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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RSS에서 내 블로그가 정치 블로그로 분류되는 이유

민노씨께서 내가 가끔 찝찝하게 생각하던 부분을 잘 지적해주셨다. 한RSS라는 국내 최고의 RSS 구독 사이트에서 블로그들을 카테고리별로 분류해놓았는데, 민노씨가 보기에 이 분류가 합당치 않다는 것이다. 민노씨가 든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그 자신이 속해있는 ‘정치’ 카테고리다. 그 곳에는 박노자씨의 블로그를 비롯하여 이정환씨의 블로그, 그리고 내 블로그도 속해있다. 민노씨는 내 블로그를 예로 들면서 블로거가 굳이 소개에 “경제관련 Blog”라고까지 했는데 “정치에 잡아두는” 이유를 모르겠다고 하셨다.

사실 내가 블로그계에 처음 발을 들여놓게 된 것은 해외의 파워블로거들이 상상도 못할 수입을 얻고 있다기에 물질적 보상에 눈이 어두워서였으니 그 동기로 치자면 당연히 “경제” 블로그다. 여하튼 이후 포스팅도 거의 잡식성이긴 하나 글의 비율로 치자면 경제 관련 글이 가장 많긴 하다. 그런데 왜 한RSS는 나를 “정치에 잡아두고” 있을까? 나는 이것이 비단 한RSS뿐만이 아닌 메타블로그, 나아가 사람들의 정서가 반영된 결과라고 생각한다. 즉 내 생각에 사람들이 경제현상 제반에 대한 고찰(economy 또는 economics), 나아가 정치경제학적인 고찰(political economy)은 정치(politics)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이 편견에 따르면 경제는 business다. 즉 돈이 되는, 또는 투자와 관련된 그 무엇을 말한다. 다른 예로 올블로그에서도 ‘올블로그 어워드 2008’이라며 후보 추천이 진행 중인데 여기에서도 “전문 부문”을 볼 것 같으면 분류가 ‘경제 분야’가 아닌 ‘비즈니스 분야’다.


올블로그 어워드 2008 추천분야

실제로 한RSS가 경제 카테고리에 분류해놓은 RSS중 경제신문을 제외한 일반인들의 블로그 성격을 볼 것 같으면 대부분 투자, 재테크, 주식에 관한 블로그들이다. 물론 그들 블로그 역시 거시경제에 대한 분석 글도 상당수 실리기도 하지만 투자적인 관점에서의 분석이 주가 된다. 그것들이 옳고 틀린가를 따지는 것이 아니고, 그러한 경제고찰에 있어 관점의 차이가 내 블로그와 이정환씨의 블로그와 같은 유의 관점과 대별되는 점이라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그것이 한RSS를 비롯한 사회일반이 정치경제적 관점을 경제로 보기보다는 정치로 보는 이유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넷상에 계속하여 펌질되고 있는 것 같은 소위 ‘경제관련 사이트 모음’이라는 글에 천형처럼 붙여진 내 블로그에 대한 딱지를 짤방으로 소개.


“시스템에 대한 비판주의”! 이정환닷컴이 더 하다오~

펑크의 자기부정에 대한 단상

역시 블로깅은 재밌다. 아래 글들은 이른바 Punk Spirit 에 관한 일련의 커뮤니케이션을 시간 순으로 나열해본 링크들이다. ‘웅크린 감자’님이 펑크적이지도 않은 빅뱅은 펑크 흉내 내지 말라고 화두를 꺼내셨고, ‘민노씨’가 ‘웅크린 감자’님의 훈계가 모순되게도 “권위적이고, 폭력적인 사고”를 기반으로 대안을 찾고 있다고 비판하셨고, ‘히치하이커’님이 “다만 실제로 국내 음악신에서 아이돌이란 위치에 있는 이들이 얼마나 자율적으로 음악을 하고 있는진 궁금하긴” 하다며 민노씨의 글을 첨언하셨다.(비판은 아닌 것 같고) 그리고 이에 대해 민노씨가 또 “펑크는 궁극적으론 자신을 부정하고, 극복하고, 역먹이려는 정신이라고 나는 감히 이야기하고 싶다”라고 첨언하셨다.

펑크 음악을 즐겨듣는 나에게는 참 흥겨운 주제다. “펑크는 궁극적으로 자신을 엿 먹이려는 정신”이라는 민노씨의 멘트도 왠지 공감이 간다. 그것 아마 아래와 같은 이유때문 일 것이다.(너무 냉소적일지 몰라도…)

시장 지배를 위한 음악 산업의 전략은 정밀하게 발전되어 왔다. 시장은 그들이 장악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주기적으로 해결되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주장이다. 레코드 회사들은 인디펜던트들의 활동으로 드러난 시장 수요에 가끔 부응하기도 하지만 보통 그들은 시장을 교묘히 조작하고 가능한 선택을 제한한다. 이것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 대중적 취향이다. 한편으로 대중은 항상 혁신에 응답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대중적 취향은 항상 장사꾼들에 의해 현혹되기도 한다. 불만스러운 요구들이 쌓여 마침내 터져 나올 때까지 기업은 대중적 취향 위에 군림하다가 인디펜던트들에 의해 이 욕구는 상업화하고 다시 이는 기업의 의해 매수된다. 그러나 의문점은 어디에서 그러한 새로운 요구들이 생겨나는 것인가? 왜 시장 통제는 대부분 효율적이지만 가끔씩은 그렇지 않은가? 대중은 그들이 원하는 것을 얻는가? 항상? 가끔씩? 이 장에서 얘기하고 싶은 요점은 록이 제작되는 상업적 프로세스는 본질적으로 상호 모순적이라는 것이다.[록음악의 사회학 사운드의 힘, 사이먼 프리스, 권영성/김공수 옮김, 한나래(1995), pp 128~129]

어쨌든 모든 예술행위는, 급기야 모든 (정치적, 경제적, 사상적) 행위는 다른 이에게 전달되어야 한다. 전달되지 않는 한에는 지가 무슨 랭보였든, 피카소였든, 커트 코베인이었든, 트로츠키였든 사람들의 기억 속에 자리 잡지 않게 된다. 그 점이 체제순화적인 행위에서야 갈등을 빚을 일이 없겠으나 체제모순적인 행위에서는 그 자체가 모순이 된다. ‘이거 시발 체제는 좆같은데 그걸 알리려면 체제 안으로 들어가야 되다니’라는 독백을 바로 윗 글에서 사이먼 프리스가 시장과 인디펜던트의 관계를 비유로 들며 어렵게 설명해주었다.

팬들도 마찬가지다. 예전에 suede가 우리나라에 알려지지 않았을 때 그 광팬을 만난 적이 있는데 그 분 왈 제발 우리나라에서 유명해지지 않았으면 좋겠단다. 자신을 메인스트림에 쩔어있는 국내 팝팬들과 차별화시키고자 하는 욕망이었다. 그런데 그 팬은 suede 가 영국 음악씬에서 명성을 얻지 않았다면 그들의 이름을 알기나 했겠는가. 그것이 음악‘시장’에서의 팬(특히 오덕후스러운)들의 딜레마일 것이다.

Crass3.jpg
Crass3“. Licensed under CC BY-SA 3.0 via Wikimedia Commons.

아마도 이러한 ‘상호모순’이 가장 비극적으로 표출된 사례는 Joy Division의 이언 커티스나 Nirvana의 커트 코베인의 자살이 아닐까 싶다. The Clash 를 비롯한 상당수의 펑크 밴드들도 자신의 이데올로기, 상업주의, 팬들의 모순된 요구 속에서 긴장감과 자기부정 속에서 괴로워했고 말이다.(이러한 자기부정은 자본주의 정치체제로 편입한 좌파정당의 평당원들 사이에서 꽤나 심각한 고민거리다) 결국 민노씨 이야기처럼 ‘끊임없이 자기부정을 하는 펑크 정신’이 온존하여 음악계가 바람직한 방향으로 흘러가면 좋겠지만 당사자에게는 상당한 스트레스임은 부정할 수 없을 것 같다.

마지막으로 엄청난 펑크관련 블로그 하나 소개

추.

예전에 NHK에서 밴드 경연대회를 본적이 있는데 모히칸 머리를 하고 웃통을 벗은 엄청난 녀석이 보컬을 맡은 펑크밴드의 공연도 있었다. 이 보컬, 사회자의 단상까지 들고 나와서는 무대를 개판으로 만들어버렸다. 문제는 공연이 끝나고 난 후인데 단상을 죄송스럽다는 표정으로 들고 가 정중히 내려놓고 ‘스미마센’하며 인사를 꾸벅 하는 것이었다. 그때 일본 애들 중엔 펑크밴드가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었다.

총선 소회…라기보다는 이런저런 잡생각

내가 지난 번 글 ‘진보신당을 비판적으로 지지한다’라는 글에 내 스스로의 정치적 지향이 ‘자기파괴적 자본주의자’라고 썼었는데 그것을 유명 블로거 민노씨께서 자기 글에 인용을 했다. 그래서 들었던 느낌은 “뭐 대단한 이야기라고 인용까지”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내가 RSS 에 등록해놓고 필히 찾아 읽는 블로그가 있는데 필명 ‘포카라’님의 블로그다. 주식시장에 관한 글이 주로 올라와 있으나 그저 그런 시시껄렁한 점장이식 주가예측 블로그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실로 엄청난 인문학적 지식과 경제학적 고민이 묻어나는 글이 넘쳐나는 곳이다. 블로거 중 개인이력이 가장 궁금한 분이 바로 이 포카라님이다.(주1)

두 가지 에피소드를 이야기했는데 이야기의 요지는 요즘 내가 생각하는 화두에 관해서 말하고 싶어서이다. 나 스스로를 ‘자기파괴적 자본주의자’라고 포지셔닝한 이유는 사실 자본주의 사회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99%가 그러하겠지만(주2) 나 역시 자본주의 착취구조의 먹이사슬에서 위로부터 착취 받고 아래를 착취하는데 일조하는 역사적 사명을 부여받아 그에 따라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착취구조에서 제법 상부에 속해 있다고도 할 수 있겠다. 가진 것은 쥐뿔 없는 놈이 말이다.

그런 면에서 나 스스로를 ‘자기파괴적 자본주의자’라고 한 것이다.

포카라님을 거론한 데에는 좀더 설명이 필요할 것 같은데 포카라님이 최근 내가 또한 RSS로 애독하던 우석훈 씨에 대한 촌평을 올린 이유 때문이다. 이 시니컬로 치자면 국내 둘째 가라면 서러울 것 같은 자칭 ‘명랑 공산주의자’ 우석훈 씨의 책에 대한 “애정 어린” 비판을 읽었는데 포카라님에 따르면 우석훈 씨가 최근 낸 책 ‘명랑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언론에서 호들갑 떨만큼 대단한 것 같지 않다”고 한다.

결론적으로(?) 한가로운 토요일 저녁 쓸데없이 향후 – 그것이 언제가 될 것인지는 이번 선거를 보면 좀 더 요원한 과제로 남기는 하지만 – “사람 사는 세상이 돌아와” 혁명세력이 누군가를 시급한 경제적 기반의 재정립에 써먹어야 할 때 누구를 써먹을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즉 여기에 마음은 민중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 차있으나 실물경제에는 개념 없는 인간이 있다.(주3) 두 번째 ‘명랑 공산주의자’이고 이론으로 빠삭하나 역시 실물경제에 그리 익숙하지 않은 인간이 있다. 세 번째 ‘자기파괴적인’ 블로그질을 일삼으나 실생활에선 그런 티를 내지 않는 박쥐같은 약간은 실물경제에 익숙한 인간이 있다. 마지막으로 정치적인 부분에 대해선 개념 탑재 하지 않은 실물경제만 밝은 인간이 있다. 민중을 한 없이 사랑하는 집권자는 누구를 택해야 하나?

개인적으로 포카라님 같은 분이(주4) 킹왕짱이라고 생각하는데 이 남한 땅에 그런 분이 10분이나 계실까 모르겠다.

하여 나는 다시 생각해본다.

진보신당이 의석을 못 얻었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살짝 눈가에 이슬이 맺히지만 또 의석을 얻었다 한들 갈 길은 너무 멀다는 그 하나의 사실 때문에, 그리고 위에서 단편적으로 주절주절 늘어놓은 그 어려운 로드맵 때문에 나는 뭐 진보신당이 의석을 얻지 못한 것이 ‘대세에 영향 없다’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아직도 사실 가야할 길은 무지하게 멀다 … 물론 생양아치 홍정욱한테 노회찬이 진 건 열 받는다.

(주1) 나 스스로는 누가 나의 개인이력을 파고들려는 것에 알러지적 반응을 보이는 주제에

(주2) 이것은 아무리 변혁적 마인드를 가지고 있는 노동자여도 마찬가지다. 현자노조의 사회주의자 노동자가 자본주의 재생산 구조에 기여하는 비율과 사회주의 세상을 위해 기여하는 비율을 생각해보면 10초면 알 수 있다

(주3) 소위 자칭 좌파라면 경제학적 소양이 어느 정도 있어야 하는데 꽤나 이름빨 날리는 이들 중에서 이런 소양 없이 말빨로 먹고 사는 이들이 사실 꽤 된다

(주4) 물론 사실 이론 좌파들의 도움도 필수적이다… 다만 현실감각을 지닌 인물이 필요하다는 의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