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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주인의식 없는 주주에 관한 이야기

미국 재무부는 지난 달 씨티그룹에 250억 달러를 투입한 데 이어 이번에 200억 달러를 추가 지원하고 그 규모만큼 우선주를 매입하기로 결정했다. [중략] 지난 주말 씨티그룹의 종가는 3.77달러였고 [중략] 시가총액은 205억달러수준이다. [중략] 결국 개인이 주식시장에 200억달러를 투자했다면 씨티그룹의 지분을 99% 가까이 다 사들일 수 있다는 얘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같은 선택은 결국 AIG처럼 국유화하지 않고 기존 경영진을 존중하겠다는 의미로 해석된다.[美는 왜 씨티 살리기 도박 택했을까?, 아시아경제, 2008년 11월 24일]

금융위기 당시 미국 정부가 금융위기 당시 금융회사들에 자본을 투입한 이유는 금융회사들이 과도한 레버리지로 자산을 늘려놓는 바람에 자본이 심각하게 부족했고, 부실한 자본비율은 곧 파산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때에도 美정부는 (반대급부가 거의 없는) 재정지원 혹은 (반대급부가 배당인) 우선주의 형식으로 금융회사의 자본을 보충하였다.1 주식 중에서도 우선주의 형식으로 출자한 이유는 의사결정권이 없는 주식에 출자함으로써, 자본주의의 성지인 미국 경제에서의 금칙어인 “국유화”라는 이념적 공세를 피해가려 했기 때문이다.2

물론 재무부의 씨티그룹의 우선주 매입이 “국유화”에 대한 미국정치의 알러지 반응을 피하고자 함이라는 사실은 납득이 간다. 하지만 인용문에서 언급하듯 사실 재무부는 이미 AIG를 국유화한 바 있다. 그리고 주택 모기지 채권이라는 거대한 자산을 담당하고 있는 프레디맥과 패니메도 “후견체제(conservatorship)”라는 요상한 명칭을 사용하기는 했지만, 본질적으로 그 회사들을 국유화한 것이다. 그럼에도 재무부는 유독 금융위기의 진원지로서 허약하기 이를 데 없는 허울 좋은 이름만 남아 있는 씨티그룹은 기를 쓰고 국유화의 길을 피해갔다.

리 삭스가 지하실 체육관에서 나를 발견하였다. 나는 운동을 멈추고 씨티의 완충 자본인 보통주 500억 달러를 추가하는 서명을 하였다. 우리가 국유화를 원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만큼이나, 쓰러지게 좌시하지 않는다는 모습도 중요했다. 우리는 “리먼 상황은 없다”는 의도를 진지하게 입증해야 했다. 그렇지 못할 경우, 민간투자자는 금융시스템의 자본 확충이라는 위험 투자를 하지 않을 것이었고, 우리는 TARP 자금만으로 충분할지 알지 못했다.[스트레스테스트, 티모시 가이트너 지음, 김규진/김지욱/홍영만 옮김, 인빅투스, 2015년, p366]

한편 구제금융과 우선주 매입이라는 긴급수혈에도 불구하고 씨티그룹의 정상화 기미는 요원했다. 그래서 마침내 재무부는 자신들의 우선주와 민간투자자의 우선주 500억 달러를 보통주로 전환했다. 재무부가 이런 조치에 나선 것은 금융회사의 건전성을 가늠하는 기준인 단순자기자본비율(tangible common equity)에서는 보통주가 보다 신뢰도 높은 주식이기 때문이다. 가이트너는 그야말로 국유화와 파산이라는 양쪽 낭떠러지에서 외줄을 타고 있는 씨티그룹을 – 아니 주주와 경영진의 이익을 – 지켜주는 수호천사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어쨌든 당시 재무부는 보통주 전환을 통해 36%의 지분을 확보함으로써 씨티그룹의 대주주가 됐다.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기업의 대주주인 재무부는 이제 당연히 주주의 권리와 의무에 따라 회사를 정상화하고, 나아가 국가경제를 정상화시키기 위한 조치에 착수했어야 했다. 애초에 구제금융의 명분이 금융시장 정상화였고, 금융회사에 대한 자금투입이 대출로 이어져 시중에 다시 돈이 도는 것이 바로 그 정상화의 첩경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시 대주주이자 규제당국인 재무부는 그럴 생각이 별로 없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재무부는 250억 달러 규모의 정부 보유 우선주뿐 아니라 그에 상응하는 민간 주주의 우선주를 보통주로 전환하는 데 동의했다. [중략] 놀랍게도 재무부는 씨티에 자구책을 모색하라는 요구를 거의 하지 않았다. 보통주 전환을 통해 정부가 확보한 씨티 지분은 전체 주식의 3분의 1이 넘었다. 그뿐 아니라 연방예금보험공사에는 씨티그룹의 자회사이며 부보은행인 씨티은행의 영업을 정지할 수 있는 법적 권한이 있었다.[정면돌파, 실라 베어 지음, 서정아/예금보험공사 옮김, 곽범국 감수, 알에이치코리아, 2016년, p302]

실라 베어는 “시장경제에서는 누구나 파산할 자유를 누려야 한다”(p341)고 주장하는 시장주의자였다. 그런 실라베어가 보기에 티모시가이트너는 항구적인 구제금융이 가능하게끔 논리를 펴는 재무부 백서를 내는 등 이른바 “구제금융주의자”였다. 그런데 실라베어가 보기에 가이트너의 더 큰 문제는 그렇게 씨티그룹의 대주주가 되었음에도 주주로서의 마땅한 권리와 의무를 행사하려 하지 않는 것이었다. 재무부는 구제금융만으로도 국유화할 수도 있었던 회사를 열등한 조건의 우선주로 수혈하고 급기야 대주주가 됐음에도 아무 짓도 하지 않은 것이다.3

이념적 지형을 이분법적으로 나누자면 실라베어는 명백하게 “자본주의자”다. 그는 저서에서 “자본주의자인 나는 정부가 우선주 투자라도 은행을 소유하는 데 반대하는 입장이었다.”(정면돌파, pp361~362)라고 주장했다. 그가 보기에 우선주 투입은 기업의 파산할 자유를 박탈한 것이다. 그러면 이 반대편에 서있는 가이트너는 어떤 주의자일까? “구제금융주의자”는 뭔가 균형이 맞지 않기 때문에 결국 그는 “사회주의자”다. 소비에트식의 사회주의자는 아니고 “빈자를 위한 자본주의, 부자를 위한 사회주의”라는 당시의 이념적 공세의 맥락에서의 “사회주의자”다.

씨티는 완전히 다른 경우로 오랫동안 통화감독청과 뉴욕연준은행의 ‘최고’ 인가 은행 자리를 유지했다. 국제적인 인지도도 높았다. 따라서 씨티가 부실화된다면 두 규제기관 모두 국내에서만 비난받는 정도로 그치지 않고 국제적인 망신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가이트너의 멘토이자 영웅인 로버트 루빈이 씨티의 회장으로 있었다는 사실도 웃음거리가 될 터였다. [중략] 씨티가 위기에 처하지 않았다면 정부가 그토록 대대적인 구제금융 프로그램을 시행했을까 하는 의문이 아직까지 내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다.[정면돌파, p232]

하지만 어떠한 형식으로든 “국유화”라는 타이틀을 피하려 했던 가이트너 역시 그의 회고록과 실라베어의 회고록을 동시에 읽은 내 관점에서 보자면 분명한 자본주의자다. 다만 가이트너는 “정실(crony) 자본주의자”다. 시장 전체의 이익이나 소비자의 이익이 아닌 일부 자본의 이익을 위해서 정부의 돈을 쓰는 관료라면 그를 세금을 낭비했다고 해서 “사회주의자”라 부를 이유가 없다. 그런 정의라면 개발도상국의 정치권은 온통 사회주의자다. 우리는 이미 그러한 공직자가 주도하는 경제를 일컫는 표현으로 “정실 자본주의”란 표현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금융위기 당시 공화당을 위시한 보수층은 이런 적절한 표현을 피하고 구제금융 자체를 “사회주의적” 조치라 맹비난하였고, 이런 이념적 혼란을 틈타 보수층 내에서는 티파티라는, 진보층에서는 “월스트리트를 점령하라” 세력이 성장하였다. 즉, 부시 정권의 헨리폴슨이 시작한 정실 자본주의가 오바마 정권의 티모시가이트너에서 만개함으로써 보수층이든 진보층이든 초당적으로 이루어진 구제금융에 대한 – 그렇지만 그들은 거의 혜택을 받지 못한 – 분노가 정치지형을 더욱 더 양극화시켰던 것이다. 그 현재진행형이 도널드트럼프다.

티모시 가이트너가 설명하는 ‘금융위기의 역설’에 대한 단상

그렇다고 해서, 나는 “정부가 금융업계에 대해 관대했다.”는 일반인들의 인식이 근거 없다고 반박하지는 않는다. [중략] 부실금융회사의 경영진들이 저택이나 멋진 자가용 비행기를 사도록 구제금융으로 지원한 것이 아니라 금융의 재앙이 경제 전반을 망치지 못하게 막을 다른 방법이 없어서 한 것이다. 금융시스템이 정지되면 신용은 얼어붙고, 저축은 사라지며, 상품과 용역에 대한 수요가 사라지게 되어 대량실업과 가난 그리고 고통을 초래하게 된다. [중략] 이것이 ‘금융위기의 역설’로, 우리가 적절하고 공정하다고 느끼는 것이 때로는 적절하고 공정한 결과를 낳기 위해서 요구되는 것과 정반대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정책결정자들이 위기를 더욱 확대시키는 이유이며, 위기관리의 정치학이 항상 지지를 받지를 못하는 이유이다.[스트레스테스트, 티모시 가이트너 지음, 김규진/김지욱/홍영만 옮김, 인빅투스, 2015년, p591]

경제시스템의 버블이 터짐으로써 위기가 발생한다면 상식적인 대안은 내핍을 통하여 다시 재무제표를 건전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것은 일개 가계의 이야기이고 국가 차원에서 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것은 여태 형성되어온 버블을 통해 국가의 각 부문이 그에 맞게 성장을 해왔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태에서 국가적인 내핍을 강요하게 되면 버블로 먹고 살던 부문은 영양실조에 걸려 쓰러지거나 사망에 이르게 된다. 결국 버블의 어느 선까지가 “건전한” 버블이고 어느 선까지가 “불건전한” 버블인지 알 때까지 정책결정자는 가이트너가 이야기하는 것처럼 인기 없는 ‘금융위기의 역설’에 근거한 정책을 시행하여야 한다.

이 과정에서 당사자는 억울하겠지만 대중의 분노가 폭발한다. 분명히 월스트리트는 경제위기의 방화범임이 확실한데, “월스트리트 출신”의 가이트너가1 방화범을 구제해줘서 저택과 자가용 비행기를 안겨주었다는 것이 분노의 주된 내용이다. 실제로 그의 회고록에 보면 이렇게 보일 수 있는 정황이 많다. AIG에 구제금융을 안겨주었는데, 그 와중에 직원은 이미 약속되어 있는 막대한 보너스를 받을 예정이었다. 재무부 장관으로서 그 계획을 막아보려 했지만, 법적으로 이는 불가능하였기에 수많은 비난을 들으면서도 내버려둘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 가이트너의 회고다. 정확히 정책결정자가 방화범에게 보너스를 주는 그림이 그려진다.

한편 이 시점에서 왜 금융시스템에서 대중의 분노를 촉발하는 ‘금융위기의 역설’이 생기는지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미국의 금융시스템은 – 또는 서구의 선진 금융시스템 – 시장의 완전경쟁과는 거리가 먼 독점체제이다. 골드만 삭스를 비롯한 많은 투자은행이 포진해있기는 했지만, 이들은 어떻게 보면 전 세계를 대상으로 하는 월스트리트라는 기업명의 단일 투자회사다. 세계화와 탈규제의 와중에 이들은 엄청난 금융버블을 지구단위로 키웠다. 그런 와중에도 금융시스템의 감독체계는 뿔뿔이 흩어져 있었고 후진적이었다. 가이트는 이런 상황을 “조지 워싱턴 장군의 군대로 세계 제3차 대전을 치르는 것”(602p)과 같았다고 회고한다.

결국 가이트너가 각종 경제지표를 보여주며 회고하듯이 분명 인상적으로 짧은 기간 동안에 미국을 비롯한 세계의 경제위기는 어느 정도 잦아들었다. 그리고 조지 워싱턴 장군의 군대는 도드-프랭크 법 등을 통해서 어느 정도 선진화되었다. 하지만 문제는 여전히 시장참여자 모두가 어느 선까지가 “건전한” 버블이고 어느 선까지가 “불건전한” 버블인지 알지 못한다는 것이고, 자신들은 처벌받을 아무런 이유가 없고2 단지 잠시 운이 나빴을 뿐이라고 생각하는 “금융의 귀재”들이 월스트리트에 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결국 신용이 얼어붙지 않게 하는 대신에 우리는 방화범인 금융독점자본주의를 보호해줄 수밖에 없었다.

가이트너는 회고록에서 월스트리트를 처단하라는 요구를 지속적으로 “구약성서적인 정의”를 요구하는 근본주의자로 몰아세운다. 이러한 그의 사고방식은 ‘금융위기의 역설’에 따른 정치학이라는 케인스주의적 사고도 자리 잡고 있는 한편으로 납세자나 – 심지어 의회에게 – 금융과 같이 어려운 분야를 난도질하게 내버려두지 않겠다는 엘리트주의적 사고도 자리 잡고 있다. 사람들이 그를 부당하게 월스트리트 출신이라고 몰아세웠지만, 그의 지사(志士)적 업무처리에는 월스트리트 편향으로 흐를 수밖에 없는 자본주의 금융시스템 고유의 – 특히 미국 Fed의 – 엘리트주의도 한몫하고 있음을 부정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어쨌든 현상온존 위주의 엘리트주의적 관점을 제쳐두고 본다면 가이트너의 처방은 결과적으로 옳았다. 불길이 온 산을 뒤덮고 있는데 채권자에게 헤어컷을 요구하면 그 채권자는 불씨를 다른 산으로 가지고 갈 것이었다. 그래서 구약성서적 정의를 실천하기 보다는 헤어컷을 하지 않음으로써 불씨를 옮기지 말라는 신호를 주었다. 그런데 이런 처방은 여태 IMF외환위기 때 한국 등 제3세계에 취한 조치 등을 생각하면 극히 이례적인 처방이다. 명분은 그때의 위기는 국지적이고 2008년의 위기는 세계적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인데, 옳은 말이고 그게 또한 월스트리트 단일기업의 금융시스템이 가지는 본질을 말해주고 있다.

바로 온 세계의 금융시스템, 또는 미국 정부조차 월스트리트의 인질이라는 사실.

우리는 또한 이 문제에 글로벌한 해법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위기가 전 세계적이었고, 미국은 국내의 실패만이 아니라 해외의 취약한 감독기준으로 인해서도 손상을 받았다.. 만일 우리가 강화된 기준을 글로벌하게 권유하지 않고 단독으로 부과했다면, 미국은 시스템 강화의 성과는 못 얻으면서 미국업계의 전 세계 시장점유율만 감소시켰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런던 G20회담에서부터 시작하여, 바젤III라고 알려지는 체계와 파생상품 감독, 글로벌 은행의 청산 처리방식을 포함하는 국제금융 대책을 추진하였다.[같은 책, p465]

티모시 가이트너의 모순된 입장

서머스는 다수 금융사가 자본부족을 평가하는 유일하게 타당한 방식은 자산을 현행 시가에 가깝게 평가하는 것이라 믿었다. [중략] 따라서 서머스는 스트레스 테스트가 좀비은행들을 지원하기 위한 눈가림 체계라고 우려했다. [중략] 나는 [중략] “이 자산들은 패닉 중에서 나타내는 것보다 훨씬 더 가치가 있고, 주요은행 다수가 지급능력을 갖추었다고 판명될 가능성이 그럴듯하게 있다”고 보였다. [스트레스 테스트, 티모시 가이트너 지음, 김규진/김지욱/홍영만 옮김, 인빅투스, 2015년, p335]

티모시 가이트너는 뉴욕Fed 행장으로 근무하다 금융위기의 와중에 집권에 성공한 오바마의 선택으로 재무장관에 취임하였다. 그 후 그가 시장의 공포를 줄이고 한정된 TARP(Troubled Asset Relief Program : 부실자산매입프로그램) 의 자금을 효율적으로 쓰기 위해서 생각한 아이디어가 바로 인용한 책의 제목인 스트레스 테스트다. 가이트너는 금융사가 보유한, 당시 시중에서 전혀 인기가 없어 팔리지 않고 재무제표를 악화시키던 자산을 적정(!?)하게 평가하는 스트레스 테스트를 통해 시장에 신뢰를 재고시키겠다는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었고, 이를 그의 경제학 스승인 래리 서머스와 의논한 것이다.

서머스는 하지만 가이트너의 아이디어에 반대하며 소위 시가평가 방식이 진리라 주장했는데, 가이트너는 이러한 견해는 서머스가 헤지펀드에 근무한 경력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고 이를 “헤지펀드의 견해”라고 불렀다. 그렇다면 서머스의 견해는 독자인 내가 이름붙이기를 “재무부의 견해”라고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즉, 시장에 의해 진정한 가치가 평가받는 것이 옳다고 믿는 견해를 “헤지펀드의 견해” 혹은 서머스의 견해라고 한다면, 은행의 고유한 회계원칙에 의한 차주의 지급능력에 기초하여 진정한 가치를 평가받는 것이 옳다고 믿는 견해를 “재무부의 견해” 혹은 가이트너의 견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미국인들은 과도한 보수를 받는 은행가들을 구제하는 데에 분노하였고, 백악관의 정치팀은 우리가 국민들의 반발에 동조하는 편에 서 있음을 보여 주기 원하였다. [중략] 우리에게는 버블 시기에 이미 지급된 보너스를 압류할 법적 권한이 없었고, 대다수 민간기업의 보수를 설정할 권한이 없었다. [중략] 대중들이 인정할 만한 수준으로 상여금을 삭감한다면 이들 은행으로부터 인재들이 대거 탈출을 초래하고, 은행이 안전한 방향으로 나아갈 전망이 줄어들었을 것이었다.[같은 책, p338]

이러한 두 인용문 사이의 시각의 불일치 혹은 모순이 가이트너의 회고록을 읽는 내내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지점이다. 분명히 그는 뉴욕Fed 시절이나 재무부 시절에 소위 공공의 입장 혹은 미국이라는 국가적 단위의 입장에 서서 예외적 조치나 예외적 가치평가를 옹호하고 관철한다. 예를 들어 그는 쉴라 베어 예금보험공사 사장의 부실은행 채권자들의 헤어컷이란 원칙적 조치를 시장의 혼란을 가져올 것이라며 맹비난한다.1 이는 비상사태를 포함한 각종 상황에 대한 정부 나름의 가치평가법을 옹호한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직원보수의 문제를 거론하면서는 한 치도 흔들림 없는 시가평가주의자로 돌아선다.

바로 그가 서머스에게 비아냥거리듯 딱지 붙였던 “헤지펀드의 견해”라는 딱지가 월가의 직원보수에 관해서는 고스란히 본인에게 적용될 수 있는 딱지가 된 것이다. 비록 미국의 금융가 직원이 다른 경제권의 금융가 직원의 보수나 미국 내의 다른 산업군의 보수보다 예외적으로 높았지만 이는 월가가 예외적으로 많은 부가가치를 창출한 역사가 있는 만큼이나 수용할 수도 있는 견해다. 하지만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것은 월가에 예외적으로 적용했던 그 가치관이 직원보수에 있어서만큼은 – 몇 페이지 지나지도 않아서 – 예외를 허용하지 않는 시장근본주의적 자세로 돌아서는 그 모순이다.2

그게 비단 티모시 가이트너 한 개인의 모순이라면 큰 문제가 없었을 수도(?) 있었겠지만, 실은 자본주의 시스템이 기틀을 마련하여 존속하여 온 이래 이러한 모순은 크건 작건 위정자와 시장참여자들 사이에 일관되게 흘러온 기류이기도 하다는 점이 사태의 핵심이다. 본질적으로 사회적 기능을 하는 기업이 사적소유 혹은 주인-대리인 관계의 문제3로 인해 사회적 통제의 범위를 벗어날 때 우리는 왕왕 ‘이익의 사유화, 손실의 사회화’라는 본질적 모순에 직면하고, 이를 부당하게 정당화하거나 좌절하곤 한다. 가이트너가 정당화하고 있는 관념이 그런 모순이다. “직원 보수는 시장에 맡겨두고 손실은 TARP로 메워주자.”

중앙은행이라는 존재를 다시 생각해본다

나는 2006년의 공개시장조작위원회에서 “우리의 인식에 어떤 거대하고 부정적인 충격이 없는 한, 주택 가격에 예상되는 냉각의 효과는 완만할 것이라고 믿습니다.”라고 발언했다. 버냉키 의장은 농담 분위기를 빌어서 뉴욕의 조합(co-op) 아파트의 미친 듯한 가격에 대한 보고서를 요구했고, 위원들은 웃었다. [중략] 그러나 2007년 3월은 서브프라임에 대한 경고를 하기에는 게임에 너무 늦은 시점이었다. 그리고 내 견해로는, 위험을 줄이는 유일하고 효과적인 방식은 감독자들이 주요 금융사들이 위기에서 생존하는 데 충분한 자본과 유동성을 확보하도록 만드는 것뿐이었다.[스트레스테스트, 티모시 가이트너 지음, 김규진/김지욱/홍영만 옮김, 인빅투스, 2015년, pp133~135]

공개시장조작위원회에서 집값하락에 대해 Fed의장이 농담을 할 정도로 그렇게 낙관적이었던 분위기가 가이트너가 뒤늦게 고백하는 “경고하기에 너무 늦은 시점”으로 바뀌는데 불과 1년이 걸렸을 뿐이다. 그 1년 사이에 미국 부동산 시장에 무슨 천지개벽이 일어난 것도 아닐 텐데 어떻게 그렇게 분위기가 돌변하였을까? 왜 경제위기는 이렇게 우리 앞에 갑자기 등장하는 것일까, 그 과정에서 중앙은행은 무엇을 할 수 있는 것일까에 대한 의문이 최근 우리나라의 조선/해운업의 위기 상황에서의 정부와 한국은행의 갈등 과정에서 생겨난 새로운 의문이다.

우선 롱포지션과 숏포지션의 시간상의 차이가 머릿속에 떠오른다. 롱포지션은 각종 채권이 가격을 오름으로써 이익을 보는 위치다. 가격은 일반적으로 서서히 오른다는 전제 하에 이 위치를 롱포지션이라고 한다는 설도 있다(whatever). 그리고 숏포지션, 즉 가격이 떨어짐으로써 이익을 보는 위치다. 가격하락은 서서히 과열되었던 거품이 터지며 투매로 이어지는 경향이 있기에 짧은 시간 안에 급락하는 경향이 있다. 인용문에서의 기간이 바로 이렇게 급격한 투매의 시기였고, 많은 참여자들은 시장의 신호에도 불구하고 버냉키처럼 농담으로 그 경고를 무시했다.

두 번째, 중앙은행의 정책수단의 한계다. 회의 시간에 농담을 한다고 해서 정책집행자들이 마냥 시장을 방관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Fed는 2004년 6월부터 금리를 0.25%씩 인상하면서 긴축정책에 돌입하였다. 문제는 이런 단기금리 인상이 장기금리 인상으로 이어지지 않았다는 점이고 이에 대한 여러 해석이 있지만, 중요한 것은 오늘날의 경제가 전통적인 Fed의 정책수단으로 통제하기에는 너무 커지고 복잡해졌다는 점이다. 이러한 정책수단의 한계를 깨달은 현 상황을 우리는 “새로운 정상” 심지어 “새로운 비정상”이라 이름붙여 정당화하게 되었다.

세 번째, 두 번째의 배경과 겹치는 것이라 할 수 있는 정책집행자들의 믿음 혹은 그들의 계급적 성향이었다. 버냉키 전의 그린스펀은 아인랜드에 열광했던 시장근본주의자였고 시장 불개입주의자였다(다만 거품 붕괴로 인한 채권자의 채권회수에 문제가 있을 시에는 예외였다). 경제학자 제럴드 앱스테인(Gerald Epstein)은 금리조정 등을 – 주로 단기금리 – 통해서 인플레이션 목표를 달성하기만 하면 경제가 자연스럽게 굴러갈 것이라 여기는 이러한 발상을 신자유주의 적이고 금융엘리트를 위한 발상이라고 비판하였다.

금융위기 도래 이후, Fed를 비롯한 각국의 중앙은행은 “양적완화”, “마이너스 금리” 등을 비롯한 여러 비정상적인 조치로 경제 시스템의 붕괴를 지연시켰다. 그런데 사실 이러한 정책집행자들의 – 행정부나 의회로부터 독립되어 중립을 지키고 있다고 여겨지는 고매한 금융 엘리트 – 손에 흙을 – 또는 피 – 묻히는 행위는 이미 한국이나 중국과 같은 개발도상국에서는 좀더 일상적으로 취해지던 조치와 유사할 수도 있다. 한국 정부가 “한국판 양적완화”라고 하지만 Fed의 조치가 “미국판 관치주의”라고 할 수도 있는 것이다.

결국 “한국판 양적완화”든 “미국판 관치주의”든 간에 경제의 순환은 금융시스템에서의 유동성을 통해 가속화되고 이것이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한에는 사회 대다수 구성원에 영향을 미치며 사회적 기능을 수행한다. 하지만 시장의 본질이든 오작동이든 간에 거품이 터지고 나면, 그 치유는 주로 – 여태 시장과 함께 사태를 마냥 낙관했던 – 중앙은행을 포함한 금융 시스템에 의해 이루어진다. 여태의 행위가 주로 자산가에게 이득이 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는 점에서 “이익의 사유화, 손실의 사회화”라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1

늘 그렇듯 중앙은행은 “중립성”과 “독립성”을 주장하며 시장의 완벽한 작동에 미세조정만을 가하는 금융엘리트 집단으로 남기를 꿈꾸지만, 시장은 늘 미세조정 이상을 요구하며 요동쳤고 결국 중립성과 독립성은 허울 좋은 명분으로만 남게 되었다. 오늘날의 중앙은행 재무제표는 국가재정의 부외금융으로 존재하고 있으며, 의회의 통제를 벗어나기 위한 또 하나의 주머니일 뿐이란 사실은2 현재 한국정부의 한국은행 흔들기에서도 여실히 느낄 수 있다. 경제 위기로 인해 우리는 다시 한 번 중앙은행의 존재이유를 생각해보게 된다.

어쩌면 그들은 1. 너무 순진하거나 2. 너무 무력하거나 3. 너무 고매한 것일지도?

금융거래세가 가지는 경제적/정치적 의미

11월 8일 EU 27개국 경제재무장관회의에서 금융거래세(FTT : Financial Transaction Tax) 도입과 관련한 논의가 이루어졌으나 독일과 프랑스를 주축으로 한 적극 추진 세력과 영국을 중심으로 한 비(非)유로존 간 상반된 이견이 좁혀지지 않아 최종 합의 도달에 실패함. EU 집행위원회는 금융거래세 도입 시 초단타매매 등 금융시장 불안과 투기 증폭 행위를 감소시킬 수 있으며, 유로존 재정위기에 책임이 있는 금융업계 및 투자자들에게 책임을 부과하는 방안이 되며, 시장에 큰 부담 없이 연간 570억 유로의 자금 조달이 가능하다고 설명함. 그러나 영국 재무장관은 금융거래세 도입 취지에는 찬성하나 유럽이 먼저 도입할 경우 금융투자자들이 미국 또는 홍콩 등으로 이전할 것이라며 반대 의견을 피력함.[EU, 금융거래세 도입 합의 불발, 보험연구원, 2011년 11월 10일]

이미 2008년 금융위기 이후 EU에서 논의된 금융거래세는 인용문에서도 설명하듯이 1) 금융위기를 초래한 금융권에 대한 징벌적 성격과 2) 경제에 큰 충격을 주지 않으면서 재정위기를 해소하려는 실용적 목적을 가지고 제안된 세금이다. 환율의 변동을 이용하여 자금의 급격한 유출입에서 발생하는 자금 시장의 문제를 줄이자고 제임스 토빈이 제안한 토빈세와는 달리, 주식∙채권∙외환 등의 금융상품 거래 일반에 부과하는 세금의 개념이다.

이제 금융거래의 세계화는 세계경제에 좋든 나쁘든 엄청난 영향을 미치고 있고, 이를 부정하는 정부는 찾기 힘들다. 금융거래 중 외환거래량을 예로 들어보자. 국제결제은행(BIS)은 3년마다 1일 외환시장의 거래량을 집계하는데, 2010년에는 규모가 4조 달러 정도 된다고 한다. 그럼 전 세계의 상품 수출입 거래량은 얼마나 될까? WTO에 따르면 2010년 기준으로 연간 약 30조 달러다. 8일간의 외환거래량이면 상품의 연간 거래량을 압도한다.

따라서 금융거래에 대한 적절한 통제는 세계경제의 안정성 차원에서 중요하다. 문제는 각국의 이해관계가 극명하게 갈라진다는 점인데, EU 내에서는 독일, 프랑스 진영과 영국의 입장이 첨예하게 다르다. 영국은 독일이나 프랑스보다 경제 규모는 작지만, 금융은 강하다. BIS에 따르면 세계 외환거래 중 36.7%가 영국에서 일어나 미국을 제치고 세계에서 가장 빈번하다. 독일과 프랑스에서 일어나는 외환 거래는 각각 2.1%, 3.0%에 불과하다.

일국 차원에서의 금융거래세 도입은 여러 사례가 있다. 브라질은 1993년에 은행 거래활동에 과세하는 ‘은행거래세’를 도입하여, 비교적 성공적인 모델로 거론되고 있다. 반면 스웨덴은 1984년 금융거래세를 도입한 이후 금융거래가 대거 국외로 빠져나가는 실패를 맛보아야 했다. 이는 각국의 경제성장 및 투자매력도 등에 따른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일국 차원의 과세는 결국 수많은 변수를 초래한다는 점이다.

결국 금융거래세의 성공여부는 개연성이 매우 높은 풍선효과를 극복하고 금융거래를 자국의 테두리 안에 묶어둘 수 있느냐 하는 문제인데, 결국 세금을 내고서라도 해당 국가에서 계속 거래를 할 수 있는 매력적인 요소(금융 인프라의 성숙도, 높은 경제성장으로 인한 자금수요 등)가 존재하는가 하는 등의 변수가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일국 차원의 과세는 경제지형의 변경에 따라 그 효과가 바라질 수 있다는 근본적인 한계를 가지고 있다.

결국 빛의 속도로 진행되는 금융거래를 통제하는 근본적인 대안은 전 세계적인 규모의 일률적인 과세다. 이 방법에 대해서 티모시 가이스너 美재무장관은 진실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는 전 세계 거의 대부분의 국가가 과세를 하더라도 케이맨 군도와 같은 단 하나의 조세피난처만 과세하지 않아도 그쪽으로 거래가 몰릴 것이라고 경고했다. 물론 그의 반대는 이익집단의 로비에 의한 것이긴 하지만 사태를 정확히 바라보고 있기는 하다.

개인적으로 금융거래세 과세의 성공여부는 향후 세계경제의 안정화에 있어 중요한 시금석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기업은 초국적으로 변해가고, 금융거래는 거대화되는 상황임에도 이를 통제할 행정력이 일국 단위에서 국한된다는 상황은 – 협력체를 구성한다 할지라도 – 정상적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FTA 등으로 가속화되는 자본의 세계화는 결국 전 세계 모든 국가가 공동의 이해관계 아래서 촘촘히 대응하지 않으면 풍선효과만 불러올 뿐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