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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읽은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소설들


올해의 책읽기 중에 가장 모험적인 시도였다면 연초에 시도한 ‘롤리타 원서로 읽기’였다. 소설의 원작자인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는 러시아 국적이었지만 귀족 명문가에서 태어난 천재인지라 여러 나라 언어에 능숙하였으며, 이 소설을 쓸 때 그는 모국어인 러시아어대신에 영어를 사용하였다. 하지만 네이티브가 쓴 영어소설이 아니라고 결코 만만히 볼 것이 아니었다. (물론 영어실력 부족이 가장 큰 원인이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이 소설을 읽으며 나보코프가 사용한 수많은 은유와 현학적인 단어 등으로 인해 – 어릴적 한국어로 이미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 한 문단 한 문단을 힘겹게 타고 올라야만 했다. 그런 시도 끝에 완독에 성공했음에도 – 또는 그러하였기에 – 만족감은 기대 이상이었다.

예를 들어 주인공인 험버트 험버트가 롤리타와 묵었던 여관에서 정체모를 남자와 나눴던 대화에서 험버트의 머릿속에 잠재하고 있던 죄책감이 대화 속에서의 언어적 유희로 표현되던 상황은 영어가 아니고서는 쉽게 이해될 수 없는 상황이었고, 소설의 곳곳에 배치되어 있는 이런 가느다란 감정의 뉘앙스는 영어로 읽어야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소아성애라는 비뚤어진 여성 혐오적 욕망을 관능적이고 현학적으로 풀어낸 탓에 – 또는 덕분에 – 아직도 이 소설의 제목과 캐릭터는 유사한 사회적 현상을 묘사하는데 가장 손쉽게 쓰이는 상징이 되었고, 소설 그 자체의 매력을 감상하기 위해서나 또는 그 욕망의 사회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번쯤 읽어야할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롤리타가 힘겨운 고산등반이었다면 요코미조 세이시의 옥문도(獄門島) 읽기는 가벼운 트래킹이라 할 수 있었다. 영국에 셜록 홈즈가 소설 속에 등장하는 사설탐정의 전범이라면 일본은 바로 요코미조 세이시가 창조해낸 긴다이치 코스케(金田一耕助)라 할 수 있다.1 1947년 처음 연재되기 시작했다는 이 소설은 역시 긴다이치가 등장하는 요코미조의 다른 소설에 비교할 때에 – 적어도 내가 읽은 중에서는 – 가장 미스터리로서의 매력이 강하고 이 매력이 하이쿠 등 일본 고유의 문화와 잘 융합되어 있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또한 긴다이치 코스케의 다소 엉뚱한 캐릭터 설정과 뛰어난 건축물을 보는 듯한 주변 캐릭터 설정의 기하학적 배치가 훌륭하게 결합되어 있다는 점도 이 작품의 매력이다.

소설은 긴다이치가 동료군인이었던 한 명문가의 장남이 죽음을 맞이하며 했던 부탁을 들어주러 “지옥의 문”이라는 끔찍한 이름의 섬에 찾아가면서 겪는 사건을 그리고 있다. 이 소설의 매력은 섬으로 향하는 배에서부터 시작한다. 요코미조는 이때부터 등장하는 어느 조연 하나도 낭비하지 않고 저마다의 역할을 정확히 배치하여 활용한다. 하다못해 섬으로 싣고 가는 절의 종(鐘)에도 역할이 배당되어 있다. 그리고 이후 발생하는 살인사건은 각각의 하이쿠의 대응하는 모양새를 띤다.2 소설의 또 하나의 매력은 그 살인의 배경에 거대하게 자리 잡고 있는 섬의 폐쇄성, 그리고 더 매크로하게 일본이라는 섬이 지니고 있는 폐쇄성과 봉건성을 비판하고 있다는 점이다. 재미와 메시지를 함께 지닌 작품.


지난 11월 말 교토(京都)를 여행했다. 그래서 가기 전에 참고용으로 고른 소설이 미시마 유키오의 ‘금각사’였다.3 1956년 출판된 이 소설은 하야시 쇼켄이라는 절의 도제가 1950년 실제로 금박으로 덮여 있던 누각을 불태워버렸던 충격적인 사건을 소재로 하고 있다.4 작가는 소설을 쓰기위해 5년간 자료조사를 할 만큼 치밀하게 작품 준비를 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현실의 하야시 쇼켄은 소설 속에서 말더듬과 부모에 대한 원망으로 열등감에 젖어있는 미조구치로 재탄생한다. 미조구치는 어쩌면 하야시 쇼켄과 당시 여러 내적 갈등을 겪고 있던 미시마 유키오 자신이 뒤섞여 있는 캐릭터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읽다보면 ‘미시마 스스로가 먼저 금각사를 태워버리지 못해서 이 소설을 쓴 게 아닐까’하는 의문이 들 정도다.

미시마 유키오가 “이상한 에로티즘을 구사”한다는 평이 있는데 이 소설 역시 그런 이상한 에로티즘이 잘 묘사됐다는 점에서 시사소설인 동시에 작가의 뇌내망상과 상상력의 재창조물이라 할 수 있다. 미조구치는 임신부의 배를 걷어차며 쾌감을 느끼고 여러 에로틱한 상황에서 금각사의 환영을 중첩되며 성적환상에 시달린다. 이런 면에서 방화는 명백히 미조구치의 오르가즘과 연결되어 있고, 먼 훗날 미시마 유키오 스스로가 자행하는 자살극에서 느꼈을 오르가즘과 연결되어 있다. 금각사라는 미(美)는 파괴해야만 영속한다는 모순된 강박은 “인간이 잔인해지는 순간은 단말마의 신음을 볼 때가 아니라 나뭇가지 사이로 스며드는 햇살이 비치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을 때”라는 작중인물의 대화에서도 엿볼 수 있다.

제러미 리프킨의 『한계비용 제로 사회』 斷想

소위 “미래학자”들의 저서는 별로 읽지 않는 편이다. 취향의 문제이기도 하고 선입견의 문제이기도 한 것 같다. 암튼 최근 피치 못할 사정(!)으로 유명한 제러미 리프킨의 ‘한계비용 제로 사회’라는 책을 일부분 읽었다. 읽었던 서문과 일부 챕터를 요약하자면 기술의 상상을 초월한 발전으로 한계비용이 제로에 가까워지고 이로 인해 “전반적인 최적의 복지”가 이루어지면 다가올 미래는 “협력적 공유사회(collaborative commons)”로 발전할 것이라는 긍정적 세계관에 대한 개론과 각론이랄 수 있다.

그의 이념적 지형은 거칠게 보자면 ‘위험하지 않은 反자본주의자’ 정도 되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자본주의 시스템 자체에 자본주의가 추동하는 기술발전에 따라 “한계비용의 제로化”되는 모순이 내재되어 있다고 생각한다는 점에서 반체제적이다. 그는 이러한 주장을 위해 오스카르 랑게와 같은 맑시스트의 분석이나 케인스의 예언을 인용한다. 그런 한편 자본주의라는 패러다임은 협력적 공유사회가 되도 한동안 존속할 것이라고 유보적 입장을 취한다는 점에서 위험한 사고의 소유자는 아니다.

‘패러다임’이라는 개념은 토마스 쿤의 유명한 『과학 혁명의 구조』에서 빌려온 개념이다. 쿤이 패러다임을 처음 쓴 것은 아니지만, 그로 인해 그 단어는 가장 유명해졌다. 패러다임은 “함께 작용하며 통일되고 통합적인 세계관을 확립하는 신념 및 가정 체계로서 설득력이 높고 저항할 수 없는 까닭에 실제 상황 그 자체나 마찬가지로 여겨지는 것”이라 풀이되는 개념이다. 그런 면에서 순응적이고 긍정적인 개념이다. 칼 맑스가 자본주의를 “이데올로기”라 부르며 그것을 일종의 ‘허위의식’이라 부른 것과는 다른 자세다.

이런 점만 봐도 기득권이 제러미 리프킨을 불온시할 이유는 전혀 없다. 오히려 리프킨은 한계비용이 줄어들면서 기존 자본가의 이윤이 줄어들 상황을 염려하면서 로렌스 서머스의 보고서를 인용하며 “일정한 비율로 수익이 증가하는 조건하에 상품이 생산되는 .. 일시적인 독점 권한과 이윤이 민간 사업체에 이러한 혁신에 참여하도록 이끄는 보상이 될 것”이라며 이윤 확보의 로드맵까지 제시하고 있다. 자본주의가 “공유경제”, “협력적 공유사회”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탈정치화될 수 있는 논리를 제공한 셈이다.

내가 보기에 그의 이론의 가장 허술한 점은 “한계비용 제로化”를 협력적 공유사회로 가는 키워드로 여긴다는 점이다. 한계비용은 고정비가 일정한 단기적 생산 상황에서 재화나 서비스가 한 단위 늘어날 때마다 추가되는 비용을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생산이 늘어날수록 한계노동생산성이 떨어지며 이에 따라 한계비용은 증가한다. 하지만 디지털 시대가 되며 정보재 등은 한계비용이 0에 가까워지는 상황이 연출되며, 리프킨은 이런 상황에 환호하고 있다. 하지만 장기상황에서는 한계비용 이외에 평균비용이 증가할 것이다.

즉, 현재 정보재와 같은 재화의 한계비용이 제로에 가까운 것은 이미 광범위하게 재정이나 투자로 깔아놓은 각종 물적인 인프라스트럭처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장기적으로 이 고정자본은 갱신되어야 한다. 이미 자본주의 황금기에 깔린 미국 등 서구사회의 인프라는 그 생애주기 막바지에 놓여 있어 대규모 갱신이 필요한 시점이다. 이러한 투입비용을 감안한다면 단순히 소프트웨어 다운로드 속도가 빠른 정황만 가지고 한계비용 제로 사회를 외칠 일인지 모르겠다. 그런 정보재에 대한 불평등한 상황은 차치하고라도 말이다.

또 하나 그의 이론은 “최적의 복지” 로드맵이 눈에 띄지 않는다. 얼론 머스크가 북한의 핵보다 더 위험한 것이 인공지능이라고 했다는데, 그들이 인간의 웬만한 모든 종류의 노동을 빼앗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인류의 재산이 자산과 소득에서 절대 다수 얻어지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의 종말은 소득의 종말을 의미하기에 일부 벤처캐피탈리스트는 ‘기본소득’을 주장한다. 하지만 리프킨은 “소유주와 노동자의 낡은 패러다임이 무너지고 있다”(215p)고 말할 뿐이다. 노동자는 여전히 당장 돈이라는 “낡은 패러다임”이 필요한데?

* 짧은 독서로 거칠게 쓴 글이니 혹시 내가 오해하고 있는 부분이 있다면 의견주시기 바랍니다.

단테의 신곡에 등장하는 경제사범에 대한 인식

카센티노의 푸른 언덕에서 아르노 강으로 서늘하고 잔잔하게 흘러내리는 실개천들이 언제나 눈앞에 속절없이 아른거립니다. 그것을 머리에 떠올리는 일이 얼굴 살을 뜯어내는 병보다 나를 더 애타게 목을 태우고 있소. 나를 괴롭히는 엄격하기 그지없는 정의가 하필 내가 죄를 지은 곳을 떠올리게 하며 더 깊은 한숨을 내쉬게 만드는구려. 거기는 로메나, 내가 세례자의 얼굴로 주화를 찍어 위조화폐를 만들던 곳이오. 나는 그 때문에 저 위에 불에 탄 육신을 남겼소.[신곡, 단테 엘리기에리 지음, 박상진 옮김, 민음사, 2008년, pp306~307]

지옥에 떨어진 이 죄인은 스스로를 “장인(匠人)”이라 부르는 아다모1다. 그는 당시 로메나 성2의 군주였던 귀도와 알레산드로의 꾐에 빠져 쇠로 피오리노(fiorino)3라는 – 중세유럽의 부국이었던 피렌체에서 1252년부터 주조하여 통용시키던 – 금화의 위조화폐를 만들었고, 그 탓에 지옥에 오게 됐다는 것이 단테의 신곡에 등장하는 한 일화다. 이 장에서 단테가 묘사하는 것을 보면 당시 화폐 위조를 중한 범죄로 다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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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어 인용문의 뒤쪽을 보면 같이 지옥에 떨어진 시논이라는 다른 죄인4은 아다모에게 “내가 거짓말을 했으면, 넌 돈을 위조했어! 난 한마디 말 때문에 여기 있지만, 넌 다른 어떤 마귀보다도 나쁜 놈이야!”라고 거칠게 힐난한다. 당시 피렌체는 백년 전쟁 동안에 잉글랜드 왕에게 자본을 대기도 하는 등 유럽 각국에 자본을 대주는 금융도시였다. 자연히 위조화폐를 주조하는 죄는 중죄로 다루었으리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들의 고통은 눈에서 눈물이 되어 터져 나왔다. 그들은 비처럼 떨어지는 불꽃과 뜨겁게 달구어진 모래를 손으로 내저으며 이리저리 피해 다녔다. 마치 여름날에 벼룩, 파리, 빈대에 물어뜯기는 개가 주둥이와 발목으로 버둥대는 것 같았다. 고통스러운 불길이 떨어지는 가운데 몇 사람을 눈여겨보았지만, 아무도 알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모두가 목에 주머니를 걸고 있음을 깨달았다. 색깔과 문장(紋章)이 선명하게 보였다. 그 와중에도 그들의 눈은 주머니를 흡족하게 여기는 것 같았다.[같은 책, pp167~168]

한편 이들은 고리대금업자다. 그들이 차고 있는 주머니가 바로 고리대금업자임을 상징하고 있다.5 교회는 1179년 제3차 라테란 공의회를 통해 고리대금업자는 영성체를 비롯한 교회의 구원을 받을 수 없도록 정하였다. 따라서 단테가 신곡을 쓴 14세기 초 고리대금업자가 사후에 갈 곳은 지옥밖에 없었다. 금융업으로 성장한 도시에 살면서 위폐범을 단죄하면서도 고리대금업자를 지옥에 보내는 혼돈된 세계관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여하튼 고리대금업에 면죄부를 준 것은 먼 훗날이 지나서였고 위폐범은 아직도 극악한 중죄다.

Giotto, scrovegni, enrico scrovegni dona agli angeli una riproduzione della cappella degli scrovegni (1302).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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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고리대금업자라도 교회에 재산을 바치면 성화에도 등장하고 천국도 갈 수 있다

이렇듯 종교적 관념은 언뜻 우리의 경제활동과는 별로 관계가 없어보일지 몰라도 실은 다른 여타 분야에서 그렇듯 우리의 경제관념에도 끈끈하게 얽혀 있다. 이자를 받는 것을 금지한 것은 기독교나 이슬람 모두의 교리였고 앞서 보는 것처럼 기독교 교리는 그런 고리대금업자를 지옥으로 보냈으며 이슬람은 여전히 이자수취를 원칙적으로 금지하고 있다6. 금융 등 3차 산업을 “노동”으로 여기지 않는 관념도 아담 스미스7, 막스 베버8, 심지어 칼 맑스9에 이르기까지 서양 경제학자들의 경제관에 일관되게 반영되어 있다.

올해의 공연

성 토마스 합창단 마태수난곡

올해 3월 16일 예술의 전당에서 열린 공연이었다. 요한 세바스찬 바흐가 작곡한 위대한 작품 마태수난곡 전곡을 바흐가 실제로 재직했던 8백여 년 전통의 성 토마스 합창단이 부른 공연이다. 성경의 마태복음 26장과 27장을 기본 텍스트로 한 극적(劇的) 음악으로 공연시간이 3시간에 달하는지라 청중으로서도 상당한 인내심을 요하는 공연이었지만 미리 음반으로 예습을 하고 간 터라 생각보다 지루하지는 않았다. 더불어 초심자이긴 하지만 그 시대 사람들이 – 특히 바흐가 – 지니고 있는 그 신앙심에 대한 이해도가 조금은 더 높아지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숭고한 감정이 느껴지는 공연이었다.

New Order 도쿄 공연

올해 5월 28일 도쿄에서 열린 New Order 단독 공연이었다. 2012년 섬머소닉에서 만난 이후 4년 만에 다시 보는 뉴오더의 모습이었다. 일본은 확실히 우리나라보다는 뉴오더의 팬 층이 두꺼운지라 이틀 간의 공연에도 적잖은 관중이 모여들었고, 밴드는 신보인 Music Complete를 공연목록에 상당수 집어넣었기 때문에 섬머소닉의 공연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와 열기로 채워졌다. 스탠딩공연장에서 계속 되는 해드뱅잉 등으로 체력이 상당히 고갈되었던 공연이었지만, 그만큼이나 락 공연의 광기를 더욱 몸으로 느낀 공연이기도 했다. 그들의 신보와 공연을 다시 한 번 접할 그날이 오기를 기원해본다.

New Order 東京 공연 後記

Don Giovanni

오페라에 대해서는 문외한에 가깝지만 직접 육안으로 보고 싶은 공연을 꼽으라고 한다면 바로 모차르트의 돈지오반니였다. 뉴욕에 가는 김에 메트오페라의 공연일정을 검색해보니 이 작품이 10월 12일 공연일정에 있어 주저 없이 선택하였다. 뉴욕이 오페라의 본고장이라 말할 수는 없겠지만 어쨌든 상당한 완성도를 기대할만한 지역이었고, 공연은 다행스럽게도 가수들의 압도적인 가창력이나 화려한 무대장치 등에서 대만족이었다. 특히 극의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는 비련의 여인 돈나 안나 역의 배우의 가창력은 실황으로 접하지 않으면 느낄 수 없는 감동을 주어서 더욱 더 만족감이 높았던 공연이었다.

Steely Dan Concerts

사실 무리를 해서 뉴욕을 간 이유가 이들의 공연을 보기 위해서였다. 아내와 나 둘 다 좋아하는 째즈-락 밴드지만 오랜 기간 공연을 갖지 않다가 미국 동부 순회공연에 돌입했다는 사실을 알고 겁 없이 뉴욕행 티켓을 질렀던 것이다. 당일 공연장에 가보니 동양인으로 보이는 이들은 우리 부부뿐이고 절대 다수가 백인이었을 정도로 이들의 음악은 독특한 지형을 형성하고 있었고, 해외 공연장으로 직접 찾아가기 전에는 그들의 내한공연 따위는 볼 수 없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하였다. 공연에 대해서는 더 이상 설명할 필요가 없이 완벽한 하모니의 세션을 갖춘 공연이었다. 다시 이들을 볼 수 있을지?

너무 흥겹게 공연을 감상하던 어느 관객

Squeeze / The English Beat 합동 공연

이들의 공연도 뉴욕행의 시간 때우기로 선택한 것이었다. 결과적으로는 내 생애 가장 신나는 공연 순위 탑을 차지했다. 둘 다 좋아하는 밴드지만 두 밴드 모두 주로 80년대를 주요한 시기로 활동하였기에 그리 큰 기대를 하지 않았지만, 현장에서의 감동은 달랐다. 나이 대를 가리지 않고 모두들 노래를 따라 부르고, 리듬에 맞춰 춤을 추며, 맥주를 마셔대는 모습, 공연수준의 높낮이를 가리지 않고 – 물론 공연은 수준급이었다. – 몸으로 음악을 느낄 수 있는 감동의 도가니였다. 이들의 공연을 보면서 다시 한 번 전성기가 지났어도 흥겹게 순회공연을 다닐 수 있는 팬 층과 시장이 있는 그들의 대중문화가 부러웠다.

Squeeze 공연 後記

올해의 전시회

Stanley Kubrick 展

현대카드가 작년 11월부터 올해 3월까지 연 기획전으로 스탠리큐브릭의 주요 작품에 쓰였던 소품, 시나리오, 그의 개인사물 등을 빼곡하게 채워 넣은 전시회였다. 앞서 글에서도 썼듯이 올해 초반 극장에서 만난 그의 작품들의 여운을 다시 한 번 되새김질할 수 있는 기회가 됐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었다. 전시된 소품들과 사전 콘티 등을 보면 여느 감독들도 그러하겠지만, 특히나 편집증 환자라고 여겨질 정도로 작품의 완성도에 집요하게 집착한 감독인가를 피부로 느낄 수 있다. 실제 스페이스오디세이에 쓰였던 HAL9000 실물을 만날 수 있었던 보기 드문 기회.

변월룡 展

우선 이 위대한 화가를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준 미술평론가이자 기획자인 문영대 씨에게 감사를 드린다. 소비에트 시절의 타협하지 않았던 사회주의자 예술가의 주요 작품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만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용기와 인내심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어쨌든 개인적으로는 이 전시회를 세 번 찾았을 만큼 감명 깊었던 전시회다. 나는 화가 중에서도 그림 그리는 솜씨가 남다른 더 잘난 화가가 따로 있다고 생각하는데 변월룡 씨가 바로 그런 분이다. 이런 그림 솜씨와 이데올로기와 인간에 대한 사랑이 결합하여 최상의 결과를 낸 이가 바로 변월룡 씨다.

르느와르 展

올해 5월 도쿄에 갔을 때 들른 도쿄 국립미술관에서 열렸던 전시회다. 르느와르라고 하면 어딘가 식상한 면도 있을 것 같은 인상주의 화가지만 전시회를 보면 그것은 우리가 그의 명성이나 이미지를 과소비했을 뿐 그의 작품 자체는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 수 있다. 이 전시회가 인상적이었던 이유 하나가 특히나 일본에서 열린 전시회라는 점이었기 때문인데, 토요일 그 많은 인파가 몰렸음에도 기이할 정도로 질서정연하고 조용했다는 점, 그리고 컬렉션의 알찬 내용이 국내의 유사 전시회에서 접하기 어려울 정도로 집요했다는 점 등 때문이다. 그런 점은 참 부러웠다.

고양이를 안고 있는 쥴리

우타가와 히로시게 展

이 전시회는 도쿄 시내를 배회하다 산토리 미술관에서 이 전시회가 있다는 것을 우연히 알고 들른 대박 전시회였다. 우키요에를 즐기기는 하지만 제대로 된 진본을 본적이 없는지라 이렇게 우키요에의 大家의 작품을 한데 몰아서 볼 수 있었던 것은 큰 행운이었다. 명소에도백경 등 전국을 돌아다니며 풍경화를 – 그럼으로써 일종의 관광지 팸플릿 역할을 했던 – 주로 그렸던 작가인지라 역시 컬렉션은 풍경화 위주다. 전시회에서는 이런 작품을 현재의 위치와 매칭해서 보여주며 상세한 설명을 곁들였는데, 다시 한 번 일본인의 집요함을 느낄 수 있었던 전시회였다.

우타가와 히로시게(歌川広重) 전시회

노이에 갤러리(Neue Gallarie)의 클림트 展

뉴욕에 갔을 때 메트로폴리탄미술관, MOMA 등 주요미술관을 돌아다니며 감상한 상설전시는 여태도 그렇고 앞으로도 기대하기 어려운, 그야말로 한꺼번에 몰아서 걸작을 감상한 시기였다. 하지만 특별히 이 갤러리의 클림트 작품을 언급하는 이유는 약간의 기획전 적인 성격을 띠면서도 클림트의 여성 전신을 그린 주요 작품을 한 번에 감상할 수 있었던 흔치 않은 전시회였기 때문이다. 방을 죽 둘러싼 클림트의 여인들을 바라보며 그가 살았던 시대의 그 분위기가 내 머릿속에 샤워 물을 퍼붓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과소비되는 느낌이 드는 화가지만 역시 천재임에 틀림없는 화가였다.

올해의 영화

스탠리큐브릭의 작품들

올해 초, CGV가 기획한 스탠리큐브릭 시리즈展에서 본 영화들이다. 이때 2001: A Space Odyssey, A Clockwork Orange, The Shining, Dr. Strangelove를 일주일에 걸쳐 감상하였다. 작은 모니터로 봤던 영화를 스크린에서 접하면 이제까지 못 봤던 새로운 디테일을 보게 되는 법이고 큐브릭의 영화들이 바로 그러했다. 특히 스페이스오디세이에서의 우주의 광활함을 작은 모니터에서 본다는 것은 엄밀히 말해서는 부조리한 상황이었다. CGV가 내년에는 남은 큐브릭의 작품도 상영해주길 빌어본다.

사티야지트 레이(সত্যজিৎ রায়,)의 ‘대지의 노래’ 3부작

남들이 그렇듯 인도영화 하면 무조건 군무와 어설픈 스토리가 결합된 우스꽝스러운 영화라고 알고 있던 나의 편견을 깨부순 영화들이다. 장 르느와르에게 사사한 감독이 1955년 거의 혼자의 힘으로 만들다시피 한 ‘대지의 노래’는 가난한 아푸의 가족이 어떻게 그들의 삶을 개척해나가는가에 대해 그린 리얼리즘 영화다. 감독은 이어지는 ‘대하의 노래’, ‘아푸의 세계’를 통해 아푸의 삶을 계속 조명하며 인도 근현대사에서의 한 개인의 삶을 입체적으로 조명하여 인도영화계에 흔들리지 않는 기둥을 구축하였다.

I, Daniel Blake

“흔들리지 않는”이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또 하나의 감독이 있다면 바로 켄로치일 것이다. 영국 노동계급의 삶에 대한 애정을 흔들림 없이 지니고 있는 감독의 최신작으로 영국 복지제도의 부조리함과 이에 맞서는 다니엘 블레이크의 삶을 희비극의 기법으로 조명하였다. 지난 번 글에 썼듯이 선진국의 고령화 현상은 특히 노동계급의 빈곤과 맞물려 치명적인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되는데 이 영화가 바로 그러한 상황에 놓인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의 처지를 조명하고 있다. 너무 리얼하다는 점에서 장르는 공포영화다.

Love Is Strange

중산층의 삶을 살아가고 있던 뉴욕의 게이 부부가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차별받으며 피치 않게 별거를 하게 되며 겪게 되는 어려움을 소재로 한 영화다. 모두들 친한 친구고 친척이지만, 그들의 삶의 공간과 시간이 조금씩 겹치면서 서로가 어떻게 부대낌을 겪게 되는 지가 세심하게 묘사되어 있어 보는 내내 고개를 끄덕거리게 된다. 영화 내내 흐르는 쇼팽의 음악과 뉴욕의 풍경이 그럴싸하게 어울려 더욱 영화 보는 맛을 느끼게 한다. 뉴욕에 갔을 때는 주인공들이 마지막으로 헤어지는 레스토랑에 직접 방문해 덕질을 하기도 했다.

The Wire

미드 역사상 최고의 작품을 꼽으라면 빠지지 않고 탑3에 들어가곤 하는 HBO(2002~2008년 방영)의 드라마. 전직 볼티모어의 경찰이었던 에디 번즈(Ed Burns)의 각본으로 만들어진 이 작품은 볼티모어라는 도시를 둘러싼 이들의 삶을 입체적으로 조명하는데, 작품은 시즌마다 마약, 정치, 노조, 교육, 언론 등 주요 이슈를 건드리며 하나의 거대한 콘텍스트를 완성해나간다. 이 작품을 보고나서 볼티모어 출신 흑인 작가 타네히시 코츠(Ta-Nehisi Coates)의 ‘세상과 나 사이’라는 책을 읽었는데, The Wire가 현실로 와 닿는 책이었다.

올해의 책

슬슬 한해를 마무리할 시간이 왔다. 오늘 ‘올해의 뫄뫄’ 시리즈를 써볼까 하고 에버노트를 뒤적거리다보니 올해는 개인적으로 나름 참 많은 일이 있었던 해다. 또한 사회적으로도 참 많은 일이 벌어졌던 – 그리고 아직도 진행되고 있는 – 해이기도 하다. 많은 사건이 비극이었지만, 그 와중에 그러한 비극을 계기로 화해와 상처 회복의 단초가 마련되기도 했다. 그러한 양면성이 인생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누구도 언제나 행복할 수 없고 누구도 언제나 불행하지만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적어도 책을 읽는 순간만은 행복하거나 최소한 불행을 잠시 잊는 순간이 아니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紅樓夢

올해는 조설근의 소설 홍루몽을(내가 읽은 것은 나남에서 발간한 총 여섯 권짜리) 다 읽은 해다. 작가의 반자전적 소설이라는 설이 유력한 이 걸작은 주된 줄거리는 한 귀족 집안의 자녀인 가보옥과 임대옥과의 사랑 이야기이지만, 그 안에는 삶의 의미가 무엇인가라는 진지한 질문이 담겨져 있다. 또한 작가 스스로가 겪었을 귀족의 풍습에 대한 치밀한 묘사를 통해 우리는 봉건사회의 계급구조를 들여다볼 수도 있다. 이 소설을 “페미니스트 소설”이라 이름붙이는 것은 과잉해석이겠지만, 대부분 여성이 주인공이고 그들의 주체성이 살아있다는 점에서 웬만한 현대소설보다 페미니즘 적이라는 것도 매력요소다.

The Catcher In The Rye

여태 한 대여섯 번은 읽은 것 같은데 올해는 특히 홀덴이 방황하는 주요무대인 뉴욕을 다녀와서 읽었다는 점에서 더 맛깔스러운 독서가 됐다는 점에서 ‘올해의 책’으로 선정해 보았다. 즉, 홀덴이 기차를 타고 뉴욕의 펜스테이션에 도착해서 센트랄파크 및 웨스트사이드 등으로 헤매는 동선이 내가 뉴욕에서 헤맸던 동선이기에, 영화화도 되지 않은 이 작품에 비주얼을 가미해주어 더 실감나게 작품을 감상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었다. 한편 트위터에서 화제가 되었던 “원문에서의 head가 ‘머리’냐 ‘귀두’냐”란 논란도 다시 곱씹어 볼 수 있었던 계기가 됐다. 귀두로 해석한 번역가는 음란마귀가 씐 것 같다.

스트레스테스트 / 정면돌파 / 대마불사

2008년 금융위기를 다룬 책은 여러 권이 있겠지만, 올해에는 이 세권의 책으로 어느 정도 당시의 정황을 되짚어 볼 수 있었다. 앞의 두 권은 금융위기 속의 출연진인 – 그리고 서로 앙숙인 – 티모시 가이트너와 쉴라 베어가 쓴 회고록이다. 그렇기에 둘의 주장이 엇갈리는 장면에서 서로의 주장을 비교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대마불사는 뉴욕타임스의 컬럼니스트이기도 한 작가 앤드류 로스 소킨(Andrew Ross Sorkin)이 쓴 책이다. 작가의 시점에서 각 주요국면의 정황을 치밀하게 조명했다는 점에서 앞서의 두 권이 비어있는 부분을 채워줄 수 있는 좋은 참고서다. 암튼 대단한 사건이었다.

콜레스테롤 수치에 속지마라

특이하게 건강에 관한 책을 골라봤다. 조니 바우덴(Jonny Bowden)과 스테판 시나트라(Stephen Sinatra)의 공저다. 개인적으로 LDL수치와 총콜레스테롤 수치가 높아서 빌려본 책인데 의외의 내공을 느끼고 숙독했던 기억이 난다. 요점은 콜레스테롤 수치가 높을수록 심장질환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는 “가설”은 현대의학의 신화이자 상술일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해박한 지식을 통해 콜레스테롤, 인슐린 등 우리 귀에 익숙하지만 정작 그 의미를 잘 모르는 것들에 대해 상세하게 알려준다. 작가의 주장은 굉장히 논란이 많은 주제이기 때문에 독자로서 이를 유의하며 다른 주장과 비교하여 읽어야 할 것이다.

시골빵집에서 자본론을 읽다

빵과 자본론이라는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주제가 한데 만난 책이다. 질풍노도의 삶을 살던 저자는 어느 날 빵을 배워보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는데 학자이신 아버지가 문득 자본론을 읽어보라고 해서 그 책을 읽으며 제빵업자로서의 삶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게 됐다는 개인적 경험을 적은 것인데 엉뚱해 보이면서도 읽다보면 고개를 끄덕거리게 된다. 결국 저자는 자신의 경제주체로서의 역할을 자본론에서 이상적인 경제단위로 설정한 “자유로운 생산자들의 연합”의 일원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한편 맑스가 자본론에서 엉터리로 만들어진 빵이 얼마나 나쁜지 설명하는 부분도 있으니 의외로 빵과 자본론은 어울리는 주제다.

(장수의 악몽) 노후파산

NHK 스페셜 제작팀이 실제로 노후파산의 위기에 있거나 이미 파산한 노인들을 심층 취재하여 만든 책이다. 올해 일본에 갔을 때 유난히 노인층이 많이 눈에 띄어서 일본사회의 노령화를 실감하였던 바, 이 책을 읽으면서 그러한 노인층이 세계 최고의 선진국인 일본에서조차 어떻게 삶의 파행을 겪게 되는 지를 실감하게 됐다는 점에서 충격적이었다. 이러한 비극적인 삶은 단순히 문학 속의 소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 경제 시스템이 해결해야 할 절체절명의 과제다. 올해는 특히 전 세계적으로 기본소득 등 그러한 논의가 활발하게 이뤄졌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한편 이 책을 읽고 ‘나, 다니엘 블레이크’를 보면 충격이 배가 된다.

문 앞의 야만인

책이 말하고자 하는 주제가 뭔지 아리송하게 만드는 제목의 이 책은 M&A에 관한 고전이다. RJR내비스코라는 미국의 거대기업의 합병과 LBO를 둘러싸고 월스트리트의 쟁쟁한 플레이어들이 어떻게 합종연횡을 하며 사투를 벌이는 지가 번역본 900페이지가 넘는 회고록을 통해 소상히 담겨져 있다. 그래서 해당 분야의 종사자들에게나 문외한에게나 좋은 참고서가 될 수 있다. 아직 3분 2 정도 밖에 진도를 나가지 못했지만, 굳이 ‘올해의 책’으로 선정한 이유가 이것이다. 특히 투자은행 업계에 종사하고 있다면 어떻게 딜소싱이 이루어지는지, 주선은행이란 어떤 의미인지, 협상이란 무엇인지 등에 대해 고민해볼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