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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가을엔 고전 스릴러에 빠져 지낼 것 같다

지난주는 레이먼드 챈들러(Raymond Chandler)에 푹 빠져 있던 한주였다. 회사 도서관에서 그의 대표작 ‘기나긴 이별(The Long Goodbye)’을 빌려 읽었는데, 책이 너무 낡아 너덜너덜한 탓에 정말 오랜만에 소설책을 돈 주고 구입하기도 했다. 처음 읽는 그의 저서이지만 이 작품을 원작으로 하는 로버트 알트만(Robert Altman) 감독의 동명 영화는 이미 본지라 전혀 낯설지는 않은 작품이었다.

술 한 잔 즐기기에도 피곤한 끈적끈적한 더위가 사람을 곤죽으로 만드는 LA에서 벌어진 두 건의 살인사건, 그리고 이 두 사건에 모두 엮인 사립탐정 필립 말로(Philip Marlowe)의 대처법과 그의 수다가 소설의 큰 줄거리다. 특유의 하드보일드 문체와 독특한 인물설정 및 서로의 관계, 무엇보다도 무뚝뚝한 척 하면서도 쉴 새 없이 독특한 시각으로 수다를 떨어대는 필립 말로의 스타일이 매력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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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ymondChandler TheLongGoodbye” by May be found at the following website: http://www.betweenthecovers.com/btc/reference_library/title/1000133.. Licensed under Wikipedia.

특유의 문체와 인물설정 등이 낯설지 않아 고개를 갸우뚱하기도 했는데 곧 무라카미 하루키의 그것들과 매우 유사함을 깨달았다. 하루키가 의심할 바 없는 챈들러 팬임을 알 수 있는 정황이다. 말로의 캐릭터와 그가 맞수들과 벌이는 설전은 즐겨 읽던 하루키의 소설에서의 설정과 겹친다. 특히 ‘일각수의 꿈’에서의 정체모를 사나이들과 주인공의 설전은 챈들러의 작품이라 해도 될 것 같은 설정이었다.

요점은 하루키가 챈들러를 표절했다는 게 아니고 챈들러의 작품이 그 정도의 일류 소설가의 마음을 사로잡을 만큼 매력적이라는 점이다. 스릴러는 때때로 줄거리를 빨리 따라잡기 위해 세부묘사를 건너뛰고 읽기도 하는데, 이 책은 한줄 한줄 정성들여 읽어도 좋을 만큼 디테일에 공을 들였다. 챈들러 팬들에게는 쏘울푸드라는 ‘김릿’이라는 이름의 칵테일이나 기타 자잘한 에피소드 등이 깨알 같은 재미를 안겨준다.

한편 기억력이 메멘토인지라 앞서 언급한 로버트 알트만 감독의 영화를 다시 DVD로 주문하여 감상했다. 놀랍게도 줄거리와 필립 말로의 캐릭터는 원작과 딴 판이었다. 1953년에 발표된 원작을 20년이 지난 1973년에 만들어 현대화시키다보니 상당한 정도의 수정이 불가피할 수도 있었겠으나 챈들러의 팬들에게는 상당히 충격적이었다고 한다. 개인적으로는 영화도 그 나름의 매력이 있었다. 수작에 넣어줄만 했다.

아무래도 가을엔 고전 스릴러에 빠져 지낼 것 같다.

잡담

1. 오랜만에 No Way Out을 다시 감상했다. 이 영화는 섹스, 정치, 야망, 기만, 배신, 폐쇄공포증 등 이 장르의 작품이 지녀야 할 미덕들이 황금비율로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 작품이다. 개인적으로 케빈 코스트너를 좋아하지 않지만 적어도 이 작품에 있어서만큼은 최고의 연기를 보여주고 있다.

2.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겨울만 되면 읽곤 하던 ‘호밀밭의 파수꾼(The Catcher in the Rye)’을 다시 읽고 있다. (잘난 체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책을 소개해준 이가 영어로 읽어야 제 맛이라고 해서 영어로 된 책만 읽고 있다. 아무튼 영어로 된 골때리게 재밌는 표현이 한국어로 어떻게 표현되어 있을지 궁금하긴 하다. The one ugly one, Laverne wasn’t too bad a dancer, but the other one, old Marty, was murder. Old Marty was like dragging the Statue of Liberty around the floor. ㅎㅎㅎㅎㅎ

3. ‘호밀밭의 파수꾼’과 함께 겨울만 되면 즐겨 읽곤 하던 일본만화책들이 있다. 하나는 사사키 노리코의 ‘닥터 스크루’, 또 하나는 하라 히데노리의 ‘겨울이야기’. 둘 다 겨울이 오면 생각나고 들쳐보곤 하던 만화들이다.

4. 겨울이야기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과 비교할 수 있는 구도인데 개인적으로 두 작품 중 어느 작품이 뛰어나냐고 묻는다면 “거의 동급”이라고 말해주고 싶다.

5. ‘호밀밭의 파수꾼’을 쓰신 J.D. Salinger는 아직도 살아계신 것으로 추정(?)된다. 1919년생이신데 한참 전에 은둔생활에 들어가신 후 여태껏 별 소식이 없으시다. 몸 건강하시길.

6. 물론 겨울에 어울리는 소설로는 ‘설국’도 빼놓을 수 없다.

7. 갈수록 눈이 적게 오는 것 같다. 겨울가뭄.

8. 왜 ‘호밀밭의 파수꾼’이 암살자의 코드인지, 그 이유는 잘 모르겠다.

미쉘 공드리

요즘 감상하는 작품 중 실망감을 안겨주지 않는 영화감독이 있다면 단연 미쉘 공드리 Michel Gondry 다. 여태껏 본 그의 영화는 세 개. 감상시점 순서로는 ‘수면의 과학(2005)’, ‘이터널 선샤인(2004)’, ‘비 카인드 리와인드(2007)’ 인데 각각의 작품이 나름의 개성을 품고 있으면서도 ‘공드리 표 영화’라는 스타일이 일관되게 흐르고 있다는 점이 매력이다.

비단 나뿐 아니라 많은 이들이 그의 작품을 보면서 레오 까라, 무라카미 하루키, 왕자웨이의 작품에서 느껴지는 특유의 감성을 느꼈을 것이다. 그런 한편으로 그의 작품에서 더욱 도드라지는 그만의 특색은 우리가 소위 MTV식 편집이라 이름붙인, 어떤 의미에서는 휘발성의 자극이 강하다고 비판하는 그 지점의 편집과 연출이 공드리 식의 현실과 환상을 오가는 이야기 전개에 기가 막히게 어울린다는 점이다.

소재 면에서는 공히 남녀 간의 사랑을 다룬 ‘수면의 과학’, ‘이터널 선샤인’ 에 지쳐갈 때쯤, 마을주민이 참여한 영화제작을 통해 낡은 건물을 보존한다는 줄거리의 ‘비 카인드 리와인드’를 감상하게 되어 공드리에 대한 신선감을 이어갈 수 있었다. 가장 감탄을 하면서 본 영화는 ‘이터널 선샤인’. 과거와 현재가 정신없이 왔다 갔다 하므로 영화 보다가 헷갈릴 수도 있다. 글을 적다보니 레오 까라의 영화가 보고 싶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