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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경제신문이 말하는 “경영권 방어 강화”는 누구를 위한 강화인가?

엘리엇매니지먼트 등 해외 헤지펀드를 필두로 한 적대적 M&A 세력이 삼성뿐만 아니라 국내 주요 기업을 공격 목표로 삼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면서 경제계는 “경영권 방어책을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국내 기업이 경영권을 지키기 위해 사용할 수 있는 방어 수단은 자사주 취득과 신주의 제3자 배정, 초다수결의제, 황금낙하산 정도다. 하지만 자사주 취득 외에 다른 수단은 사실상 무력화돼 있다.[“황금주·포이즌필 도입하고 영국처럼 지분공시 기준도 강화해야”]

과연 한국경제신문답다. 한국 재벌의 소유구조를 반성해야 할 시점에 엘리엇매니지먼트를 “적대적 M&A 세력”으로1,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시도를 “국내 기업이 경영권을 지키기 위한” 시도로 프레이밍하면서 “경영권 방어책 강화”를 요구하고 있다. 문어발식 순환출자를 통해 양적 팽창에만 신경 쓰느라 “오너 일가”라는 이름에 무색하게 극소수의 지분만을 가지고 있으면서 전횡을 휘두르는 한국 재벌 일가의 행태에 대한 반성은 어디에도 엿보이지 않는다.2

삼성그룹은 제일모직과 삼성물산의 합병 이유로 시너지 효과를 들었다. [중략] 그러나 삼성이 합병을 추진하려는 진짜 이유는 다른데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재용 부회장으로의 승계작업이 더 급하기 때문이다. 이 부회장은 그룹의 지주회사격인 제일모직 지분 23.2%를 근거로 계열사를 지배하고 있다. 그러나 정작 그룹의 핵심인 삼성전자 지분은 0.57%밖에 없다.[헤지펀드가 물고늘어진 삼성의 아킬레스건]

親삼성 언론 중앙일보 정경민 경제부장의 글이다. 임금님이 홀딱 벗고 있음에도 아무도 그렇다고 이야기 못하는 동화적 상황이 이번 사태에서 재연되고 있는 와중에, 그나마 정경민 씨가 그의 블로그에 사실을 알리고 있다. 삼성물산이 어떤 미사여구를 동원하더라도 이번 합병계획이 이재용 씨에 대한 “후계 승계 작업”임을 부인할 사람이 누가 있을까? 그리고 여기에서 문제가 된 것은 누군가가 이 승계 작업이 적정한 가격에 의한 작업이 아니라 주장한 지점이다.

한국경제가 주장하는 “경영권”은 누구를 위한 경영권이어야 하는 것일까? “주주 자본주의”적 사고로는 ‘주주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엘리엇의 주장이 그것이다. “이해관계자 자본주의”적 사고로는 노동자 등의 이익도 중요하다고 주장하고 사회민주주의 체제 하에서 목소리를 얻고 있다. 그럼 지금 삼성물산의 경영권은 어떤 자본주의적 사고를 따르는 것일까? 사견으로 삼성물산은 “오너 일가”의 봉건적 후계 승계 작업을 위한 사고로 매진하고 있다.

삼성물산의 대주주는 2015년 6월 1일 현재 삼성SDI(7.9%), 삼성화재(4.79%)다. “오너” 이건희 씨의 지분은 1.41%다. 삼성SDI의 대주주는 2015년 6월 2일 현재 삼성전자(19.58%)고 삼성화재의 대주주는 2015년 3월 5일 현재 삼성생명(14.98%)다. “후계자”로 알려진 이재용 씨의 지분은 잘 안 보인다. 인용문에서 언급된 삼성전자 0.57%와 삼성생명 0.06%에서 잠깐 등장한다. 그렇다면 이 싸움에 “삼성물산 對 적대적 M&A 세력”이란 프레이밍이 맞는 것인가?

삼성물산이 보유한 계열사 지분가치는 상장사만 따져도 13조원정도다. 극단적으로 말해 삼성물산을 사들인 뒤 계열사 지분만 팔아도 5조원 남는 장사란 계산이 나온다. 삼성물산은 덤으로 남는다. 엘리엇이 삼성물산의 정관을 고쳐 보유 주식을 현물 배당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구한 것도 삼성전자 지분을 노린 포석이다. 엘리엇의 주장에 외국인투자자와 국내 소액투자자 일부가 동조하고 나선 건 이 때문이다.[헤지펀드가 물고늘어진 삼성의 아킬레스건]

형법에는 “배임의 죄”라는 죄목이 있다. “타인의 사무를 처리하는 자가 그 임무에 위배하는 행위로써 재산상의 이익을 취득하거나 제삼자로 하여금 이를 취득하게 하여 본인에게 손해를 가한 때(제 355조)” 적용되는 죄다. 삼성물산에서 이재용 씨는 어떤 위치인가? 심하게 말해 그는 제삼자다. 그 삼자가 합병으로 엄청난 이득을 누리게 되는 것이 눈에 훤히 보이는 상황인데 경영진은 합병으로 매진하고 있다면 그 경영권은 과연 배임으로부터 자유로운가?

장하준 교수의 삼성활용론 중 국민연금의 역할에 관하여

지금 삼성전자의 경우, 국민연금공단이 7~8%의 지분을 갖고 있다. 회장 유고가 발생하는 경우, 국세청이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등 삼성 3세들로부터 상속세를 삼성전자 주식으로 받아(주식 가격을 더 높게 쳐줄 수도 있다) 국민연금공단에 인도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국민연금공단이 삼성전자의 확고한 최대 주주가 되고 삼성 가문의 지분은 크게 줄어든다. [중략] 삼성전자가 국민경제에 유리한 방향으로 경영하도록 압력도 행사할 수 있다. 이건희의 후계자가 엉뚱한 경영을 일삼는다면 일정한 기간 뒤에 CEO 자리에서 쫓아낼 수도 있다.[“필요하면 삼성법도 좋다”]

장하준 교수는 국내의 좌우 진영 모두에서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현실주의자” 혹은 “실용주의자”의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삼성에 대한 위와 같은 입장이 그의 전형적인 시각인데 어느 진영도 선뜻 동의할 수 없는 해법일 것이다. 좌파의 입장에서는 “봉건적인” 기업 지배권을 보장해주는 것이고 우파의 입장에서는 “연기금 사회주의”의 도래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국민연금법 제102조(기금의 관리 및 운용) 보건복지부장관은 국민연금 재정의 장기적인 안정을 유지하기 위하여 그 수익을 최대로 증대시킬 수 있도록 제103조에 따른 국민연금기금운용위원회에서 의결한 바에 따라 다음의 방법으로 기금을 관리·운용하되…

국민연금법에서 규정하고 있는 기금 운용원칙은 “수익을 최대로 증대”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원칙은 우파의 이념공세를 막을 수 있는 무기가 될 것이다. 하지만 그 원칙 자체가 국민연금을 주주 자본주의로부터의 방패막이로 사용하려는 장 교수의 생각과 배치되는 것이다. 국민연금 역시 다른 주주처럼 단기차익을 시현하려는 맘을 먹지 않는다는 것을 누가 보장하는가?

기관투자자에 포함되는 펀드, 연금기금, 생명보험사는 청구권의 만기(maturity of liabilities) 측면에서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우선 펀드, 특히 공포펀드의 경우 환매요청과 거의 동시에 자금을 인출할 수 있으므로 청구권의 만기는 초단기에 해당한다. 반면, 생명보험사의 보험계약은 비교적 장기이며, 퇴직연금, 국민연금 등 연금기금의 청구권의 만기는 초장기라 할 수 있다.[기관투자자가 자본시장 발전에 미치는 영향 및 정책과제, 자본시장연구원, 2014년 2월]

청구권의 만기가 길다는 점은 확실히 연금의 단기수익 추구 성향을 경감시킬 것이다. 그리고 이런 성향은 다소 안정적인 경영에 도움을 줄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국민연금은 수익 추구 집단이다. 주식시장 부양을 위해 연금을 동원한달지 하는 여태의 행태가 장 교수가 “국민경제에 유리한 방향”을 명분으로 내세우며 또 다시 연금을 호출한 명분은 아닌 것이다.

국민연금에 돈을 붓고 있는 내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분명 연금은 궁극적으로 수익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움직여야 한다. 그 과정에서 연금의 주주행동주의가 옳은 것이냐 혹은 국민경제에 유리한 방향이 연금에 유리한 방향이냐 등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국민연금의 운용원칙이 좀 더 고유특성에 맞게 조정이 되어야 할 것이다.

“주주 자본주의는 죽었다”

왜 이게 문제가 될까? 대규모 기관 투자자들을 포함하여 더 많은 투자자들이 오랫동안 높아져가는 보수를 감내해왔다. 보수는 주주 자본주의의 시대가 시작한 1980년대에 뛰기 시작했다. 기업들은 노동자와 사회에 비해 투자자들에 역점을 두기 시작했다. 주주들은 그들의 수익이 커지기만 한다면 임원들에게 더 많은 보수를 주어도 개의치 않았다.

그러나 어느 시점엔가 꼬리가 개를 흔들기 시작했다. 주주 이익과 임원 보수는 2000년의 시장 활황 이후 다른 길을 걷기 시작했다. 2001년 이후 주주들은 일반적으로 물가상승을 감안한 주식에서 남는 것이 없었다. 반면 임원 보수는 오랫동안 올랐다. 다양한 이유로 주식에 기반을 둔 보상은 보수가 주식의 이익의 등락에 따라 움직이리라는 보장이 되지 못했다. 보상 체제에 대한 부분적인 비난이 일었던 대침체(the Great Recession) 이후에서조차 보수의 상승은 잠깐 동안의 지체만 있었을 뿐이다.

또 다른 데이터에 따르면 1990년대 이래 배당은 감소했다. 기업들은 이제 일반적으로 그들의 이익의 절반에 훨씬 못 미치는 금액을 내놓는데, 수십 년간 최저 수준이다. 회사가 빠르게 성장한다면야 삭감된 배당이 이해가 되지만, 오늘날 그러한 경우는 드물다.

‘경영진 급여에 대한 주주 발언권(Say-on-pay)’은 투자자들에게 기업의 이윤이 어떻게 나뉘는가에 대해 도전할 수 있는 쉬운 방도이다. 그리고 그들은 승부수를 띄웠다. 모든 계정이 잘 관리되고 있는 바이오약품 회사인 Celgene을 예로 들자. 몇몇 투자자들은 이익이 늘지 않고 있는 와중에도 임원의 보수가 부풀어 오르는 것에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들은 Say-on-pay를 조직했고 주류 미디어들의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96%가 경영진을 지지했다.

이는 임원진에게 좋은 뉴스인데, 이제 그들은 회사의 재원을 어디에 쏟아 부을지 결정하는데 보다 많은 유연성을 갖게 된 것이다. 그리고 더 넓게 생각하면, “관리자의 자본주의(managerial capitalism)”이 주주 자본주의보다 현상에 대한 더 단순하고 현실적인 상황이다.[Shareholder Capitalism Is Dead]

다소는 엄살 섞인 글이지만 현재 상황에서 ‘주주 자본주의’가 처한 묘한 상황을 잘 묘사하고 있는 글이라 인용해 보았다. 인용문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서구 기업들의 임원 보수는 1980년대부터 – 바로 신자유주의가 득세하기 시작한 시점 – 급격히 증가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처음에는 소위 주주 자본주의의 발전과 같은 궤를 그렸다.

이런 현상은 특히 월街를 중심으로 한 미국 기업들에게 두드러진 현상이었는데, 금융 부문의 비대화와 노조의 경영간섭과 같은 이해자 자본주의로부터도 자유로운 상황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런데 이번 신용위기 사태에서도 보듯이 급기야 이 엄청난 보수는 회사이윤과도 따로 노는 꼬리가 개를 흔드는 상황이 연출되었다.

모든 것이 “인간의 탐욕”때문이라는 종교적인 뉘앙스의 해석을 별개로 하고 생각해볼 때, 현 상황은 자본주의의 발전에 따라 투자자들과 그들의 대리인 – 즉, 회사의 경영진 – 간의 ‘대리인 문제(agency problem)’이 더욱 강화되고 있는 현실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특히 복잡한 금융상품을 팔던 월街에서 이 현상은 두드러졌다.

또 하나, 투자자들이 이전 세기의 투자자들과 달리 펀드와 같은 집합투자 또는 간접투자의 경우가 많아짐에 따라 이해관계가 희석되고 있다는 점도 고려할 수 있을 것이다. 펀드매니저가 그들에게 제시하는 목표수익률이 달성되는 한은, 투자자들은 골치 아프게 투자대상 회사의 재무제표를 들여다보려 하지 않고, 임원 보수를 개의치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 날 자본주의를 더 올바른 방향으로 가게 하려는 행동주의자들이 주주 자본주의를 활용하여 소액주주 운동을 벌이기도 하고 일부 연기금 등에서도 사외이사 파견 등 회사의 의사결정 행위에 영향을 미치려 하지만, Celgene의 경우에서도 볼 수 있듯이 불합리한 임원 보수 등에 무심한 다수의 투자자들에 의해 이러한 의지가 꺾이고 있는 것 같다.

인용문의 필자는 이에 대해 “주주 자본주의가 죽었다”는 극단적인 선언을 하면서 경영진의 각성을 촉구하지만, 결국 자본주의 메가트렌드의 변화와 이로 인한 결과를 개별 인간들의 선의(?)에 기대는 것은 또한 모든 것이 “인간의 탐욕”때문이라는 환원론적 주문에 불과하다. 주주 자본주의가 실패한 이때가 다시 ‘이해자 자본주의’가 필요한 시점이 아닐까?

Some Like it Hot

토니 커티스와 마릴린 먼로가 주연을 맡은 로맨스 코미디 Some Like it Hot(1959년)은 여자로 분장한 남성 연주자들이 벌이는 해프닝을 다뤄 이러한 소재의 아류 코미디의 전범으로 남은 걸작이다. 시카고 갱들의 살인사건을 목격하는 바람에 여장을 하고 마이애미로 도망친 두 남성 연주자들이 우여곡절 끝에 갱들로부터 벗어나고, 이 와중에 섹스폰 주자 조(토니 커티스 분)는 슈가케인(마릴린 먼로 분)이라는 진정한 사랑을 찾게 된다는 것이 대충의 줄거리다.

한편 이 작품의 또 다른 등장인물인 백만장자 오스굿은 또 다른 여장 남자 제리(잭 레몬 분)에게 첫눈에 반해 청혼을 한다. 제리는 이를 거절하지 못하고 있다가 결론 부분에 청혼을 거절한다. 처음엔 오스굿의 어머니가 싫어할 것이라고 말하다 통하지 않자 ‘담배를 피운다’, ‘애를 못 낳는다’ 핑계를 대지만 오스굿이 굴하지 않자 자신이 남자라는 사실을 털어놓는다. 그러자 오스굿 왈 ‘no one is perfect’

영화의 매력은 이런 부조리한 상황이 연출되는 상황묘사다. 배우자감이 동성(同性)이라는 것이 단지 ‘작은 흠결’에 지나지 않는다고 여기는 백만장자의 호기로움에 당시 관객들은 웃음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말도 안 된다고 호들갑을 떨면서 말이다. 그 상황은 어떠한 절대적인 믿음을 깨뜨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남자와 남자는 결혼할 수 없다는 상식 말이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그 상식은 변화를 겪게 된다.

오늘날 미국에서는 여전히 논란이 되고 있긴 하지만 일부 지자체에서 동성결혼을 합법화시켰다. 영화의 무대가 되고 있는 마이애미 역시 동성애자들이 활발히 권익운동을 펼치고 있는 곳으로 알고 있다. 가정이긴 하지만 만약 오스굿이 정말 성별에 개의치 않고 제리가 그런 오스굿의 헌신에 마음이 움직였다면 ‘no one is perfect’ 가 틀린 말은 아닐 수도 있지 않을까? 만약 Some Like it Hot이 현대에 다시 리메이크된다면 제작진은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 맞게 결론부분을 각색하여야 할 고민에 빠지게 될 것이다.

무쏘 신화로 잘 알려진 쌍용자동차가 지금 심한 몸살 정도가 아닌 엄청난 독감을 앓고 있다. 경제위기에 떠밀려 중국자본에 인수되었다가 내팽겨지고 거의 폐업 수준의 구조조정을 통해 회생을 도모하다 노동자들의 거센 반발에 부닥쳐, 지금 작업장은 전쟁터로 변하고 말았다. 노동자들은 ‘해고는 살인이다’라는 자신들의 말을 스스로 증명이라도 하듯이 하나둘 스스로 목숨을 끊는 극단적인 상황으로 내몰리고 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해석들은 분분하다. ‘경쟁력 없는 차종을 생산하였으므로 문을 닫음이 옳다’, ‘중국자본이 기술이전 등 알맹이를 쏙쏙 빼먹고 도망갔다’, ‘노조 때문에 회사가 망하는 것이다’, ‘회사의 살인적인 구조조정이 원인이다’ 등등 하나의 상황을 둘러싸고 열개의 해석이 난무한다. 솔직히 저간의 사정에 관심을 두지 않았던 제3자의 입장에서는 이리 솔깃 저리 솔깃할 뿐이다.

내가 쌍용에 대해 안타까워하는 부분은 이것이다. 쌍용그룹이 거두지 못한 사업부문을 상하이자동차가 인수하였을 때에, 그리고 외환위기 때 수많은 기업들이 외국자본에 인수되거나 채권단에게 넘어갔을 때에, 또 최근 대우조선해양이나 대우건설 인수문제가 불거질 때에, 왜 우리는 오직 한 길만을 생각하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든다. 1차적으로 채권단은 담보능력을 지닌 자본의 인수를 바란다. 그것이 아니면 때로 그들 스스로가 주인, 즉 주주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주주만이 ‘기업의 진정한 주인’이라는 이 흔들리지 않는 통념에 대해 어쩌면 동성결혼의 불가가 1950년대식 편견에 불과할 수도 있다는 인식전환처럼 나름의 상상력을 발휘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사실 이런 전환적인 사고는 이미 유럽 등지에서 ‘주주 자본주의’가 아닌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라는 개념으로 – 즉 주주, 채권단, 고용인 모두 회사의 장래와 이해관계를 가진다는 – 통용되고 있다. 살벌한 이념의 동토(凍土)인 남한 땅에서는 ‘빨갱이의 선동’이 되지만 말이다.

쌍용자동차를 상하이자동차에 넘겨 허튼짓을 할 때, 외환은행을 론스타에 넘겨 허튼짓을 할 때, 대우건설을 능력 없는 금호그룹에 넘겨 허튼짓을 할 때, 대우조선해양이 주인을 못 찾고 표류할 때 정부는, 채권단은, 주주는 그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노동자들도 또 다른 의미의 주인임을 생각하지 않는다. 아무런 이해관계도 없는 자본가에게 LBO(leveraged buy out)로 기업을 인수하게끔 한다면 노동자들에게 LBO를 이용하게끔 하는 대안도 가능한 것이 아닐까?

물론 최근 금호그룹이 알려진 바로 약 2조원의 손실을 내며 대우건설을 게워내기로 한 상황에서 볼 수 있듯이 기업인수는 막대한 리스크를 안는 일이긴 하다. 채권단의 입장에서야 그러한 리스크를 감내할 수 있는 기업을 인수자로 삼을 수밖에 없는 한계가 있다. 하지만 노동자들이 여타 기업보다 그 리스크에 더 노출되어 있다는 뚜렷한 증거도 없다. 그러한 편견은 동성결혼을 불가하다는 것처럼 이 시스템 속에 통념으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일 뿐일 수도 있다.

노동조합이 아닌 더 발전된 합의체, 단순한 우리사주조합이 아닌 실질적인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고 그 소속원들에게 권리에 상응하는 의무를 부과할 수 있는 합의체를 만들어내고 사회가 그것을 용인한다면 불가능한 일도 아닐 것이다. 그것은 체제 전복적이지도 않다. 노동자는 스스로가 주주일 뿐인 것이다. 쌍용자동차의 노동자들과 전쟁을 벌이며 낭비하고 있는 이 막대한 사회적비용을 그러한 시스템의 수립에 투입한다면 못할 것도 없는 작업일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지금 이 순간에도 힘 있는 자들은 이와는 다른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이다.

자본주의를 위해 포기할 수 있는 것

회사는 “민간 이사회와 관리팀에 의해 운영될 것입니다.” 그는[오바마:역자 주] 그들이 다운사이징과 비용절감의 전문가들이라는 점을 명백히 하면서 “그들은 – 그리고 정부가 아니며 – 지시를 내리고 이 회사를 어떻게 변모시킬지 의사 결정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계속해서 “연방정부는 주주로서의 권리행사를 자제할 것이고.. 간단히 말해 우리의 목적은 GM을 자립하게 하는 것, 간섭하지 않은 것, 빨리 빠져나오는 것입니다.”
The company “will be run by a private board of directors and management team,” he insisted, making it clear that they would be experts in downsizing and cost-cutting. “They – and not the government – will call the shots and make the decisions about how to turn this company around,” he continued. “The federal government will refrain from exercising its rights as a shareholder. … In short, our goal is to get GM back on its feet, take a hands-off approach, and get out quickly.”[출처]

‘사회주의’ 또는 ‘국유화’에 대한 우익의 공포감은 급기야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지극히 정당한 ‘주주’로서의 권리조차 포기하는 역설을 낳고 있다. 자본주의를 위해서라면 주주 자본주의쯤은 포기할 수 있다는 뚝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