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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모시 가이트너의 모순된 입장

서머스는 다수 금융사가 자본부족을 평가하는 유일하게 타당한 방식은 자산을 현행 시가에 가깝게 평가하는 것이라 믿었다. [중략] 따라서 서머스는 스트레스 테스트가 좀비은행들을 지원하기 위한 눈가림 체계라고 우려했다. [중략] 나는 [중략] “이 자산들은 패닉 중에서 나타내는 것보다 훨씬 더 가치가 있고, 주요은행 다수가 지급능력을 갖추었다고 판명될 가능성이 그럴듯하게 있다”고 보였다. [스트레스 테스트, 티모시 가이트너 지음, 김규진/김지욱/홍영만 옮김, 인빅투스, 2015년, p335]

티모시 가이트너는 뉴욕Fed 행장으로 근무하다 금융위기의 와중에 집권에 성공한 오바마의 선택으로 재무장관에 취임하였다. 그 후 그가 시장의 공포를 줄이고 한정된 TARP(Troubled Asset Relief Program : 부실자산매입프로그램) 의 자금을 효율적으로 쓰기 위해서 생각한 아이디어가 바로 인용한 책의 제목인 스트레스 테스트다. 가이트너는 금융사가 보유한, 당시 시중에서 전혀 인기가 없어 팔리지 않고 재무제표를 악화시키던 자산을 적정(!?)하게 평가하는 스트레스 테스트를 통해 시장에 신뢰를 재고시키겠다는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었고, 이를 그의 경제학 스승인 래리 서머스와 의논한 것이다.

서머스는 하지만 가이트너의 아이디어에 반대하며 소위 시가평가 방식이 진리라 주장했는데, 가이트너는 이러한 견해는 서머스가 헤지펀드에 근무한 경력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고 이를 “헤지펀드의 견해”라고 불렀다. 그렇다면 서머스의 견해는 독자인 내가 이름붙이기를 “재무부의 견해”라고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즉, 시장에 의해 진정한 가치가 평가받는 것이 옳다고 믿는 견해를 “헤지펀드의 견해” 혹은 서머스의 견해라고 한다면, 은행의 고유한 회계원칙에 의한 차주의 지급능력에 기초하여 진정한 가치를 평가받는 것이 옳다고 믿는 견해를 “재무부의 견해” 혹은 가이트너의 견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미국인들은 과도한 보수를 받는 은행가들을 구제하는 데에 분노하였고, 백악관의 정치팀은 우리가 국민들의 반발에 동조하는 편에 서 있음을 보여 주기 원하였다. [중략] 우리에게는 버블 시기에 이미 지급된 보너스를 압류할 법적 권한이 없었고, 대다수 민간기업의 보수를 설정할 권한이 없었다. [중략] 대중들이 인정할 만한 수준으로 상여금을 삭감한다면 이들 은행으로부터 인재들이 대거 탈출을 초래하고, 은행이 안전한 방향으로 나아갈 전망이 줄어들었을 것이었다.[같은 책, p338]

이러한 두 인용문 사이의 시각의 불일치 혹은 모순이 가이트너의 회고록을 읽는 내내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지점이다. 분명히 그는 뉴욕Fed 시절이나 재무부 시절에 소위 공공의 입장 혹은 미국이라는 국가적 단위의 입장에 서서 예외적 조치나 예외적 가치평가를 옹호하고 관철한다. 예를 들어 그는 쉴라 베어 예금보험공사 사장의 부실은행 채권자들의 헤어컷이란 원칙적 조치를 시장의 혼란을 가져올 것이라며 맹비난한다.1 이는 비상사태를 포함한 각종 상황에 대한 정부 나름의 가치평가법을 옹호한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직원보수의 문제를 거론하면서는 한 치도 흔들림 없는 시가평가주의자로 돌아선다.

바로 그가 서머스에게 비아냥거리듯 딱지 붙였던 “헤지펀드의 견해”라는 딱지가 월가의 직원보수에 관해서는 고스란히 본인에게 적용될 수 있는 딱지가 된 것이다. 비록 미국의 금융가 직원이 다른 경제권의 금융가 직원의 보수나 미국 내의 다른 산업군의 보수보다 예외적으로 높았지만 이는 월가가 예외적으로 많은 부가가치를 창출한 역사가 있는 만큼이나 수용할 수도 있는 견해다. 하지만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것은 월가에 예외적으로 적용했던 그 가치관이 직원보수에 있어서만큼은 – 몇 페이지 지나지도 않아서 – 예외를 허용하지 않는 시장근본주의적 자세로 돌아서는 그 모순이다.2

그게 비단 티모시 가이트너 한 개인의 모순이라면 큰 문제가 없었을 수도(?) 있었겠지만, 실은 자본주의 시스템이 기틀을 마련하여 존속하여 온 이래 이러한 모순은 크건 작건 위정자와 시장참여자들 사이에 일관되게 흘러온 기류이기도 하다는 점이 사태의 핵심이다. 본질적으로 사회적 기능을 하는 기업이 사적소유 혹은 주인-대리인 관계의 문제3로 인해 사회적 통제의 범위를 벗어날 때 우리는 왕왕 ‘이익의 사유화, 손실의 사회화’라는 본질적 모순에 직면하고, 이를 부당하게 정당화하거나 좌절하곤 한다. 가이트너가 정당화하고 있는 관념이 그런 모순이다. “직원 보수는 시장에 맡겨두고 손실은 TARP로 메워주자.”

“주주 자본주의는 죽었다”

왜 이게 문제가 될까? 대규모 기관 투자자들을 포함하여 더 많은 투자자들이 오랫동안 높아져가는 보수를 감내해왔다. 보수는 주주 자본주의의 시대가 시작한 1980년대에 뛰기 시작했다. 기업들은 노동자와 사회에 비해 투자자들에 역점을 두기 시작했다. 주주들은 그들의 수익이 커지기만 한다면 임원들에게 더 많은 보수를 주어도 개의치 않았다.

그러나 어느 시점엔가 꼬리가 개를 흔들기 시작했다. 주주 이익과 임원 보수는 2000년의 시장 활황 이후 다른 길을 걷기 시작했다. 2001년 이후 주주들은 일반적으로 물가상승을 감안한 주식에서 남는 것이 없었다. 반면 임원 보수는 오랫동안 올랐다. 다양한 이유로 주식에 기반을 둔 보상은 보수가 주식의 이익의 등락에 따라 움직이리라는 보장이 되지 못했다. 보상 체제에 대한 부분적인 비난이 일었던 대침체(the Great Recession) 이후에서조차 보수의 상승은 잠깐 동안의 지체만 있었을 뿐이다.

또 다른 데이터에 따르면 1990년대 이래 배당은 감소했다. 기업들은 이제 일반적으로 그들의 이익의 절반에 훨씬 못 미치는 금액을 내놓는데, 수십 년간 최저 수준이다. 회사가 빠르게 성장한다면야 삭감된 배당이 이해가 되지만, 오늘날 그러한 경우는 드물다.

‘경영진 급여에 대한 주주 발언권(Say-on-pay)’은 투자자들에게 기업의 이윤이 어떻게 나뉘는가에 대해 도전할 수 있는 쉬운 방도이다. 그리고 그들은 승부수를 띄웠다. 모든 계정이 잘 관리되고 있는 바이오약품 회사인 Celgene을 예로 들자. 몇몇 투자자들은 이익이 늘지 않고 있는 와중에도 임원의 보수가 부풀어 오르는 것에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들은 Say-on-pay를 조직했고 주류 미디어들의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96%가 경영진을 지지했다.

이는 임원진에게 좋은 뉴스인데, 이제 그들은 회사의 재원을 어디에 쏟아 부을지 결정하는데 보다 많은 유연성을 갖게 된 것이다. 그리고 더 넓게 생각하면, “관리자의 자본주의(managerial capitalism)”이 주주 자본주의보다 현상에 대한 더 단순하고 현실적인 상황이다.[Shareholder Capitalism Is Dead]

다소는 엄살 섞인 글이지만 현재 상황에서 ‘주주 자본주의’가 처한 묘한 상황을 잘 묘사하고 있는 글이라 인용해 보았다. 인용문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서구 기업들의 임원 보수는 1980년대부터 – 바로 신자유주의가 득세하기 시작한 시점 – 급격히 증가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처음에는 소위 주주 자본주의의 발전과 같은 궤를 그렸다.

이런 현상은 특히 월街를 중심으로 한 미국 기업들에게 두드러진 현상이었는데, 금융 부문의 비대화와 노조의 경영간섭과 같은 이해자 자본주의로부터도 자유로운 상황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런데 이번 신용위기 사태에서도 보듯이 급기야 이 엄청난 보수는 회사이윤과도 따로 노는 꼬리가 개를 흔드는 상황이 연출되었다.

모든 것이 “인간의 탐욕”때문이라는 종교적인 뉘앙스의 해석을 별개로 하고 생각해볼 때, 현 상황은 자본주의의 발전에 따라 투자자들과 그들의 대리인 – 즉, 회사의 경영진 – 간의 ‘대리인 문제(agency problem)’이 더욱 강화되고 있는 현실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특히 복잡한 금융상품을 팔던 월街에서 이 현상은 두드러졌다.

또 하나, 투자자들이 이전 세기의 투자자들과 달리 펀드와 같은 집합투자 또는 간접투자의 경우가 많아짐에 따라 이해관계가 희석되고 있다는 점도 고려할 수 있을 것이다. 펀드매니저가 그들에게 제시하는 목표수익률이 달성되는 한은, 투자자들은 골치 아프게 투자대상 회사의 재무제표를 들여다보려 하지 않고, 임원 보수를 개의치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 날 자본주의를 더 올바른 방향으로 가게 하려는 행동주의자들이 주주 자본주의를 활용하여 소액주주 운동을 벌이기도 하고 일부 연기금 등에서도 사외이사 파견 등 회사의 의사결정 행위에 영향을 미치려 하지만, Celgene의 경우에서도 볼 수 있듯이 불합리한 임원 보수 등에 무심한 다수의 투자자들에 의해 이러한 의지가 꺾이고 있는 것 같다.

인용문의 필자는 이에 대해 “주주 자본주의가 죽었다”는 극단적인 선언을 하면서 경영진의 각성을 촉구하지만, 결국 자본주의 메가트렌드의 변화와 이로 인한 결과를 개별 인간들의 선의(?)에 기대는 것은 또한 모든 것이 “인간의 탐욕”때문이라는 환원론적 주문에 불과하다. 주주 자본주의가 실패한 이때가 다시 ‘이해자 자본주의’가 필요한 시점이 아닐까?

“장기 성과에 따른 보수 체계”가 금융위기의 해법일까?

규제를 통해 금융계의 보상 체계를 획기적으로 바꿔야 한다. 은행들은 경쟁업체에 우수한 인력을 빼앗길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스스로는 보상 체계에 손대려 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규제를 통해 리스크가 큰 투자의 경우 단기 성과에 따라 지급됐던 보너스를 보다 장기 성과에 따라 지급되도록 바뀌어야 한다.[“탐욕은 선하다”던 게코가 돌아왔다]

누리엘 루비니가 조선비즈에 기고한 글의 일부다. 보수체계의 개혁에 관한 내용이다. 이번 금융위기에서 보통사람들이 가장 분노했던 상황이 바로 위에 언급한 월스트리트 투자은행들의 보수 문제였다. 위기의 진원지였기에 구제금융까지 받아 실질적으로 망한 기업이면서도, 예년과 다름없는 엄청난 보너스를 지급했던 그 배포에 많은 이들이 어이없어 했다. 이 글에서는 다만 그들이 받는 보수가 과연 합당한지 아닌지를 떠나서 “단기 성과에 따라 지급됐던 보너스”가 “장기 성과”로 바뀌어야 한다는 주장의 타당성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다.

금융회사, 특히 투자은행은 성과에 연동되어 보수가 지급되는 냉혹한 보수체계를 특징으로 한다. 즉, 거칠게 보아 그들의 급여는 개개인 또는 한 팀이 낸 성과에서 내포된 리스크를 차감한 위험조정이익의 일정비율을 받는 조건으로 결정된다. 이때 그 성과를 내는 상품은 투자은행의 어느 분야에서 일하느냐에 따라 제각각 다를 것이다. 이번 위기의 핵으로 여겨지는 서브프라임 모기지 파트였다면 그들이 대출은행으로부터 사들인 채권을 유동화시켜 투자자들에게 넘기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수수료를 기반으로 급여를 받았을 것이다.

이 과정이 어떻게 진행되는지는 이 비디오를 참고하시라.

이제 투자은행의 직원들이 어떻게 단기 성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지를 알아보자. 금융위기로 인해 많은 이들에게 친숙한 용어가 된 증권화와 유동화가 그 비법이다. 모기지처럼 초장기의 대출을 은행의 재무제표에 놔두지 않고 다른 투자자들에게 넘겨버리는 행위가 바로 유동화고 그 유동화하는 방식이 MBS라는 증권형식을 취했다는 점에서 그것은 또한 증권화다. 이 과정의 기초 원리는 최초대출자가 유동화를 통해 투자자에게 더 싼 값에 채권을 팔면 최초대출자는 부채비율을 높이지 않은 채 차익을 챙길 수 있고 이것을 반복하는 원리다.

그게 말처럼 쉽냐고 반문할 수 있지만 사실 그리 쉬운 과정은 아니기에 그렇게 엄청난 급여를 받는 핑계거리도 된다. 방법은 각양각색일 것이다. 장기대출을 단기 채권으로 전환하여 장단기 금리차를 취할 수도 있고, CDO처럼 MBS를 합성한 후 신용등급을 높여서 비싸게 팔아먹을 수도 있고, 아예 자신들의 재무제표도 거치지 않는 자금을 단순하게 신용공여만 해서 그 수수료를 취할 수도 있다. 그리고 이들이 이런 돈벌이를 할 수 있는 배경은 자금수요자와 공급자간의 자금흐름을 가속화시킬 수 있는 유동화가 가능한 금융환경이다.

그 금융환경은 그간 금융부문 내외부에서 차근차근 마련되어 왔다. 일단 기초자산을 구성한 큰 시장 중 하나는 미국의 모기지 시장이었다. 소유권 사회라는 기치 하에 미국은 최근 몇 십 년 사이 빠르게 주택보급률을 확대시켰는데 금융권은 바로 그 주택자금을 공급하였다. 공급한 돈은 미국금융권에서만 나오는 것도 아닌 ‘세계화된 금융’에 의해 쉽게 이전될 수 있는 전 세계의 투자자금에서 충당되었다. 특히 2000년대 들어 그 시장은 급속도로 커졌고 자연히 그 과정의 참여자들에게 매우 높은 단기 성과에 따른 급여가 지급된 것이다.

그것이 지속가능한 금융이었는가 하는 질문은 그때는 몰랐어도 – 또는 외면했어도 – 이제는 모두가 답을 알고 있다. 그 시기 최소한의 다운페이먼트만으로도 대출을 해줬고 그 나머지 돈마저 에쿼티론이란 상품으로 대출을 해주는 등 대출자격심사라는 것이 유명무실화되었다. 빌려준 돈은 빠른 속도로 MBS, CDO 등으로 재포장되어 세계 곳곳으로 퍼져나갔는데 이때 엉터리 신용평가가 품질을 보증해주었다. 결국 내용물은 쓰레기라는 게 밝혀진 이후에야 비판자들이 단기 성과가 덧없다는 사실을 성토했지만 이미 챙길 돈은 챙긴 후였다.

결국 광적으로 진행되었던 무작위 대출, 금융의 세계화, 유동화와 증권화 현상이 일체가 되어 황금알을 낳는 오리의 배를 가르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보여주는 해프닝을 연출한 셈이다. 이들 하나하나가 절대악이라 할 수는 없다(무작위 대출은 빼고). 그보다는 그것들이 합쳐서 상승효과를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는 근본모순에 주목하여야 할 것이다(이 글에서는 논외). 그리고 단기 성과에 따른 급여는 그 해프닝이 가속화되는데 일조를 한 셈이다. 그런 면에서 단기 성과를 장기 성과로 변환시키는 것은 어느 정도 합리적인 고려사항이다.

문제는 이미 현대 금융환경이 단기 성과가 초단위로 측정될만큼 미시화된 상황인데 – 하이프리퀀시 트레이딩이라고 들어보셨는지? 1000분의 1초 단위로 거래를 하는 방식이라 한다 – 그 성과를 어떻게 장기적으로 분배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다. 예로 어떤 직원이 올해 유동화를 통해 90억 원을 벌었으면 당연히 올해 다 성과를 받기 원할 것이다. 그것을 회사가 30억 원씩 3년에 걸쳐 성과를 인식하겠다고 한다면 그건 어떤 면에선 부당한 것이다. 성과의 단기성도 문제지만 성과 기간과 보상 기간의 불일치도 일면 비합리적이다.

그런 면에서 어쩌면 단기 성과에 따른 보너스에 대한 “탐욕”은 금융위기의 원인이기도 하지만 그 결과인 측면도 강하다. 유동화가 마련해준 회전속도가 빠른 금융환경이 그 낙전을 직원들에게 떨어뜨려준 것이다. 그러니 어쩌면 유동화 속도가 느려지고 자금수요나 공급이 모두 둔화되면 금융회사는 자연히 수익에 연동하여 직원급여를 조절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경쟁업체에 우수한 인력을 빼앗길 수 있다는 우려”는 시장이란 게 존재할 때나 하는 배부른 소리니까 말이다. 요컨대 급여체계는 독립변수로 고려할 사항은 아니다.

이명박 후보는 노무현 정부가 키운 후보다

요즘 이명박 후보를 후려치지 않으면 블로그스피어에서 왕따 당할 정도로 그의 엉뚱함과 어눌함은 상식적인 사람들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 같다. 어제 100분 토론은 보지 못하였으나 평소 그의 행동과 발언으로 비추어보건대 분명히 100분 코미디였을 것이라고 가히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이 무한도전의 새로운 패널이 되어도 시원찮을 후보가 지지율 50%를 넘고 있다. 범여권이니 뭐니 잔챙이 후보들은 그야말로 감히 바라보지도 못할 빛나는 지지율이다. 한나라당과 이 후보의 후원세력들은 요즘 표정 관리하느라 여념이 없을 것이다. 서울역에서 좌파정부 물러가라고 태극기 흔들면서 고래고래 소리치셨던 분들은 아주 살맛이 날 것이다. 반대로 대통령 이명박을 상상하기 싫은 이들에게는 요즘만큼 약 오른 때도 없을 것이다. 필리핀이고 인도네시아고 비행기 편을 알아보고 계신 분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생각해보라. 50% 지지율을 넘는 상상초월 대통령 후보가 하루아침에 태어난 것은 아니다. 차근차근 오랜 기간 대권의 꿈을 향해 달려온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고난과 역경의 가시밭길에서 모난 돌 골라주며 이명박 후보를 보살펴 주고 키워준 이는 사실 애석하게도 한나라당의 수뇌부나 박근혜씨가 아닌 노무현 정부다.

언젠가 회사의 회식자리에서도 동석한 부장이 ‘좌파 정부의 종식’을 위해 건배하자고 하여 나 혼자 실실 웃었지만 정말 노무현 정부가 좌파 정부였으면 이명박 후보는 대권에 접근도 못했을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말로는 ‘좌파’라고 청와대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며 눈물 흘리던 이 정부가 실은 이 나라를 신자유주의의 놀이터로 만든 주범이었으며 그러한 토양 위에서 자연스럽게 신자유주의의 무한경쟁 이데올로기를 완성시킬 이명박 후보가 대통령 적임자로 대두된 것이라는 이야기다.

서민의 이미지에 서민의 애환을 보듬어 줄 것이라는 기대를 안고 출범한 이 정부가 지난 5년간 저지른 과오는 열거하기도 벅차다. 비정규직 양산의 토대가 된 노동악법을 만들어냈고, 그 억울함을 호소하는 노동자들을 무차별  검거하고 폭행하였으며, 남한 땅을 미국의 거대자본의 손아귀에 넘겨줄 한미FTA를 초치기로 완성하였고, 어눌한 부동산 정책으로 온 나라를 투기의 현장으로 만들어버린 정도가 대표적인 업적(?)이다. 그러면서도 엉뚱한 곳에서는 하나마나한 평등주의를 외쳐 보수 세력의 인심은 인심대로 잃고 말았다. 즉 행동은 ‘우익’이면서 레토릭만 ‘좌익’이 되어버린 ‘주댕이 좌파’가 바로 이 정부의 자화상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좌파 정부’ 종식시키겠다는 보수우익 아저씨는 울분에 찬 마음으로, ‘주댕이 좌파’에 질려버린 꿈을 잃은 젊은이는 자포자기적 심정으로 함께 두 손 모아 이명박을 지지하게 된 것이다. 새로운 코미디 양산지가 되어버린 대통합민주신당의 후보들의 공약을 보라. 이 후보의 공약이 막가파여서 그렇지 같이 함께 묶어 이면지로 써도 어색하지 않을 초록동색의 신자유주의 공약들이다. 다만 일부 범여권 후보들의 공약에 형식적으로나마 어설픈 복지공약이 들어 있을 뿐이다.

요컨대 범여권과 한나라당은 대척점이 없다. 얼마나 대척점이 없으면 한나라당 후보가 어느날 개혁후보랍시고 범여권 경선에 떡 하니 등장하겠는가. 지난 5년간 내내 그랬다. 하나는 ‘가면을 쓴 보수’였고 하나는 ‘수구적인 보수’여서 국회에서 싸우고 2차로 술집 가서 형님 동생하며 어울렸으니 이에 질려버린 국민들이 ‘가면 안 쓴 솔직한 보수’를 밀어주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그러니 사실은 이명박 후보가 바로 ‘범여권’ 후보인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차별화된 문국현 후보가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민주노동당은 5만 당원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노쇠한 이미지의 권영길 후보가 당지지율마저 갉아먹고 있는 마당에 현대판 로버트오웬 문국현 씨가 지난 대선 노무현 대통령이 써먹었던 ‘진보’의 이미지로 포장되어 나섰다. 아마도 현 시점에서는 ‘보수’ 이명박에 대한 유일한 대항마인 것 같다. 범여권의 지렁이 후보들은 ‘진보’ 이미지를 써먹을 수 없을 만큼 유탄을 많이 맞았기 때문이다.

연말에는 아마도 매우 확률 높게 정권이 바뀌게 될 것이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암울해 할 것 같다. 그렇게 된다 하더라도 위안거리가(?) 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범여권의 후보들이 대통령이 되어도 ‘신자유주의 무한경쟁의 폭주기관차’는 정상적으로 운행될 것이었으므로 누가 대통령이 되었는가는 중요하지 않았다고 냉소를 지을 수 있을 정도일 것이다. 물론 이 후보가 되면 대운하 공약 폐기하고 발뺌하느라 한바탕 쇼를 하는 과정을 지켜보는 재미도 있을 것이다.

10월 19일 덧붙임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 블로그에 손석춘 원장께서 올리신 글 중에 위 허접한(!) 제 글을 축약해서 표현해주는 문구를 발견하고 퍼옵니다. 글의 나머지는 이명박 후보를 까는 내용이니 현 정부의 지지자는 제 글보다는 읽기에 편하실 겁니다. 일독을 권합니다. 🙂 http://bloggernews.media.daum.net/news/392491

그래서다. 이명박의 정책과 날카롭게 각을 세운 정치세력이 전면에 나서야 한다. 노골적 신자유주의자임을 아예 과시하듯 드러내는 후보 앞에서 ‘진보적 신자유주의’ 따위의 어설픈 사고나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갔다”는 의지 박약을 보일 때가 아니다.


다시 한번 왜 이명박 후보가 노무현 정부가 키운 후보인지 말씀드리자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