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g Archives: 이재용

“경제도 중요하지만, 정의를 세우는 게 더 중요”가 아니고요

특검이 이재용 씨의 구속영장을 청구하기로 한 사실에 대한 브리핑의 캡처 이미지를 트위터에서 봤다. 자막에는 “특검 ‘경제도 중요하지만, 정의를 세우는 게 더 중요’”라고 쓰여 있었다. 개인적으로도 처음에는 무딘 칼날이 되지 않을까 염려했던 특검의 결기를 느낄 수 있는 브리핑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조금 아쉬움도 있는 발언이다. 오히려 “경제를 세우기 위해 정의를 세워야 한다”는 식의 브리핑을 했더라면 어땠을까? 어느 발언이 더 합당한가에 대한 물음은 정의가 경제를 희생하고서라도 이 사회가 지켜야 할 상보(相補)적 성격의 개념인지, 아니면 정의(正義)와 경제가 함께 가는 것이라는 – 또는 부정적 효과를 가지는 – 상관(相關)적 성격의 개념인지에 대한 고민이 우선해야 할 것이다.

우선 정의가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해봐야 할 것 같다. 몇 해 전 우리나라에는 인문학 서적으로는 보기 드물게 엄청난 판매량을 기록하며 그 저자가 내한공연(!)을 열만큼 신드롬을 연출했던 책이 있다. 바로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이다. 이 책은 명불허전 우리가 정의에 관해 가지고 있는 선입견을 많이 깨부수면서도 동시에 대중의 통념을 위로해주는 내용을 담고 있다. 결국 정의는 공동체의 정서를 지켜내는 것이다. 국어사전에서 정의하는 “사회나 공동체를 위한 옳고 바른 도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공동체가 계급, 성별, 인종별 분화를 거듭하게 되면 정의의 정의(定義)가 달라지는 것이 문제다. 특히 분단 상황에서 “국가-재벌 동맹자본주의”1 체제를 유지한 남한에서는 특히 그렇다.


정의를 제멋대로 정의한 유신 시대의 포스터 (c) 민족문제연구소

이재용 씨의 혐의는 무엇인가? 뇌물공여를 통해 소위 “삼성그룹” 내의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 안에 대한 주주의 의사결정을 왜곡시키려 했다는 것이다. 이 사태의 진행상황은 이 블로그에서도 몇 번 글로 적은 바 있는데, 과연 합병이 옳은 결정이었는지 아닌지는 우선 논외로 하겠다.2 문제는 문명이 발달하면서 기능적 분화를 유지해야 할 현대사회에서 이재용 씨가 그 기능적 분화를 정치적 압력으로 무마시키려 했다는 것이다. 즉,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는 정부가 아닌 보통사람의 돈으로 운용되는 투자도구이니 만큼 그들에게 있어 “정의”는 보통사람의 경제적 이익에 복무해야 하는 독립적인 기능을 가지고 있는데, 오히려 엉뚱한 “국익”을 내세운 사적이익 추구에 복무한 것으로 보이는 혐의다.

분화는 근대사회를 기술하고 설명하는 핵심적인 개념들 가운데 하나이다. 근대사회는 기능적으로 분화한 세계이다. 전체 사회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예술, 교육 등의 다양한 영역으로 분화한다. [중략] 이렇게 분화한 각 사회적 단위들에는 저마다의 고유한 기능이 주어진다. [중략] 그리고 다양한 영역이나 조직은 갈등하거나 투쟁할 수 있다. [중략] 아니 갈등하거나 투쟁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굳이 다양한 국가기관과 그 기관들에 속한 수많은 국가관료가 존재할 필요가 없다.[국가이성비판, 김덕영 지음, 다시봄, 2016년, pp121~122]

정의의 문제로 돌아가자. 근대사회의 한 기능인 기금운용본부에게 있어 정의는 무엇인가? 연금 납입자의 경제적 이익이다. 운용본부가 그 이익을 위해 결정을 했다면 본부가 합병을 찬성했든 반대했든 그 결정을 존중해줄 합리적 이유가 있다. 그런데 만약 외압에 의해 합병을 찬성했다면 정의가 무너졌다고 여길 합리적 이유가 있다. 이때 실현된 정의는 “국가-재벌 동맹자본주의” 상층부를 위한 정의다. 한편, 그렇다면 이 정의가 최소한 국가 단위의 공동체의 경제적 이익에 부합하는가 하는 문제도 고민할 필요가 있다. 재벌 체제에 내재화된 경제신문들은 하나같이 특검 때문에 나라 망한다고 곡소리가 났다. 하지만 삼성전자의 주가로 관찰할 수 있는 시장은 별로 반응이 없다. 재밌는 일이다.

기금운용본부의 기능적 분화 무력화 시도가 경제에 장단기로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서는 논외로 하겠다.3 하지만 원론적인 부분에서 살펴볼 때 이재용 씨의 혐의가 사실이라면 그는 시장의 본원적 기능, 즉 균형가격의 탐색을 방해했다고 봄이 타당하다. 그가 기금운용본부의 의사결정에 개입하지 않았다면 본부는 시장의 합병할 양사의 합병비율이 균형가격에 부합하는지 독립적으로 판단했을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시장주의자들이 경제발전의 대전제로 여기고 있는 이상향임은 분명하지 않은가? 즉, 기능적 분화를 거친 독립적 기관의 각각의 정의가 서야 원론적 경제가 바로 서는 것이다. 이재용 씨는 시장의 균형가격 탐색을 방해한 자본가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자본가는 적어도 시장주의자가 아니다.

당신이 잠든 사이에도 삼성은 조용히 움직이고 있다

전 국민의 눈길이 최순실 씨를 비롯한 국정농단세력의 추한 행태에 쏠려 있는 와중에도 – 이하 박근혜 게이트 -, 그들의 국정농단에 한축을 담당하고 있는 삼성은 – 보다 정확하게는 이재용 씨는 – 꿋꿋이 자신이 가야할 길을 가고 있다. 삼성전자가 지주회사 체제 전환을 포함한 지배구조 재편 작업에 본격 돌입한 것이다. 그동안 삼성은 지주회사 체제로의 전환에 대해 줄곧 부정해 왔는데 이번에 이제 그 전환을 공식화한 것이다.

그런데 왜 하필 지금일까? 정국의 혼란을 틈타서 조용히 발표하려는 것일까? 중론에 의하면 바로 어영부영 박근혜 게이트 수사를 하고 있는 검찰의 턱 밑에 특검이 와 있는 것처럼 지주회사 체제를 통해 자신의 지분을 강화하려는 이재용 씨의 턱 밑에 이러한 꼼수를 막으려는 각종 법 개정안이 제출되어 있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는 박용진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상법 개정안, 같은 당의 제윤경 의원의 공정거래법 개정안 등이 있다.

최근 대기업들이 회사의 분할 또는 분할합병 등을 통하여 지주회사와 자회사로 분리하면서 분할하기 전에 자기주식의 비율을 적극적으로 확대한 후 분할·분할합병의 방식으로 자회사를 설립하고, 지주회사는 자기주식을 그대로 보유하여 그 자기주식에 대하여 자회사로부터 주식을 배정받아 현행법에 따른 모회사와 자회사, ‘독점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에 따른 지주회사와 자회사의 지분 요건을 확보하고 있음.[상법 일부개정법률안, 2016.7.12.]

자기주식은 흔히 “자사주(自社株)”라고 부르기도 하는 ‘기업에서 발행한 주식을 회삿돈으로 다시 매입하는 주식’을 말한다. 기업이 자사주를 매입하는 이유는 흔히 주가에 호재로 작용한다. 예를 들어 회사가 자사주를 매입 후 소각하면 시장에 유통되는 주식이 줄어들면서 기존 주주가 보유한 주식 가치가 높아질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의결권이 제한되는 자사주의 특성에 따라 적대적 M&A 세력의 의결권을 약화시키는 목적에 쓸 수도 있다.

그런데 한국의 재벌들은 이 자사주를 소위 “오너” 일가의 지배력을 강화하는데 사용할 수 있는 창조경제를 구현하였다. 지난 2011년 정부는 “자사주 매입과 처분의 장점을 활성화”한다는 명목으로 자사주 매입·처분 요건을 완화했다. 그런데 이런 규제완화가 소위 인적분할과1 결합하면 지주회사가 의결권이 없는 자사주를 활용하여 사업회사의 신주를 배정받아 의결권을 갖게 되고, 이를 통해 “오너”의 지배력을 강화하는 마술을 부리게 된다.

한진그룹은 지난 2013년 대한항공을 지주회사(한진칼)와 사업회사(대한항공)로 나눴다. 인적분할 방식의 회사 나누기로 한진칼은 대한항공의 자사주 주식 6.75%를 갖게 됐다. 이후 한진칼에 승계된 대한항공 자사주 6.75%는, 그 비율만큼 사업회사로 된 대한항공의 신주 배정 발행을 이끌었다. 이 과정에서 한진그룹 총수 일가는 기존에 보유한 대한항공 대주주지분율 9.87%에 인적분할로 생긴 대한항공 신주 지분(6.75%)를 합쳐 총 지분을 16.62%까지 늘렸다.[재벌 지배력 강화 ‘자사주 꼼수’ 막는法…박용진 의원 발의]

삼성전자는 자사주 비중이 12.18%다. 삼성전자가 인적분할하면 지주회사가 사업회사의 자사주 12.18%에 대해 의결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야당 의원들이 발의한 법 개정안들에 따르면 삼성은 ‘회사를 분할할 때 분할회사 자사주에 분할 신주 배정을 금지’(상법 개정안)당하거나 ‘대기업이 지주회사 전환을 위해 회사를 분할하려면 반드시 자사주를 미리 소각‘(공정거래법 개정안)해야 한다. 한진이 하던 절도를 삼성은 못하게 된다.

‘부자 삼성 가난한 한국’의 저자 미쓰하시 다카아키는 그의 저서에서 “한국의 대기업은 국내 시장의 과점화, 대외 직접투자 증가, 국내 투자 축소, 인건비 인하, 원화 약세, 법인세 인하2 등 한국 국민에게 부담을 지우는 갖가지 시책과 전략 속에서 성장률을 높이고 있다”고 단언했다. 그의 발언은 오늘날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한 삼성전자는 정부와 국민의 희생 속에서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는 평범한 진리를 재확인하고 있을 따름이다.

그런데 지난번 삼성물산과 제일모직과의 합병에서 불합리한 합병비율로 합병하여 이재용 등 “오너” 일가의 지배력을 강화시켰던 삼성이, 이제는 다시 그 지배력을 활용하여 그룹의 핵심인 삼성전자의 자사주를 동원하고 이를 통해 지배력을 한층 강화하는 2차 퀀텀점프를 시도하고 있다. 노동자의 희생과, 원화 약세를 위한 국가적 희생과, 차별적인 대우를 통한 자국 소비자의 “호갱화”로 거대기업이 된 삼성전자가 그렇게 이재용의 품에 안기고 있다.

그런데 이것도 “국익”을 위해 도와줘야 하나?

한국경제신문이 말하는 “경영권 방어 강화”는 누구를 위한 강화인가?

엘리엇매니지먼트 등 해외 헤지펀드를 필두로 한 적대적 M&A 세력이 삼성뿐만 아니라 국내 주요 기업을 공격 목표로 삼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면서 경제계는 “경영권 방어책을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국내 기업이 경영권을 지키기 위해 사용할 수 있는 방어 수단은 자사주 취득과 신주의 제3자 배정, 초다수결의제, 황금낙하산 정도다. 하지만 자사주 취득 외에 다른 수단은 사실상 무력화돼 있다.[“황금주·포이즌필 도입하고 영국처럼 지분공시 기준도 강화해야”]

과연 한국경제신문답다. 한국 재벌의 소유구조를 반성해야 할 시점에 엘리엇매니지먼트를 “적대적 M&A 세력”으로1,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시도를 “국내 기업이 경영권을 지키기 위한” 시도로 프레이밍하면서 “경영권 방어책 강화”를 요구하고 있다. 문어발식 순환출자를 통해 양적 팽창에만 신경 쓰느라 “오너 일가”라는 이름에 무색하게 극소수의 지분만을 가지고 있으면서 전횡을 휘두르는 한국 재벌 일가의 행태에 대한 반성은 어디에도 엿보이지 않는다.2

삼성그룹은 제일모직과 삼성물산의 합병 이유로 시너지 효과를 들었다. [중략] 그러나 삼성이 합병을 추진하려는 진짜 이유는 다른데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재용 부회장으로의 승계작업이 더 급하기 때문이다. 이 부회장은 그룹의 지주회사격인 제일모직 지분 23.2%를 근거로 계열사를 지배하고 있다. 그러나 정작 그룹의 핵심인 삼성전자 지분은 0.57%밖에 없다.[헤지펀드가 물고늘어진 삼성의 아킬레스건]

親삼성 언론 중앙일보 정경민 경제부장의 글이다. 임금님이 홀딱 벗고 있음에도 아무도 그렇다고 이야기 못하는 동화적 상황이 이번 사태에서 재연되고 있는 와중에, 그나마 정경민 씨가 그의 블로그에 사실을 알리고 있다. 삼성물산이 어떤 미사여구를 동원하더라도 이번 합병계획이 이재용 씨에 대한 “후계 승계 작업”임을 부인할 사람이 누가 있을까? 그리고 여기에서 문제가 된 것은 누군가가 이 승계 작업이 적정한 가격에 의한 작업이 아니라 주장한 지점이다.

한국경제가 주장하는 “경영권”은 누구를 위한 경영권이어야 하는 것일까? “주주 자본주의”적 사고로는 ‘주주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엘리엇의 주장이 그것이다. “이해관계자 자본주의”적 사고로는 노동자 등의 이익도 중요하다고 주장하고 사회민주주의 체제 하에서 목소리를 얻고 있다. 그럼 지금 삼성물산의 경영권은 어떤 자본주의적 사고를 따르는 것일까? 사견으로 삼성물산은 “오너 일가”의 봉건적 후계 승계 작업을 위한 사고로 매진하고 있다.

삼성물산의 대주주는 2015년 6월 1일 현재 삼성SDI(7.9%), 삼성화재(4.79%)다. “오너” 이건희 씨의 지분은 1.41%다. 삼성SDI의 대주주는 2015년 6월 2일 현재 삼성전자(19.58%)고 삼성화재의 대주주는 2015년 3월 5일 현재 삼성생명(14.98%)다. “후계자”로 알려진 이재용 씨의 지분은 잘 안 보인다. 인용문에서 언급된 삼성전자 0.57%와 삼성생명 0.06%에서 잠깐 등장한다. 그렇다면 이 싸움에 “삼성물산 對 적대적 M&A 세력”이란 프레이밍이 맞는 것인가?

삼성물산이 보유한 계열사 지분가치는 상장사만 따져도 13조원정도다. 극단적으로 말해 삼성물산을 사들인 뒤 계열사 지분만 팔아도 5조원 남는 장사란 계산이 나온다. 삼성물산은 덤으로 남는다. 엘리엇이 삼성물산의 정관을 고쳐 보유 주식을 현물 배당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구한 것도 삼성전자 지분을 노린 포석이다. 엘리엇의 주장에 외국인투자자와 국내 소액투자자 일부가 동조하고 나선 건 이 때문이다.[헤지펀드가 물고늘어진 삼성의 아킬레스건]

형법에는 “배임의 죄”라는 죄목이 있다. “타인의 사무를 처리하는 자가 그 임무에 위배하는 행위로써 재산상의 이익을 취득하거나 제삼자로 하여금 이를 취득하게 하여 본인에게 손해를 가한 때(제 355조)” 적용되는 죄다. 삼성물산에서 이재용 씨는 어떤 위치인가? 심하게 말해 그는 제삼자다. 그 삼자가 합병으로 엄청난 이득을 누리게 되는 것이 눈에 훤히 보이는 상황인데 경영진은 합병으로 매진하고 있다면 그 경영권은 과연 배임으로부터 자유로운가?

자본주의 시스템이면 봉건적 세습은 막아야 하지 않겠는가?

지난주 발표된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은 복잡한 계열사들을 정비하고 핵심 계열사인 삼성전자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고자 총수 일가가 세운 계획의 핵심이다. 그러나 제시된 합병 가액은 오너 일가에게만 득이 된다. 이 전주식거래방식의 합병 계획에 따르면 사실상의 지주회사인 제일모직이 삼성물산을 1:0.35의 비율로 흡수합병하게 된다. 그러나 이 합병안에서 삼성물산은 과소평가된 반면 제일모직의 주가는 지금과 같이 높은 수준으로 과대평가됐다. [중략] 합병이 발표되기 앞서 지난해 삼성물산의 주가는 25% 가까이 하락해 주가순자산비율(PBR)이 0.62배를 기록했다. 지난 10년 평균(1.17배)을 크게 밑도는 수준이다.[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주주 반대로 무산될까]

월스트리트저널의 최근 기사는 최근 발표된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 계획이 “오너 일가(원문은 ”the Lee family“)에게만 득이 된다”는 사실을 단정적으로 말하고 있다. 삼성 “그룹”의 지주회사의 역할을 하고 있던 제일모직이 일시적으로 저평가된 삼성물산과 합병함으로써 그룹의 “핵심 계열사(원문은 “crown jewel”)“인 삼성전자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는 시나리오는 겉으로 보기에는 삼성 그룹 내의 건설 업종의 시너지 효과를 노리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보다 ”오너 일가“, 보다 직설적으로 3세 세습의 핵인 이재용 개인을 위해서일 것이다.

시장이 균형가격을 찾아줄 것이라는 신고전파 경제학의 이론이 요 며칠 동안 이 블로그의 주요 화두인데 효율적 시장가설의 상황에서의 주식시장이야말로 이 균형가격을 탐색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라 간주되고 있었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하지만 실제로는 주식시장이 그 기능을 하는 것인가에 대해서 케인스 주의나 행동 경제학 등에서 많은 의문을 제기해 왔다.1 WSJ역시 이번 합병 시나리오에서 삼성물산 주주들이 “적정 가격”보다 낮은 이익을 얻게 될 것이라고 확언하고 있다. 그렇다면 삼성이 제시한 물산의 가격이 균형가격에서 일탈해 있는 셈이다.

바로 그 차익거래 가능성의 틈새시장을 엘리엇 매니지먼트가 파고들었다. 엘리엇은 전에 아르헨티나의 국채 헤어컷 해프닝에서 아르헨티나 정부에게 엿 먹인 전력이 있는 투자자다. 한 국가의 고유권리(?)일 수도 있는 채권 헤어컷을 훼방 놓을 만큼의 실력을 갖춘 투자자니 만큼 ‘이재용 vs 엘리엇’의 승부는 만만치 않아 보인다. 삼성물산 주주는 현재 엘리엇 7.12%를 비롯하여 외국인이 32.11%를 점유하고 있다. 주총에서 참석 주주 의결권의 3분의 2이상, 발행 주식 총수의 3분의 1이상 동의여서 어느 누구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팽팽한 상황이다.

이 상황에서 주목할 만한 주주가 9.98%의 주식을 소유한 2대 주주 국민연금이다. WSJ의 해당 기사도 지적하듯 한국 기업의 주주들은 주주권 행사에 소극적이었고 국민연금도 예외가 아니었다. 일종의 “사회적 배당”이랄 수 있는 국민연금은 여태 정부의 경기부양을 위한 또 하나의 예산 행세를 하며 거수기 역할에 만족해왔기 때문이다. 최근 몇 년간 국민연금의 행태를 볼 때 보다 적극적 자세를 보일 수도 있을 것이지만 – 사회적 배당의 주주의 한 사람으로써 연금이 보다 적극적인 행동을 취하길 기대해보지만 – 그 행보는 쉽게 가늠하기 어렵다.

자본주의 시스템이면 주주 자본주의를 가동해서라도 봉건적 세습은 막아야 하지 않겠는가?

0.57%의 사나이를 위한 원대한 계획

에버랜드는 한국의 가족경영 재벌이 적은 지분으로도 그룹을 통제하는 것을 가능케 하는 상호순환출자 시스템이기 때문에 중심축이다. 이건희 일가는 삼성그룹의 74개 회사의 1.53% 지분을 가지고 있으면서 49.7%를 통제하고 있다. [중략] 에버랜드는 삼성생명의 지분 19.3%를 보유하고 있는데 삼성생명은 그룹의 주력인 삼성전자의 세 번째 대주주다. [중략] 삼성은 보도된 바로는 재구조 계획에 대한 코멘트를 거부하고 있다. 애널리스트들이 예상하는 시나리오 하나는 지주회사를 구성하기 위한 삼성전자, 삼성물산 건설부문, 그리고 에버랜드의 합병이다.[Samsung Everland IPO Indicates Revamp of Korea’s Largest Chaebol]

삼성에버랜드의 갑작스러운 상장 계획 발표를 다룬 블룸버그 기사 중 일부다. 삼성의 이번 결정에 대한 배경과 향후 예상 시나리오가 잘 요약되어 있다. 우리나라의 다른 재벌도 그렇듯이 삼성 일가역시 흔히 삼성그룹의 “오너(owner)”라고 불리지만 위에서 보듯이 그 호칭에 어울리는 지분을 갖고 있지 않다. “상호순환출자”라는 희한한 제도를 통해 그룹을 통제하고 “오너” 행세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룹 내 삼성 일가가 실질적으로 “오너”라고 불릴만한 자격을 가지고 있는 회사가 있다면 바로 삼성에버랜드다. 25.7%의 지분을 가져 최대 주주인 이재용 씨를 비롯한 이건희 일가가 45.56%를 소유하고 있다. 특수관계인을 포함할 경우 지분은 80.62%까지 높아진다. 에버랜드가 단순한 레저 회사가 아닌 이유다. 이 회사는 상호순환출차의 정점에 서 있는 사실 상의 “지주회사”인 셈이다.

삼성전자의 시장지배력 강화, 중화학 및 건설업종 업황 부진 등에 따라 삼성전자를 중심으로 한 전자부문이 그룹 내 매출 및 자산의 70%를 상회하는 등 그룹수익성 및 현금흐름 측면에서 전자부문의 집중도가 높아지고 있다.[삼성에버랜드 회사채등급 평가보고서 중에서]

바로 이 점이 이건희 일가의 후계구도의 약점이다. 삼성전자의 실질적 지배권을 갖지 못한다면 “삼성그룹”의 지배자라 할 수 없을 텐데 이재용의 삼성전자 지분은 불과 0.57%다. 지난달 2일 국회를 통과한 ‘금융지주회사법 개정안’으로 삼성생명이 전자 지분을 매각해야 할 경우 상황은 더 심각하다. 그래서 언론은 에버랜드와 삼성SDS 상장으로 이재용이 실탄을 마련하려 하는 것이라는 예측이다.

언론은 에버랜드와 삼성SDS 상장으로 가족이 마련할 수 있는 돈은 대략 4조원으로 예측하고 있다. 하지만 웬만큼 실탄을 마련한다 할지라도 그 덩치 큰 삼성전자의 지배력을 구축하는 것은 무리수 일 것이다. 그래서 나오는 이야기가 삼성전자 분할 후 주식교환 등을 통한 합병이다. 장기적으로는 순환출자 구도를 해소하고 금융지주회사와 산업지주회사 체제를 갖추는 방향으로 갈 것이란 예측이다.

개인적으로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뻔히 보이는 시나리오가 진행되어가는 와중에도 언론에서 지분 0.57%의 주주가 회사를 지배하기 위해 취하는 로드맵에 대한 의아심을 가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삼성이라 이름 붙여진 회사들이 일사분란하게 0.57%의 사나이가 권력세습을 위해 나아가고 있는 것이 정상적인 경제행위라 여기는 것일까? 순환출자 구조를 해소하는 그 자체로 만족하는 것인가?

우리는 지금도 개인이 자기 재산을 자손에게 물려주어야 한다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말하자면 정치 권력에 관해서는 상속 원리를 거부하지만 경제 권력에 관해서는 상속 원리를 수용한다. 정치 분야의 왕조 지배는 사라졌지만, 경제 분야에 이름난 가문은 살아남는다.[버트란트 러셀, 서양철학의 역사 中]

경제 세습을 당연시하는 풍토에 대한 러셀의 의아심이다. 이재용이 상속세만 정당하게 낸다면 – 여태 그렇지 않았던 역사가 있기에 의심스럽지만 – 그는 현행 법 체제 아래 합법적으로 이건희의 경제 권력을 무난히 이어받을 수 있다. 우려스러운 것은 그가 가지고 있는 또는 가질 수 있는 권력 이상의 권력을 또 다시 편법적으로 창출하는 것이다. 이런 의혹을 짚어줄 수 있는 감시자는 누구일까?

2009년에 이명박은 이건희가 1990년대에 그의 아들에게 SDS 전환사채를 고의로 낮은 가격에 팔아서 회사에 손해를 끼쳤다는 2009년 법원판결에 사면조치를 내렸다. 한국에서는 순환출자 탓에 주식 가치를 제한하는 것이 가능하다.[Samsung Everland IPO Indicates Revamp of Korea’s Largest Chaebo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