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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동안 계급투쟁을 잊어버리자” 나라 경제가 이런데….

“왜 빵의 부족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가?” 다른 병사가 소리쳤다.
“인간은 빵만으로는 살 수 없다.” 쮸드노프스키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 다음에는 멘셰비키적 방위주전론자로서 비테브스키 소비에트의 대표인 한 장교가 말했다. “누가 권력을 장악하고 있느냐 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제는 정부가 아니라, 전쟁이다. 그리고 어떤 변혁보다도 우선 전쟁에서 이겨야 한다.” 여기에서 야유와 빈정거리는 박수가 있었다. “볼셰비키 선동가들은 데마고그다!” 회의장은 웃음소리로 진동했다. “잠시 동안 계급투쟁을 잊어버리자”고 그는 말했으나 그의 말은 더 이상 계속 될 수 없었다.[세계를 뒤흔든 10일, 존 리드 저, 장영덕 역, 두레, 1993년, p63]

오랜만에 책꽂이에서 꺼내 읽은 책의 일부분을 인용해보았다. 미국 언론인 존 리드가 볼셰비키 혁명을 직접 체험하고 책으로 엮은 르포 문학의 걸작으로 평가받는 작품이니 만큼 현장에서의 생동감이 1세기가 지난 지금에 읽어도 어렴풋이 느껴질 정도다. 인용한 장면은 10월의 어느 날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의 한 철야회의에서의 모습이다. 계급모순과 민족모순 중에서 우선순위가 무엇인가라는 사회변혁의 오래된 이슈가 이 장면에서 또 한 번 연출되고 있는 점이 흥미롭다.

심사는 치열했습니다. 9시간을 넘겼습니다. “분식회계도 횡령도 아래에서 정상적으로 처리한 줄 알았다”는 게 김태한 대표의 입장, “분식회계도 증거인멸도 횡령도 김 대표의 지시를 받았다”는 게 김동중 삼바 전무의 입장이었습니다. 서로의 책임을 물었습니다. 이런 날선 내부 다툼과 법적 공방 끝에 삼성 측은 호소에 나섰다고 합니다. 어쩌면 ‘일격’에 가까운 호소,

“일본 문제도 있고, 나라 경제가 이런데….”

영장심사 결과는 김 대표도 김 전무도 모두 기각. 집으로 돌아갔습니다.[‘삼바’ 영장심사에서 나온 말, “나라 경제가…”]

존 리드의 책을 읽고 나서 뜬금없이 낮에 읽은 이 기사가 떠올랐다. 정확히 삼성 측의 누가 저 말을 했는지는 보도에 나와 있지 않지만, 여하튼 참으로 어이없는 적반하장 발언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삼성이 현재 일본의 무모한 정치적 도발의 책임을 져야 하는 당사자는 아니고, 일면 그 도발로 인한 피해자라고는 할 수 있을지 몰라도 구속영장심사 자리에서 피의자가 할 소리는 절대 아니기 때문이다. 아니 할 말로 일본 문제와 이들 기업의 분식회계가 무슨 상관이나 있기는 한가?

어쨌든 존 리드의 책을 읽다가 삼바 기사가 떠오른 것은 내부의 갈등을 외부의 적을 팔아 회피하려는 작태가 유사 이래 정치집단 내, 계급적 갈등관계에 있던 집단 사이, 심지어는 범죄 집단과 이를 단죄하려는 시민사회 사이에서도 단골 메뉴로 꺼내들었던 핑계거리가 되곤 했다는 점에서 약간의 연상 작용이 있었던 것 같다. 앞서의 장교는 어쨌든 선의에 의한 발언이라고 여겨지는 반면, 삼성 측의 주장은 본인들의 범죄를 나라가 처한 어려움을 틈타 빠져나가려는 야비함으로밖에 느껴지지 않는다.

나라 경제를 망쳐놓은 것은 본인들인데.

‘국가 단위의 기억’의 時限에 대한 단상

그러나 여기서 ‘소박한 의문’이 생긴다. 왜 두 차례의 참화를 겪으면서도 인류는, 특히 서양사회는, 자본주의 원리에 대해서 근본적인 재검토를 하려고 하지 않았을까. 슈펭글러나 폴라니 같은 뛰어난 사상가가 나타났는데도 왜 ‘이성신앙은 위험하다’든다 ‘자본주의는 악마의 맷돌이다’고 한 의식을 공유할 수 없었던 것일까. [중략] 여기서 우리는 하나의 ‘가설’을 생각하게 된다. 그것은 미국이라는 국가의 존재다. [중략] 자국이 한 번도 전장이 되어본 적이 없었던 미국인에게 그런 유럽인의 쓰라린 경험이 다른 사람 일에 지나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폴라니가 필생의 대저 “대전환”을 쓴 것은 대전 중의 미국이었지만, 그 의미를 미국인들은 실감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미국이 세계의 지배자가 되어 현대자본주의의 모순이 한층 더 확대된 것은 아닐까. 사실 현대경제학의 이론체계에서 주요한 부분은 전후의 미국이 만들어낸 것이다. 거기에서 신자유주의나 글로벌자본주의가 강력한 경제철학으로서 세계에 침투해 들어갔다.[자본주의는 왜 무너졌는가, 나카타니 이와오 지음, 이남규 옮김, 기파랑, 2009년, pp169~171]

인용문에서 “현대경제학의 이론체계에서 주요한 부분은 미국이 만들어낸 것”이라는 저자의 주장에는 약간 반감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일단 전후의 쓰라린 상처를 딛고 일어나기 위해 서구세계가 공통적으로 채용했던, ‘국가의 주도적인 역할 수행이라는 사고방식은 케인즈 적이라는 점에서 歐洲의 아이디어에 가깝고, 더욱이 “현대자본주의의 모순이 한층 더 확대된” 계기를 만든 ‘자기책임’을 강조하는 ‘신자유주의’의 이데올로기 역시 오스트리아의 프리드리히 하이에크에서 근원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가렛 대처, 로널드 레이건, 그리고 가깝게는 알란 그린스펀 등의 시장자유주의 전도사들은 하이에크의 저서와 소련에서 망명한 소설가 아인랜드(Ayn Land)의 사상을 교과서적으로 받아들였다. 즉, 직접적인 전쟁의 경험이 없기에 자본주의의 궤도를 수정하려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저자의 가설보다는, 오히려 전쟁의 부산물로서 탄생한 “공공의 적” 소비에트 집단주의에 대한 자유주의적 반발이 더 미국식 자본주의를 일종의 안티테제로 내세우는 계기가 되었다고 보는 가설이 타당해 보인다.

가설은 가설일 뿐이니 가설을 까기 위해 이 글을 인용한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이 인용문에 깔고 있는 전제로써의 “국가 및 지역 단위의 기억”이라는 가정이 맘에 들어서 인용을 했다. 사실 유럽은 아직도 전쟁 당시의 기억을 국가 및 지역 단위에서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그래서 반세기가 훨씬 넘은 지금까지 끔찍했던 전쟁을 피하기 위해 EU라는 연방국가를 꿈꾸고 있고, 독일은 그렇게도 인플레이션을 혐오하고 있으며, 주변국들은 압제적으로 보이는 독일의 모습에서 서슬 퍼런 파시즘을 연상하고 있다.

전쟁과 같은 혹독한 경험이 아닐지라도 국가/지역의 기억은 존속된다. 외환위기를 경험한 국가는 경제이론이야 어떻든 그 비용이 얼마든 간에 일단 외환보유고를 늘리려는 강박관념을 갖게 된다. 부동산 시장이 쭉 상승했던 국가는 빚내서 집사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문제는 그 기억이 전쟁의 기억만큼은 치열하지 않아서 오래가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인데, 대개 그 기억의 시한은 거시적 상황인가 미시적 상황인가에 따라 다르겠지만 한 경제주역의 세대가 물러가는 30~40년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전후 자본주의 영국은 노동당을 선택했고 미국은 진작 뉴딜이라는 새로운 경제체제를 받아들였다. 전간기의 자유방임적 체제의 폐해를 분명히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한 국가주도의 자본주의가 30~40년 쯤 지나고 석유위기가 봉착하자 이전의 기억이 퇴색하며 결국 국가 및 사회의 역할을 부정하고 개인의 자기책임을 강조하는 신자유주의를 채택하게 된다. 용어에 ‘신(neo)’자를 붙였지만 고전적 자유주의의 폐해가 어떠했는지를 기억하는 이는 많지 않았다. 국가 단위에서의 기억력이 쇠퇴한 셈이다.

시장근본주의의 폐해가 어떻게 되는지에 대한 기억은 또 한 번의 파괴적(일뻔 했던) 시스템의 위기를 겪고 나서야 다시 한 번 상기하게 되었다. 그래서 글래스-스티걸 법을 만들었던 기억을 되살려 도드-프랭크 법을 가다듬고 있다. 당시와 다른 점이 있다면 물적 조건은 한층 악화되어 있다는 점이다. 당시엔 미국이라는 거대한 자금의 원천이 있었다. 현재 그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후보인 중국은 사실 허울 좋은 껍데기에 가깝다. 그런 상황에서 개혁조치마저 전후의 그것에 미치지 못할 만큼 미봉책에 가깝다.

전후 영국의 노동당은 지금의 기준으로 봐서도 ‘소비에트와는 다른, 그러나 명백한 사회주의 국가’로 봐도 무방할 정도의 변혁을 추구했다. 주요기간산업은 빠르게 국유화되었고, 부자에 대한 세율은 혁명적으로 높아졌다. 유럽 대륙의 조치도 이와 비슷했고, 미국은 反소비에트 연합의 유지를 위해 이런 혁신조치를 용인하면서도 돈을 쏟아 부었다. 미국 또한 혁신적인 재분배 정책을 통해 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국가주도의 자본주의 선순환을 이끌었는데 그 정점은 린든 존슨의 “위대한 사회” 정책이었다.

하지만 현재 당시의 유럽이랄 수 있는 미국에서의 개혁조치는 지지부진하다. 애초 양적완화 자체가 기만적인 미봉책이었는데 단기적인 경기호전으로 벌써 원대 복귀할 태세다. 앞서 말한 도드-프랭크 법은 수많은 이해관계자의 주장을 섞다보니 분량이 무려 330만 단어에 3,500페이지에 달하는 규모임에도 이 법을 두려워하는 이가 별로 없어 보일 정도다. 가장 근본적으로 패니메, 프레디맥 두 거대한 정부보증회사의 처리방안은 아직도 오리무중이다. 변혁적인 조치는커녕 개혁조치마저 벽에 부닥치고 있다.

단기적으로 미국의 경제가 호전될 수는 있다. 제조업이 호전되면서 고용도 활성화되고 소비도 증가할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제조업 공장으로서의 과거 미국의 영광을 되돌려주는 것은 아니다. 이미 “Made in USA”보다 “Made by Apple”이 더 유의미한 세상이 됐다. 공장은 수시로 입지를 옮기고 초국적 자금 운용에 따라 稅收는 바닥을 기고 있다. “위대한 사회”를 외치기에는 사회 자체가 와해되고 있다. 미국인들의 기억력을 되살리려면 필요한 것은 어쩌면 이젠 과거의 경험보다는 새로운 상상력이 필요할 것 같다.

Is the Conservative Movement Losing Steam?

Is the Conservative Movement Losing Steam?
Richard Posner(저자소개)
May 10, 2009

이 글은 미국의 보수주의 석학 중 하나인 리차드 포스너씨가 쓴 글로 보수주의가 이미 미국정치의 승리자라는 결론을 내리고는 있으나, 그것이 기초하고 있던 사상적 기반이 – 특히 아들 부시의 행정부를 거치면서 – 심각한 지적퇴보를 겪고 있다는 사실을 담담히 서술하고 있는 글이다. 글을 읽으면서 드는 생각이지만 사실 그 지적 기반이라는 것도 – 좌우를 떠나서 – 현실세계와 동떨어진 절대원칙으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격렬하게 움직이는 세상 속에서 마모되고 세련되면서 지도적 위치를 획득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결국 시대정신은 그 주창자의 것이라기보다는 그것을 원하는 시대상황의 것일 수도 있다.[역자]

한때 생명력 있었던 미국에서의 보수주의 운동의 지적인 퇴보가 감지되고 있다. 내가 설명할 것인바, 이것은 그 성공의 유서가 될 수도 있다.

1960년대까지(내가 20대 후반이었을 때) 나는 거의 보수주의 운동의 존재를 의식하지 못하였다. 그것은 희미하고 빠듯했으며, (1964년 린든 존슨에 의해 학살당한) 배리 골드워터, 아인 랜드, 러셀 커크, 그리고 윌리엄 버클리 와 같은 형상으로 상징화되었다. 이들은 내게는 전혀 어필하지 못했다. 보다 강한 보수주의 사상가, 예를 들어 밀튼 프리드먼과 프리드리히 하이에크, 그리고 다른 걸출한 보수주의 경제학자, 예를 들어 조지 스티글러와 같은 이들이 무대에 있었다. 그러나 경제학계 밖에서는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다.

1960년대 말의 국내의 혼란, 존슨식 “위대한 사회”의 무절제, 반독점과 규제의 경제학의 중요한 진전, 1970년대의 “스태그플레이션”, 그리고 (착각인 것으로 판명되었지만) 소비에트가 냉전에서 승리했다는 믿음–이 모든 상황전개로 인해 다채롭고 활기에 넘치는 보수주의 운동이 촉발되었다. 이는 마침내 1981년 로널드 레이건의 선거에서의 승리로 결론이 났다. 이 운동은 “시카고 스쿨” (그리고 그에 따른 탈규제, 민영화, 통화주의, 낮은 세금, 그리고 케인지언의 거시경제학에 대한 거부) 과 연계된 자유시장 경제학, 강한 군대와 리버럴한 국제주의에 대한 거부의 의미에서의 “신보수주의”, 전통적 가치에 대한 존중과 페미니즘과 [소수자에 대한 : 역자주] 차별철폐에 대한 저항과 범죄에 대한 강경노선이 관련된 문화적 보수주의를 아우르고 있었다.

냉전의 종식, 소비에트의 붕괴, 자본주의의 지구적 승리를 장식하는 범세계적인 번영, 특히 경제학에서의 클린턴 행정부의 본질적인 보수주의적 정책들, 그리고 마침내 부시 행정부의 선거와 초기 시절은 보수주의 운동의 절정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러나 그게 정점에 달했을 뿐 아니라 쇠퇴하고 있다는 신호가 있었다. 주도적인 보수주의 지성들은 늙어갔고 운명을 달리했다(프리드먼, 하이에크, 진 커크패트릭, 버클리 등). 그리고 다른 이들은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조용해지고 덜 활동적이 되었다(이를테면 로버트 보르크, 아이빙 크리스톨, 게르투르드 힘멜파르브). 그리고 그들의 계승자들은 보수주의가 귀에 거슬려지고 대중추수적이 되어가자 이전만큼 공공에 나서지 않았다.

클린턴 행정부 말년에 나는 내가 이해하는바, 보수주의의 승리에 대한 축하에 만족하였다. 그리고 미국의 경제나 사회구조의 다른 더 많은 변화를 바랄 욕심이 없었다. 재산세가 폐지되거나, 한계 개인소득세율의 더 많이 감세되거나, 정부가 축소되거나, 헌법의 실용주의가 “원리주의(originalism)”를 위해 폐기되거나, 총기소유의 권리가 확대되거나, 우리의 군사적 입장이 강경해지거나, 동성애자의 권리 증진이 저항에 부닥치거나, 공공 영역에서 종교의 역할이 확대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 이 모든 것들이 2004년 부시의 재선에 따라 물이 오른 신보수주의가 수용한 원인이 되었다.

내 주제는 보수주의의 지적인 퇴보다. 신보수주의의 정책이 대부분 감정과 종교에 의해 좌우되고 있고 대부분 약한 지적 근거를 지니고 있다는 점이 두드러지고 있다. 정책들이 개념상으로 취약하다는 것은, 실행에 있어서도 대부분 실패해 왔던, 그리고 정책이 정치적 실패라는 것은 그러므로 놀랍지 않다. 보수주의에 대한 통렬한 타격은, 오바마의 선거와 프로그램에서 최고조에 달했는데, 네 배나 배가되었다.: 미국의 외교정책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군사력의 실패; 지구온난화에 대한 부정, 관리 임명시의 종교적 기준의 활용, 정부기관에서의 관리와 전문지식의 무시와 같은 지성을 의지로 대체하려는 시도의 공허함; 지속적인 임신중절에 대한 편견; 그리고 거대한 재정적자, 메디케어 약품 계획, 초과 대외채무, 자산가격 인플레이션의 형태로 나타난 재정적 요실금

2008년 가을에 공화당의 얼굴은 사라 페일린과 수리공 조가 되어버렸다. 보수주의 지성인에게 당은 없었다.

그리고 작년 9월 금융 위기가 닥쳤고 디프레션이 확실해졌다. 이 예기치 않은, 그리고 쇼킹한 이벤트로 인해 경기 싸이클과 통상적인 거시경제에 관련된 보수주의 경제학자들의 핵심적인 믿음에 심대한 분석적 약점이 드러났다. 프리드먼 주의자들의 통화주의와 금융의 효율적 시장 이론이 큰 타격을 받았다. 그리고 보수주의자들의 혐오의 대상인 존 메이나드 케인즈의 거시경제학적 사상이 다시 존경받게 되었다.

신정부의 정책과 계획의 리버럴한 면이 과한 것 같은 신호와 전조가 보인다. 그래서 학식있는 보수주의 비평가들의 타깃이 많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 글에 따르면 보수주의 운동은 1964년 이래 가장 낮은 저점에 있다. 그러나 기본적인 차이를 통해 이 운동은 현재까지는 이미 그 운동이 이미 얻은 명예에 안주하고 있는, 최소한 한동안은, 미국 정치와 사회사상의 중심을 이동시키는데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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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 물은 썩게 마련

foog 2009/01/07 12:31
잘 아시겠지만 이 다큐는 동명의 책을 기초로 만들어진거죠. 요즘 그 책을 읽고 있답니다. 다 읽고 다큐를 감상하려 했는데 이렇게 맛뵈기로 보여주시니 감사합니다. 🙂

Periskop 홈지기 2009/01/07 15:41
마침 그 책을 읽고 계셨다니 재밌는 우연이네요. 책과 다큐멘터리가 논조가 미묘하게 다르게 잡혀 있으니 독서와 시청을 연달아 하시면 훨씬 느낌이 좋을 것 같습니다. 저는 한창 신자유주의가 전성기(?)를 구가할 때 읽었는데, 지금 다시 읽어보면 느낌이 확 다를 것 같습니다. 번역판에서는 자그만치 “국가 주도 경제의 쇠퇴와 시장 경제의 승리”라고 부제를 달아놨는데 10년도 안 되어 상황이 이렇게 역전이 되다니…… 역시 오래 살고 볼 일입니다. 댓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foog 2009/01/07 16:39
제 현재까지로의 감상은 이렇습니다. 물론 그 책이나 여타 경제현상을 다룬 책들이 신자유주의 혹은 그와 다른 입장들의 우위를 기조로 하는 내용들이 대다수이고 이 책도 그러한 편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러한 부분들보다는 ‘결국은 어떠한 입장이든지 간에 혁신하지 않는 고인 물은 썩게 된다’는 생각이 자꾸 들더군요. 소비에트 모델도 어찌되었든 한때는 다른 국가들의 부러움을 산 적이 있습니다. 케인즈 모델도 서구자본주의의 전성기를 구가하게끔 만들어 주었던 모델이고요. 욕을 바가지로 먹었지만 신자유주의 모델도 케인즈적인 국가개입주의 모델의 부담을 덜어냈다는 점에서는 혁신이었죠. 하지만 그 부담을 덜어냄의 과함, 즉 균형점을 찾지 못한 일방적인 자유화때문에 또 다시 이전의 모델과 같은 길을 걷고 있는거죠. 결국 인간은, 그리고 세상은 끊임없이 새로운 모델을 찾아헤매고 그것이 혁신적일 때까지는 유효한 그러한 좌충우돌의 시스템이 이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Periskop 홈지기 2009/01/08 13:56
옳으신 말씀입니다. 가만히 다른 곳에 올라온 글들을 보노라니 이 다큐멘터리를 1편만 보고 단순히 “신자유주의 찬양”으로 아는 분들도 있더군요. 사실 전편을 다 보면 어느 한 쪽을 편들려는 것보다는 그렇게 돌고 도는 자본주의의 큰 흐름을 전달해주려는 것임을 알 수 있을텐데 말입니다. 저도 우리 현실을 영위해나가는 시스템에 있어 만인의 행복을 보장해주는, 그런 영속된 균형잡힌 체제란 존재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면 완벽하겠지 하는 믿음이 들다가도 한 구석에서는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하며 썩어가기 마련이죠. 그런 문제들에 대해 끊임없이 의문을 던지고 각자의 방식으로 해결책을 구해온 노력들이 있어왔고, 그것이 어느 순간 격렬한 파도와 맞물려 세상은 바뀌는게 아니겠습니까.

[원문보기]

위 대화는 어느 책에 대한 나와 ‘Periskop 홈지기’님과의 대화다. 우리가 이야기하고 있는 책은 ‘시장 對 국가’라는 이름으로 국내에 소개된 The commanding heights라는 책이다.

The commanding heights : the battle between government and the marketplace that is remaking the mord
다니엘 예르긴, 주명건 역, 세종연구원, 1999.09.01

<시장 대 국가>는 시장과 국가 역할의 역전과 재역전 드라마가 전개된 지난 50여 년간의 세계경제사를 하나의 서사극처럼 펼쳐내고 있다. 에너지 문제 전문가로서 석유산업의 역사를 소설처럼 그려낸 저서 <상>(The Prize – 황금의 샘으로 번역됐음)으로 퓰리처상을 수상했던 예긴은 이번에도 방대한 사료와 현장답사를 통해 작가로서의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출처]

책 소개에도 나와 있듯이 이 책은 지난 50년간의 국제경제에 있어서의 시장과 국가의 주도권 쟁탈전을 전 세계적인 범위에서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다. 물론 전체적인 톤은 결국은 시장이 국가보다 우월하다는 뉘앙스가 풍기기는 하나 보다 근본적인 교훈은 위의 대화에서도 말하였듯이 ‘고인 물은 썩게 마련’이라는 점이다.

소비에트 모델의 ‘경직성’, 케인즈 모델의 ‘방만함’은 그 모델의 한때의 참신성에도 불구하고 그 열정의 소진을 재촉하는 촉진제가 되고 말았다. 이후의 시장근본주의 모델은 시장이 이른바 ‘창의와 효율’을 통해 늘 새로운 열정을 불어넣어줄 것이라는 가정 하에 운용되어 왔지만 결국 그 시장역시 자기만족적이고 아전인수적인 편견으로 말미암아 좌초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결국 우리는 이러한 잔재들의 교훈과 반성 속에서 새로운 모델을 찾아나서야 할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내가 ‘Periskop 홈지기’님과 대화를 나눴던 곳은 ‘Periskop 홈지기’님이 위 책에 기초하고 살을 붙인 동명의 다큐멘터리의 소개 글에서였다. 나도 아직 보지 못했지만 책내용으로 볼 때 충분히 기대해도 좋을 내용으로 판단된다. ‘Periskop 홈지기’님의 멋진 소개로 더욱 구미가 당긴다. 다큐멘터리 소개는 여기로.

글래스-스티걸 법

글을 써야할까?

sonnet님의 이 글에 대해 응대하는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은 했으나 요즘 바쁘기도 했거니와 좀 찝찝한 점이 있어 글쓰기를 몇 차례 망설였었다. sonnet님이 지난번에 쓴 내 글에 트랙백을 걸어주셨고 또 글 서두에 “근원적 모순론은 다음과 같은 시각을 말한다”라며 나의 글을 인용하셨기에 나는 ‘당연히’ 내가 주장한 바에 대한 반박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근원적 모순론”을 비판하기 위하여 든 예는 ‘증권중개인에 대한 수수료 자율화와 글래스-스티걸 법의 폐지’였다.

의아한 점은 사실 나는 금융위기의 원인으로 탈규제를 이야기한 적은 있지만 위에 든 두 가지 사례를 적시한 바가 없다는 점이다. 그래서 저 두 가지 조치가 기본적으로 사리에 맞는 것이었지만 의도치 않게 금융위기를 초래했다는 취지로 나의 “근원적 모순론”이 잘못 되었다고 말씀하시는 sonnet님의 논지는 솔직히 좀 당황스럽다. 더욱이 규제의 부당성에 대해 든 예인 소비에트의 어처구니없는 규제도 왜 그 맥락에서 등장했는지 이해가 안 된다. 아니 할 말로 내가 여태 글을 쓰면서 소비에트식 규제에 찬성한다는 말을 한 적도 없는데 말이다.

한 가지 더 지적하자면 글의 논지는 결국 규제완화가 시장경쟁을 촉진하는 ‘선의의 것’이라는 것 같은데 그게 sonnet님이 규정하신 “근원적 모순론자”들에게 어떤 설득력을 가질지 궁금하다.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근원적 모순론”이라 하면 일반적으로 금융자본주의, 신자유주의, 시장경제의 개선, 더 나아가 자본주의 제도의 폐지를 주장하는 논리가 아닌가 생각된다. 그런데 규제완화의 유용성을 논하는 것이 같은 수위에서의 논의가 되겠는가 하는 생각도 든다. 굳이 이야기하자면 sonnet님의 주장은 ‘규제옹호론자’ 또는 ‘정부개입주의자’에 대한 반박이라는 생각이 든다.

좌우지간… 지금 (망설이면서) 응대의 글을 쓰고 있다. 주의하실 점은 sonnet님의 글이 워낙 다양한 방향에서의 논점을 제시하고 있기에 이 글도 불가피하게 다소 장황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해주시기 바란다.

sonnet님의 논지 요약

sonnet님의 글은 보통 스크롤의 압박이 심하므로 바람직하지는 않지만(주1) 내 글을 읽는 이들의 편의를 위해 나름대로 그의 글을 요약해보도록 하겠다.

1) 이번 위기는 경쟁 촉진이나 금융복합기업화 같은 멀쩡한 정책개혁의 결과가 의도치 않았던 귀결(unintended consequence)이며 그런 것을 두고 “언제나 예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분석은 근원적 모순론에게는 매우 불리한 것이다.

2) 규제란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시장 경쟁과는 꽤 다른 특성(중요함)을 갖긴 하지만, 그것도 기본적으로는 방대한 선택지 중 일부의 기대값을 바꿔놓는 인센티브에 불과하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또한 정책은 상당한 확률로 예기치 못한 귀결을 맞게 된다.

3) 미국의 거대 투자은행들이 일거에 몰락하게 된 원인은 과거 건전한 개혁정책이라고 생각되었던 모종의 진보의 도입에 있었다. 또한 현상에 대한 불만은 언제나 진보의 강력한 추동력이었다. 그런데 이 경우 불만족스러운 현상을 강력히 성토한다는 것은 (과거의) 진보적 시도의 잘못을 두들기는 것이 되어서 자승자박이 된다.

4) 급진주의자들은 기존 체제에 존재하는 선을 인정하지 않고, 악을 치유하고자 하는 열정에 골몰한 나머지, 기존의 선을 좀 더 좋은 것으로 대체함이 없이 그것마저 파괴해버리고 만다.

5)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어떤 특정 경쟁정책이 재앙을 촉발했다고 해서 경쟁을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경쟁을 빼고 다른 어떤 것을 집어넣었을 때, 시장이 지금과 같은 정도로 돌아가게 될 것 같지가 않으니까 말이다. 그러니 다른 기적의 대안이 확보되지 않는 한 경쟁정책은 앞으로도 실용적인 정책대안으로 우리의 도구 상자 안에 계속 남아 있어야 하며 물론 앞으로도 종종 사용되어야 한다.

글래스-스티걸 법에 대하여

글래스-스티걸 법을 폐지하게 되자, 투자은행이 움켜쥐고 있던 전통적인 밥그릇을 상업은행들이 파먹어 들어올 수 있게 되었다.[Barry Eichengreen, 경제 위기의 해부학, 2008년 9월 22일, sonnet님이 인용]

그런 위험한 모험에 뛰어드는 것을 미묘한 균형을 통해 억제하고 있었던 것은 투자은행들이 갖고 있던 짭짤한 수수료 수익이라든가 S&L의 (프리미엄 붙은) 영업권, 그리고 잠재적 경쟁업체 진입을 막아주던 글래스-스티걸 법 같은 소위 철밥통의 보이지 않는 역할이었다는 것이다.[sonnet]

인용한 글에서 sonnet님은 인용한 아이켄그린의 논지를 빌어 증권중개인 수수료 획일화와 글래스-스티걸 법이 투자은행을 철밥통으로 만들어주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그 법의 폐지는 경쟁을 촉진하는 선의의 의도였다고 정당화하고 있다.(주2) 그렇다면 글래스-스티걸 법이 그토록 바람직하지 않은 규제였는지를 살펴보자.

1920년대 증권 붐이 일어날 당시 은행의 대출수요는 감소한 반면 연준의 금융완화정책에 의해 예금은 대폭 증가하였기 때문에 은행들은 증권투자의 비중을 높이게 되었다. 그러나 1929년 주가 대폭락이 나타나면서 은행의 도산이 이어졌고 결국 대공황이 발발하였던 것이다. 특히 이 과정에서 은행의 증권거래관련 불공정행위가 밝혀지면서 은행에 대한 예금자의 신뢰가 흔들렸고 이에 따라 은행과 증권업의 분리를 명확히 하는 은행법 개정이 불가피했던 것이다. 글래스-스티걸 법의 제정에 따라 1934년 6월까지 은행업무(상업은행업무)와 증권업무(투자은행업무)를 겸영하던 미국의 은행들은 업무를 분리해야만 했고 약 1/3정도가 상업은행업무에 전문화하게 된다.[미국자본주의 해부, 홍영기(금융감독원), 풀빛, 2001년, pp192~193]

이 글에서 보다시피 글래스-스티걸 법의 입법은 그 당시 상황에서 불가피한 선택이었고 나아가 바람직한 규제였다. 은행과 증권업무를 분리한 것이다. 물론 유니버셜뱅킹도 가능한 업역이긴 하지만 자본주의 초기 시절 공황을 목도한 뒤 고유업무 영역을 분리했다고 그것을 철밥통을 만드는 경쟁저해책이라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리고 이 규제는 sonnet님이 예로 든 소비에트의 규제보다 훨씬 적절한 규제의 사례다.(이는 조금 뒤에 알아보자) 더불어 그러한 규제조치는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경제적 자유주의 시절의 종말과 정부개입주의적인 시절의 서막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그리고 1999년 금융서비스현대화법(Gram Leach Bliley Act)의 입법과 이로 인한 글래스-스티걸 법의 폐지는 또 다시 경제 자유주의의 복권, 금융과점의 허용 등 신자유주의의 본격화를 알리는 신호가 되는 것이었다.

먼저 규제의 유용성에 대해 살펴보자. sonnet님은 ‘3. 규제라는 도구’에서 소비에트의 예를 들며 규제의 무용성 내지는 외부효과에 대해 상당히 자세히 서술하셨는데 사실 굳이 규제에 대해 살펴보아야 했을 것 같으면 앞서 ‘2. 금융위기 돌아보기’에서 예로 들었던 글래스-스티걸 법에 대해 논함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그래야 규제의 양면성을 볼 수 있을 것이고 글래스-스티걸 법의 의의와 시대적 한계를 동시에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자 그러면 글래스-스티걸 법이 금융복합기업화를 막아서 투자은행의 안정성을 해쳤거나 경쟁을 저해해서 미국금융시장의 발달을 지연시켰다고 보는가? 글래스-스티걸 법이 두눈 시퍼렇게 뜨고 규제를 하고 있는 동안 미국의 금융업은 급속히 성장하여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가지게 되었다. 꼭 그것이 글래스-스티걸 법의 우월성을 말하는 것도 아니지만 어느 정도는 그것이 부당한 악법은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보다 중요한 사실은 이 법으로 대표되는 이른바 금융억압의 시기가 지니는 의미인데, 즉 일반적으로 금융억압의 시기라 불리는 브레튼우즈 체제인 1946년에서 1973년까지의 기간 동안 체계적인 금융위기는 상대적으로 거의 발생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요컨대 그 법은 그 법이 가지는 한도 내에서 역할을 마땅히 수행한 것일 뿐이다.

아래 그래프는 2008년 현재의 투자은행과 상업은행의 레버리지를 보여주고 있다. 비록 아이켄그린이 글래스-스티걸 법의 폐지가 “투자은행이 불안정한 단기자금시장 대신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예금을 사용해 그들의 사업자금을 조달할 수 있게 해 준다”고 두둔했지만 투자은행 자신들은 별로 그럴 생각이 없었던 것 같다. 그들은 여전히 높은 레버리지를 통해 고위험의 투자를 마다하지 않았다. sonnet님 표현을 흉내내자면 경쟁을 시켰는데도 레버리지가 떨어지지 않은 것이다.(주3)

특히 여기서 탈규제의 더 비참한 드라마가 연출된다. 즉 레버리지의 증대는 이 조치와도 연관 있는데 탈규제의 하이라이트를 들라면 글래스-스티걸 법 폐지보다 이른바 “자발적 통합감독 프로그램”이라는 어이없는 제도였다 할 수 있다.

NCR(주4)제도는 비록 정치하고 세련되지 못한 매우 단순한 방식을 따르고 있지만, 적어도 2004년까지는 증권회사의 재무건전성을 유지하도록 하는 규제로서 훌륭히 그 기능을 수행했다고 평가받는다.
SEC(주5)는 2004년 6월 8일, 투자은행지주회사에 대해서 법적인 감독권한은 없지만 이를 통합적으로 감독하는 자발적 통합감독 프로그램(consolidated supervised entities:CSE)을 마련했다.

대형 투자은행들은 집요하게 앞에서 살펴본 표준 NCR 제도가 투자은행의 위험관리 능력을 무시하고 레버리지를 과도하게 규제하는 제도라고 주장하며 이의 완화를 요구하였다. 이러한 규제완화를 적극적으로 주도한 사람은 당시 골드만삭스의 CEO였으며 현재 미국 재무장관인 Paulson이었다.
이러한 규정이 마련되자마자 곧 Goldman Sachs, Morgan Stanley, Merril Lynch, Lehman Brothers, 그리고 Bear Stearns 의 5개 대형 투자은행은 SEC로부터 CSE 자격을 승인받았다. 이 5개 투자은행이 CSE 자격을 획득한 유일한 투자은행들인데, 공교롭게도 이번 월가의 금융위기에서 모두 부실화된 투자은행들이기도 한 것은 매우 주목할 만하다.[월가의 금융위기와 자기자본규제, 연구위원 한상범, 자본시장 Weekly 2008-40호 II, 한국증권연구원, pp2~3]

이러한 5대 투자은행들의 “자발적 감독”의 결과는 어떠했을까? 그 이전까지 그나마 12배를 유지했던 이들의 레버리지는 2004년의 예외인정 이후 위의 그래프에서 보듯이 40배까지 상승한다. 12배의 레버리지는 그다지 크지 않지만 40배면 문제가 심각하다. 요컨대 글래스-스티걸 법의 폐지가 이미 70년대 후반 이래 지속적으로 추진되었던 금융규제 완화의 사후적 승인(주6)이라면 이 조치는 그야말로 금융위기의 결정타라 할만 하다. 그런데 여기에서 어떤 “근본적으로 사리에 맞는 선택”을 집어낼 수 있는가? “경쟁촉진정책”이라 할 수 있는가?

이제 글래스-스티걸 법의 폐지가 아이켄그린의 말대로 “근본적으로는 사리에 맞는 선택”이었는지 한번 살펴보자.

M&A는 권모술수와 배신을 동반한다. 탈법, 아니 M&A 성사를 위해 아예 법을 바꾸는 로비도 동원된다. 합병 후 시티그룹의 CEO가 된 샌포드 웨일은 자신의 회사 트레블러스와 시티콥을 합병하는 데 반독점법인 글레스-스티걸 법이 방해가 되자, 워싱턴에 전방위로비를 벌인다. 1999년 미국 의회는 ‘시티그룹 정당화법’이라고 불린 ‘금융 서비스 현대화법’을 통과시킴으로써 ‘거대공룡’ 시티그룹의 탄생을 방조한다. 합병을 위해 정치인을 움직여 법도 바꾸는 마당이니 M&A 금융기술은 물론, ‘마카로니 방어전략’, ‘독약 전략’ 같은 반(反) M&A 금융기술도 만만찮게 발전한 곳이 월가다.[‘월가의 법칙’ 책 소개]

[기타 참고글]
글래스-스티걸 법 폐지 로비의 짧은 역사 (번역문 보기)
How Citigroup’s CEO rewrote the rules so he could live richly. (부분번역문 보기)

요컨대 아이켄그린은 그 법의 폐지가 “근본적으로는 사리에 맞는 선택”이라고 표현했지만 나는 미국의 금융자본주의 발달에 따라 적당한 시기에 입법되어 한 시대를 풍미하며 미국경제가 발전하는 시기에 존속하였다가, 폐지 이전부터의 은행 간 합종연횡 등이 점차 노골화되는 등 금융억압이 해체되어가자(주7)시효를 다하고 사라진 것이다. 그 뒤에 이어진 사태는 다 알다시피 현재의 금융위기다.

글을 마치며

sonnet님의 이어지는 ‘4. 파괴적 경쟁’, ‘5. 진보의 딜레마’, ‘6. 편견(?)의 옹호’ 절은 논의의 집중을 위해서 – 솔직히 쓰다 지친 면도 있음 🙂 – 여기에서 별도로 다루진 않겠다.(주8) 다만 맨 마지막에 ‘7. 마무리 : 던져진 질문에 대하여’의 sonnet님의 다음 말씀에 대해 한마디 하기로 한다.

경쟁과 분권화는 분명히 시장을 움직이는 핵심 요소라고 할 만하다. 그런데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어떤 특정 경쟁정책이 재앙을 촉발했다고 해서 경쟁을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경쟁을 빼고 다른 어떤 것을 집어넣었을 때, 시장이 지금과 같은 정도로 (혹은 그 이상) 돌아가게 될 것 같지가 않으니까 말이다. 그러니 다른 기적의 대안이 확보되지 않는 한 경쟁정책은 앞으로도 실용적인 정책대안으로 우리의 도구 상자 안에 계속 남아 있어야 하며 물론 앞으로도 종종 사용되어야 한다. 이런 양 측면을 고려해 볼 때 위기를 넘긴다면 예전과 본질적인 변화는 없는 ‘시장으로 복귀’해야 한다는 것은 별 의문의 여지가 없는 결론이라는 것이 내 대답이다. 이제 근원적 모순론이 답할 차례이다.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얼마나 많이 뜯어고쳐야 충분하다고 말할 것인가? ‘시장으로 복귀’란 표현이 무색해질 정도로 큰 변화가 과연 어떤 것인지 한번 지켜보기로 하자. 이 질문에 대한 답이 “살짝 잽을 피하시는 모습은 조금 실망”(foog)스러운 것이 어느 쪽인지를 보여줄 테니까 말이다.[sonnet]

앞에서 쭉 살펴보았듯이 글래스-스티걸 법은 경쟁을 저해하는 법이 아니었다. 시장의 플레이어의 특성에 따라 그 고유 업무를 구분하였을 뿐이다. 그리고 적어도 그 법은 존속기간 동안 끊임없는 폐지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어느 정도 잘 작동하였다. 그때의 시장은 국가가 특정한 명분을 가지고 개입한 시장이었다. 그 기간 동안 금융은 탈 없이 굴러갔고 전 세계 자본주의는 사상 최고의 호황을 누렸다. 그러다가 포디즘 체제 하의 경기변동, 미국이라는 나라의 비효율성 증대로 말미암아 금융탈규제의 상황이 연출되었다. 이것이 경쟁촉진이었는지 독과점 창출이었는지는 결과가 말해줄 것이다. 적어도 글래스-스티걸 법을 보면 마냥 “사리에 맞는 선택”이라고 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오히려 상업은행의 거대화를 촉진하였으니 말이다.

나는 시장과 국가를 대립항으로 보지 않는다. 그들은 자본주의 경제체제하에서 동반자다. 그들은 자본주의를 발달시키기 위해 함께 노력했고 국가는 사실상 고전적 의미의 자유주의 경제가 막을 내린 이후 언제나 시장을 지도해오고 투자해왔다. 규제와 탈규제를 반복하고 정부투자를 증대시켜 왔다. 고전적 자유주의 시대에는 10%미만이었던 서구의 GDP 대비 정부총지출은 1990년대 중반에 40~50%를 유지하고 있다. 실질적으로 국가개입주의는 현대 자본주의의 가장 큰 특징이다. 그러니 규제 없는 시장이라는 것은 어쩌면 신화에 불과하다. 시장의 가장 큰 플레이어가 룰을 정하겠다는데 그게 불합리한 것인지 잘 모르겠다.

sonnet님이 경쟁과 분권화가 시장을 움직이는 핵심요소라고 하셨는데 여태 말했듯이 자본주의에서의 탈규제 심지어는 규제 그 자체조차도 독점을 강화하는 데 일조한 것들도 많거니와 그 하이라이트 중 하나인 글래스-스티걸 법의 폐지는 사리에 맞지도 않았고 의도치 않은 금융위기를 초래한 것도 아니다. 그런 자유를 부여하는 것이 시장에 위험하다는 신호는 이미 S&L 사태 때 감지하지 않았는가? 나는 최소한 그런 과거에 대한 기억력을 가진 시장을 원하는 것이다. 그런데 시장은 어느 기간만 지나면 편리하게 과거를 망각한다. 이번은 다르다고 주문을 외우면서 말이다. 나는 이게 시장의 고유모순인지 아니면 의도치 않은 실수인지는 잘 모르겠다.

  1. 이 스크롤의 압박은 논쟁 시 일장일단이 있는데 단점은 글이 긴 관계로 상대가 글을 허투루 읽을 수 있다는 점이고 장점은 글이 긴 관계로 상대가 글을 허투루 읽을 수 있다는 점이다. 🙂
  2. 잠깐 곁다리로 새자면 벌써 이 부분이 정책이 “상당한 확률로 예기치 못한 귀결을 맞게 된다”며 거부감을 가지면서 동시에 탈규제가 바로 지금 눈앞에서 예기치 못한 귀결을 맞은 데에 대해서 옹호하는 것은 조금 이상하다.
  3. 물론 아이켄그린은 이에 대해 “복합기업화가 완성되려면 시간이 걸린다”는 핑계로 빠져나가기는 했지만 말이다
  4. 표준 순자본규칙(Uniform Net Capital Rule)의 약자로 미국 증권거래위원회에 등록된 증권회사에 대한 자기자본규제 제도
  5.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urities and Exchange Commission)
  6. 사실 이미 70년대 후반 이래 은행들은 경쟁력 제고를 위해 대형 은행지주회사를 중심으로 글래스-스티걸법상 명확한 금지규정이 없거나 법률 해석상 진출이 가능한 증권업무분야에 진출을 시도하고 있었다.(중략) 금융자유화, 규제완화로 표현되는 이러한 변화는 1930년대 이래 미국의 분업주의적인 관리된 금융시스템의 일정한 균열을 의미하는 것이었고 대체할 새로운 금융시스템의 정합적 구조가 나타나지 않은 상태에서 80년대 위기상황을 초래하게 되었다.(미국 자본주의 해부, 홍영기[금융감독원], 풀빛, 2001년, p198)
  7. 앞서 말했듯이 시티은행의 경우 금융서비스현대화법(Gram Leach Bliley Act)이 허용되기 이전인 지난 98년 은행지주회사법의 제한에도 불구하고 트라벌러즈 그룹(Travelers Group)이라는 보험회사를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승인을 얻었다. 제이피모건체이스(JP Morgan Chase)는 제이피모건(JP Morgan)이라는 투자은행과 체이스맨하턴뱅크(Chase Manhattan Bank)가 합쳐진 금융그룹이다.
  8. 그리고 하나 하나가 모두 심각한 주제여서 나의 역량을 뛰어넘는 측면도 있다 🙂

선형도시

필자가 지난번에 “경제위기가 도시의 모습을 바꿀 것인가?”라는 글에서 고유가가 공공의 도시계획이나 민간의 도시개발에 영향을 미쳐 도시경관이 바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내비친 바 있다. 실제로 도시발전의 역사는 그 당시의 기술발전이나 자원가격에 의해 영향 받은 바 크다. 철도 등 대중교통망, 엘리베이터와 같은 발명품,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는 석유문명과 발전시설이 없었더라면 오늘날과 같은 광역권 도시나 도심의 마천루 등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여하튼 그 글 말미에 이렇게 적었다.

“예언컨대 광범위한 대중교통 시설의 정비와 직주근접(職住近接)식 도시계획이 새로운 대안으로 제시될 것 같다.”

솔직히 이 말은 예언도 아니고 당연한 소리다. 석유를 포함한 에너지 가격이 일정수준까지 올라가서 변곡점을 넘어버리면 당연히 물적(物的)계획은 그에 상응하여 수정되어야 한다. 각설하고 내가 저 말을 쓸 때에 염두에 둔 도시계획안 하나가 있었다. 바로 아래 그림이다.


Nikolai Miliutin 이라는 과거 소비에트 도시계획가가 주창한 ‘선형도시(linear city)’(주1)형의 스탈린그라드 계획이다. 그림에서 보는 것처럼 도시가 우리가 상상하는 것처럼 도심을 중심으로 한 원형이 아니라 철도, 공업지구, 녹지대, 주거지구 등이 샌드위치처럼 차곡차곡 쌓여있는 형태다. 그리고 도시는 이렇게 좌우로 계속 같은 패턴으로 뻗어가면서 커간다. Miliutin은 이러한 도시건설을 통하여 도시와 농촌의 경제격차와 계층간 경제격차를 해소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어쨌든 애초 이 도시계획안이 떠올랐던 이유로 돌아가 보자. 자 이보다 더 환상적인 직주근접이 있을 수 있을까? 녹지대만 지나면 바로 내가 근무하는 공장이다. 살벌한 고층 아파트밖에 안 보이는 베드타운에서 막히는 도로에서 매연 마셔가며 도심의 직장으로 출근하는 현대의 도시가 얼마나 비효율적인가를 한눈에 알 수 있지 않은가? 그래서 실제로도 아직도 이러한 선형도시를 주장하는 이들도 있는 것 같다. 어쨌든 나름 근사한 아이디어다.

그런데 무릇 모든 것이 그렇지만 이 도시는 하나의 약점이 있다. 바로 노동자들은 직장이나 주거 중 어느 하나의 자유를 포기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내가 도시의 오른 쪽 끝의 직장과, 또 그곳에 인접한 주거지에서 살고 있었는데 도시 왼쪽 끝의 직장으로 옮기고 싶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전의 편리함에 비할 바 없이 불편한 직주분리 현상이 나타날 것이다. 그러한 면에서 이 도시는 어쩌면 사회주의 조국이 직장과 주거를 정해주고 일정정도 제약을 가했던 소비에트에서나 제대로 구현되었을 법한 도시다.

만약 새로운 선형도시를 계획하고 입안할 요량이라면 주거와 직장선택의 자유라는, 현대인이라면 포기할 수 없는 천부인권에 대한 고려가 있어야 할 것이다.(주2)

(주1) 선형도시의 첫 주창자는 19세기 스페인의 Arturo Soria Y Mata라는 도시계획가다.

(주2) 사실 생각해보면 현대 자본주의 도시에서 살고 있는 노동자들이라고 뭐 주거와 직장선택의 자유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들에게는 시장과 가격이라는 보이지 않는 억압이 존재하니 말이다.

사회주의 혁명, 아방가르드, 그리고 전자음악

1919년에 러시아의 음향 기술자 레온 테레민 Leon Theremin(본명 Lev Sergeivich Termen) 은 자신의 이름을 따서 전기적인 음률의 고저가 연주되는 테레민 theremin(또는 thereminvox, aetherphone 으로 불리기도 함)이라는 흥미로운 악기를 발명한다. 이 악기는 연주자가 악기에 손을 대지 않고도 연주하는 악기로서 연주자의 손이 금속봉에 얼마나 근접하는 가에 따라 음의 고저와 음량이 조절되었다. 테레민의 연주소리는 다소 기괴스러워서 1040년대에서 1960년대까지 공상과학영화나 공포영화의 사운드트랙에 곧잘 사용되었다.(예로 들자면 Spellbound, The Lost Weekend, Ed Wood, Mars Attacks!, The Day the Earth Stood Still.)

Lev Termen playing - cropped.jpg
Lev Termen playing – cropped” by Bettmann, Corbis – http://tygodnik.onet.pl/35,0,57107,sowiecki_faust,artykul.html (polish). Licensed under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테레민을 연주하고 있는 레온 테레민

이 악기는 흥미롭게도 소비에트 사회주의 혁명의 성공과 그에 따른 단기적인 아방가르드 예술의 융성과 관련이 깊다. 아방가르드 예술은 그 태생과 발전 자체가 일반인들이 쉽게 접근할 수 없는 급진성을 띠었으며 현실사회 전반에 대한 상당한 혐오감을 내포하고 있었다. 소비에트 혁명을 성공으로 이끈 볼셰비키는 후진적인 러시아 사회에서의 선각자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고 소수의 직업적 혁명가의 엄격한 집단을 표방하였다는 점에서 아방가르드와 상당히 유사한 형태의 집단이었다 할 수 있었다.

“이들은 다른 사람들이 볼 수 없는 진실을 파악하고 있었으며, 이점이야말로 자신들에게 반대하는 모든 사람들을 무시하거나 경멸할 수 있는 권리를 스스로에게 부여해줬다.”[마크 애론슨, 도발 아방가르드의 문화사]

그리고 혁명이 성공하자 새로운 지배계급이 된 볼셰비키는 아방가르드의 예술 활동을 적극적으로 장려한다. 소비에트는 예술이 인민들을 사상, 감정, 분위기로 물들게 할 수 있는 강력한 수단이 될 수 있다고 여겼고 아방가르드 예술을 일종의 사회주의 선전선동의 수단으로 활용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예술은 아지프로 agitprop 라 불리며 실질적이고 창조적인 약진을 해나갔다. 적어도 스탈린이 정권을 잡기 이전까지는…..

El Lissitzky, Lenin Tribune, 1920. State Tretyakov Gallery, Moscow.jpg
El Lissitzky, Lenin Tribune, 1920. State Tretyakov Gallery, Moscow“ von El Lissitzky – State Tretyakov Gallery, Moscow. Lizenziert unter Public domain über Wikimedia Commons.

엘 리시츠키 El Lissitzky 가 레닌을 위해 제작한 연단으로 구성주의의 진수를 보여주는 작품

여하튼 이 당시의 예술분위기는 모든 장르에서 전통적인 문법장르가 해체되는 시기였다. 보이는 것, 들리는 것들 모두가 해체되고 재창조되어 이해 불가한 우스꽝스러운 소리조차 음악으로 포장되었는데 그 대표적인 창조물이 바로 기계를 통한 실용적 작업이 소리와 결합된 레온 테레민의 작품 테레민이었다.

레온 테레민은 1895년 페테스브르그에서 태어났다. 귀족집안 출신이었던 그는 어렸을 적부터 과학에 소질을 보이며 남들과 다른 교육의 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 소비에트 혁명 후 그의 인텔리겐챠적인 지위가 문제가 될 수도 있었지만 그의 과학적 재능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혁명정부를 위해 일을 할 수 있게 되었고 어느 정도 자유도 누릴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시기에 테레민은 여러 연구를 하던 중 인체의 온도변화를 음향으로 전환하는데 착안하여 테레민을 만들게 되었다.

1921년 어느 날 레온 테레민이 자신이 발명한 새로운 악기를 레닌에게 시연해 보인다. 이 악기는 현도, 건반도, 마우스피스도 없는 악기였다. 음은 전기 장치가 부착된 상자에서 만들어졌다. 연주자는 상자에 부착된 안테나와 금속봉 사이의 공간을 채우고 있는 공기를 연주한다. 이 악기는 전혀 새롭고도 으스스한 음을 만들어내었다. 레닌은 이 연주에 깊은 감명을 받은 나머지 악기연주법을 배우기까지 했다고 한다.(레닌은 후진적인 농업사회였던 러시아가 사회주의 강국으로 거듭나는 길은 하루빨리 공업사회로 전환하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하였다. 이에 따라 기계에 대한 그와 집권세력의 집착은 매우 강했다. 그는 실제로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고 한다. “Socialism equals Soviet power plus electrification.” )

이후 소비에트의 현대성을 상징하는 선전도구로서 새로운 악기를 유럽에 선전하러 돌아다니던 테레민은 1927년 미국으로 이주하여 이 신기한 악기를 대중에게 선보였다. 많은 이들이 테레민에 관심을 보였는데 앨버트 아인슈타인 Albert Einstein 도 매우 흥미있어 하며 그의 집을 자주 드나들었다 한다. 이듬해 그는 테레민의 특허권을 얻은 후 악기 제작권을 RCA에 팔았다. RCA는 이 악기의 연주가 “휘파람 부는 것처럼” 쉽다는 슬로건 하에 악기 판매에 나섰는데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악기연주가 휘파람 불듯이 쉽지도 않았을 뿐더러 1929년 미국에는 대공황이라는 미증유의 사태가 있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 악기는 미키마우스 클럽에서 시연되기도 했었고 앞서 말했듯이 공상과학영화와 공포영화의 사운드트랙에 이용되었다. 이 악기의 가장 뛰어난 연주자는 전직 바이올리니스트였던 클라라 록모어 Clara Rockmore 였다. 레온 테레민은 아름다운 외모의 그녀에게 구애하였으나 그녀는 변호사 존 록모어 John Rockmore 와 결혼한다.

Rockmore and Termen.jpg
By Unknownhttp://www.thereminworld.com/Article/13958/happy-birthday-clara-rockmore, Public Domain, Link

Clara Rockmore

이후 테레민은 소수이긴 하지만 대중음악에도 사용된다. The Beatles나 The Rolling Stones 와 같은 몇몇 대중음악가가 이 악기의 소리를 사용하였다. 대표적인 곡이 비치보이스의 명곡 Good Vibrations 다. 하지만 그의 작업은 이러한 컬트적인 현상과 별개로 현대 대중음악에 보다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의 작업이 신서사이저를 발명한 로버트 무그 Robert Moog 에게 영감을 주었기 때문이다.

로버트 무그는 1950년대 혁신적인 신서사이저라 할 수 있는 미니무그 minimoog 를 발명하여 현대 전자음악(Kraftwerk, Gary Numan, Pink Floyd 등의 선구자적인 음악가들이 시도하여 인기를 얻었던 전자음악은 80년대 Synth Pop, New Romantics 등의 장르를 통해 전성기를 맞는다. 이후 이들 장르의 인기는 이전 같지 않지만 오늘 날 대중음악에서 필수적인 요소가 되었다.) 의 아버지로 칭송받는 이다. 그는 이미 고등학교 시절부터 테레민에 매혹되어 직접 제작하여 팔기까지 했던 인물이었다. 그리고 미니무그는 많은 면에서 테레민이 지향하는 바를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런 면에서  우리시대의 신서사이저 음악은 테레민의 은혜를 받은 셈이다.

Minimoog.JPG
Minimoog” by Krash – photo taken by Krash. Licensed under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로버트 무그가 제작한 미니무그

1938년 그는 돌연 미국에서 종적을 감추었다. 많은 이들은 소련의 스파이들이 그의 뉴욕 아파트에서 그를 납치하여 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후에 나온 그의 전기에서는 그가 빚 때문에 미국을 떠났고(RCA에 테레민의 권리를 넘긴 레온 테레민의 다음 프로젝트는 텔레비전의 발명이었다고 한다. 이를 위해 회사를 설립하고 많은 돈을 끌어 모았으나  그 프로젝트는 실패하였고 테레민은 빚더미에 앉았다고 한다.) 어쨌든 결과적으로는 소련에 호송되었다고 전하고 있다.(또는 그가 미국에서 명성을 얻었을때조차 지속적으로 소련 스파이들과 접선을 유지했고 이 당시 자발적으로 소련으로 돌아갔다는 설도 있다)

어쨌든 그는 그곳에서 혁신적인 도청장치인 The Bug의 작업에 참여하였고 이일로 인해 당시 소련사회의 최고 영예인 스탈린 훈장을 수여받기도 했다. 후에 소련에서 음악학교에서 음악 강의를 맡기도 했으나 현대음악은 해로운 것이라는 비난에 직면하여 이 일을 그만두어야 했다. 그는 1991년이 되어서야 미국으로 되돌아 올 수 있었고 1993년 숨을 거두었다. 1994년 그의 업적을 기린 Theremin: An Electronic Odyssey 라는 다큐멘타리가 발표되었다.

요컨대 테레민의 개발, 발전, 그리고 이어지는 전자음악의 발달의 이면에는 사회주의 혁명, 아방가르드, 기계문명에 대한 낙관주의와 같은 20세기 초 인류문명사의 발전이라는 역사적 맥락이 놓여져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한참 후에 대중음악계는 지나친 악기의 기계화, 내지는 전자기기화에 싫증을 낸 이들이 소위 플러그를 뺐다는 의미의 unpluged 공연을 한동안 유행시키기도 했다.

테레민 연주 듣기

참고할만한 사이트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