하여 왔다. 이는 내년에는 GDP 대비 8%의 재정적자로 악화될 것이다.

동시에 경제성장의 주요 동력 중 하나는 많은 부분 대출열기의 뒤편에 있는 금융 부문인데 이들의 대차대조표는 지난 10년간 다섯 배(약 1조 파운드에서 오늘날 5조 파운드를 상회하는) 증가하여 넷 중에 한 요소 정도로 영국경제를 정체시켰다.

QE는 단순히 더 많은 대출을 독려함으로써 수요를 소생시키려는 또 하나의 시도를 의미할 뿐일 수도 있다. 대출이 이 위기를 초래한 뿌리라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그것은 치료법이 아닌 것 같다. 치료법은 저축과 자본의 생산적 사용을 독려하는 정책에 있을 것이다. 그 외에 치료법은 침체가 그 흐름대로 흘러가고 시스템으로부터 정화되는 잉여로 인하여 영국경제가 침체로부터 벗어나면서 성장하는 강한 기초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점에서 QE는 재정적 자극, 공격적 금리인하, 그리고 은행이 좀더 많은 대출을 하게끔 하려는 시도와 더불어 단순히 영국의 최후의 순간을 지연시킬 뿐이고 오늘의 문제를 내일로 미루고 영국을 일본식의 “잃어버린 10년”으로 선고하는 것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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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이 글은 현재의 디레버리징과 수요축소 현상을 용인하는 한편, 긴축정책을 통해 경제를 건전화시키자는 주문으로 이해된다. 물론 시장자유주의적인 사상을 가진 이들의 통상적인 주문이긴 하나 이데올로기적인 편견을 떠나 한편으로는 수긍이 가는 면도 없잖아 있다. 현 위기의 원인인 대출을 오히려 독려하고 급기야 돈을 품으로써 사태를 해결하려는 시도는 어쩌면 본문에 나와 있는 대로 위기를 유예시키려는 시도에 불과할 수도 있다. 마약중독자에게 마약을 주면서 생명을 연장시키려는 시도와 비슷하다. 그럼에도 국가와 중앙은행이라는 최종대부자가 경제의 핏줄이라 할 수 있는 금융시스템이 오염되어 전 산업분야로 퍼져가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으라는, 또는 더 위축시키라는 주문 역시 비현실적이기는 마찬가지다. 장기적으로 좋아질 것이라는 낙관적 견해에 대해 ‘인간은 장기적으로 누구나 죽는다는’ 어느 경제학자의 말을 상기시키지 않더라도 위기는 분명한 현실이기 때문이다.

펑크의 자기부정에 대한 단상

역시 블로깅은 재밌다. 아래 글들은 이른바 Punk Spirit 에 관한 일련의 커뮤니케이션을 시간 순으로 나열해본 링크들이다. ‘웅크린 감자’님이 펑크적이지도 않은 빅뱅은 펑크 흉내 내지 말라고 화두를 꺼내셨고, ‘민노씨’가 ‘웅크린 감자’님의 훈계가 모순되게도 “권위적이고, 폭력적인 사고”를 기반으로 대안을 찾고 있다고 비판하셨고, ‘히치하이커’님이 “다만 실제로 국내 음악신에서 아이돌이란 위치에 있는 이들이 얼마나 자율적으로 음악을 하고 있는진 궁금하긴” 하다며 민노씨의 글을 첨언하셨다.(비판은 아닌 것 같고) 그리고 이에 대해 민노씨가 또 “펑크는 궁극적으론 자신을 부정하고, 극복하고, 역먹이려는 정신이라고 나는 감히 이야기하고 싶다”라고 첨언하셨다.

펑크 음악을 즐겨듣는 나에게는 참 흥겨운 주제다. “펑크는 궁극적으로 자신을 엿 먹이려는 정신”이라는 민노씨의 멘트도 왠지 공감이 간다. 그것 아마 아래와 같은 이유때문 일 것이다.(너무 냉소적일지 몰라도…)

시장 지배를 위한 음악 산업의 전략은 정밀하게 발전되어 왔다. 시장은 그들이 장악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주기적으로 해결되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주장이다. 레코드 회사들은 인디펜던트들의 활동으로 드러난 시장 수요에 가끔 부응하기도 하지만 보통 그들은 시장을 교묘히 조작하고 가능한 선택을 제한한다. 이것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 대중적 취향이다. 한편으로 대중은 항상 혁신에 응답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대중적 취향은 항상 장사꾼들에 의해 현혹되기도 한다. 불만스러운 요구들이 쌓여 마침내 터져 나올 때까지 기업은 대중적 취향 위에 군림하다가 인디펜던트들에 의해 이 욕구는 상업화하고 다시 이는 기업의 의해 매수된다. 그러나 의문점은 어디에서 그러한 새로운 요구들이 생겨나는 것인가? 왜 시장 통제는 대부분 효율적이지만 가끔씩은 그렇지 않은가? 대중은 그들이 원하는 것을 얻는가? 항상? 가끔씩? 이 장에서 얘기하고 싶은 요점은 록이 제작되는 상업적 프로세스는 본질적으로 상호 모순적이라는 것이다.[록음악의 사회학 사운드의 힘, 사이먼 프리스, 권영성/김공수 옮김, 한나래(1995), pp 128~129]

어쨌든 모든 예술행위는, 급기야 모든 (정치적, 경제적, 사상적) 행위는 다른 이에게 전달되어야 한다. 전달되지 않는 한에는 지가 무슨 랭보였든, 피카소였든, 커트 코베인이었든, 트로츠키였든 사람들의 기억 속에 자리 잡지 않게 된다. 그 점이 체제순화적인 행위에서야 갈등을 빚을 일이 없겠으나 체제모순적인 행위에서는 그 자체가 모순이 된다. ‘이거 시발 체제는 좆같은데 그걸 알리려면 체제 안으로 들어가야 되다니’라는 독백을 바로 윗 글에서 사이먼 프리스가 시장과 인디펜던트의 관계를 비유로 들며 어렵게 설명해주었다.

팬들도 마찬가지다. 예전에 suede가 우리나라에 알려지지 않았을 때 그 광팬을 만난 적이 있는데 그 분 왈 제발 우리나라에서 유명해지지 않았으면 좋겠단다. 자신을 메인스트림에 쩔어있는 국내 팝팬들과 차별화시키고자 하는 욕망이었다. 그런데 그 팬은 suede 가 영국 음악씬에서 명성을 얻지 않았다면 그들의 이름을 알기나 했겠는가. 그것이 음악‘시장’에서의 팬(특히 오덕후스러운)들의 딜레마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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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ass3“. Licensed under CC BY-SA 3.0 via Wikimedia Commons.

아마도 이러한 ‘상호모순’이 가장 비극적으로 표출된 사례는 Joy Division의 이언 커티스나 Nirvana의 커트 코베인의 자살이 아닐까 싶다. The Clash 를 비롯한 상당수의 펑크 밴드들도 자신의 이데올로기, 상업주의, 팬들의 모순된 요구 속에서 긴장감과 자기부정 속에서 괴로워했고 말이다.(이러한 자기부정은 자본주의 정치체제로 편입한 좌파정당의 평당원들 사이에서 꽤나 심각한 고민거리다) 결국 민노씨 이야기처럼 ‘끊임없이 자기부정을 하는 펑크 정신’이 온존하여 음악계가 바람직한 방향으로 흘러가면 좋겠지만 당사자에게는 상당한 스트레스임은 부정할 수 없을 것 같다.

마지막으로 엄청난 펑크관련 블로그 하나 소개

추.

예전에 NHK에서 밴드 경연대회를 본적이 있는데 모히칸 머리를 하고 웃통을 벗은 엄청난 녀석이 보컬을 맡은 펑크밴드의 공연도 있었다. 이 보컬, 사회자의 단상까지 들고 나와서는 무대를 개판으로 만들어버렸다. 문제는 공연이 끝나고 난 후인데 단상을 죄송스럽다는 표정으로 들고 가 정중히 내려놓고 ‘스미마센’하며 인사를 꾸벅 하는 것이었다. 그때 일본 애들 중엔 펑크밴드가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었다.

신용위기, 그 1년 후 (2)

인디펜던트紙가 신용위기가 도래한 지 일 년여에 즈음하여 ‘Credit crunch one year on’이라는 제목으로 금융계 인사 10명의 감회를 엮은 기사를 게재했다. 오늘은 두번째로 HSBC의 체어맨의 말을 들어 보기로 하겠다.

Stephen Green, chairman of HSBC

금융시장은 2009년에도 어려울 것이다. 약해지고 있는 실물 경제는 물론 회복될 것이다. 회복되기에는 많은 분기가 소요될지도 모르겠다. 금융시장이 전과 같지 않으리라고 보는데 이는 주주를 대변하는 규제기관이나 감독기관이 높으면서도 증가하는 레버리지와 부외금융(off-balance-sheet)(주1) 상품의 복잡한 구조를 용인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시장에 개입되어 있는 파트들은 새로운 비즈니스모델을 찾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모든 것이 정리되기까지는 꽤 시간이 걸릴 것이고 금융시장의 몇몇 부문에서는 고용이 줄어들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완전히 증권화(securitisation) 이전의 시대로 돌아갈 수는 없다. 은행들이 단순히 신용의 중개자로만 존재하던 예전으로 돌아가지는 않을 것이다.(주2)

이는 우리가 아는 문명의 종말은 아니다. 이는 우리가 헤쳐 나가야 할 고통일 뿐이다. 관계당국은 금융시장을 광범위한 범위에서 신용을 완화시켜 왔었다. 많은 측면에서 이는 현재까지는 제한된 영향만 미쳤다. 그들은 시스템 내에 유동성을 유지시켜야 할 필요성과 인플레이션의 고삐를 잡아매어야 할 필요성 사이에서 딜레마에 놓여 있다.(주3)은행들은 확실히 그들이 지니고 있어야 했던 그러한 강한 위험관리를 지니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개인 차원에서 위험부담을 독려하기 위한 보상제도들에 관한 이슈가 있다.

FSA(Financial Services Authority : 영국재정청) 은 허심탄회하게 그들이 배워야할 교훈을 깨달았다. 그 기관은 은행의 유동성과 자본기반에 많은 주목을 기울일 것이다. 투자자는 또한 신용평가에 의존하는 대신 그들 자신의 결정을 내려야 할 것이다.

촌평 : 신용평가를 안 믿으면 자본주의에서 무엇을 믿으란 말인가?

 

(주1) 현대 금융시장에서의 증권화(securitisation)나 프로젝트파이낸싱 등의 사업방식은 어느 투자자가 그들의 사업을 위해서 돈을 차입하였음에도 그것이 재무제표에 계상되지 않도록 별도의 도관체(conduit)를 만드는 방식으로 진행해왔는데 이것이 바로 부외금융, 즉 대차대조표에 부채가 기록되지 않는 기법이라 할 수 있다. : 역자주

(주2) 역시 시장의 메이저플레이어인 만큼 현재의 증권화 대세 현상에 대해 긍정하는 입장이고 그것을 옹호하는 데, 나 역시 그와 똑같은 취지는 아니나 어느 정도 은행들이 이전의 단순 중재기관의 위치로 돌아갈 수 없음에 대해서는 공감하는 편이다. 또 그렇게 할 필요가 있나 하는 생각도 든다. : 역자주

(주3) 가장 대표적으로 금리정책에 있어서 이러한 딜레마가 계속 논란이 되고 있다. : 역자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