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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역사는 질투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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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yagawa IsshōOwn work, Public Domain, Link

무규율 성교란 무엇을 말하는가? 이것은 현재나 혹은 먼 과거의 어느 시기에 있었던 그런 금제(禁制, Verbotsschramken)가 당시에는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본 바와 같이 질투의 울타리는 이미 무너졌다. 그런데 질투의 감정이 비교적 늦게 발전하였다는 것은 지극히 확실하다. 근친상간의 관념도 마찬가지라고 말할 수 있다.[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 프리드리히 엥겔스 지음, 김대웅 옮김, 도서출판아침, 1989년, 40쪽]

이 문구가 당시의 경건한 마음으로 가부장적인 가족 이데올로기를 받아들이던 많은 사람들을 분노케 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인용한 책의 제4판 서문을 직접 쓴 엥겔스는 서문에서 1860년대 초까지만 해도 역사과학은 완전히 ‘모세5경’의 영향 아래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그 책에 상세하게 묘사된 가부장제 가족 형태가 최고(最古)대의 가족 형태로 인정되었을 뿐 아니라, 그것이 일부다처제라는 점만 제외하고는 현대의 부르주아적 가족과 동일하다고 볼 수 있다고 적고 있다.

이러한 종교적 신념을 가진 이들에게 과거에는 무규율 성교가 금제(禁制)가 아니었다고 말한다면 그들은 곧바로 ‘그래서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했다’라고 맞받아칠 것이다. 엥겔스는 책 전체에 걸쳐 그러한 맹신자들의 논리를 격파할 것인데, 그 서두에서 인류의 가족 역사가 무규율 성교가 횡행한 군혼(群婚)의 형태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엥겔스는 책 제목처럼 역사에서의 가족, 사유재산, 그리고 국가의 기원을 찾아나가는 흥미로운 지적인 여정을 떠난다.

한편, 또 하나 흥미로운 지점은 엥겔스가 무미건조한 톤으로 “질투의 감정이 비교적 늦게 발전하였다”라고 말하는 대목이다. 우리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본능이라 생각하는 것처럼 질투 역시 본능이라고 여기는데, 엥겔스는 그 생각이 틀렸다고 한 것이다. 그렇다면 질투라는 감정이 인류사에서 일으켰던 수많은 갈등, 범죄, 그리고 이를 묘사한 예술 작품도 실은 역사적 의식의 산물일 테니 인간은 후천적으로 발달한 감정에 휘둘리는 장기판의 말일 뿐이라는 묘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어쨌든 결국 인간의 역사는 질투라는 감정을 가지게 되면서 획기적으로 이전과 달라지게 된다. 바로 질투는 군혼에서 일부일처제 혹은 일부다처제의 가부장제 가족 형태로 바뀌는 촉매가 되었고, 소유욕은1 – 질투의 또다른 형태 – 공동체가 공유하던 재산을 혼자서 혹은 가족 안에서 소유하겠다는 사유재산의 발전의 원동력이 되었다. 그뒤 수많은 학자와 예술가는 질투, 소유욕, 이기심을 죄악시하기도 하고 정당화하기도 하면서 문화와 문명을 발전시켜왔다. 인류의 역사는 질투의 역사다.

  1. 엥겔스는 같은 책의 109쪽에서 이를 “야비한 탐욕, 한계를 모르는 향락욕, 더러운 인색, 공유재산의 이기적 약탈욕” 등의 용어를 써가며 비난하고 있다

녹색광선(Le Rayon Ve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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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y be found at the following website: http://www.movieposterdb.com/poster/c3a421ae, Fair use, Link

WARNING 스포일러 만땅

지난주 토요일 아침 다섯 시에 – 혹은 새벽 – 쿠팡 플레이에 있는 에릭 로메르 감독의 1986년작 ‘녹색광선(Le Rayon Vert)’을 봤다. 이름은 익히 들어서 알고 있던 작품이었고, 영화를 보기 전 ‘이 영화 보지 않았나’라고 잠깐 생각했던 영화다. 그런데 봤던 영화는 아니었었다. 얼핏 비슷한 이름의 다른 프랑스 영화랑 헷갈렸던 것 같다. 문득 궁금해서 지금 검색해보니 장 자크 베넥스 감독의 1980년작 디바(Diva)랑 혼동했었다. 제목도 전혀 비슷하지 않은데 왜 헷갈렸는지 모르겠다. 내 열등한 회색 뇌세포 탓이겠지.

영화의 전체적인 느낌은 토요일 아침에 보기 좋은 영화였다. 플롯의 엄밀성이나 연출의 치밀함에 대해 바짝 신경 쓰지 않아도 감상에 큰 무리가 없는 스낵 같은 작품이었다. 영화를 보면서 어떤 영화 스타일이 생각났고 검색을 해보니 아니나 다를까 에릭 로메르를 지극히 존경하는 한국 영화인이 있었으니 홍상수였다. ‘녹색광선’은 프랑스판 홍상수 영화였다. 보다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변방의 홍상수라는 영화인이 그 스타일을 베낀 에릭 로메로 스타일의 프랑스 누벨바그’였다. 이런 스타일에 익숙하게 해준 홍 감독에게 감사.

영화를 보는 동안 여주 델핀(Delphine)이 계속 영화 제목 녹색광선이 의미하는 바에 대한 암시를 던진다. 녹색이 최근 자신의 운세에 좋다는 둥의 대화를 통해서 말이다. 극 중간쯤 가서 델핀이 들른 한 해변에서 마침내 델핀의 옆에 있던 한 노인들의 대화를 통해 녹색광선이 무슨 의미인지 밝혀진다. 극에서 말하는 녹색광선은 일몰시 태양의 윗부분이 초록색으로 보이는 광학 현상을 의미한다. 그리고 또한 그 표현은 그러한 현상을 소재로 사용한 쥘 베른의 ‘녹색광선’이라는 소설을 의미한다. 무척 다층적인 이미지인 셈이다.


저물녘 드물게 볼 수 있다는 녹색광선의 한 사례(이미지 출처)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쥘 베른의 ‘녹색광선’은 평소 그가 주로 쓰던 공상과학 장르가 아닌 로맨스적 요소가 많이 담긴 소설이라고 한다. 영화에서 이에 대해 논하는 노인들의 관점이 흥미로웠는데 그들은 쥘 베른의 대표작인 ‘해저2만리’는 재미가 없었고 ‘녹색광선’이 좋았다는 의견을 피력한다. 나도 현재 읽고 있는 여러 책 중에 예의 ‘해저2만리’가 있어서 흥미로운 분석이었다. 사견으로 재미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 소설을 읽지 않은 사람이 보기에는 다소 신파조로 보일만 할 만큼 장광설적인 요소가 있다. 지루한 편이긴 하다.

어쨌든 이 대화를 엿들은 (삶이 무료했던) 델핀은 녹색광선을 보기로 마음먹은 것 같다. 영화 줄거리에 ‘녹색광선을 찾아 떠났다’는 식의 소개도 있는데 내가 보기에 그가 의도적으로 녹색광선을 쫓았다기보다는 남친도 무의미하고 휴가도 무의미한 무력한 파리쟁이 여행지에서 마주친 훈남과 석양을 보러갔다가 운 좋게 녹색광선이 보이는 일몰을 보게 된 쪽에 가깝다. 이러한 애매모호함도 영화에서 중요한 요소다. 사는 것이 마음대로 되지도 않고 어쩌다 생각지도 않게 원하는 것이 걸려드는 것도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 아닐까?

토요일 아침에 보기에 부담 없는 영화라고는 했으나, 사실 보는 내내 여주의 ‘까칠함’에 적잖이 짜증이 났었다. 어쩌다 휴가 계획을 망쳐버린 그를 위해 친구들이나 주변의 다른 이들이 이런저런 식으로 많이 배려해주는데 델핀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까칠하거나 울음을 터뜨리는 등의 개인주의적으로 행동한다. 녹색광선을 여행지에서 마주친 훈남과 같이 보는 장면에서조차 그의 이런 기행은 멈추지 않는다. 델핀의 이런 행동은 어쩌면 감독의 의도된 연출인 것 같다. 감독 스스로가 이런 식으로 누벨바그의 아웃사이더였다는 점에서.

장미 가꾸기에 진심이었던 조지 오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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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BChttp://www.penguinbooksindia.com/en/content/george-orwell, Public Domain, Link

지난여름 나는 전쟁 전에 살던 작은 시골집을 지나가고 되었다. 내가 심을 땐 아이들 새총보다 크지 않았던 조그만 백장미가 거대하고 왕성하게 우거져 있었고, 앨버틴 또는 그 비슷한 무엇은 분홍 꽃송이를 구름처럼 터뜨린 채 울타리 절반을 뒤덮고 있었다. 둘 다 내가 1936년에 심은 것들이었다. 그때 떠오른 생각은 ‘전부 겨우 6페니 주고 산 건데!’였다. 나는 장미가 얼마나 오래 사는지 알지 못한다. 평균수명이 10년은 되지 않을까 싶다.[나는 왜 쓰는가, 조지 오웰 저, 이한중 역, 한겨레출판, 2015년, 177쪽]

조지 오웰이 쓴 신변잡기 성 칼럼이다. 우리 집에도 장미가 피었다. 빨간 장미다. 전 주인이 심어놓은 것이다. 나는 오웰이 그랬던 것처럼 식물에 관심이 많지 않아서 – 사실 아예 없다 – 장미가 필 때에야 ‘예쁘다’하며 감상하거나 사진이나 찍어 인스타에 올리기 바쁘지, 꽃이 피기 전에는 그 어떤 관심도 없었다. 그런 나를 아내가 타박하며 장미를 돌보라고 시키기에 몇 달 전엔가 비료를 이사 온 이후 처음으로 주긴 했다. 그 덕분인지 아니면 원래 생명력이 강해서인지는 모르겠으나 일주일 전쯤부터 꽃이 피기 시작했다. 내 집인데도 이렇게 관심이 없는데, 오웰은 세 들어 살고 있던 집에서도 – 저 집은 세 들어 살던 집이었다고 한다 – 정성스레 장미를 가꿨었다니 역시 뭔가 – 우리가 선입견을 품고 있는 – 영국인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가드닝에 진심인 영국인?

병렬독서가(竝列讀書家)의 푸념

최근에 책을 읽으면서 고민 아닌 고민을 하고 있다. 책도 진득하게 읽지 못하는 주제에 – 책을 읽으면서도 늘 옆에 휴대전화를 끼고 있다 – 읽고 싶은 책은 많아서 다른 책을 펼쳐 읽게 되는 것이다. 소위 요즘 유행하는 표현으로 – 아마 트위터에서만 유행하는 듯 하지만 – “병렬독서”. ‘병렬’과 ‘독서’를 조합한 표현이기에 직관적으로 무슨 의미인지는 대략 짐작할 수 있고, 실제로도 ‘여러 권의 책을 동시에 읽는 독서 습관’을 일컫는 표현으로 쓰이고 있다. 아무튼 아직 한 단어로 공식적으로 인정되지는 않은 표현이다. 외국에서도 이런 독서습관이 제법 있어서 영미권에서는 Polyreading이 그러한 습관을 의미하는 표현이고, 일본에서는 흔히 ‘쌓아두고 읽는다’고 하여 ‘적독(積読, 츤도쿠)’라고 표현한다고 한다.

어쨌든 병렬독서, 폴리리딩, 츤도쿠 웟에버…. 이런 독서습관이 좋은 습관이든 아니든 개인적으로는 계속 신경 쓰이는 것이 사실이다. 왜냐하면 나름 일종의 고답적인(?) 관념으로 ‘뭔가 하나를 제대로 마무리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선입견이 내 머릿속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또 한편으로 이런저런 호사가적 호기심 때문에 이 책을 읽다가도 다른 책이 신경 쓰이고 다른 책을 읽다가도 다른 영화가 보고 싶고 그렇게 조금씩 반경을 넓히다보니 어느새 원래 읽던 책은 끝날 기미가 안 보이고 그런 지경에 이른 상황이다. 처음 시작한 책을 끝내야 하는 것은 순전히 개인적인 문제에 불과함에도 혼자서 찝찝한 – 마치 휴대전화 앱아이콘 오른쪽 상단에 숫자 표시가 남아있는 것을 싫어하는 것처럼 – 그런 상황이다.

요즘 병렬독서 목록 중에서 집중적으로 읽고 있는 책에 대해 잠깐 언급하자면 페르낭 브로델의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베른트 뢰크의 「피렌체 1900년」, 윌리엄 L. 샤이러의 「제3제국의 흥망」, 프랭크 허버트의 「듄의 메시아」, 아닐 아난타스와미의 「기계는 왜 학습하는가」, 모리시(Morrissey)의 「Autography」 정도다. – 목록도 계속 이야기하다보면 끝이 없으니 여기서 끊도록 하겠다 – 두서없어 보이는 장르라는 점에서 어릴 적 성적표에 늘 적혀있던 담임선생님의 염려, 즉 ‘주의가 산만한’ 성격이 제대로 드러난 행태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근본적으로 책도 기승전결과 전달하고자 하는 큰 메시지가 있는데 그 와중에 다른 책을 읽으면서 맥락도 끊기며 앞서의 책이 줄 수 있던 감동이 식는 부작용도 우려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우려를 불식시킬지도 모를 책을 발견했다. 이 트윗이 소개하는 책인데 일본의 서평가 나가타 노조미(永田希)가 쓴 「적독(積読)이야말로 완전한 독서술이다」라는 책이다. 제목만 봐도 내 두서없는 독서 습관이 잘못된 것이 아니었다고 위로받을 수 있는 – 또는 더 완벽한 적독의 스킬을 배울 수 있는 – 책이란 사실을 알 수 있다. 책 내용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근본적인 장애물은 내가 일본어를 못한다는 점이다. 한국어 번역본이 소개될 때까지 기다려야 할 것 같다. 그때까지는 – 또는 번역돼서 출간된다 해도 다른 책 읽느라 읽을 시간이 없을 가능성도 높지만 – 책 제목 자체만으로 나름 내 어수선한 독서습관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산만한 독서가 아예 읽지 않는 것보다는 낫지 않은가?

책을 한 번에 몇 권씩 읽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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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보는 미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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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BO – http://www.impawards.com/tv/succession_ver2.html, Fair use, Link

요즘 쿠팡플레이에서 석세션(Succession)을 보고 있다. 어제 시즌 2의 첫 번째 에피소드를 봤다. 로간 로이(Logan Roy)라는 독재적인 성향의 인물이 일군 미디어제국의 권력이 그의 자식들로부터 도전을 받는 시점부터 시작하는 작품인데, 유명한 미디어 재벌 루퍼트 머독 일가의 실제 모습을 많이 참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실제로 루퍼트 머독 일가는 석세션처럼 지금도 치열하게 권력 투쟁 중이다) 공간적 배경인 (언젠가 다시 가보고 싶은) 뉴욕 맨해튼을 묘사하는 차가운 톤의 역동적 촬영이 극에서의 냉정한 인간관계와 잘 어울려 재밌게 보고 있다.

어쨌든 자본은 지금은 각종 엄밀한 법률적 장치와 절차에 의해서 그 지분(equity)이 합리적으로 통제받는 것으로 인식되지만, 이 작품을 보면 사실은 그 자본 안에서는 여전히 봉건적이고 매우 인간적인 (도덕적이거나 합리적 우열을 가리려는 호불호에 상관없이) 기제가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과 같은 초미래의 시대를 설정한 작품에서조차 그러하듯이 여전히 권력 내에서의 작동 기제는 중세 혹은 더 거슬러 올라가는 권력에서의 그것이 그러하듯이 협잡과 윽박지름과 합종연횡의 줄타기를 통해 관철되고 있다. 한마디로 기싸움이다.

로간 로이 역의 브라이언 콕스(Brian Cox)는 제이슨본 시리즈의 본아이덴티티(The Bourne Identity)에서 악역으로 출연하였을 때의 연기로 인상이 깊었던 배우인데, 막무가내 재벌 1세의 캐릭터가 너무 잘 어울리는 배우다. 로간에 대항해서 열심히 반항하는 아들 켄달 로이 역의 제레미 스트롱(Jeremy Strong) 캐릭터도 인상적이다. 애사심에 아버지에 대항하는 척하면서도 결국 억제할 수 없는 권력에로의 본능을 드러내는 뽕쟁이 재벌2세의 캐릭터를 잘 소화해내고 있다. 이외의 조연들의 호연도 극을 재밌게 감상할 수 있는 매력포인트다.

그중 특히 흥미로운 캐릭터/배우는 권력 의지 없는 맏형 코너 로이(Connor Roy)역의 앨런 럭(Alan Ruck)이다. ‘어디서 많이 봤다’ 생각하며 보다보니 알아차린 건데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80년대 코미디 ‘페리스의 해방’에서 역시 삶의 의욕이 없는 부잣집 외아들 캐머런 프라이(Cameron Frye) 역으로 – 의욕 없는 부잣집 아들 역이 종특? – 나온 배우다. 아버지의 재력에 빌붙어먹는 한량이 현재까지 본 중 딱 한번 좌파 상원의원인 길 이비스(Gil Eavis)를 만나 적대감을 드러내며 권력의지를 드러냈다. 대통령이 되겠다고. 🙂

이것은 지브리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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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né Magritte(1898-1967) – Image taken from a University of Alabama site, “Approaches to Modernism”: [1], Fair use (Old-50), Link

요즘 카카오톡의 프로필 업데이트 상황을 보고 있으면 신기한 현상을 발견할 수 있다. 프로필을 업데이트한 사람들의 대표이미지의 60~70%가 익숙한 만화풍의 이미지를 올리고 있는 것이다. 바로 지난 25일 오픈AI가 내놓은 ‘챗GPT-4o 이미지 생성‘(ChatGPT-4o Image Generation) 모델에서 새로 제공하고 있는 서비스 중 하나인 일본 애니메이션 스튜디오 지브리의 화풍을 모방한 이미지 생성을 활용한 이미지다. 지브리 스타일 이외에도 디즈니, 픽사 스타일 등의 이미지 생성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는 모양인데 우리나라에서는 압도적으로 지브리 스타일을 선호하는 것 같다. 역시 소셜미디어 주 소비층인 우리나라의 60~70년대생 세대의 지브리에 대한 애정은 그만큼 더 각별한 것 같다.

문제는 평소 미야자키 하야오AI 창작물에 대한 지론을 놓고 봤을 때 그는  이런 인기를 달가워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다만, 지브리 쪽은 오픈AI의 행동에 대해 아직 입장을 내놓지 않고 있다. 하지만 지브리의 구체적인 작품을 베낀 것이 아닌 그 스타일을 흉내 내는 것이 저작권 침해인가에 대한 논쟁은 벌써 시작됐다. 미술가 칼라 오티즈는 “오픈AI 같은 회사들이 예술가들의 작품과 예술가들의 생계에 대해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또 다른 명백한 예“라며 오픈AI를 비난했다. 로펌 ‘프라이어 캐시먼’의 파트너 변호사 조시 와이겐스버그는 막연한 ‘스타일’이 저작권으로 보호되지는 않는다는 대략의 원칙이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문제가 없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고 발언했다.

또 하나 흥미로운 현상이 있는데 이스라엘 군인들이 자신들의 모습을 이 서비스를 이용해 생성한 이미지를 엑스에 올린 것이다. 해당 계정은 이 이미지를 올리며 “우리도 ‘지브리 트렌드’에 편승하기로 했다”고 적었다고 한다. 현재 팔레스타인 영토에서의 민간인 학살로 비난을 받고 있는 이스라엘이 이러한 트윗을 통해 본인들의 이미지를 세탁하는, 이른바 화이트워싱(Whitewashing)에 AI 서비스, 더 구체적으로 지브리의 스타일을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미야자키 하야오는 일본제국이 저지른 과오들을 미화하지 않고 그대로 직시하는 반전(反戰)주의자이다. 그런데 학살을 자행하고 있는 군대가 하야오 스타일을 베낀 AI서비스로 자신들을 미화하고 있는 상황인 것이다.

오픈AI의 CEO 샘 올트먼은 지난달 31일 엑스를 통해 “지난 한 시간 동안 100만 명의 이용자가 늘어났다”며 2022년 챗GPT 출시 5일 만에 이용자 100만 명을 달성한 것보다 더 빠른 속도의 증가폭이라고 전했다. 저작권 이슈나 자사의 서비스를 이용한 화이트워싱 이슈가 어찌 됐든 일단 이용자수를 확보해서 시장우위를 점하겠다는 전략은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굉장히 무신경하고 독선적인 전략으로 보이지만, 빅테크 수장의 이런 무신경함이 새로운 것은 아니다. 이미 페이스북, 유튜브 등 많은 소셜미디어는 저작권의 가장 큰 침해주체이고, 가짜뉴스의 최대 플랫폼이 된지 오래다. 오픈AI는 그러한 빅테크 선배의 행태를 다시 답습하고 있을 뿐이다. 힘의 우위가 창작자의 권리를 착취하고 있다.

르네 마그리트의《이미지의 배반》이라는 작품이 있다. 이 작품에는 파이프가 그려져 있는데 하단부에는 ‘Ceci n’est pas une pipe'(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고 쓰여 있다. 사람들의 관습적인 사고방식을 당황케 하려는 작가의 의도다. 하지만, 틀린 말도 아니다. 작품은 파이프를 추상화한 이미지이지 파이프 그 자체는 아니다. 예술은 존재의 본질(originality)을 모사하며 개성(personality)을 부여한다. 개성이 부여되는 한 본질을 넘어서는 창조물이라는 점에서 모방이 허용된다. 모든 창조물은 창작자의 시각과 스타일이 반영된 끊임없는 모방이다. 마그리트는 이 사실을 감상자에게 상기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가 배반한 것은 감상자의 선입견이고, 배반하지 않은 것은 창작자의 개성과 예술성이다.

다른 창작자들은 기존 창작자의 작품을 오마주/패러디하는 방식으로 새롭게 모방한다. 그런데 이 모방이 나쁜 의도로 행해질  기존 창작자의 창작 의지를 꺾거나 창작 의도를 왜곡하는 때도 있기에 저작권이 존재한다. 많은 경우 저작권 침해는 모방자의 물질적 이해관계 때문에 발생한다. 오픈AI의 서비스가 지브리의 모방을 통해 새로운 개성을 부여한 것도 아니고 단순히 시장 선점이 목적일 것이라는 개연성 때문에 일단 저작권 침해 여부를 떠나 좋지 않은 의도의 권리 침해라 여겨진다. 즉, 그들은 이용자에게 지브리 스타일의 이미지를 제공하면서도 ‘이것은 지브리가 아니다’라는 식으로 모방의 권리를 내세우며 권리의 경계를 허물려 하고 있다. 우리는 그 경계에 대해 다시 고민해야 할 상황이다.

펜실베이니아역의 시계

사무실에 액자를 하나 걸어뒀는데 알프레드 아이젠슈테트(Alfred Eisenstaedt)라는 유명한 사진작가가 1943년에 찍은 뉴욕의 펜실베이니아역의 풍경이 담긴 사진이다. 작품의 제목은 Clock in Pennsylvania Station으로 높은 위치에서 아래를 바라보며 찍은 사진에 역 천장에 걸려 있는 커다란 시계가 하나 보이고 – 약 (필시 오후) 2시 40분가량을 가리키고 있다 – 아래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그런 사진이다.

시계에 무어라 적혀있는데 분침 때문에 첫 번째 단어가 잘 안보여 다른 사진을 찾아보니 Eastern Standard Time이었다. 즉, ‘미동부 표준시’라는 의미다. 즉, 사진을 벽에 걸어놓은 내가 때때로 그 사진을 볼 때 나는 1943년 어느 날 미동부 표준시로 오호 2시 40분에 펜실베이니아역에 있던 한 무리의 사람들과 그 풍경을 보고 있는 것이다. 정지된 시공을 담는 사진이라는 매체의 매력이다.

이런 사진이나 흑백영화를 볼 때면 고질병처럼 ‘저 사람들은 이미 모두 이 세상 사람들이 아니겠지’라는 생각이 머리에 떠오르곤 한다. 사진에는 20대 이상의 성인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대부분인지라 대략 1920년대 이후 출생하신 분들일 테니 지금 생존해계신다면 100세를 넘으셨을 것이라 여겨지고 대략 9할 이상은 돌아가셨을 것이다. 이 생각을 하면서 또 작품의 맥락과 상관 없이 괜히 우울해지곤 한다.

그런 의미에서 다시 제목이 말해주는 것처럼 작품의 주인공인 시간을 알려주는 기계와 시간의 흐름을 거역할 수 없는 인간들이 한 프레임에 담긴 사진을 물끄러미 보면서 청승맞은 우울한 감정에 사로잡히는 것이 인간으로서의 내 나약함의 증거이다. 인간이 만들어놓은 시간이라는 개념에 무력한 그 인간이라는 존재, 그리고 죽음을 기억하게 되기 때문이다.

but time
keeps flowing like a river (on and on)
to the sea, to the sea
Till it’s gone forever

알란파슨스프로젝트라는 80년대 밴드의 Time이라는 노래 가사의 일부다. 시간은 강과 같이 바다로 흐른다는, 시간을 시각화한 노래다. 차분한 템포의 이 노래를 듣고 있자면, 자연스레 고요히 흐르는 시간의 강물이 연상된다. 내가 태어나지도 않았던 1943년의 한 기차역에서 흘러왔던 시간의 강물이 주는 중압감이 내 뇌리에 약하게나마 느껴지는 아침이다.

잡담

Bühnenbildentwurf Rheingold.JPG
By Viktor Angerer – postcard, Public Domain, Link

리하르트 바그너의 최고의 걸작으로 알려진 ‘니벨룽의 반지’를 영상으로 감상하고 있다. 10시간이 훌쩍 넘는 대작인지라 작년부터인가 ‘한번 완주해봐야지’라고 마음을 먹고 있기는 했는데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이번에 긴 연휴 기간이라 일단 영상을 틀어놓고 보기 시작했다. 솔직히 엄청난 걸작이라고는 하는데 저 유명한 ‘발퀴레 동기’ 연주가 흐르기 전까지는 그 노래가 그 노래같고 그 연주가 그 연주같아서 도닦는 기분으로 계속 보고 있고 현재는 주요 캐릭터 중 하나인 보탄이 그의 명령을 거스른 딸 브룬힐데를 힐난하는 부분까지 감상하였다.(이제 한 4분의 1 온듯)

다만 스토리의 밑바탕은 북구신화인지라 극의 전개는 흥미롭다. 특히 절대반지가 최고의 권력을 상징하는 상징이라는 설정은 이미 많은 이들이 톨킨이 쓴 ‘반지의 전쟁’ 등으로 익숙한 설정이다. 지금 읽고 있는 빌헬름 게를로프의 ‘화폐 계급 사회’라는 책에서 상류층이 자신들만의 화폐로 사용하기 위해 금을 사용하고 이를 반지로 만들어두었던 역사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하는데, 어쩌면 바로 인간 스스로가 절대반지를 꿈꾸며 그러한 ‘사회/경제적’ 행위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신화를 통해 이야깃거리로 재탄생시킨 셈이다. 현대의 절대반지는 뭘까? 금? 달러? 비트코인?

전에 당근에서 북구신화를 사놓고 어딘가에 팽겨쳐 놓았는데 찾아서 한번 진지하게 읽어봐야겠다.

뉴욕에서의 영국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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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iscogs, Fair use, Link

Sting만큼 그룹 활동과 솔로 활동에서 모두 엄청난 음악적/상업적 성공을 거둔 뮤지션도 그리 많지 않다. 레게에 기초한 펑크락 밴드 The Police로 다섯 장의 스튜디오앨범을 내놓으면서 내놓은 음반 하나하나 비평적으로나 상업적으로나 큰 호응을 얻었고 1983년 Synchronicity를 내놓으며 그룹 활동의 정점을 찍었다. 그 이후 그는 슬슬 솔로 활동을 예열하더니 1985년 The Dream of the Blue Turtles를 내놓으며 밴드 리더에서 솔로 뮤지션으로 부드럽게 넘어가 버렸다.

그뒤 2025년 현재까지 열다섯장의 스튜디오앨범을 내놓는 등 – 분량이 밴드 활동 시기의 세배! –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이러한 다작 활동 중에서도 사람들이 가장 사랑하는 그의 솔로곡을 꼽으라면 많은 이들이 단연 그의 솔로 2집 Nothing Like the Sun의 세번째 트랙으로 수록된, 뉴올리언스 출신의 째즈 뮤지션 브랜포드 마살리스(Branford Marsalis)의 쓸쓸한 소프라노색서폰 연주가 곡 전면에 깔리는 ‘뉴욕에서의 영국인(Englishman in New York)’ 을 꼽을 것이다.

“Be yourself no matter what they say”라는 가사가 계속 반복되는 – BTS가 주체성을 강조하기 이전에 이미 스팅이 강조하고 있었다 – 이 노래가 만들어진 스토리는 곡의 매력만큼이나 매력적이다. 일전에 트위터에서 누군가 같은 영어권에서 살면서 “I’m an alien, I’m a legal alien”이라고 푸념하는 스팅이 오만하다는 투의 트윗을 해서 다른 이들의 어그로를 끈 적이 있는데 – 지금은 그 트윗을 지웠는지 안보임 – 트위터에서 몇몇이 지적했다시피 이 노래는 스팅 자신의 이야기가 아니라 – 부분적으로는 자기 이야기기도 하지만 – 그가 알고 지내던 또 다른 영국인 이야기다.

In New York City, 1992
By Ross B. Lewis – Private correspondence, CC BY-SA 4.0, Link

그의 이름은 쿠엔틴 크리스프(Quentin Crisp, 본명 Denis Charles Pratt)로 아티스트의 모델 등으로 활동한 저술가/예술가이자 커밍아웃한 게이다. 1908년 생인 그는 환갑의 나이가 다 된 1968년 자서전 The Naked Civil Servant1 를 내놓는다. 1964년 입담이 좋았던 쿠엔틴은 한 라디오 인터뷰에서 누드모델, 책 디자이너, 성매매 노동자 등으로 일했던 자신의 삶을 이야기했다. 영국의 Jonathan Cape라는 출판사의 임원이 이 인터뷰를 듣고 책으로 낼 것을 제안했고 영화로도 제작되는 등 꽤 인기를 얻게 된다.

1978년 당시 만담가로 활동하던 그는 뉴욕으로 공연을 위해 떠났다가 아예 뉴욕에 정착하게 된다. 뉴욕에서도 저예산으로 제작된 햄릿(1976년)의 배우로 출연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던 그는 1985년 The Bride라는 이름의 고딕로맨스 영화에 잴허스(Zalhus) 박사 역으로 출연하는데2 이 영화의 주인공이 바로 찰스 프랑켄슈타인 남작 역을 맡은 스팅이었다. 쿠엔틴의 재치있는 입담에 깊은 인상을 받았을 스팅은 1987년 쿠엔틴에 관한 노래 Englishman in New York을 발표한다.

노래 가사를 보면 곡의 주인공은 뉴욕에 와서도 영국식 습관을 버리지 않는다. 커피 대신 차를 마시고, 영국식 액센트도 그대로이고, 신사는 절대 뛰지 않고 걷는다는 식으로 말한다. 그런데 이 노래에는 쿠엔틴의 동성애자로서의 정체성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Be yourself no matter what they say”라는 가사가 그의 정체성에 대한 뉘앙스만 약간 풍길 뿐이다. 쿠엔틴은 생전에도 게이 해방운동을 냉소적으로 대했다고 한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동성애 자체가 범죄인 영국에서 그가 일종의 생존의 수단으로 냉소주의를 택한 영향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러하기에 노래는 이방인(지역 혹은 성적정체성)으로서의 주체에 관한 이야기인 동시에 그냥 가볍게 들을 수 있는 한 독특한 이주민에 관한 이야기기도 하다.

“Quentin’s a friend of mine and someone I admire greatly because I think he’s one of the most courageous people I’ve ever met. He has lived his life in an individual way in a society that is vicious and malevolent. But he is a hero in a feminine way. So that’s a song about the feminine qualities than can exist in man without being negative.”
“쿠엔틴은 제 친구이고 제가 매우 존경하는 사람인데, 제가 만난 사람 중 가장 용감한 사람 중 하나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사악하고 악의적인 사회에서 개인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삶을 살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여성적인 방식으로 영웅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부정적이지 않고도 남성에게 존재할 수 있는 여성적인 특성에 대한 노래입니다.” ~ Timeout, 1987년 10월

스팅의 타임아웃과의 인터뷰 중 쿠엔틴에 관한 이야기다. 다른 인터뷰에서 스팅은 “게이인 것이 신체적으로 위험한 시기에 그는 화려한(flamboyantly) 게이였고 가장 위트가 넘치는 사람”이었다고 말한다. 앞서도 말했듯이 쿠엔틴의 동성애자로서의 혼란과 위험성에 대한 극복 수단은 유머(혹은 냉소)였다. 일종의 생존하기 위한 생계수단이었다. 또한 스팅이 언급하는 바와 같이 남성성과 여성성에 대한 구분짓지 않기 또한 중요한 태도인데, 이러한 자세가 필요함은 전에 소개한, (역시) 뉴욕에서의 한 게이바의 군무를 묘사한 조잭슨의 Real Men이란 곡에서도 강조하고 있다.

See the nice boys dancing in pairs
Golden earring, golden tan, and blow wave in their hair
Sure, they’re all straight, straight as a line3
All the gays are macho, can’t you see the leather shine?

멋진 남자들이 짝을 지어 춤추는 걸 보세요
금빛 귀걸이, 황금빛 태닝, 그리고 머리카락에 불어오는 웨이브
물론, 그들은 모두 스트레이트합니다. 일직선 춤라인처럼요
게이들은 모두 마초예요, 가죽이 빛나는 걸 못 보나요?

뮤직비디오는 완연한 째즈 풍의 곡에 맞게 뉴욕을 배경으로 인상적인 풍경이 펼쳐지는 흑백 화면으로 구성되어 있다.4 지금 봐도 멋진 스타일의 스팅이 등장하고, 이야기의 주인공 쿠엔틴 크리스프가 등장하고, 브랜포드 등 연주자가 등장한다. 하지만 이들은 서로 교차하지는 않는다. 다들 뉴욕을 배회하는 이방인들일 뿐이다. 비디오의 마지막 장면에서도 브랜포드는 쓸쓸히 홀로 길을 걸어간다.5 이러한 흑백화면의 비디오가 80년대말 여러 인기 뮤지션들의 영상의 트렌드로 쓰였는데 언뜻 생각나는 것은 펫숍보이스마돈나다. 이 비디오도 모두 화려하다(flamboyant).

누가 뭐라든 내 자신이 되라”……. 살면서 가장 실천하기 어려운 주제다.

  1. 그는 한 예술학교에서 누드모델로 일했고 급료는 교육부가 지불하여서 결국 자신도 일종의 공무원이라고 쿠엔틴이 비꼬는 투로 표현한 것에서 책 이름을 따왔다고 한다
  2. 이 영화에는 또한 Flashdance를 통해 1980년대 영화계에 강렬한 인상을 남긴, 그러나 이후의 인상적인 필르모그래피를 이어가지 못한 제니퍼 빌즈(Jennifer Beals)가 출연한다고 한다
  3. 조잭슨은 “그래 그들은 다 똑바르지(straight). 줄만큼이나.”에서는 straight의 중의적 의미를 가지고 말장난을 하고 있다
  4. 감독은 그 유명한 데이빗 핀처(David Fincher)
  5. 흥미로운 것은 스팅이 뿌연 창밖으로 보며 노래하는 장면이 있는데 여기에 지금은 없어진 쌍둥이 빌딩의 실루엣이 보인다

Stuart Price

아침 출근길에 요즘 가장 핫한 뮤지션 중 하나인 Dua Lipa가 2020년 내놓은 그의 2집 Future Nostalgia를 감상했다. 이 앨범은 그의 섹시한 외모와 허스키한 보컬이 신쓰웨이브 풍의 레트로한 디스코 리듬과 화학적 결합에 성공하여 팬데믹 시절 공연이 여의치 않음에도 불구하고 전 세계적으로 엄청난 인기를 얻은 앨범이다. 한편 이 앨범을 감상하며 흥미로운 인물을 한 명 다시 만날 수 있었는데 앨범의 프로듀서로 참여한 Stuart Price다.

스튜어트 프라이스의 이름이 대중에게 가장 널리 알려지게 된 때는 Madonna와 함께 그 유명한 Hung Up을 선보였을 때다. 마돈나라는 레트로한 뮤지션을 레트로한 에어로빅복을 입혀 레트로한 ABBA의 Gimme! Gimme! Gimme!를 샘플링한 곡을 부르게 하여 – 역의 역의 역발상 – 제2의 전성기를 맞게 한다는 시나리오는 좀 과잉설정일 정도로 황당한데 실제로 이 스토리를 성공시킨 이가 바로 스튜어트 프라이스다. 이런 시도는 뮤지션의 미래 – 나아가 음악의 미래 – 를 제시하는 수단이 레트로라는 점에서 이른바 레트로퓨처리즘(Retro Futurism)적인 시도라 할 수 있다.1

Stollwerck 1898 Im Jahre 2000. Ein Reisehotel.jpg
By Unknown (Name unten links nicht lesbar) – [1], Public Domain, Link
레트로퓨처리즘적인 그림 하나 : 예전 사람들이 상상했던 2000년대

2000년대 즈음하여 1980년대의 신쓰팝을 추종하여 새로운 장르를 실험한 신쓰웨이브(Synthwave)가 바로 이러한 레트로퓨처리즘 노선을 취하고 있다. 그들은 80년대 신쓰팝, 유명한 80년대 미드 Miami Vice 등의 오리지널을 가지고 재생속도를 늦춘달지, 의도적으로 비디오 재생이 찌그러지는 화면을 만든달지, 느닷없이 그리스의 조각상이 등장한달지 하는 방식을 통해 그 시절을 추억 – 패러디, 오마쥬, 희화화, 대상화 그 어떤 표현이든 – 하는 의식을 거행하면서 서브장르로서 어느 정도 유명해졌다.

신쓰웨이브가 메인스트림으로 올라선데에는 The Weeknd의 공헌이 적지 않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Stuart Price 역시 공헌자로서의 적지 않은 지분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80년대 키드로서 실력을 쌓아 Madonna, Pet Shop Boys, New Order 등 80년대의 적자(嫡子)의 앨범의 프로덕션을 맡으면서 그들과 본인의 커리어하이를 찍을 수 있게 해주었다. 그리고 신예 두아리파 역시 그의 손을 빌어 영국 국내용 뮤지션이 아닌 글로벌 댄싱퀸의 자격을 획득했다. 음악인으로서 더 좋을 일이 있을까? 자신이 즐겨듣던 이들의 음악을 배워 다시 자신이 그 스타일로 프로덕션해주고 이를 다시 신예에게 활용하는 경험을 갖는다는 것.

Nbc miami vice 02.jpg
By http://www.nbc.com/Vintage_Shows/Miami_Vice/photos/index.shtml#cat=733&sec=1602&mea=38829, Fair use, Link
Synthwave 뮤지션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고 있는 마이애미바이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정작 스튜어트 프라이스의 활동 중 좋아하는 시기는 그가 직접 뮤지션으로 무대를 뛰던 시기다. 그는 프로듀서로 본격적으로 나서기 전에 Les Rythmes Digitales라는 솔로프로젝트로 음악을 만들었고 Adam Blake, Johnny Blake 와 함께 Zoot Woman이라는 3인조를 결성하여 몇장의 음반을 내놓았다. 개인적으로는 특히 주트우먼 시절을 좋아한다. 이들의 컨셉트 역시 레트로퓨처리즘이었다. 2000년대였음에도 일부러 촌스러운 정장 차림으로 80년대 신쓰팝을 재생하면서도 그 이후의 댄쓰팝의 트렌드와의 가교 역할을 한 밴드가 바로 주트우먼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2024년 신보를 내놓는 등 여전히 활발하게 활동 중인 현재진행형 밴드다.

Duran Duran의 Girls on Film을 오마쥬한 것이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Zoot Woman의 Living in a Magazine 비디오

  1. Future Nostalgia라는 앨범명도 바로 이 Retro Futurism이라는 표현을 달리 표현한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