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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을 아는 것이 경제학의 최후과제

이 테잎들은, 엔론의 서부해안 트레이딩데스크으로부터의, CBS가 몇 년 전에 보도한 사실을 확인해주고 있다 : 즉 전력생산자와 거래자들 간의 비밀스러운 계약에서 발전설비를 끄도록 명령함으로써 가격을 의도적으로 올린 것이다.

“만약 스티머를 끄면, 그것들이 복구되는 것은 얼마나 걸릴까요?” 엔론의 한 노무자가 말하는게 들린다.

“오, 매시간 켜고 끄는 것을 원하는 것이 아닐 텐데요. 그냥 놔둡시다.” 다른 이가 말한다.

“음. 그냥 가서 차단해버리지 그래요?”

시애틀 근처의 스모미쉬 공공유틸리티지구의 공무원들은 이 테잎을 법무부로부터 받았다.

“이것은 우리가 기다리던 그 증거다. 이는 그들이 시장을 조작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그 유틸리티의 대변인 에릭 크리스텐슨의 말이다.[Enron Traders Caught On Tape]

反민영화론자들이 공공서비스를 민영화할 경우 얼마나 끔찍한 재앙이 초래되는지 자주 거론하는 사례가 엔론의 사례다. 발전 및 자원 분야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속도로 성장하며 에너지 서비스 민영화의 선두주자로 나섰던 이 기업은 지극히 복잡한 투자구조와 이에 따른 기상천외한 분식회계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회사다. 인용한 부분은 이 이윤만을 쫒는 회사가 지역에 공급하여야할 전기서비스를 가지고 어떻게 장난을 쳤는지 고발하고 있는 상황의 묘사다. 전력은 거래되는 것인데 전력을 차단하면 공급이 줄어 가격이 올라갈 것이고 거래자는 이를 갈취한다는 이치다.

특이하게도 우익이든 좌익이든 –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모르나 – 인간과 그 인간들로 구성된 기업은 이윤추구를 어떠한 행동의 가장 주요한 동기로 간주한다는 것에 동의한다. 경제학자들은 개인(個人)이든 법인(法人)이든 여태 경제 흐름을 제대로 파악해 합리적인 경제 전망을 하는 ‘경제적 인간(Homo Economicus)’라는 인간상을 경제 시스템의 주역으로 간주한다. 좌우익의 입장차가 있다면 우익은 이러한 합리적 이윤추구행위가 시장을 통해 검증되며 공공선에 도달한다는 것이고, 좌익은 개별적 이윤추구행위가 통제되지 않아 자본주의의 모순을 증폭시킬 것이라는 정도일 것이다.

특히 예로 든 공공서비스의 민영화에 대해 좌우익의 이러한 입장차는 첨예하게 드러난다. 당초 우익들은 – 또는 집권세력 – 민영화가 당장의 비용지불을 이연시키는 동시에 시장경쟁을 통해 시설과 서비스를 값싸게 공급할 것이라는 주장을 하여 민영화를 추진하였고, 좌익은 민영화가 공공서비스에 이윤추구 동기를 제공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비용의 증대와 이로 인한 수혜자의 배제 및 서비스 질 저하를 불러올 것이라고 주장했다. 두 주장 모두 어느 면에서는 동일한 이윤추구 동기에 대한 동전의 양면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라 생각된다. 엔론은 당연히 동전의 더러운 면을 상징한다.

이 글에서는 민영화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은 유보하도록 하겠다. 그보다는 시장에서의 이윤추구 행위가 공공성과 가장 첨예하게 부딪히는 그 민영화 서비스가 과연 상당수 경제학자들이 – 앞서 말한바 좌우익 공히 공유하는 – 특정한 목적, 즉 이윤동기에서만 움직이는 것인가 하는 질문을 던져보고자 한다. 그 물음에 대해 엔론을 예로 들 경우 답은 분명하다. 위에 묘사한 소름끼치는 풍경에서 전기를 차단할 경우 고통 받을 주민들에 대한 배려는 어디서도 느낄 수 없다. 이는 시장 안에서의 조화된 이기적 인간들의 행위가 공공선을 초래한다는 우익들의 주장을 무색케 한다.

2005년 8월, 미국 역사상 최악의 허리케인으로 기록된 카트리나가 루이지애나를 강타했다. 당시 그 지역에서 전력 공급 사업을 맡고 있던 엔터지는 정전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이미 100만 가구에 전력 공급이 끊긴 상태였고 엔터지 직원 1,500명 역시 집을 버리고 다른 곳으로 대피해 있었다. 엔터지의 CEO 웨인 레오나드(Wayne Leonard)는 직원들에게 개인적인 상황이 모두 해결될 때까지 직장에 나오지 않아도 된다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중략] 힘든 상황에도 불구하고 엔터지 직원들은 대부분 직장으로 복귀했고, 최악의 상황이던 그 일주일 내내 하루에 16시간씩 일했다. [중략] 그들이 이렇게 행동하게 된 중심에는 레오나드의 거대한 비전이 자리 잡고 있다. 레오나드의 비전은 ‘더 좋은 세상을 만드는데 기여한다’는 것이었고 그의 비전을 가슴에 품은 직원들에게 직장은 월급 이상의 것이었다.[스티브잡스 무한혁신의 비밀, 카민 갤로 지음, 박세연 옮김, 권영설 감수, 비즈니스북스, 2011년, pp123~124]

민영화 서비스가 반드시 나쁘지 만은 않다는 다른 예로 쓰일 수 있는 경우다. 같은 민간 에너지 기업이지만 적어도 엔터지는 카트리나 사태로 인한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노력을 함에 있어 이윤추구를 유보하였다. ‘더 좋은 세상을 만드는데 기여한다’라는 CEO의 비전은 어쩌면 좌우익 모두 마음에 들지 않을 것 같다. 물론 그가 일관되게 그러한 비전을 추구하였는지는 의문이지만 어떤 면에서 그는 ‘자비로운 자본가’, ‘공익을 배려하는 자본가’로 규정할 수 있을 것 같고, 이는 경제학자들이 규정하는 ‘경제적 인간’과는 거리가 있다. 어쨌든 민영화 기업임에도 불구하고 이 회사는 공익을 추구했다.

인용한 저서는 저 유명한 애플의 CEO 스티브 잡스에 관한 성공비결을 다룬 책인데, 이 사례는 그의 동기와 유사한 동기로 기업을 운영하는 다른 기업을 사례로 들기 위해 언급된 것이다. 요컨대 스티브 잡스의 모티브는 돈이 아니었다. 그에게는 세상을 바꾸겠다는 열정이 있었고 이를 구현하기 위해 노력하였으며, 돈은 그것에 대한 부산물로 따라온 것이다. 경제학자들의 인간상과 동떨어진 이야기라 이례적이라 여길 수 있을 것 같은데, 사실 상당히 많은 경영학/성공학 저서들이 이런 맥락을 강조한다. ‘돈이 아니라 열정이다.’ 그렇다면 경제학과 경영학이 바라보는 인간상은 전혀 다른 것인가?

정리를 해보자면, 민영화든지 인간상이든지 앞서 언급하였다시피 동전의 양면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된다. 큰 기조에 있어 시스템이 인간의 행위를 규정하고 좀 더 인간적인 시스템을 갖추면 보다 나은 행동을 기대할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여건 속에서도 – 예로 이윤추구가 지상과제인 민영화 서비스 내에서도 – 사람들은 이타적 행위를 곧잘 한다는 것이다. 이를 완전히 비합리적인 행위로 몰아세우기 어려운 것이, 바로 스티브 잡스가 혁신적인 제품을 만들어 세상을 바꾸겠다는 이타적(또는 적어도 非이윤추구적인) 행위를 했고 그것이 물질적 성공까지 이어진 사례가 있기 때문이다.

결국 인간의 이기적인 이윤추구 행위와 그 행위의 합인 시장에서 우익 경제학자들이 기대하는 조화(‘보이지 않는 손!’)를 기대하기에는 그 안에 채워져야 할 것이 아직도 많다는 사실은 여전하고, 반대로 좌익 경제학자들이 비판하는 끔찍한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그래도 인간들이 숨 쉬며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이윤추구 행위와 시장 사이에 부족하게나마 무언가가 채워져 가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그래서 경제학자들은 ‘준합리적 경제이론’이랄지 ‘행동경제학’과 같은 이론을 내놓아 지나치게 각진 인간에 대한 정의를 세심하게 다듬으려 한다. 결국 인간을 아는 것이 경제학의 최후과제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