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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 케인즈주의

Massive Defense Spending
Leads to Job Loss

by Dean Baker

석유회사와 다른 통상의 용의자들이 후원하는 전국 단위의 광고가 하나 있는데, 대중들에게 온실가스 배출을 줄이고 지구온난화를 감속시키는 조치가 엄청난 일자리 감소를 초래할 것이라는 것을 확신시키는 것이다. 이 광고는 낮은 성장과 수십만의 일자리 감소를 경고하고 있는데, 심지어 의회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현재의 법안들의 몇몇 수정안들이 법제화될 경우 수백만의 일자리 감소에 이를 수도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사실 표준 경제 모델은 에너지 가격을 인상시켜 온실가스 배출을 줄이려는 목적의 조치가 낮은 경제성장과 관련하여 비용을 발생시킬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낮은 경제성장은 그 영향이 확실히 대부분 이 괴담에서 지적하는 것보다 미약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더 적은 일자리를 의미하기는 한다.

그러나 일자리 감소에 관한 석유회사의 괴담은 어떠한 전후관계도 없는 것이다. 이 모델에서 대부분 정의상의 시장산출물을 방해하는 여하한의 정부 조치는 더 낮은 경제성장과 더 적은 일자리로 이어져 효율을 저해한다. 지구온난화를 저감시키는 노력들은 이 범주에 속하지만, 대부분의 모든 것들과 모든 범주의 많은 아이템들이 더 큰 영향을 미친다.

예를 들어 국방지출은 정부가 자원을 시장에 의해 결정된 용도로 사용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그 대신 그것을(자원을 : 역자 주) 무기와 물품을 사고 병사와 다른 군무원들에게 임금을 지급한다. 표준 경제 모델에서 국방지출은 효율을 감소시키고, 성장을 저해하고, 일자리를 갉아먹으면서 경제를 직접적으로 고갈시킨다.

몇 해 전에 경제와 정치 연구 센터(the Center for Economic and Policy Research)는 앞서가는 경제 모델링 회사인 글로벌인사이트에게 GDP 1%포인트에 상당하는 국방지출이 지속시키는 증감의 영향을 분석하는 작업을 의뢰했다. 이는 대략 이라크 전쟁에서의 비용에 상응하는 것이었다.

글로벌인사이트의 모델은 20년 후에 경제는 추가적인 국방지출의 결과로 0.6%포인트만큼 감소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낮은 성장은 국방지출이 증가하지 않았을 상황에 비교해볼 때에 거의 70만 개의 일자리가 감소된다고 암시하고 있다. 건설과 제조업은 특히 이 예측에서 많은 일자리 감소가 있었는데, 각각 21만개와 9만개의 일자리였다.

우리가 글로벌인사이트에게 모델링해달라고 부탁한 시나리오는 현재의 정책과 연계된 국방지출의 증가를 매우 과소평가되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가장 최근의 분기에 국방지출은 GDP의 5.6%에 달한다. 비교해보면 911 공격 이전에 의회의 예산처는 2009년의 국방지출이 GDP의 2.4%에 달할 것으로 예상했었다. 우리의 911 이후의 무장은 공격 이전의 기준선과 비교할 경우에 비해 3.2%포인트에 해당한다. 이는 글로벌인사이트의 일자리 감소 예측이 훨씬 더 낮음을 의미한다.

더 많은 지출의 영향은 즉각 비례하여 경제 모델에 반영되지는 않을 것이다. 사실 이는 다소 비례보다 더 반영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단지 글로벌인사이트의 예측을 3으로 곱하기만 하면, 우리의 증가하는 국방지출이 장기적으로 GDP의 1.8%포인트의 감소로 이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현재의 경제에서 약 2천5백억 달러에 해당하는 것이거나, 이 나라의 모든 사람들의 수입이 800달러 감소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국방지출의 증가로 인해 예상되는 일자리 감소는 2백만 개에 달할 것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지구온난화에서 기인하는 노력에 의한 일자리 감소를 반영하는 표준 경제 모델은, 또한 2000년 이후 장기적으로 2백만의 일자리에 근접하는 경제비용을 발생시키는 국방지출의 증가도 반영한다.

몇몇 이유로 인해 아무도 더 많은 국방지출과 관계된 일자리 감소는 주목하지 않는다. 사실 국방지출로 인한 일자리 감소는 뉴욕타임스, 워싱턴포스트, 나쇼날퍼블릭래디오, 또는 어떠한 주요 미디어에서도 언급하고 있지 않다. 이러한 생략의 핑계거리는 찾는 것은 매우 어려울 것이다.

만약 우리가 온실가스를 감소시키기 위한 노력에 대한 경제적 영향에 대해 심도 깊은 논의를 하고 싶다면, 경제적 영향은 맥락이 맞아야 한다. 우리는 석유회사가 이익을 유지하는데 관심이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이를 유권자에게 알리고 싶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나 만약 미디어가 어떠한 전후관계 없이 지구온난화를 포함한 조치들로 인한 일자리 감소 예측을 논한다면, 대중은 또한 그들의 모티브를 따져 물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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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지구온난화에 대한 석유메이저들의 비난을 반박하기 위한 글이다. 이 글은 본래의 의도 이외에도 또 한 가지 중요한 사실 하나를 알려주고 있다. 즉, 좌우 양측에서 각자의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주장하고 있는 소위 ‘군사 케인즈주의’(Military Keynesianism)의 효용성이 근거 없다는 사실을 일깨워주고 있다.

케인즈는 정 할일이 없으면 땅이라도 팠다가 다시 묻으면 어쨌든 GDP가 늘어나니 경기부양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한바 있다. 우익 후손들은 – 그리고 군사기업들은 – 이 논리에 따라 국방지출과 같은 비생산적 지출에 정당성을 부여했고, 좌익 후손들은 우익들이 그러한 욕망 때문에 조만간 어디에선가 전쟁을 일으킬 것이라고 주장한다.

둘 다 국방지출이 경기부양에 도움을 줄 것이라는 전제에 동의하고 논쟁을 벌이는 셈이다. 하지만 본문에서도 밝혔듯이 국방지출은 경제에 도움을 주지 않는다. 비록 그것이 단기적으로 일자리를 늘이고 GDP를 증가시키는 착시효과가 있을지 몰라도, 그것이 생산적인 선순환 과정에 속해있지 않은 이상 – 미사일이 매개체가 되어 생산에 기여할 일이 있을까? – 그것은 허깨비일 뿐이다.

단기적인 경기부양에 효과는 있을 수 있지 않은가는 주장도 만만치 않지만 사실 현대전이 경제에 도움을 준적은 없다. 전쟁이 특정경제에 도움을 준 경우는 전쟁이 특정경제에 비용을 부과하지 않고 순수하게 이득만을 안겨줄 경우에 한한다. 2차 대전에 참전하기 전의 미국과 한국전쟁의 생산기지 역할을 한 일본이 그 경우에 해당한다.

일반적인 믿음과 달리 몇몇 저자들은 2차 세계대전이 미국경제를 살린 원인은 미국이 전쟁에 참전하였기 때문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특히 그들은 미국의 참전 이전, 영국을 위한 미국의 엄청난 무기 생산이 우리 경제를 살린 요인이라고 주장한다.Contrary to popular belief, some writers say that the reason that WWII actually stimulated the U.S. economy was not because of America fighting the war. Specifically, they argue that America’s ramped-up production of armaments for the British before the U.S. entered the war was the thing which stimulated our economy.[Guest Post: “War ALWAYS Causes Recession”]

이처럼 전쟁이 한 경제에 긍정적이려면 순이익이 증가하여야 한다. 베트남전쟁, 이라크전쟁 등 미국이 치룬 주요전쟁들은 미국의 일방주의, 이에 따른 주요 국가들의 비협조, 그리고 특히 미군 특유의 값비싼 단위비용으로 말미암아(주1) 오히려 순손실을 발생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물론 이라크 전쟁에서는 유전확보라는 부수적인 효과를 감안할 수도 있고 이것은 상당부분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남아있는 미국과의 분쟁지역은 이라크에서와 같은 효과를 얻을 수 있는 곳이 거의 없다. 유일하게 이란이 있으나 명분이나 국제공조 등, 이전의 일방주의와 다른 명분을 얻기 위해 기울여야 하는 노력을 감안하면 경제적 실익은 없다.

군사적 지출과 서비스업은 제조업과 달리 가시적인 생산물을 창출하지 못한다. 1,2차 산업이 그 기능을 담당할 뿐이다. 하지만 서비스업은 일정 정도 생산의 효율성을 증대시키는 기능을 하는 긍정적 기여를 한다. 이와 달리 군사적 지출의 유일한 기여는 거주민의 심리적 안도감 정도다. 나머지 비용지불은 군수기업에게 돌아갈 뿐이다. 다시 말해 케인즈의 승수효과는 없다. 또는 마이너스다.

(주1) 특히 이라크전쟁은 군대 유지기능의 대폭적인 민영화 등으로 말미암아 비용이 대폭 증가했다

석유, 자본주의, 도시

우리는 미국에서 도시 간 또는 도시 내에서 포괄적인 통행자 철도 서비스가 있었다는 사실을 쉽게 잊곤 한다. 1950년대에의 값싼 연료, 경제 활황, 그리고 새로운 주간(州間) 도로 시스템으로 말미암아 철도가 인기를 잃어갔다. 미국인들은 승용차 소유가 가져다 준 개인주의적 자유를 포용했고 보도조차 없는 너무나 자동차 의존적인 광범위한 교외개발을 시작했다.
It’s easy to forget that we used to have comprehensive passenger rail service in America, both between and within cities. Then, in the 1950s, cheap gas, a booming economy and the new Interstate Highway System made rail unfashionable. Americans embraced the individual freedom that car ownership brought and started building far-flung suburbs so automobile-dependent that they didn’t even have sidewalks.[출처]

요즘 석유의 개발에 관한 역사책을 탐독하고 있는데, 실로 미국을 비롯한 서구 자본주의의 전후 활황은 상당 부분 값싸고 이용가치가 너무나 다양한 석유라는 마술과 같은 자원 덕분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초기 자본주의의 승자독식 시스템에 대한 반성으로 각광받은 케인즈주의적인 분배 시스템에 의해 경기가 부양되었다는 해석도 가능하지만 그마저도 실은 석유가 전제되어야 함이 합당하다.

이 중에서도 특히 전후 미국의 강대국으로의 성장은 석유에 상당 부분 의존하고 있다. 스스로가 세계 최고 수준의 산유국인 이 나라는 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연합국이 소비한 석유의 90%를 공급하였다. 이는 무기 수출과 함께 미국의 본원적인 자본축적에 막대한 기여를 하였음은 말할 것도 없다. 또한 위에 언급되어 있다시피 석유는 미국의 도시화와 산업화를 가속화시키면서 국가의 풍경을 바꿔놓았다. 그 결과 넓은 교외주택과 대배기량의 자동차는 미국 중산층의 상징이 되었다.

하지만 이제 그 신화는 깨져가고 있다. 불과 얼마 전의 유가폭등세와 석유고갈에 대한 두려움은 이제 평범한 미국인조차, 아니 전 세계의 문명인들이 공통으로 느끼는 두려움이 되었다. 더군다나 승용차 없이는 일상생활의 영위조차 어려운 미국의 기형적인 도시화는 이제 큰 골칫거리가 되었다. 보기에는 호쾌할지 모르지만 그러한 시스템은 유사시에 ‘지탱불가능한(unsustainable)’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오바마가 얼마 전 서둘러 전국적 차원의 철도 신설 계획을 발표한 것이다.

미국이 석유 시대의 가장 상징적인 도시 개발 형태이긴 하였지만 다른 나라들도 유사한 형태로 발전하여 왔다. 하지만 이제 그 풍경이 근본적으로 바뀌어갈 시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노동가치론에 대한 단상

이글은 아래 ‘부’와 ‘가치’ 간의 실질적인 구별에 관한 메모 에 리에라님과 beagle2님이 달아주신 댓글에 대한 나의 보충설명 내지는 단상이다.

노동가치론은 노동을 ‘가치(value)’의 참된 척도로 보는 것이다. 아담 스미드가 – 또한 그를 비롯한 고전파 경제학자들 – 이러한 이론을 정식화한 이유는 여러 이유가 있을 수 있으나, 그 중에서도 ‘부는 화폐에 존재한다’라고 믿는 중상주의적 견해에 대항무기로 사용하기 위함도 포함되어 있다. 한 나라, 나아가 이 세상의 부는 어느 한 나라가 무역차액을 통해 당시의 화폐적 표현인 금을 쟁취함으로써 쌓이는 것이 아니라 각 나라의 노동자의 근면한 노동, 그리고 자유무역을 통한 상품의 활발한 교환을 통해 쌓여간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했던 것이다. 여기에서 ‘부’와 ‘가치’간의 구별이 필요한데 ‘부’는 본래 교환가치가 없던 자연자원과 그에 대한 노동이 결합된 것이고, ‘가치’는 그 중에서도 교환가치의 측정단위가 되는 노동만을 고려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지식가치론이랄지, 인적자본에 대한 문제를 살펴보자. 한동안 예를 들면 미래학자라는 명찰을 달고 있는 사람들에 의해 지식 또는 정보역시 가치를 가질 수 있다는 주장이 꽤 설득력을 가지고 전파되었다. 나는 이 주장이 두 가지 천박한 편견에 기초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첫째, ‘가치(value)’라는 단어에 대한 오해다. 사랑도 가치 있고 우정도 가치 있다. 정보 역시 가치 있다. 다만 이때 가치는 가치론에서의 가치와는 다른 의미로 쓰일 뿐이다. 둘째, ‘노동(labour)’에 대한 편협한 사고다. 지식과 정보에 대한 탐구 역시 넓게 보아 노동의 범주에 들어간다. 탄광에서 석탄 캐는 것 – 물론 이는 매우 유용한 노동이나 사회적으로 천대받는 막장 노동이다 – 만 ‘노동’이 아니다. 다만 노동가치론은 노동의 정도를 측정할 때에 유일하게 상호비교가 가능한 ‘노동시간’을 측정단위로 삼을 뿐이다. 그러므로 지식이나 정보도 가치가 있다고 주장하는 이가 지식이나 정보의 측정단위를 제시하지 못할 바에야 노동가치론에 지식가치론도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노동의 이분법적 사고를 좀더 들여다보자. 실제로 주류경제학에서 – 또는 사회일반에서의 –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분리, 그리고 이 중에서 정신노동의 우월적 지위를 당연시하는 입장은 다시 창조성, 상상력, 기업가 정신 등 미사여구로 포장되어 노동일반을 이끌고, 심지어 새로운 가치를 ‘창조(create)’한다는 주장까지 하기에 이른다. 그런 과정에서 이른바 ‘인적자본(human capital)’의 중요성도 강조될 것이다. 리스크를 부담하는 그러한 모든 창조적인 것들의 존재는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그러하기에 노동가치론이 의미 없다는 논지를 이끄는 것은 무리가 있다.

만약 노동가치론을 주장하는 이중 어떤 이가 ‘공장에서 기계라인에서 조립만 하고 앉아 있는 노동자들’이 ‘멋진 신차 디자인을 통해 시장을 개척하는 자동차 디자이너’보다 더 많은 ‘가치를 창조’한다고 주장한다면, 나는 그것은 노동가치론에 대한 조악한 이해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바로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억지스러운 분리다. 우리 일상에서의 실제의 노동은 이 두 가지를 분리하기 어려우며, 실제로 많은 창조적 제안은 사실 기업의 우두머리에서가 아니라 기획단위의 노동자, 심지어 생산라인에서의 노동자들의 직무발명이 대부분이다. 인적자본을 굳이 강조하지 않더라도 자본주의 문명의 발전의 대다수는 현장에서 상품을 만들고 부수며 시행착오를 거친 노동자, 즉 인적자본들이 일궈낸 것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노동가치론’의 현재적 의미는 무엇일까? 고전적인 – 단순히 고전경제학만이 아니라 – 경제학의 철지난 이론이지만 옛것을 알아둔다는 의미 정도로만 받아들이면 될까? 앞서 아담 스미드가 노동가치론을 꺼내들었던 이유를 다시 한번 상기해보면 현재적 의미도 어느 정도 있다고 여겨진다. 즉 현대사회 역시 ‘부는 화폐로부터 창출된다’라는 중상주의적 견해에서 크게 진전된 바 없는 것이 현실이고, 그러한 의미에서 노동가치론은 유의미하다고 본다.

현대 자본주의에서 금융부문의 비대화로 인해 지속적으로 반복된 신용창출은 이제 단순히 산업의 혈맥 역할 뿐 아니라 스스로가 산업이 되고자 했다.(미국에서 한창 때 전체 산업이윤에서 금융부문이 차지하는 비율은 40%를 넘었었다) 하지만 노동가치론에 비추어 생각해보면 그것은 일장춘몽일 뿐이다. 좀 심하게 말해 금융 중상주의다. 금융부문이 가치를 ‘창출(create)’하는 것이냐 ‘전유(appropriate)’하는 것이냐의 논의를 제켜두고라도, 이 세계는 1,2차 산업의 존재 없이는 하루도 제대로 굴러갈 수 없는 경제다. 우리가 MMF를 먹고, CDS를 타고, ABS에서 잘 수 없는 한에서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금융부문이 비대해진 미국은 중국으로부터의 값싼 공산품을 가져다가 생활한 것이다.

‘노동가치론이 다른 이론보다 우월한 이론이다’라고 입 아프게 떠들 필요 없이, 또 그것을 무슨 신주단지 모시듯 무결점의 이론이라고 여길 것 없이, 그것이 가지는 함의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고 해석하고 실천하면 된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노동가치론이 세상을 바라보는 하나의 잣대로써 유용하다고 생각한다.

비록 케인즈가 마르크스를 개차반 취급하고 자본론이 코란과 동일한 선상의 책이라고 폄하하였지만 그의 글을 인용함으로써 마르크스 내지는 노동가치론 등 경제학 이론을 옹호(?)해보고자 한다. 요지는 결국 우리가 그것에 기대는 한에는 사실 모든 객관적이고 엄정한 글이나 말 역시도 선입견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고, 많은 이들은 자신들의 가치관에 영향을 미친 책들을 코란까지는 아니더라도 하나의 ‘밀교적(密敎的)’ 지침서로 무의식중에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그렇게 받아들일 수 있는 만큼만 받아들이고 그에 대해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는 이들과 게임의 룰 안에서 싸워나갈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 인간의 한계라고 생각한다. 나 역시도.

경제학자와 정치철학자들의 사상(思想)은, 그것이 옳을 때에나 틀릴 때에나, 일반적으로 생각되고 있는 것보다 더 강력하다. 사실 세계를 지배하는 것은 이밖에 별로 없는 것이다. 자신은 어떤 지적(知的)인 영향으로부터도 완전히 해방되어 있다고 믿는 실무가(實務家)들도, 이미 고인(故人)이 된 어떤 경제학자의 노예인 것이 보통이다. 허공(虛空)에서 소리를 듣는다는 권자(權座)에 앉아 있는 미치광이들도 그들의 미친 생각을 수년 전의 어떤 학구적(學究的)인 잡문(雜文)으로부터 빼내고 있는 것이다. 나는 기득권익(旣得權益)의 위력은, 사상의 점진적인 침투에 비하면, 매우 과장되어 있다고 확신한다. [중략] 위험한 것은 사상이지 기득권익(旣得權益)은 아니다.[John Maynard Keynes, 고용, 이자 및 화폐의 일반이론, 조순譯, 비봉출판사(2007), pp 461~462]

금융견실주의(金融堅實主義 ; financial prudence)

소비(消費)는 – 분명한 것을 반복하자면 – 경제활동의 유일의 귀착점(歸着點)이며 목적(目的)이라 할 수 있다. 고용(雇用)의 기회는 필연적으로 총수요(總需要)의 크기에 의해 제한된다. 총수요란 오직 현재의 소비(消費)로부터, 또는 장래의 소비를 위한 현재의 준비(準備)로부터 유발될 수 있을 뿐이다. 우리가 미리 유리하게 대비할 수 있는 소비를 한없이 뒤로 미루어 둘 수는 없다. 한 사회 전체의 입장에서 볼 때, 우리는 장래의 소비를 위하여 금융적 방편(方便)으로 대비할 수는 없으며, 오직 경상적인 현물(現物)의 산출(産出)을 통하여 대비할 수 있을 뿐이다. 우리의 사회조직과 기업조직이 장래를 위한 금융적 준비를 장래를 위한 실물적 준비로부터 분리하고 있으며, 따라서 전자를 확보하려는 노력이 반드시 후자를 수반하리라는 보장은 없다. 이것이 사실인 이상 금융견실주의(金融堅實主義)는, 허다한 예가 증명하듯이, 총수요(總需要)를 감소시키고 따라서 복지(福祉)를 저해할 가능성이 짙은 것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미리 대비한 소비가 크면 클수록, 미리 대비하기 위한 무엇인가를 또 발견한다는 것은 더욱 어려워지고, 수요(需要)의 원천으로서 우리가 현재의 소비(消費)에 의존하는 정도는 더욱 커질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의 소득이 크면 클수록 우리의 소득과 소비와의 차액도 늘어난다. 따라서 어떤 진기한 방편이 없는 이상, 우리가 후에 보는 바에 같이, 수수께끼에 대한 해답은 없다. 다만 우리의 소비가 우리의 소득에 미달하는 액수가 (오늘 생산(生産)하는 것이 채산에 맞는) 장래소비(將來消費)를 위한 물적(物的) 준비와 동등한 액수를 초과하지 않도록, 충분히 많은 실업(失業)이 유지됨으로써 우리를 빈곤(貧困)에 얽매어 두는 길이 있을 뿐이다.[John Maynard Keynes, 고용, 이자 및 화폐의 일반이론, 조순譯, 비봉출판사(2007), pp 122~123]

케인즈의 사상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문구라 생각되어 소개한다. 그는 “자본은 소비와 분리되어 존재하는 독립적인 실체가 아니”며 “소비성향의 약화는 모두 소비에 대한 수요뿐 아니라 자본에 대한 수요도 동시에 약화”시킨다고 주장하고 있다. 인용한 문단은 그 중에서도 소비성향의 약화의 원인으로 “금융견실주의(金融堅實主義 ; financial prudence)”를 지목하고 있다. 얼핏 익숙하지 않은 용어인데 다음과 같은 케인즈의 설명에서 그 의미를 곱씹어 볼 수 있다.

만약 이것의 효과가 ‘견실(堅實) 금융주의(financial prudence)’에 의해, 즉 설비가 실제로 소모되는 것보다도 더 빨리 원가를 ‘상각(償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생각에 의해 악화된다면, 그 누적적인 결과는 사실 매우 심각하게 될 수 있다.[같은 책, p118]

즉 한 기업주가 설비의 감가상각을 인식하는 과정에서 보수적으로 그 소모분보다 더욱 많은 금액을 상각하고, 이것이 전 사회적으로 누적될 경우, 그것은 소비수요 약화에 이은 자본수요의 약화로 귀결된다는 것이 그의 논지다. 예를 들면 현재의 금융위기에서 은행들이 BIS 비율 확충을 위해 노력하게 되면 결국 대출여력이 줄어들어 가계소비와 기업 활동을 위축시키는 것도 같은 맥락이라 할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보수적 관점의 폐해가 [기업의 금융견실주의적 비용증가 -> 소득감소 -> 소비수요/저축 감소 -> 자본수요 감소] 순환과정에서는 타당한 논리이지만 케인즈가 별로 주목하지 않는 소비원천에 대해 살펴보면 반대의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즉 그는 무의식적으로 소득을 소비의 거의 유일한 원천으로 인식하고 있다. 하지만 2차 대전 이후, 주요 선진국들의 노동계급은 실질소득이 크게 증가하는 한편으로, 그에 상응하게 빚을 지게 되었다. 안락한 교외주택, 큰 배기량의 자동차, 각종 가전제품이 중산층의 풍경으로 자리 잡으면서 그들은 마르크스나 심지어 케인즈도 인지할 수 없었던, 단순한 임금재 이상의 소비력을 과시하게 되었고, 이중 상당부분은 빚으로 채워온 것이다.

즉 소비적 측면에서의 금융의 기능은 케인즈의 염려와 반대로 ‘금융방임주의’적인 순환과정이 형성되어왔고, 그것의 하이라이트는 1980년대부터 급속히 성장한 주택담보대출, 이른바 모기지론이라 할 수 있다. 모기지론 증권화를 통한 급속한 신용확대과정은 이후 카드론, 오토론, 스튜던트론에서도 그대로 복사되었고, 그것이 현재의 금융위기, 나아가 경제위기를 불러온 한 축을 이루고 있다.

케인즈는 “은행권을 폐광에 묻었다가 다시 파내게 한다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 나을 것”이라고 말하였지만 이것은 결국 총소비가 총소득을 초과하여 지속적으로 왜곡된 자본수요를 불러오는 경제체제에서는 통하지 않을 말인 것 같다. 요컨대 현재의 양적완화, 금리인하, 주택담보대출 비율 완화 등의 경제해법들은 금융견실주의적 자세를 견지하지 않아 붕괴된 소비수요를, 자본부문에서의 금융견실주의의 폐기로 만회해보자는 시도인 셈이다.

세계 경제 위기 : 한 마르크스주의자의 분석 (6)

다음은 사회주의평등당(the Socialist Equality Party) 호주지부의 국가서기인  Nick Beams가 2008년 11월과 12월에 걸쳐 호주 여러 도시에서 가졌던 강의를 요약 발췌한 내용이다. 번역이 일치하지 않은 점이 있을 수 있으니 주의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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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x and Engels” by Original uploader was Σ at en.wikipedia – Transferred from en.wikipedia. Licensed under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무엇보다 노동계급이 그들만의 독립적인 이해관계로 나아갈 프로그램 및 전망 – 국제사회주의 – 의 개발이 필요하다. 이는 다양한 “좌파적” 개혁가와 급진적 경향에 의해 제기되고 있는 정책과의 분명한 차별화를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 그들 모두는 자본주의 질서의 영원성을 확신하면서 노동계급의 정치적 발전을 가로막고 있다. 그들 중 몇몇을 살펴보자.

작가 나오미 클레인 Naomi Klein 과 같은 케인지언에게 위기의 원인은 정치적이다. 위기는 전후 기간 동안 작동하였던 규제를 철폐한 의사결정의 탓이다. 전후 규제 시스템의 붕괴가 이데올로기의 산물이 아닌 자본주의 시스템 내에서의 심연의 모순이라는 인식과 같은 분석은 클레인에 의해 “근본주의”로 평가절하 당한다. 결국 그들의 역할은 이번 위기로 인해 급진화되는 사람들의 시선을 딴 데로 돌리는 것이다.

소위 “좌파적” 개혁가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과거로부터의 교훈을 무시하거나 그들의 정치적 전망의 논리에 대한 비판적 고찰을 거부하는 것이다. 영국의 반(反)부채 활동가 앤 페티포 Ann Pettifor는 10월 21일 가디언에 쓰길 실패한 “세계화” 실험의 파괴적인 요인을 제거하기 위한 “대전환”이 필요하다고 호소했다. 그의 주장은 금융시장은 “길들여지고” 국가는 “덩치를 키워서” 정부가 보다 효율적인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것이고 단일 글로벌마켓은 “덩치를 축소해야”하고 “적당한 규모”라는 컨셉 하에 국제무역 시스템을 재편해야 한다는 것이다.

페티포의 처방은 1930년대 초기 노동당 “좌파”의 경력을 쌓았던 오스왈드 모슬리 Oswald Mosley 가 주도한 운동을 포함한 우익과 파시스트 운동의 “좌파적” 정책을 상기시킨다. 이 운동은 국가적 이익 차원에서 세계시장을 비난하였고 “세계화”와 그 당시 지칭되었던 “세계주의(cosmopolitanism)”를 적대시하였다.

국민국가 정부의 힘을 키우자는 페티포의 호소는 구제금융이 개시되면서 잘 이행되고 있다. 금융위기는 이미 유럽의 정부들은 “자신들의” 기관들을 보호하면서 스스로 분열하고 있다. 그리고 만약 미행정부가 자동차 회사들을 구제금융한다면 다른 정부들도 “국가의 챔피온들”을 보호하기 위해 비슷한 조치를 취할 것이다. 다른 말로 그들 모두가 1930년대 그러한 재앙을 몰고 왔던 관세장벽을 반대한다고 주장하면서도 그에 부합하게 파괴적인 형태의 보호주의 조치를 취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페티포가 주장하는 국제무역의 “적당한 규모”는 1930년대의 세계시장의 붕괴와 더불어 형성된 무역블록의 잔재이다.

케인지언 “좌파”들은 경기부양 패키지의 실행을 지지한다. 그리고 1월 20일 오바마 행정부의 권력이 어서 오기를 갈망한다. 11월 22일 오바마는 2009년과 2010년에 걸쳐 250만 개의 일자리를 창출한다는 경제계획을 발표했다. 그러나 노동통계국에 따르면 이미 지난 12개월 동안 해고자 수가 280만 명 증가했고 실업률은 1.7% 포인트 증가했다.

모든 국제 금융거래에 거래세(turnover tax)를 도입하자고 주창한 것으로 잘 알려진 프랑스에 위치한 ATTAC은 새로운 패러다임으로써 주창하길 “금융이 사회적 정의, 경제적 안정성, 그리고 지탱 가능한(sustainable) 개발에 기여하여야 하는 반면” 현재의 “모델”은 총체적인 불신을 얻고 있기에 “정치와 경제의 의사결정자들은 이 지탱 불가능하고 불공평한 금융 시스템을 인민의 요구, 평등, 그리고 지탱가능성으로 전환시켜야 한다고” 하였다.

최근 ATTAC 와 같은 소위 반(反)세계화 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조직들은 “다른 세상은 가능하다(Another world is possible)”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다른 면에서 그들이 자본주의 시스템을 끝낼 수도 있다는 환상을 만들어내고 있다. ATTAC 은 최근 그들의 슬로건을 다시 수정했다. “다른 금융 시스템은 가능하다 : 이윤에 앞선 안정성과 연대(Another finance system is possible: Stability and solidarity before profits.)”

이들의 요청은 “새로이 출발한 금융시스템을 엄밀히 규제하기 위해” UN의 후원 하에 새로운 기관을 창설하는 것인데 이는 2003년 이라크의 범죄적인 침략을 자행하려 했던 미국을 저지하는데 실패한 UN의 시도 이상의 효과를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인도 공산당의 가장 뛰어난 지성인 중 한 명인 프라밧 파트나익 Prabhat Patnaik 은 케인지언의 정부지출 증대 프로그램에 “좌파적”인 맛을 가미했다. 10월 13일 공개된 “위기의 전망”이라는 글에서 그는 현 시점에 필요한 것은 단순히 세계경제에 유동성을 공급하는 것이 아니라 증가하는 소비를 통해 수요를 불어넣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나아가 그는 “그러한 지출의 일반적인 목적은 최근 수년간의 세계경제의 특징이었던 전 세계 보통사람들의 생활수준을 쥐어짜는 것과는 반대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새로운 성장 부양”은 새로운 투기적 거품이 아닌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모두에서의 인민들의 삶의 수준을 직접적으로 향상시킬 수 있는 확대된 정부 지출”로부터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부가 다소간은 생활수준을 향상시킬 수 있고 이것이 자본주의 경제의 위기를 경감시킬 수 있다는 개념을 개진하는 것은 노동계급과 반항하는 대중이 그들이 직면한 현실에 눈감게 만드는 것이다. 위기의 근본에는 전 세계 노동계급으로부터 착취된 잉여가치와 관련한 가상자본의 초과 축적이 놓여있다. 이는 여하한의 생활수준의 향상은 이윤의 위기를 악화시킨다는 것을 의미한다.

Nick Beams 는 이후 몇몇 좌익들의 기회주의적인 행태를 고발하고 있으며 심지어 사회주의노동자당의 일부 인사 발언까지 비판하고 있다. 이러한 부분들은 생략한다. 여기까지는 케인지언 “좌파”를 비롯한 급진적이나 Nick Beams 가 기회주의적이라고 간주하는 이들의 비판이 어느 정도 의미가 있다고 판단되어 소개한다. 또한 이 뒷부분은 향후 사회주의 운동의 진로를 트로츠키주의적인 관점에서 서술하고 있다. 물론 이들 분파의 행동강령을 알아두는 것도 의미가 있겠으나, 이 글을 번역했던 애초 나의 관심사와는 조금 거리가 있어서 일단은 생략하기로 하겠다. 추후 의미가 있다고 판단될 때 별도로 소개할지도 모르겠다. : 역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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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 물은 썩게 마련

foog 2009/01/07 12:31
잘 아시겠지만 이 다큐는 동명의 책을 기초로 만들어진거죠. 요즘 그 책을 읽고 있답니다. 다 읽고 다큐를 감상하려 했는데 이렇게 맛뵈기로 보여주시니 감사합니다. 🙂

Periskop 홈지기 2009/01/07 15:41
마침 그 책을 읽고 계셨다니 재밌는 우연이네요. 책과 다큐멘터리가 논조가 미묘하게 다르게 잡혀 있으니 독서와 시청을 연달아 하시면 훨씬 느낌이 좋을 것 같습니다. 저는 한창 신자유주의가 전성기(?)를 구가할 때 읽었는데, 지금 다시 읽어보면 느낌이 확 다를 것 같습니다. 번역판에서는 자그만치 “국가 주도 경제의 쇠퇴와 시장 경제의 승리”라고 부제를 달아놨는데 10년도 안 되어 상황이 이렇게 역전이 되다니…… 역시 오래 살고 볼 일입니다. 댓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foog 2009/01/07 16:39
제 현재까지로의 감상은 이렇습니다. 물론 그 책이나 여타 경제현상을 다룬 책들이 신자유주의 혹은 그와 다른 입장들의 우위를 기조로 하는 내용들이 대다수이고 이 책도 그러한 편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러한 부분들보다는 ‘결국은 어떠한 입장이든지 간에 혁신하지 않는 고인 물은 썩게 된다’는 생각이 자꾸 들더군요. 소비에트 모델도 어찌되었든 한때는 다른 국가들의 부러움을 산 적이 있습니다. 케인즈 모델도 서구자본주의의 전성기를 구가하게끔 만들어 주었던 모델이고요. 욕을 바가지로 먹었지만 신자유주의 모델도 케인즈적인 국가개입주의 모델의 부담을 덜어냈다는 점에서는 혁신이었죠. 하지만 그 부담을 덜어냄의 과함, 즉 균형점을 찾지 못한 일방적인 자유화때문에 또 다시 이전의 모델과 같은 길을 걷고 있는거죠. 결국 인간은, 그리고 세상은 끊임없이 새로운 모델을 찾아헤매고 그것이 혁신적일 때까지는 유효한 그러한 좌충우돌의 시스템이 이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Periskop 홈지기 2009/01/08 13:56
옳으신 말씀입니다. 가만히 다른 곳에 올라온 글들을 보노라니 이 다큐멘터리를 1편만 보고 단순히 “신자유주의 찬양”으로 아는 분들도 있더군요. 사실 전편을 다 보면 어느 한 쪽을 편들려는 것보다는 그렇게 돌고 도는 자본주의의 큰 흐름을 전달해주려는 것임을 알 수 있을텐데 말입니다. 저도 우리 현실을 영위해나가는 시스템에 있어 만인의 행복을 보장해주는, 그런 영속된 균형잡힌 체제란 존재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면 완벽하겠지 하는 믿음이 들다가도 한 구석에서는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하며 썩어가기 마련이죠. 그런 문제들에 대해 끊임없이 의문을 던지고 각자의 방식으로 해결책을 구해온 노력들이 있어왔고, 그것이 어느 순간 격렬한 파도와 맞물려 세상은 바뀌는게 아니겠습니까.

[원문보기]

위 대화는 어느 책에 대한 나와 ‘Periskop 홈지기’님과의 대화다. 우리가 이야기하고 있는 책은 ‘시장 對 국가’라는 이름으로 국내에 소개된 The commanding heights라는 책이다.

The commanding heights : the battle between government and the marketplace that is remaking the mord
다니엘 예르긴, 주명건 역, 세종연구원, 1999.09.01

<시장 대 국가>는 시장과 국가 역할의 역전과 재역전 드라마가 전개된 지난 50여 년간의 세계경제사를 하나의 서사극처럼 펼쳐내고 있다. 에너지 문제 전문가로서 석유산업의 역사를 소설처럼 그려낸 저서 <상>(The Prize – 황금의 샘으로 번역됐음)으로 퓰리처상을 수상했던 예긴은 이번에도 방대한 사료와 현장답사를 통해 작가로서의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출처]

책 소개에도 나와 있듯이 이 책은 지난 50년간의 국제경제에 있어서의 시장과 국가의 주도권 쟁탈전을 전 세계적인 범위에서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다. 물론 전체적인 톤은 결국은 시장이 국가보다 우월하다는 뉘앙스가 풍기기는 하나 보다 근본적인 교훈은 위의 대화에서도 말하였듯이 ‘고인 물은 썩게 마련’이라는 점이다.

소비에트 모델의 ‘경직성’, 케인즈 모델의 ‘방만함’은 그 모델의 한때의 참신성에도 불구하고 그 열정의 소진을 재촉하는 촉진제가 되고 말았다. 이후의 시장근본주의 모델은 시장이 이른바 ‘창의와 효율’을 통해 늘 새로운 열정을 불어넣어줄 것이라는 가정 하에 운용되어 왔지만 결국 그 시장역시 자기만족적이고 아전인수적인 편견으로 말미암아 좌초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결국 우리는 이러한 잔재들의 교훈과 반성 속에서 새로운 모델을 찾아나서야 할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내가 ‘Periskop 홈지기’님과 대화를 나눴던 곳은 ‘Periskop 홈지기’님이 위 책에 기초하고 살을 붙인 동명의 다큐멘터리의 소개 글에서였다. 나도 아직 보지 못했지만 책내용으로 볼 때 충분히 기대해도 좋을 내용으로 판단된다. ‘Periskop 홈지기’님의 멋진 소개로 더욱 구미가 당긴다. 다큐멘터리 소개는 여기로.

위기돌파의 대안으로써의 사회간접자본 투자

어쨌든 60~70년대 내내 케인즈는 여전히 논란거리였는데, 재정정책을 중심으로 보면 약간 구분이 쉬울 것 같다. 유럽의 사민주의 정당들은 케인즈주의를 받아들이면서 의료보험, 퇴직수당, 실업보험, 공공 교육 등의 방향으로 끌고 가려고 했다. 이를 케인즈 좌파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복지 국가’가 그 결과물이다. 반면 일부의 경제학자들은 군사에 대한 투자도 재정정책이라고 하면서 군산복합체를 결국 만들어내게 된 국방산업 그리고 고속도로와 같은 SOC 투자를 주장하였다. 이는 결국 국방산업과 건설업에게 상대적 특혜가 돌아가게 되는데, 이를 케인즈 우파라고 부를 수 있을 것 같다.[케인즈 좌파, 케인즈 우파, 그리고 명박파, 우석훈, 프레시안, 2008년 11월 10일]

우석훈씨에 따르면 “고속도로와 같은 SOC 투자”는 케인즈 우파의 재정정책으로 분류할 수 있다. 이 분류법에 따르면 현 정부는 케인즈 우파적인 방식으로 현 위기를 돌파하려 하고 있다. 내년 예산중에 “사회간접자본(SOC) 예산을 올해보다 26.7%나 늘린 24조7000억원으로 배정”하였기 때문이다. 이는 비단 우리나라만의 대안이 아니긴 하다. 중국, 미국 등 주요국가들 역시 사회간접자본에 대한 투자를 그들 나름의 뉴딜로 여기고 선제적으로 투자한다는 방침이다.

이러한 건설시장의 촉진이 진정 효과가 있는가 여부는 많은 갑론을박이 있지만 기본적으로 전후방 산업연관 효과가 크고, 내수 진작에 효과가 상대적으로 크다는 사실은 큰 이견이 없다. 또한 사회간접자본은 장기적인 경제개발계획의 밑바탕을 구성하는 요소로 선제적이고도 거시적인 견지에서 접근하여야 하는 것 또한 사실이다. 문제는 결국 위기상황에서조차 – 오히려 위기상황임을 핑계로 방기되지만 – 역시 균형개발과 양극화 방지책은 병행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새해 예산안 처리를 둘러싸고 여야가 정면 대치하고 있는 가운데 국민 74.8%는 경기 부양을 위해 정부가 주장하는 ‘사회간접자본(SOC) 예산 증액’보다는 ‘중산층과 서민 구제 예산 증액’을 원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 민정연은 “이러한 의견은 모든 지역과 직업군에서 75% 안팎으로 고르게 나타났으며, 한나라당 지지층도 SOC 예산(34.9%)보다는 중산층과 서민 구제 예산을 늘려야 한다는 의견(60.7%)이 훨씬 많았다”고 밝혔다.[국민 75% “SOC 확충보다 서민 예산 늘려라”, 데일리중앙, 2008년 12월 5일]

또 다시 우석훈씨의 분류에 따르면 국민 대부분은 케인즈 좌파식 해결법을 지지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분배가 아닌 성장노선을 분명히 했던 정당과 대통령 후보를 압도적으로 지지했던 정치적 투표성향과 모순되는 재미있는(?) 결과이긴 하지만 어쨌든 독특한 한국적 정서의 평등주의가 짙게 배어있는 결과이기도 하거니와 그만큼 현재 서민들의 삶이 고통스럽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이명박 정부는 이러한 국민정서를 유의미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정책적으로 배려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궁금증이 남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에 대해 회의적이지 않을까 생각되고 나 역시 회의적이다. ‘오해 정권’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을 만큼 이 정권 역시 이전 정권 못지않은 뚝심 정권이다. 다 본래 의도는 그것이 아니었으나 뜻이 왜곡되어 전달되었다고 생각하는 이들이라 민심을 오해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 식일 것이다.

그러나 혹시라도 정부관계자가 이 글을 본다면 드리고 싶은 충고가 두 가지 정도 있다. 첫째, 민심을 헤아려 전향적인 재분배 정책을 입안하라는 것이다. 재분배는 낭비가 아니라 향후의 지탱가능한 경제를 위한 가처분 소득을 늘리는 소비 진작책이다. 둘째, 산업적인 안배의 측면에서 보자면 사회간접자본 확충도 분명히 필요하긴 하되 그것 이상으로 시급한 농업 살리기 대책을 강구하라는 것이다. 우리나라 사회간접자본 스톡이 선진국에 비해 열등하다는 것이 사회간접자본 확충의 논리인데 그렇게 따지자면 농업은 더더욱 심각하다. 우리나라의 식량자급률은 26%에도 미치지 못한다. 독일은 300%가 넘는다고 한다. 사회간접자본의 미비는 비효율을 초래하지만 농업의 자급기반 붕괴는 재앙을 초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