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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가 삶의 토대가 된 현대사회

기업 활동의 결과는 (항상 현실의 단면만 제공할 뿐인) 컴퓨터로 기록되고 요약된 후 묻지도 않고 처리된다. “컴퓨터는 ‘노’라고 하지 않는 법이다.” 그런 후 수치를 기초로 결정을 내린다. 정반대 결정을 수십 번 반복할 수 있을 만큼 유연한 수많은 인간의 머리는 아무도 쳐다보지 않는다. 결국 숫자가 자신의 토대가 되는 현실을 강조한다. 이를 두고 물화(reification)라 부른다.(‘res’는 ‘사물’, ‘facere’는 ‘만들다’라는 뜻이다.) 한 대기업이 예상보다 적은 수익을 올렸다는 발표 하나가 미미한 공포를 몰고 오더니 곧장 주식 폭락으로 이어져 결국 공포가 자기충족적 예언이 되고 마는 지금의 증시가 대표 사례일 것이다.[우리는 어떻게 괴물이 되어가는가, 파울 페르하에허 지음, 장혜경 옮김, 반비, 2015년, p138]

어제 글의 같은 작가가 주장한 것처럼 경제는 – 혹은 신자유주의적 서사는 – 현재 우리 사회의 문화와 정체성을 정의하는 주된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그리고 이 새로운 서사의 영웅들은 다윗이나 삼손이 아니라 애플이나 엑슨모빌과 같은 기업 – 또는 루크 스카이워커? – 이다. 이 슈퍼히어로의 파워를 확인할 수 있는 가늠자는 재무제표를 통해 알 수 있는 영업수익이나 이런 실적 등이 반영된 주식가격이다. 현대 사회에서 슈퍼히어로가 슈퍼히어로로 인정받으려면 저자가 말한 물화(reification)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문제는 이 물화 과정이 우리가 통상 믿는 것처럼 그렇게 정확하지 않거나 심지어 조작되기도 한다는 점이다. 고대 수학자가 수학을 연구한 이유가 신의 세계가 숫자로 표시되므로 연구를 통해 신의 섭리를 깨달으려 했다는 일화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일단 숫자로 표현된 것에 우리는 보다 객관적이라 여기고 강한 믿음을 갖는 게 인지상정이다. 그런 믿음을 발전시켜 현대 경제에서 기업은 재무제표를 만들고, 신용평가사는 그런 기업의 신용등급을 매기고, 정부는 경제와 관련된 숫자를 모아 이를 토대로 정책을 수립한다.

물론 이러한 과정들은 경제가 발달하면서 어느 정도 객관성이 검증된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기업에 대한 복식부기를 통해 자산의 내용을 파악할 수 있고, 신용평가가 기업이나 국가의 건전성을 가늠하는 유효한 잣대가 됨을 경험적으로 알게 되고1, 인구센서스 등을 통해 경제계획을 수립함이 타당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문제는 이런 제도의 아웃라이어들이 점점 늘어날 때다. 물화의 과정이 더 이상 내적으로 누적되어온 아웃라이어를 통제할 수 없어서 체제가 붕괴된 경험이 바로 지난 금융위기다.2

그 물화 과정을 통한 통제의 어려움에 대해서 좀 더 이야기하자면 금융위기 이전에도 그런 사례는 여러 번 있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인용문의 저자도 따로 예로 든 엔론(Enron) 사태다. 에너지 기업에서 금융 기업으로 거듭 나면서 매년 ‘미국에서 가장 혁신적인 기업’으로 거론되곤 했던 엔론이 실천했던 “혁신”은 물화 과정을 무력화시키기 위한 분식회계 혹은 수많은 도관체를 활용한 “첨단금융기법”이었다. 이런 슈퍼히어로의 붕괴는 위험조정영업이익도, 재무제표도, 이사회도, 신용평가도, 감독기관도 막지 못했다.

그 뒤 금융위기라는 자본주의가 거의 붕괴될 뻔한 – 어쩌면 지금 그저 고사중인 – 사태가 발생했어도 나를 포함한 경제주체들은 제도를 버리지 못하고, 그 근간을 이루는 숫자와 경험주의적 데이터를 버리지 못하고 있다. 심지어 이는 경제학 분야에서도 두드러진 경향이라고 한다. ‘경제나 경제학이란 것이 원래 그런 것이 아닌가?’라고 묻는다면 경제학에서도 과거에는 이론적인 부분이 다수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던 것이 요즘에는 숫자에 의존한 이른바 “실증적” 연구로 비중이 옮겨가고 있는 상황이라고 한다.

이 실증적 연구가 갖는 문제점은 현실경제에서 숫자로 구성된 제도가 갖는 문제점과 유사하다. 실증적 연구는 “정반대 결정을 수십 번 반복할 수 있을 만큼 유연한 수많은 인간의 머리”가 뒤에 숨어있다는 점이 편의적으로 무시된다는 점이다. 재무제표에 담긴 자산의 가치평가, 충당금 규모, 부외금융에 대한 숫자가 작성자에 따라 바뀔 수 있는 것처럼 실증적 연구가 연구자의 가치평가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수 있음은 우리가 숫자에 대해 갖는 경외심에 의해 압도당하는 것이 문제다. 숫자는 사회전반을 지배해가고 있다.

요는 회귀분석기법을 통한 논문이 통과되기가 쉽다는 점이다.

그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

그러다가 레이의 로비활동이 레이가 평소에 강조한 자유시장의 해법에는 어긋나 보이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예로, 엔론은 제3세계 개발 프로젝트에 대출과 대출보증을 해주는 해외민간투자공사와 수출입은행과 같은 정부기관에 의존했다. 이런 기관들은 자금을 조성하는데 알맞았다. 대부분의 은행은 잠재된 위험 때문에 제3세계 개발에 한 발 물러섰다. 레베카 마크의 사업도 이런 지지기반이 없었다면 대폭 축소되었을지 모른다. 워싱턴의 한 정부정책 연구기관의 연구에 따르면 1989년에서 2001년 사이에 해외민간투자공사, 수출입은행 등 20개의 정부 혹은 준정부기관 들이 29개국을 개발하는 엔론의 38개 해외 프로젝트에 72억 달러를 투자하기로 했다. 마크와 원수 사이인 스킬링은 자유시장을 숭배한다는 기업이 그런 위선적인 행위를 하느냐며 정부를 등에 업은 자금 조성에 조소를 퍼부었다.[엔론 스캔들 세상에서 제일 잘난 놈들의 몰락, 베서니 맥린/피터 엘킨드 지음, 방영호 옮김, 서돌, 2010년, pp186~187]

먼저 이 글에 등장하는 엔론의 플레이어들의 면면을 살펴보자. “레이”는 엔론의 CEO였던 Kenneth Lay를 말한다. “레베카 마크”는 엔론의 해외 프로젝트 개발사업을 수행한  Enron International의 수장 Rebecca Mark-Jusbasche다. “스킬링”은 천연가스 등에 대한 금융거래를 통해 수익을 창출한 Enron Corporation의 수장 Jeffrey Skilling이다. 레베카 마크가 발전소와 같은 실물에 투자했다면, 제프 스킬링은 파생상품 등 금융상품에 투자하여 투자대상이 서로 달랐고, 인용문에도 언급하고 있듯이 둘은 서로 스타일이 판이하고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한다.

인용문의 내용에 대해 좀 더 들여다보면, 해외수출금융기관(Export Credit Agency)에 의한 대출을 통해 해외사업을 추진하는 과정을 설명한 것이다. 즉, 제3세계의 발전소 프로젝트와 같은 경우 여러 위험이 존재하기 때문에 투자은행의 접근이 어렵고 금리도 높다. 그런데 ECA가 개입할 경우 그들의 직접대출이나 보증을 통해 자금조달도 용이해지고 금리도 낮아지는 일석이조의 효과가 있다. 수출을 장려하기 위한 이런 금융은 이러한 점에서 사실 스킬링이 조소하는 바처럼 “자유시장” 원리와 거리가 먼 국가의 개입을 통한, 특정기업에 대한 특혜에 가까운 성격을 띠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해외사업의 개발과정을 보면 규제완화와 같은 자유시장 원리와 수출금융과 같은 反자유시장 원리가 공존한다는 점이다. 레베카 마크의 전임자 존 윙은 영국의 티스사이드 프로젝트를 실현시키기 위해 노력하는데, 이 프로젝트는 천연가스를 연료로 사용하는 발전소 프로젝트였기에 천연가스 사용을 금지하던 그때까지의 영국 당국의 규제를 완화하지 않고서는 전망이 없는 사업이었다. 하지만 희한하게도 때맞춰 1989년 규제완화 법안이 영국 국회를 통과하였고 그 최대 수혜자는 엔론이었다. 이제 금융조달은 값싼 수출금융을 이용하면 된다.

이와 같은 견지에서 볼 때 기업의 성장은 케네스 레이가 믿었던 것처럼 완전한 규제완화만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다. 해외사업을 영위하는 업체는 수출금융을 활용하여, 미국의 축산업자는 정부보조를 받아 값싸게 재배된 옥수수를 소에게 먹여, 석유화학 업체는 일반가정보다 더 싸게 제공되는 산업용 전력의 이용을 통해 성장을 모색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만약 규제완화 신봉자가 주장하듯 이 모든 보조를 없앤다면 그들은 당장 위기에 처할 것이다. 그런 면에서 사실 기업이 원하는 것은 자신들에게만 차별적으로 유리한 “선택적 규제 혹은 규제완화”일 뿐이다.

인간을 아는 것이 경제학의 최후과제

이 테잎들은, 엔론의 서부해안 트레이딩데스크으로부터의, CBS가 몇 년 전에 보도한 사실을 확인해주고 있다 : 즉 전력생산자와 거래자들 간의 비밀스러운 계약에서 발전설비를 끄도록 명령함으로써 가격을 의도적으로 올린 것이다.

“만약 스티머를 끄면, 그것들이 복구되는 것은 얼마나 걸릴까요?” 엔론의 한 노무자가 말하는게 들린다.

“오, 매시간 켜고 끄는 것을 원하는 것이 아닐 텐데요. 그냥 놔둡시다.” 다른 이가 말한다.

“음. 그냥 가서 차단해버리지 그래요?”

시애틀 근처의 스모미쉬 공공유틸리티지구의 공무원들은 이 테잎을 법무부로부터 받았다.

“이것은 우리가 기다리던 그 증거다. 이는 그들이 시장을 조작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그 유틸리티의 대변인 에릭 크리스텐슨의 말이다.[Enron Traders Caught On Tape]

反민영화론자들이 공공서비스를 민영화할 경우 얼마나 끔찍한 재앙이 초래되는지 자주 거론하는 사례가 엔론의 사례다. 발전 및 자원 분야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속도로 성장하며 에너지 서비스 민영화의 선두주자로 나섰던 이 기업은 지극히 복잡한 투자구조와 이에 따른 기상천외한 분식회계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회사다. 인용한 부분은 이 이윤만을 쫒는 회사가 지역에 공급하여야할 전기서비스를 가지고 어떻게 장난을 쳤는지 고발하고 있는 상황의 묘사다. 전력은 거래되는 것인데 전력을 차단하면 공급이 줄어 가격이 올라갈 것이고 거래자는 이를 갈취한다는 이치다.

특이하게도 우익이든 좌익이든 –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모르나 – 인간과 그 인간들로 구성된 기업은 이윤추구를 어떠한 행동의 가장 주요한 동기로 간주한다는 것에 동의한다. 경제학자들은 개인(個人)이든 법인(法人)이든 여태 경제 흐름을 제대로 파악해 합리적인 경제 전망을 하는 ‘경제적 인간(Homo Economicus)’라는 인간상을 경제 시스템의 주역으로 간주한다. 좌우익의 입장차가 있다면 우익은 이러한 합리적 이윤추구행위가 시장을 통해 검증되며 공공선에 도달한다는 것이고, 좌익은 개별적 이윤추구행위가 통제되지 않아 자본주의의 모순을 증폭시킬 것이라는 정도일 것이다.

특히 예로 든 공공서비스의 민영화에 대해 좌우익의 이러한 입장차는 첨예하게 드러난다. 당초 우익들은 – 또는 집권세력 – 민영화가 당장의 비용지불을 이연시키는 동시에 시장경쟁을 통해 시설과 서비스를 값싸게 공급할 것이라는 주장을 하여 민영화를 추진하였고, 좌익은 민영화가 공공서비스에 이윤추구 동기를 제공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비용의 증대와 이로 인한 수혜자의 배제 및 서비스 질 저하를 불러올 것이라고 주장했다. 두 주장 모두 어느 면에서는 동일한 이윤추구 동기에 대한 동전의 양면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라 생각된다. 엔론은 당연히 동전의 더러운 면을 상징한다.

이 글에서는 민영화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은 유보하도록 하겠다. 그보다는 시장에서의 이윤추구 행위가 공공성과 가장 첨예하게 부딪히는 그 민영화 서비스가 과연 상당수 경제학자들이 – 앞서 말한바 좌우익 공히 공유하는 – 특정한 목적, 즉 이윤동기에서만 움직이는 것인가 하는 질문을 던져보고자 한다. 그 물음에 대해 엔론을 예로 들 경우 답은 분명하다. 위에 묘사한 소름끼치는 풍경에서 전기를 차단할 경우 고통 받을 주민들에 대한 배려는 어디서도 느낄 수 없다. 이는 시장 안에서의 조화된 이기적 인간들의 행위가 공공선을 초래한다는 우익들의 주장을 무색케 한다.

2005년 8월, 미국 역사상 최악의 허리케인으로 기록된 카트리나가 루이지애나를 강타했다. 당시 그 지역에서 전력 공급 사업을 맡고 있던 엔터지는 정전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이미 100만 가구에 전력 공급이 끊긴 상태였고 엔터지 직원 1,500명 역시 집을 버리고 다른 곳으로 대피해 있었다. 엔터지의 CEO 웨인 레오나드(Wayne Leonard)는 직원들에게 개인적인 상황이 모두 해결될 때까지 직장에 나오지 않아도 된다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중략] 힘든 상황에도 불구하고 엔터지 직원들은 대부분 직장으로 복귀했고, 최악의 상황이던 그 일주일 내내 하루에 16시간씩 일했다. [중략] 그들이 이렇게 행동하게 된 중심에는 레오나드의 거대한 비전이 자리 잡고 있다. 레오나드의 비전은 ‘더 좋은 세상을 만드는데 기여한다’는 것이었고 그의 비전을 가슴에 품은 직원들에게 직장은 월급 이상의 것이었다.[스티브잡스 무한혁신의 비밀, 카민 갤로 지음, 박세연 옮김, 권영설 감수, 비즈니스북스, 2011년, pp123~124]

민영화 서비스가 반드시 나쁘지 만은 않다는 다른 예로 쓰일 수 있는 경우다. 같은 민간 에너지 기업이지만 적어도 엔터지는 카트리나 사태로 인한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노력을 함에 있어 이윤추구를 유보하였다. ‘더 좋은 세상을 만드는데 기여한다’라는 CEO의 비전은 어쩌면 좌우익 모두 마음에 들지 않을 것 같다. 물론 그가 일관되게 그러한 비전을 추구하였는지는 의문이지만 어떤 면에서 그는 ‘자비로운 자본가’, ‘공익을 배려하는 자본가’로 규정할 수 있을 것 같고, 이는 경제학자들이 규정하는 ‘경제적 인간’과는 거리가 있다. 어쨌든 민영화 기업임에도 불구하고 이 회사는 공익을 추구했다.

인용한 저서는 저 유명한 애플의 CEO 스티브 잡스에 관한 성공비결을 다룬 책인데, 이 사례는 그의 동기와 유사한 동기로 기업을 운영하는 다른 기업을 사례로 들기 위해 언급된 것이다. 요컨대 스티브 잡스의 모티브는 돈이 아니었다. 그에게는 세상을 바꾸겠다는 열정이 있었고 이를 구현하기 위해 노력하였으며, 돈은 그것에 대한 부산물로 따라온 것이다. 경제학자들의 인간상과 동떨어진 이야기라 이례적이라 여길 수 있을 것 같은데, 사실 상당히 많은 경영학/성공학 저서들이 이런 맥락을 강조한다. ‘돈이 아니라 열정이다.’ 그렇다면 경제학과 경영학이 바라보는 인간상은 전혀 다른 것인가?

정리를 해보자면, 민영화든지 인간상이든지 앞서 언급하였다시피 동전의 양면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된다. 큰 기조에 있어 시스템이 인간의 행위를 규정하고 좀 더 인간적인 시스템을 갖추면 보다 나은 행동을 기대할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여건 속에서도 – 예로 이윤추구가 지상과제인 민영화 서비스 내에서도 – 사람들은 이타적 행위를 곧잘 한다는 것이다. 이를 완전히 비합리적인 행위로 몰아세우기 어려운 것이, 바로 스티브 잡스가 혁신적인 제품을 만들어 세상을 바꾸겠다는 이타적(또는 적어도 非이윤추구적인) 행위를 했고 그것이 물질적 성공까지 이어진 사례가 있기 때문이다.

결국 인간의 이기적인 이윤추구 행위와 그 행위의 합인 시장에서 우익 경제학자들이 기대하는 조화(‘보이지 않는 손!’)를 기대하기에는 그 안에 채워져야 할 것이 아직도 많다는 사실은 여전하고, 반대로 좌익 경제학자들이 비판하는 끔찍한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그래도 인간들이 숨 쉬며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이윤추구 행위와 시장 사이에 부족하게나마 무언가가 채워져 가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그래서 경제학자들은 ‘준합리적 경제이론’이랄지 ‘행동경제학’과 같은 이론을 내놓아 지나치게 각진 인간에 대한 정의를 세심하게 다듬으려 한다. 결국 인간을 아는 것이 경제학의 최후과제인 것 같다.

off-balance sheet

현재 진행되고 있는 월스트리트의 위기에 대해 차베스나 그린스펀만큼이나 할말이 많으실 것 같은 – 또는 논평을 집요하게 강요당하실 것 같은 – 장하준 교수께서도 한겨레21에서 평소 그의 지론에 입각하여 현 사태를 비판하셨다. 역시 평소의 그답게 깔끔하고 명쾌한 해석이 돋보이므로 일독을 권한다.(포카라님의 글까지 함께 읽을 수 있는 이곳으로 가실 것)

인터뷰 중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와 관련해서는 파생상품·복합상품이 너무 많고 손실 보고가 안 되는 ‘오프 밸런스 시트’ 같은 것도 있어서 금융사 자신도 정확한 피해규모를 모른다.

파생상품이니 복합상품이니 하는 단어는 여기저기서 조금씩 들어보셨을 것으로 판단되어 “오프 밸런스 시트”에 대해 간단하게 설명하겠다. 이 단어는 off-balance sheet, 우리말로 표현하자면 부외금융(簿外金融)이다. 우리말이 더 어렵다.

예를 들어 설명하겠다. A기업이 돈 100억 원을 빌려 부동산 개발 사업을 하고 싶다. 한데 부채비율이 300%여서 돈을 빌리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러면 이 회사는 자본금을 5천만 원의 B라는 부동산 개발 전용 회사를 설립한다. 그리고 C은행에 가서 부동산 사업의 사업성을 담보로 돈을 빌린다. 이른바 ‘프로젝트파이낸싱(project financing)’인 셈이다. 물론 은행이 사업성만을 담보로 돈을 빌려주진 않는다. A의 지급보증 등이 채권보전책으로 강화된다.

이제 한번 살펴보자. A는 C은행으로부터 돈을 빌렸을까? 아니다. B가 차주이고 A는 지급보증만 선 것이다. 그러므로 A의 대차대조표(balance sheet)에는 100억 원이 부채로 잡히지 않는다. 다만 지급보증을 주석에 기록하면 된다. 이것이 바로 off-balance sheet 효과다. 그리고 B라는 부동산 개발 전용 회사는 일종의 도관체(conduit)다. 정작 A가 사업을 한 것인데 B라는 도관을 이용한 것이다.

결국은 ‘뒷구멍으로 호박씨 깐 거네!’라고 비난할 일은 아니다. 신용도가 낮은 회사가 유망한 사업을 시행할 수 있는 좋은 구조이기도 하다. 은행입장으로서는 대출금이 엉뚱한 곳에 쓰이지 않고 – 회장님의 술값 등 – 자신들이 경제성이 있다고 생각되는 사업에 올바르게 쓰일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장치이기도 하다. B라는 회사의 재무제표만 감시하면 되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게 부실한 업체나 투자은행 등에서 남발되면 금번과 같은 대형사고의 진원지가 된다는 것이다. 부실한 업체 D의 부실한 회계감사에서 드러나지 않는 온갖 파생상품과 부실사업들은 곪아 썩어문드러질 때까지 투자자의 시야에 잡히지 않는다. 2000년대 초반에 엔론이 이런 식으로 사세를 고질라처럼 불려나가다가 빵하고 터져버렸다. 물론 이번 월스트리트가 사고 친 걸 보고 있자니 그때의 사건은 자그마한 해프닝처럼 느껴진다.

어쨌든 사후약방문이긴 하지만 회계규칙은 이러한 off-balance sheet를 차단하는 쪽으로 나아가고 있다. 투자은행들의 경우 바젤2 등을 통해 위험가중치를 차별적으로 적용하는 방식으로 규제가 강화되는 추세다. 언제나 하는 말이지만 규제 없는 시장은 없다. 규제가 나쁜 것이 아니라 시대를 못 따라잡거나 비합리적인 규제가 나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