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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자지라의 취재 다큐멘터리 “그리스의 저항”

그리스 – 유럽의 문명과 민주주의라는 아이디어가 처음 시작된 곳. 그러나 오늘 날 이 나라는 위기에 처해 있다. 통일된 유럽이라는 꿈을 파괴할 수 있는 그런 위기. 제2차 세계대전의 악몽으로부터 태어난, 하나의 통화를 통해 서로 다른 국가들을 함께 묶는다는 이 꿈은 비극이 되었다. 유로존에 가입한 이후 10년 후, 그리스의 경제는 붕괴했다. 생활수준은 곤두박질쳤고, 수십만의 사람들이 해고되고 수천 명의 사람들이 새로운 미래를 찾아 나라를 떠나고 있다. 많은 그리스인들은 EU, 그리고 특히 독일을 그들의 위기에 대한 책임자로 비난하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의 군사적 패배 이후 거의 70년이 지난 오늘날, 독일은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경제력을 보유하고 있으며, 이 나라의 정치적 리더십은 그리스의 미래를 그 손안에 쥐고 있을 정도다. 알자지라 기자 Barnaby Phillips가 왜 이 두 나라가 역사와 문화에 있어 서로 엮이고 이제 갈등에 처해 있는지를 파악하기 위해 그리스를 여행했다. 왜 과거의 상처를 치료하고자 했던 유럽인들의 비전은, 그렇게 되는 대신에 다시 그들을 상처의 표면으로 되돌려 놓아지게 되었는가? 그리고 누가 비난받아야 하는가? – 그리스인들? EU 또는 오래된 적인 독일?

Al Jazeera Correspondent – The Greek Resistance

미국은 지금 티파티(Tea Party)를 즐길 여유가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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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ün – A Group of Artists” by Jules-Alexandre Grün (1868 – 1934) – http://www.repro-tableaux.com/a/grun-jules-alexandre/a-group-of-artists.html. Licensed under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우여곡절 끝에 미국의 부채한도는 상향조정되었지만, S&P가 미국의 신용등급을 강등하면서 세계 금융시장은 며칠 동안 크게 출렁거렸다. 세계경제에서 미국이 가지는 위상이 다시 한 번 확인되는 국면이며, 이 위기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이 와중에 과연 이번 부채한도 및 신용등급의 논란의 승자가 누구인지에 대해서 여러 가지 분석이 나오고 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일부에서는 한 유권자 단체를 그 승자로 지목하고 있는데, 바로 미국의 보수주의 풀뿌리 유권자 조직 ‘티파티(Tea Party)’가 그들이다.

티파티는 부채한도의 협상 과정에서 존 베이너 하원 의장 등 공화당 지도부를 압박해 협상안을 연기하도록 하는 등 자신들의 존재를 확실히 입증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에 대해 親민주당 인사들은 이번 S&P의 신용등급 강등이 이러한 티파티의 강경노선에서 초래되었다며, 신용등급 강등을 ‘티파티 다운그레이드(tea-party downgrade)’라고까지 칭하며 극렬하게 비난하고 나섰다. 자신들의 책임을 면피하려는 의도도 없지 않겠으나, 그만큼 티파티의 존재감이 확인되는 에피소드이기도 하다.

사실 티파티가 이처럼 공화당 기반까지 흔들 정도로 성장할 줄은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다. 출발은 반오바마 정서였다. 지난해 오바마 민주당 후보가 대통령에 취임하기 전부터 이미 보수 유권자들은 잔뜩 성이 나 있었다. 오바마가 대통령에 취임한 지 한 달도 안 되어 천문학적인 공적 자금 투입을 골자로 한 경기 부양책을 내놓자, 그들은 자신들이 낸 세금으로 부실 회사를 살리려 한다며 맹비난했다. 바로 그때 보수 투자전문 웹사이트 마켓티커(Market Ticker)에 누군가 ‘항의의 표시로 의원들에게 차(tea)를 한 봉지씩 보내자’는 제안을 했다. 이 아이디어는 순식간에 지지를 얻었고, 곧이어 워싱턴 국회의사당의 의원실에 차 봉지가 하나씩 배달되었다.[미 정계 쥐락펴락 ‘티파티’ 파워]

흥미로운 티파티의 생성과정이다. 영국의 식민지 미국에 대한 과다한 세금부과에 항의하며 영국 상선에 있던 차를 바다에 내던진 18세기 미국인들의 저항을 의미하는 ‘보스턴 티파티’를 연상시키려는 의도를 지닌 티파티는 오바마의 경기 부양책, 특히 월街에 대한 구제금융에 항의하며 들불처럼 일어났다. 개인의 자유에 대해 유난히 민감한 것으로 알려진 미국인들이 자신의 세금으로 월街에 “공짜 점심”을 준 것에 대해 엄청난 분노를 느낀 것이다. 자유와 개인을 지향하는 미국답다는 생각이 든다.

월스트리트는 너무 추상적이고 대침체를 초래한 금융 게임들은 대부분의 미국인들이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월스트리트에 대한 정부의 구제금융은 거의 모든 이들이 본능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구체적인 행동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미국인들에게 이는 매우 잘못된 일이다. 티파티의 등장이 월스트리트의 구제금융의 시기와 일치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티파티를 지지하는 한 지인은 “정부가 힘 있는 자들에 의해 포섭되어, 우리 세금을 가져가고, 우리의 점심을 먹기 때문에” 정부를 싫어한다고 내게 설명했다.[The Rise of the Wrecking-Ball Right]

하지만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사실 월街의 위기를 방기한 것은 민주당과 공화당의 합작품, 감세와 전쟁비용을 통해 재정위기를 가속화한 것은 공화당, 월스트리트 구제금융의 물꼬를 튼 것도 공화당이었다는 점이다. 그런데도 공화당 지지자들과 서민들은 정권이 바뀌고 똑같은 짓을 오바마가 하자 그제야 분노가 폭발했다. 이것은 사회저변에 깔려있던 연방정부에 대한 막연한 적개심을(또는 유색인종 대통령에 대한 반감?) 우익들이 적절하게 자신들의 정치적 재료로 활용했음을 의미한다.

즉, 처음에 구제금융 등에 항의하며 시작된 운동이었으면 Robert Reich와 이야기를 나눈 그 사람의 분노를 삭일 수 있는 지향점, “힘 있는 사람들에 의해 포섭된 정부”를 개혁하는 것이 되어야 할 것인데, 티파티는 이번 예산삭감을 넘어선 다음 목표를 복지예산 삭감과 환경규제의 완화로 한다는 점에서 다분히 의도된 지향점을 엿볼 수 있다. 즉, 티파티는 힘 있는 자에 대한 지원은 그대로 둔 채, 힘없는 자의 밥그릇을 뺏음으로 정부의 독선을 막은 것처럼 보이게 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Tea Party에 질질 끌려다니는 미국과 지구를 풍자한 이코노미스트 만화

미국인들이 개인적 자유에 대한 갈구가 유난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는 사실 대다수 민주주의 인민들의 공통정서이기도 하다. 다만 이 자유에의 의지가 정치적으로 어떻게 구분되느냐 하는 것인데, 정치와 경제에 대한 스탠스에 따라 자유주의자라도 Libertarian과 Liberal이라는 상반된 인간형으로 나뉠 수 있다. 대다수 서민들은 이런 입장이 혼재될 수 있는데, 특정 정치세력의 기획에 의해 그 혼재된 입장이 효과적으로 정리되어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하는 바, 티파티가 이런 상황이 아닌가 생각된다.

오늘날 자유주의는 고전적 자유주의가 아니라 국가의 간섭과 복지 국가를 지지하는 미국식의 자유주의를 지칭한다. 자유주의에서 자유는 경제적 자유와 개인자유로 구분할 수 있다. 경제적 자유와 개인의 자유를 확보하려면 국가가 시장경제와 개인의 자유에 개입하지 말아야 한다. [중략] 이러한 자유주의는 국가와 자유와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느냐에 따라 크게 4가지로 구분된다. 경제적 자유와 개인의 자유에 대해 국가가 개입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Libertarian), 양쪽도 개입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Authoritarian), 경제적 자유에는 개입하지 말고 개인의 자유에는 개입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Conservative), 경제적 자유에는 개입하고 개인의 자유에는 개입하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Liberal)으로 구별된다.[David Boaz, Libetarianism, A Primer; The Free Press, 1977, p. 22. / 자유주의만이 살길이다, 한국하이에크 소사이어티 엮음, 평민사, 2006년, p80에서 재인용]

예를 들어 A가 리버럴적 지향점을 가진 이라면 정부의 복지지출 등 공익적 지출에 호의적인 입장을 가질 것이고, 신용위기가 닥쳤을 때 은행을 구제해야 한다면 그는 선택적으로 그에 대한 비판적 의식을 가질 것이다. 하지만 A가 리버타리안이라면 복지지출과 구제금융 모두 연방정부의 월권이라며 비난할 것이다. 문제는 실제로 A가 복지지출의 수혜자이면서도 리버타리안의 입장을 견지하는 경우일 텐데, 실은 미국이나 우리 사회나 이런 ‘정치 색맹’이 꽤 많을 개연성을 무시할 수 없다는 점이다.

요컨대, 자신의 물적 토대를 분명히 이해하고 사회 프로세스, 특히 경제정책 등에 대해 자신의 경제적 이해에 분명히 부합하는지에 따라 정치적 행위를 하는 이는 그나마 자주적이라 할 수 있을 것인데, 착시현상에 의한 정치적 행위를 하고 있다면 이보다 더 비참한 상황도 없을 것이다. 노인우대로 공짜 버스를 타면서 무상급식에 반대하고 엉뚱하게 노동자 투쟁현장에 가서 구사대 노릇을 하는 한국의 노인들이나 헬스케어 토론장에서 “내 메디케어를 뺐지 마라”고 시위하는 미국 노인들처럼 말이다.

이렇듯 물적 토대와 정치적 행위가 일치하지 않는 상황에는, 물론 정치적으로 선명하지 않은 기성정치 구도도 한몫하고 있다. 양당 모두 기업정치에 매몰되어 빠져나올 수 없는 미국 정치권, 경제에 있어서 차이가 미미하면서도 정치 슬로건만 극렬대치하고 있는 양당구조와 이를 大權추수주의로 극복하려는 “진보진영”이 존재하는 한국 정치권이 희망을 주지 못하고 있기에 불신은 심해지고, 결국 티파티와 같은 -대중의 분노를 상층부의 물적 이익에 악용하는- 우익 포퓰리즘이 발흥하게 된 것이다.

결론적으로 티파티는 ‘리버타리안 나찌’에 가깝다.

“Tax Me” : 과세하거나 망하거나

일단의 백만장자들이 10년 전에 저질러진 “어떤 실수”에 관한 비디오를 만들기 위해 함께 모였다. 그 실수는 부시가 부자들의 세금을 감면해준 일을 의미한다. 부자들이 더 많은 돈을 버는 동안, 지방정부, 주, 연방의 예산은 바닥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에, 루스벨트 인스티튜트의 선임연구원 Rob Johnson과 ND20의 공로자 Dan Berger는 단순명료한 요청을 하기 위해 부유한 미국인들을 한데 모았다. 그 말은 “과세하라(Tax me).”다.

“당신은 우리나라가 더 적은 돈을 필요로 하게 만들었다.(You decided our country needed less money.)” Berger의 지적이다. 이로 인해 “과학탐구, 교육(science research, education)”에 더 적은 돈이 투입되었다고 Johnson은 말한다. “(부자들은 왕성한 경제의 원인이 아니고, 왕성한 경제의 결과이다.(rich people are not the cause of a robust economy, they’re the result of a robust economy.)”라고 구글의 소프트웨어 엔지니어 David Watson은 지적한다.

Tax Me 비디오 보기

이상 New Deal 2.0에서 발췌

이와 같은 현상은 지금 전 세계의 공통적인 현상이다. 우익정부가 들어서면서 소위 감세를 통한 트리클다운 효과를 통해 경제를 활성화시키겠다며 세금을 깎아버렸다. 그렇지만 그러한 감세는 부자들에게 한층 유리하며, 효과는 아주 제한적일 뿐이라는 것이 중론이다. 또한 각국 정부는 세계화된 자본을 유혹하기 위해 경쟁적으로 세금을 깎았다. 아일랜드의 예에서 보듯이 약발이 오래가지 않는 전략이다. 결국 국고가 바닥나면서 공공서비스의 질은 악화되고 재정위기는 가중되고 있다. 돈이 없는 것이 아니라 편중되고 있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감세와 이에 따라 초래되는 재정위기는 직간접적으로 공공서비스 노동자들의 고용불안과 공공서비스 질의 저하로 이어진다. 정치인들은 증세는 인기 없는 정책이고 자본이 떠날 우려가 있다는 사실 때문에 시도하기를 꺼려한다. 결국 개별국가들의 이해관계가 파편화되어 있는 상황에서는, 세금에 대해 옳은 방향으로 공동 대응하기는 매우 어려운 문제다. 하지만 신용평가사들이 미국의 신용등급 강등을 협박할 정도로 사태는 심각하다. 이연된 재정위기는 더 큰 거품으로 다가온다. 저들 말대로 과세하거나 망하거나 둘 중 하나다.

재정위기, 그 지출측면에서의 해법에 대한 좌우의 시각차

아직도 해소되지 않은 위기

미국의 금융위기가 전 세계에 전파되는 과정에서 웬만한 국가들은 예외 없이 구제금융 등 천문학적인 재정지출, 초저금리라는 통일된 해법으로 경제난국을 헤쳐 나가려 노력하고 있다. 이런 노력의 결과 – 혹자는 닷거브(dot gov)버블이라 함 – 경제침체가 어느 정도 반전되어 제2의 대공황으로 추락할지 모른다는 공포심은 다소 잦아들었고, 서서히 출구전략을 검토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다소는 배부른(?) 주장들이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데 이 와중에 세계경제의 청신호를 교란시키는 잡음이 (주로) 자본주의 주변부에서 들려오고 있어서 우리의 신경을 거스르고 있다. 아이슬란드의 은행원들이 어부로 전직했다는 소식은 소국(小國)의 가십 정도로 여겨졌지만, 이후 구름도시 두바이나 남유럽 등에서 안 좋은 소식이 들려오고부터는 시장이 바짝 긴장하고 있고 각종 지표도 요동치고 있는 상황이다. 점점 위기가 중심부로 접근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 때문이리라.

세계 공통의 위기, 재정적자

세계경제에 대한 낙관의 의지를 꺾는 이러한 양상의 근저에는 재정적자라는 필연적인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 특히 남유럽의 위기는 해프닝에 가까운 아이슬란드와 두바이의 모험주의와 달리 유로존의 일원으로서의 나름 합리적인 가이드라인에 의한 재정운용의 행태를 보였을 것임에도 국가살림이 악화되고 있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물론 재정통계 분식회계와 같은 꼼수도 있기는 했지만 두바이와 같은 터무니없는 뜬 구름은 아니었을 텐데 말이다.

하지만 사실 이러한 위기는 남유럽만의 문제도 아니다. 대표적으로 자본주의 중심부인 미국, 영국, 일본 등도 사상 최대의 부채와 재정적자에 신음하고 있다. 다만 남유럽과는 다른 나름의 면책사유 덕분에 간신히 신용등급을 유지하여 체면을 유지하고 있는 형편이다. 어쨌든 이들 국가의 재정적자의 원인은 공급 측면에서는 경상수지 악화 및 세수감소, 지출 측면에서는 구제금융 등 재정방출, 고착화된 악성 재정지출구조를 들 수 있을 것 같다.

재정적자에 대한 좌우의 현저한 시각차

경상수지는 일본 등 일부국가를 제외하고 공통으로 마이너스다. 자연히 세수도 줄었다. 그런 와중에 각국은 위기 진화를 위해 양적완화를 시행했다. 향후 일부 투입자금이 회수되겠지만 당분간 재정에 부담이 된다. 또한 신자유주의 기조에도 불구하고 지속된 경직성 지출은 재정악화의 주요원인 중 하나다. 다만 이 비용의 삭감은 민심이반과 연결되기에 우익이 집권하더라도 쉽게 줄일 수 없었다. 민심이반의 결과는 그리스가 현재 잘 보여주고 있다.

이런 상황에 대한 보수진영의 해법은 명쾌하다. 지출을 줄이는 것이다. 그들은 천문학적인 구제금융 등에는 불가피성을 옹호하면서도 복지지출은 포퓰리즘으로 폄하한다. 조선일보는 그리스 퇴직자가 연금으로 임금의 90%를 받는다고 비아냥거렸다. 진보진영은 자연히 반대 입장이다. 그들도 재정적자에 대한 뾰족한 해결책이 있는 건 아니지만 – 굳이 들자면 증세 – 여하튼 복지축소 등을 통한 재정수지 개선은 답이 아니라는 입장이다.

한 쪽에겐 금과옥조, 다른 쪽에겐 절대악

이렇게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의 우익과 좌익의 구분은 연금, 건강보험과 같은 공공서비스의 공급주체에 대한 관점으로 나뉘는 경향이 강하다. 당연히 우익은 시장에 의한 공급, 좌익은 비(非)시장에 의한 공급을 선호한다. 전자는 효율성을, 후자는 공익성을 준거가치로 내세운다. 예를 들어 민영화에 대한 이들의 호불호도 극명하게 갈라진다. 한 쪽에선 금과옥조인 것이 다른 쪽에서는 절대악으로 전락해버린다. 접점이 별로 없다.

영국의 대처 수상이 기간산업에 대한 민영화를 단행한 데에는 하이에크의 팬으로서 관치에 대한 혐오라는 이념적 동기도 분명 작용했을 것이다. 그런 한편으로 자본주의 국가에서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재정위기에 대한 처방도 한 요인이라는 것을 무시할 수 없다. 복지지출 등 공공서비스 공급이 단기간 내에 소비를 진작시켜 선순환 되는 상황이 가시적이지 않는 상황에서는 케인스주의적인 낙관만으로 버틸 수는 없다는 위기감도 작용한 것이다.

그럼 복지삭감이 정답인가?

대처리즘 이후 금융위기 전까지 대세를 이루었던 신자유주의 흐름에 대한 사회적 저항은 만만치 않았다. 복지축소와 맞물린 자본의 세계화가 화학적 상승작용을 일으켜 각국의 인민들을 더욱 피폐한 삶으로 내몰고 있다는 정황이 곳곳에서 터져 나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2차 대전 이후로 국한하여 보자면 ‘국가 개입확대 – 개입축소 – 개입확대’로, 공공서비스나 국가역할에 대한 사회적 시각의 사이클이 형성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아직 체제 내에서 어느 특정 모델이 다른 모델을 압도한 것 같지는 않다. 또한 특정 모델의 채택이 반드시 특정 정권의 이념적 성격을 촘촘하게 규정하는 것인가 하는 의문도 든다. 즉, 통념과 달리 국가에 의한 공공서비스 공급은 자본주의 기업의 임금압박을 완화해주기 위한 ‘좌익적’ 변주곡, 실제로는 고도의 ‘우익적’ 대안에 불과할 수도 있는 것이다. 몇몇 공공서비스가 내포하고 있는 소득형평성 재고효과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공공서비스의 대안은? 재정위기에 대한 대안은?

연금제도가 체제순응을 목적으로 비스마르크에 의해 도입되었다는 사실은 제쳐두고라도 오늘날 연금운용이 일부의 희망사항처럼 그리 진보적이지 않음에 주목할 필요도 있다. 예전 한 진보정당의 유력인사가 ‘국민연금을 통한 기업 사회화’라는 다소 비현실적인 공약을 내놓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오히려 자금이 주가부양에 투입되는 등 체제 순응적으로 작동하고 있다. 또한 이러한 유동성 공급은 금융위기를 심화시키는 역할을 했다.

요컨대 복지모델이 실패했다고, 또 그것이 위기를 가중시키고 있다 해서 우익이 고소해하고 좌익이 실망할 상황인가 하고 묻고 싶다. 원초적으로 현 체제에서 노동자가 ‘착취 없이’ 정당한 임금을 받고 있다면 그런 공적 부조가 없더라도 무리 없이 생활해야하는 것이 상식적이지 않은가? 그리고 그것이 국가재정의 짐이 된다면, 은밀하게 혜택을 받고 있던 누군가에게 전향적으로 더욱 많이 부담 지워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