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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있을 중대한 판결

오늘 중대한 판결이 내려진다. 대법원은 오늘 오후 2시 노모씨 등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 153명이 낸 해고무효확인 소송 상고심 판결을 내릴 예정이다. 쌍용차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유동성 위기를 겪던 중 회생절차를 밟고, 2009년 2,405명의 해고를 단행했다. 노조의 거센 반발 속에 결국 최종 165명을 해고하는 것으로 마무리했지만 이중 153명은 부당해고라며 2010년 소송을 제기했고 오늘 그 소송의 최종 판결이 나오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관심사는 경영상 판단에 따른 정리해고의 허용 범위다. 근로기준법 제24조에 보면 “사용자가 경영상 이유에 의하여 근로자를 해고하려면 긴박한 경영상의 필요가 있어야 한다.”는 조항이 있다. 이 “긴박한 경영상의 필요”라는 주관적인 관점이 강하게 배어있는 애매한 표현으로 인해 노동계와 재계는 수많은 반목을 거듭하고 있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가장 첨예한 갈등이 수많은 죽음을 초래한 쌍용차의 정리해고 사건인 것이다.

하급심 결과는 엇갈렸는데 정리해고의 근거였던 2008년 안진회계법인의 감사보고서에 대해 각각의 재판부가 달리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1심은 “유동성 부족 사태를 극복할 방법이 없어 … 해고를 단행”했다며 사측의 손을 들어주었다. 2심은 “신차종 판매에 따른 미래 현금 흐름이 전부 누락되고 … 해고를 회피하기 위한 모든 노력을 다했다고 보기 어렵다”며 노동자의 손을 들어주었다. 엇갈린 판결은 “경영상의 필요”의 해석의 어려움을 잘 말해준다.

공지영 씨의 책 ‘의자놀이’에 의하면 안진회계법인의 보고서는 쌍용차의 건물, 구축물, 기계장치 등 유형 자산 평가에 문제가 있다며 자산 평가액을 전년도보다 5,177억 감액하기도 했다. 금융노조법률원 김태욱 변호사는 이러한 손상차손 과다 계상으로 말미암아 쌍용차의 부채비율이 187%에서 561%로 급증하였다고 주장했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전문가의 무미건조한 의견이 회사와 노동자의 운명을 좌우하는 상황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례인 것이다.

경제적 의미가 있는 소송에 대한 판결은 경제학 이론이나 금융, 회계 등 실무에 있어서의 법제도의 발전과 함께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발전과 노선의 수정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일례로 건물의 일조권이 해당 건물의 시장가치에 영향을 미친다는 판결이 있음으로 인해 우리는 그 권리를 지킬 수 있게 된 것이다. 오늘 있을 판결은 어쩌면 일조권보다 훨씬 중요한 노동권에 대한 시금석이 될 판결이다. 이제 “긴박한”에 대한 명확한 정의를 내릴 때가 됐다.

공지영의 <의자놀이>를 읽고

현대사의 비극은, 우리가 그 비극을 정면으로 바라볼 때 그 비극이 상상이상으로 우리 곁에 가까이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에서 느끼는 당혹감 때문에 더욱 그 슬픔이 증폭되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예를 들어 이 글을 읽는 당신이 서울시민이라면 광화문에만 나가도 허름한 천막 속에서 어떤 역사가 진행 중인 사실을 알 것이다. OECD가입국에 세계 9위 규모의 무역대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야만의 역사가 말이다.

쌍용자동차의 비극은 대한민국 자본주의 역사에서도 전형적인, 한 기업의 굴곡을 담고 있다고 할 것이다. 재벌의 문어발식 경영과 이에 따른 부실, 부실화된 기업의 생존을 위한 신자유주의적 조치, 이에 따른 이해당사자들(특히 노동자)의 엄청난 고통 등등. 한 가지 보다 도드라진 특징이 있다면 그 과정에서 노동자들과 그 가족들이 무려 22명이나 목숨을 “내려놓았다”는 사실이다. 마치 늦가을의 낙엽처럼 힘없이.

인기 소설가 공지영 씨가 쓴 ‘의자놀이’는 이 전형적이면서도 한편으로 기이한 현대사의 비극을 조명한 “르포르타주”다. 책은 쌍용차 사태에 대해 잘 알지 못했던 작가가 하나둘씩 사실을 알아가는 과정과, 그 과정에서의 작가의 느낌을 적고 있다. 쌍용차의 주인이 쌍용인 것으로 알고 있었던 무지한 작가는 발품과 주변의 도움을 통해 회사주인이 쌍용이 아닌 사실 이상의 엄청난 비밀과 비극이 숨어 있음을 깨닫고 분노한다.

이 책이 특히 많이 할애하고 있는 부분은 회사의 정리해고에 저항하여 조직된 77일 간의 파업투쟁 중, 그리고 그 이후 마치 ‘허물어지는 모래성’처럼 이어졌던 연이은 노동자의 죽음의 현황과 원인에 대한 묘사다. 노동환경연구소가 노조원 257명을 대상으로 한 연구 결과 “정상인 사람이 7%밖에 안 된다”(147쪽)는 기가 막힌 사실은 그 어느 사실보다 충격적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쯤 되면 정신병동을 세울 일이다.

하지만 그간 진행되어온 모습은 야만적으로 진압당한 피해자인 노동자들이 “불법파업 세력”이자 가해자로 자리매김 되었고 정신치료는커녕 체포와 구속으로 이어진 상황이었다. 지역사회는 그들을 “빨갱이”라 부르면서 외면했다. 책에서 재인용한 PD수첩에서의 한 노동자의 증언이 이 상황에서의 노동자의 박탈감을 잘 표현하고 있다. “사회가 우리보고 죽으라고 하는 것 같았어요. 이 사회에서 나가달라고.”(149쪽)

22명이 목숨을 내려놓는 끔찍한 상황이 우리의 시선을 쌍용차에 더 머물게 하는 현실은 어쩔 수 없는 인지상정이고 그러한 이유로 공지영 씨 역시 서둘러 책을 내게 되었지만, 사실 비슷한 패턴의 “합리적인” 기업의 구조조정이나 노동자의 투쟁은 지금도 곳곳에서 진행 중이다. 쌍용차처럼 외국자본의 손에 넘어간 르노삼성은 매각설이 나오고 있고, 현대자동차에서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정규직 고용을 건 싸움이 진행 중이다.

‘의자놀이’에서의 아쉬운 점은 이렇게 반복되는 경제상황에 대한 보다 근본적인 대안을 제시하지 못 하고 있다는 점이다. 200여 페이지의 짧은 르포르타주1란 점도 제약요인이거니와 경제현상에 대한 지식이 많지 않은 작가 역량의 한계도 엿보인다. 쌍용차 매각과정에서의 의심스러운 사실관계는 노조 측 전문가의 의견을 많이 참조하여 기술하였지만 이러한 개별사실에 대한 거시적인 통찰을 보여주고 있지 못하다.

컨소시엄이란 규모가 큰 사업이나 투자 따위를 할 때, 여러 업체 및 금융 기관이 연합하여 참여하는 것을 말하는데, 상하이차의 매각에 왜 컨소시엄이 필요한지 모르겠거니와 이때 난데없이 맥쿼리 증권의 이름이 보인다. 맥쿼리? 들어본 이름이지 않나? 최근 제멋대로 통행료를 올린 우면산 터널에도 맥쿼리란 이름이 보이고, 지하철 9호선에도 보이고, 인천공항을 파는 것이 소원인 이명박 대통령만큼 간절하게 인천공항을 사고 싶어 하는 명단에도 이 이름이 보인다. 이명박 대통령의 친형인 이상득 전 의원의 큰 아들 이지형이 2007년 9월까지 맥쿼리 IMM의 자산운용사 대표로 있음을 참고로 알려드린다.(84쪽)

M&A는 자산실사, 증권발행 등 많은 제반절차를 수반하므로 당연히 컨소시엄이 필요하거니와, 맥쿼리 증권은 “우면산 터널”, “이명박 대통령”, 그리고 “그 맥쿼리” 자산운용사2와 연결시키기에는 무리가 있다. 이런 음모론적 시각은 자본주의 일반의 역학관계를 나꼼수 식 정치공학 놀음에 머물게 하는 시도일 뿐이다. 이런 시각은 작가의 소설 ‘도가니’ 식으로 묘사하자면 이럴 것이라는 다음의 묘사에서 희극으로 변신한다.

‘도가니’의 장경사 식으로 이야기하면 “아니, 아직까지 노무현 때 경찰 이미지 쇄신한다 뭐다 해서 게으른 게 이골이 난데다가, 요즘 노무현 자살하고 나서 나름 그 사람 흠모하던 말단들이 아무리 말해도 잘 안 움직인다고. 그러니 당신들이 요청해야지.(106쪽)

쌍용차 노동자들에게 해고라는 직격탄을 날린 법적근거를 마련해준 정부가 김대중 정부였고, 쌍용차가 의심스러운 정황으로 매각된 것이 노무현 정부 시절이었는데, 이명박 정부 시절 노동자의 탄압에 “그 사람을 흠모하던 말단들이 잘 안 움직인다”는 설정은 그야말로 소설적인 상황일 뿐이다. 정리해고 사유가 이명박 정부 이전에는 엄격하게 제한되었었다는 사실관계 없는 서술(160쪽)은 사태의 본질에 대한 위험한 편견이다.

이 책은 쌍용차 해고노동자들에게 있어 “강력한 무기”다. 사회가 시선조차 돌리지 않던, 기껏 돌린 이도 빨갱이라 매도하던 노동자들이 실은 각종 정신질환에 시달리고 있는 약자란 사실을 유명 작가의 시선으로 풀어 주의를 환기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동시에 이 땅의 노동탄압의 원인과 대안에 대해 좁은 시선을 제시했다는 한계도 지니고 있다. 개인적으로 최근 하종강 씨와의 갈등도 작가의 이런 한계와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런 기획과 더불어, 현장을 지키고 있는 다른 수많은 무명작가와 목격자들의 존재가 소중하다.

Some Like it Hot

토니 커티스와 마릴린 먼로가 주연을 맡은 로맨스 코미디 Some Like it Hot(1959년)은 여자로 분장한 남성 연주자들이 벌이는 해프닝을 다뤄 이러한 소재의 아류 코미디의 전범으로 남은 걸작이다. 시카고 갱들의 살인사건을 목격하는 바람에 여장을 하고 마이애미로 도망친 두 남성 연주자들이 우여곡절 끝에 갱들로부터 벗어나고, 이 와중에 섹스폰 주자 조(토니 커티스 분)는 슈가케인(마릴린 먼로 분)이라는 진정한 사랑을 찾게 된다는 것이 대충의 줄거리다.

한편 이 작품의 또 다른 등장인물인 백만장자 오스굿은 또 다른 여장 남자 제리(잭 레몬 분)에게 첫눈에 반해 청혼을 한다. 제리는 이를 거절하지 못하고 있다가 결론 부분에 청혼을 거절한다. 처음엔 오스굿의 어머니가 싫어할 것이라고 말하다 통하지 않자 ‘담배를 피운다’, ‘애를 못 낳는다’ 핑계를 대지만 오스굿이 굴하지 않자 자신이 남자라는 사실을 털어놓는다. 그러자 오스굿 왈 ‘no one is perfect’

영화의 매력은 이런 부조리한 상황이 연출되는 상황묘사다. 배우자감이 동성(同性)이라는 것이 단지 ‘작은 흠결’에 지나지 않는다고 여기는 백만장자의 호기로움에 당시 관객들은 웃음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말도 안 된다고 호들갑을 떨면서 말이다. 그 상황은 어떠한 절대적인 믿음을 깨뜨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남자와 남자는 결혼할 수 없다는 상식 말이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그 상식은 변화를 겪게 된다.

오늘날 미국에서는 여전히 논란이 되고 있긴 하지만 일부 지자체에서 동성결혼을 합법화시켰다. 영화의 무대가 되고 있는 마이애미 역시 동성애자들이 활발히 권익운동을 펼치고 있는 곳으로 알고 있다. 가정이긴 하지만 만약 오스굿이 정말 성별에 개의치 않고 제리가 그런 오스굿의 헌신에 마음이 움직였다면 ‘no one is perfect’ 가 틀린 말은 아닐 수도 있지 않을까? 만약 Some Like it Hot이 현대에 다시 리메이크된다면 제작진은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 맞게 결론부분을 각색하여야 할 고민에 빠지게 될 것이다.

무쏘 신화로 잘 알려진 쌍용자동차가 지금 심한 몸살 정도가 아닌 엄청난 독감을 앓고 있다. 경제위기에 떠밀려 중국자본에 인수되었다가 내팽겨지고 거의 폐업 수준의 구조조정을 통해 회생을 도모하다 노동자들의 거센 반발에 부닥쳐, 지금 작업장은 전쟁터로 변하고 말았다. 노동자들은 ‘해고는 살인이다’라는 자신들의 말을 스스로 증명이라도 하듯이 하나둘 스스로 목숨을 끊는 극단적인 상황으로 내몰리고 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해석들은 분분하다. ‘경쟁력 없는 차종을 생산하였으므로 문을 닫음이 옳다’, ‘중국자본이 기술이전 등 알맹이를 쏙쏙 빼먹고 도망갔다’, ‘노조 때문에 회사가 망하는 것이다’, ‘회사의 살인적인 구조조정이 원인이다’ 등등 하나의 상황을 둘러싸고 열개의 해석이 난무한다. 솔직히 저간의 사정에 관심을 두지 않았던 제3자의 입장에서는 이리 솔깃 저리 솔깃할 뿐이다.

내가 쌍용에 대해 안타까워하는 부분은 이것이다. 쌍용그룹이 거두지 못한 사업부문을 상하이자동차가 인수하였을 때에, 그리고 외환위기 때 수많은 기업들이 외국자본에 인수되거나 채권단에게 넘어갔을 때에, 또 최근 대우조선해양이나 대우건설 인수문제가 불거질 때에, 왜 우리는 오직 한 길만을 생각하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든다. 1차적으로 채권단은 담보능력을 지닌 자본의 인수를 바란다. 그것이 아니면 때로 그들 스스로가 주인, 즉 주주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주주만이 ‘기업의 진정한 주인’이라는 이 흔들리지 않는 통념에 대해 어쩌면 동성결혼의 불가가 1950년대식 편견에 불과할 수도 있다는 인식전환처럼 나름의 상상력을 발휘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사실 이런 전환적인 사고는 이미 유럽 등지에서 ‘주주 자본주의’가 아닌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라는 개념으로 – 즉 주주, 채권단, 고용인 모두 회사의 장래와 이해관계를 가진다는 – 통용되고 있다. 살벌한 이념의 동토(凍土)인 남한 땅에서는 ‘빨갱이의 선동’이 되지만 말이다.

쌍용자동차를 상하이자동차에 넘겨 허튼짓을 할 때, 외환은행을 론스타에 넘겨 허튼짓을 할 때, 대우건설을 능력 없는 금호그룹에 넘겨 허튼짓을 할 때, 대우조선해양이 주인을 못 찾고 표류할 때 정부는, 채권단은, 주주는 그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노동자들도 또 다른 의미의 주인임을 생각하지 않는다. 아무런 이해관계도 없는 자본가에게 LBO(leveraged buy out)로 기업을 인수하게끔 한다면 노동자들에게 LBO를 이용하게끔 하는 대안도 가능한 것이 아닐까?

물론 최근 금호그룹이 알려진 바로 약 2조원의 손실을 내며 대우건설을 게워내기로 한 상황에서 볼 수 있듯이 기업인수는 막대한 리스크를 안는 일이긴 하다. 채권단의 입장에서야 그러한 리스크를 감내할 수 있는 기업을 인수자로 삼을 수밖에 없는 한계가 있다. 하지만 노동자들이 여타 기업보다 그 리스크에 더 노출되어 있다는 뚜렷한 증거도 없다. 그러한 편견은 동성결혼을 불가하다는 것처럼 이 시스템 속에 통념으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일 뿐일 수도 있다.

노동조합이 아닌 더 발전된 합의체, 단순한 우리사주조합이 아닌 실질적인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고 그 소속원들에게 권리에 상응하는 의무를 부과할 수 있는 합의체를 만들어내고 사회가 그것을 용인한다면 불가능한 일도 아닐 것이다. 그것은 체제 전복적이지도 않다. 노동자는 스스로가 주주일 뿐인 것이다. 쌍용자동차의 노동자들과 전쟁을 벌이며 낭비하고 있는 이 막대한 사회적비용을 그러한 시스템의 수립에 투입한다면 못할 것도 없는 작업일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지금 이 순간에도 힘 있는 자들은 이와는 다른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