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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me Like it Hot

토니 커티스와 마릴린 먼로가 주연을 맡은 로맨스 코미디 Some Like it Hot(1959년)은 여자로 분장한 남성 연주자들이 벌이는 해프닝을 다뤄 이러한 소재의 아류 코미디의 전범으로 남은 걸작이다. 시카고 갱들의 살인사건을 목격하는 바람에 여장을 하고 마이애미로 도망친 두 남성 연주자들이 우여곡절 끝에 갱들로부터 벗어나고, 이 와중에 섹스폰 주자 조(토니 커티스 분)는 슈가케인(마릴린 먼로 분)이라는 진정한 사랑을 찾게 된다는 것이 대충의 줄거리다.

한편 이 작품의 또 다른 등장인물인 백만장자 오스굿은 또 다른 여장 남자 제리(잭 레몬 분)에게 첫눈에 반해 청혼을 한다. 제리는 이를 거절하지 못하고 있다가 결론 부분에 청혼을 거절한다. 처음엔 오스굿의 어머니가 싫어할 것이라고 말하다 통하지 않자 ‘담배를 피운다’, ‘애를 못 낳는다’ 핑계를 대지만 오스굿이 굴하지 않자 자신이 남자라는 사실을 털어놓는다. 그러자 오스굿 왈 ‘no one is perfect’

영화의 매력은 이런 부조리한 상황이 연출되는 상황묘사다. 배우자감이 동성(同性)이라는 것이 단지 ‘작은 흠결’에 지나지 않는다고 여기는 백만장자의 호기로움에 당시 관객들은 웃음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말도 안 된다고 호들갑을 떨면서 말이다. 그 상황은 어떠한 절대적인 믿음을 깨뜨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남자와 남자는 결혼할 수 없다는 상식 말이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그 상식은 변화를 겪게 된다.

오늘날 미국에서는 여전히 논란이 되고 있긴 하지만 일부 지자체에서 동성결혼을 합법화시켰다. 영화의 무대가 되고 있는 마이애미 역시 동성애자들이 활발히 권익운동을 펼치고 있는 곳으로 알고 있다. 가정이긴 하지만 만약 오스굿이 정말 성별에 개의치 않고 제리가 그런 오스굿의 헌신에 마음이 움직였다면 ‘no one is perfect’ 가 틀린 말은 아닐 수도 있지 않을까? 만약 Some Like it Hot이 현대에 다시 리메이크된다면 제작진은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 맞게 결론부분을 각색하여야 할 고민에 빠지게 될 것이다.

무쏘 신화로 잘 알려진 쌍용자동차가 지금 심한 몸살 정도가 아닌 엄청난 독감을 앓고 있다. 경제위기에 떠밀려 중국자본에 인수되었다가 내팽겨지고 거의 폐업 수준의 구조조정을 통해 회생을 도모하다 노동자들의 거센 반발에 부닥쳐, 지금 작업장은 전쟁터로 변하고 말았다. 노동자들은 ‘해고는 살인이다’라는 자신들의 말을 스스로 증명이라도 하듯이 하나둘 스스로 목숨을 끊는 극단적인 상황으로 내몰리고 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해석들은 분분하다. ‘경쟁력 없는 차종을 생산하였으므로 문을 닫음이 옳다’, ‘중국자본이 기술이전 등 알맹이를 쏙쏙 빼먹고 도망갔다’, ‘노조 때문에 회사가 망하는 것이다’, ‘회사의 살인적인 구조조정이 원인이다’ 등등 하나의 상황을 둘러싸고 열개의 해석이 난무한다. 솔직히 저간의 사정에 관심을 두지 않았던 제3자의 입장에서는 이리 솔깃 저리 솔깃할 뿐이다.

내가 쌍용에 대해 안타까워하는 부분은 이것이다. 쌍용그룹이 거두지 못한 사업부문을 상하이자동차가 인수하였을 때에, 그리고 외환위기 때 수많은 기업들이 외국자본에 인수되거나 채권단에게 넘어갔을 때에, 또 최근 대우조선해양이나 대우건설 인수문제가 불거질 때에, 왜 우리는 오직 한 길만을 생각하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든다. 1차적으로 채권단은 담보능력을 지닌 자본의 인수를 바란다. 그것이 아니면 때로 그들 스스로가 주인, 즉 주주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주주만이 ‘기업의 진정한 주인’이라는 이 흔들리지 않는 통념에 대해 어쩌면 동성결혼의 불가가 1950년대식 편견에 불과할 수도 있다는 인식전환처럼 나름의 상상력을 발휘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사실 이런 전환적인 사고는 이미 유럽 등지에서 ‘주주 자본주의’가 아닌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라는 개념으로 – 즉 주주, 채권단, 고용인 모두 회사의 장래와 이해관계를 가진다는 – 통용되고 있다. 살벌한 이념의 동토(凍土)인 남한 땅에서는 ‘빨갱이의 선동’이 되지만 말이다.

쌍용자동차를 상하이자동차에 넘겨 허튼짓을 할 때, 외환은행을 론스타에 넘겨 허튼짓을 할 때, 대우건설을 능력 없는 금호그룹에 넘겨 허튼짓을 할 때, 대우조선해양이 주인을 못 찾고 표류할 때 정부는, 채권단은, 주주는 그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노동자들도 또 다른 의미의 주인임을 생각하지 않는다. 아무런 이해관계도 없는 자본가에게 LBO(leveraged buy out)로 기업을 인수하게끔 한다면 노동자들에게 LBO를 이용하게끔 하는 대안도 가능한 것이 아닐까?

물론 최근 금호그룹이 알려진 바로 약 2조원의 손실을 내며 대우건설을 게워내기로 한 상황에서 볼 수 있듯이 기업인수는 막대한 리스크를 안는 일이긴 하다. 채권단의 입장에서야 그러한 리스크를 감내할 수 있는 기업을 인수자로 삼을 수밖에 없는 한계가 있다. 하지만 노동자들이 여타 기업보다 그 리스크에 더 노출되어 있다는 뚜렷한 증거도 없다. 그러한 편견은 동성결혼을 불가하다는 것처럼 이 시스템 속에 통념으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일 뿐일 수도 있다.

노동조합이 아닌 더 발전된 합의체, 단순한 우리사주조합이 아닌 실질적인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고 그 소속원들에게 권리에 상응하는 의무를 부과할 수 있는 합의체를 만들어내고 사회가 그것을 용인한다면 불가능한 일도 아닐 것이다. 그것은 체제 전복적이지도 않다. 노동자는 스스로가 주주일 뿐인 것이다. 쌍용자동차의 노동자들과 전쟁을 벌이며 낭비하고 있는 이 막대한 사회적비용을 그러한 시스템의 수립에 투입한다면 못할 것도 없는 작업일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지금 이 순간에도 힘 있는 자들은 이와는 다른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