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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맨딩하이츠”를 점령한 대형은행, 이들을 먹여 살리는 “유모국가”

최근 경제학자들은 얼마나 많은 보조가 대형은행들의 차입비용을 낮추고 있는지에 대해 정확히 밝혀내려고 노력하고 있다. 상대적으로 더 철저한 노력으로는, IMF의 Kenichi Ueda와 메인즈 대학의 Beatrice Weder di Mauro라는 두 연구자들이 약 0.8퍼센티지 포인트라는 숫자를 잡아낸 바 있다. 이 할인가는 채권과 고객들의 위탁금 등을 포함한 전체 부채에 적용되는 것이다. 작아보일지 몰라도 0.8퍼센티지 포인트는 큰 차이를 가져온다. 자산 순위로 미국내 10대 은행들의 부채에 곱하면, 납세자들이 1년에 830억 달러를 지원하는 셈이다. 이 수치를 비교하자면 정부는 세금으로 걷히는 1달러마다 은행들에게 3센트를 지불하고 있는 것과 맞먹는다. 상위 5개 은행들이 — JP모건, 뱅크오브아메리카, 시티그룹, 웰스파고, 골드만삭스 — 총 640억 달러의 보조금을 구성하는데, 얼추 그들의 연간 이윤에 맞먹는다. 다른 말로 하자면, 이들 은행은 미국의 금융업의 커맨딩하이츠(the commanding heights)를 점령하고서 — 미국경제 사이즈의 절반도 넘는 9조 달러의 자산으로 — 기업지원책이 없는 때에 본전치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크게 봐서 그들이 보도한 이윤은 궁극적으로 납세자들로부터 주주에게로 옮겨지고 있다.[Why Should Taxpayers Give Big Banks $83 Billion a Year?]

“커맨딩하이츠”는 군사용어로 “전망 좋은 고지”를 의미하지만, 경제용어로서는 그 의미가 넘어와서 국가경제에 필수적인 기간산업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이 용어는 소비에트 정부의 수반이었던 레닌이 집권 초기인 1922년 시행했던 신경제정책을 소개하면서 처음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즉, 신경제정책에서 토지의 소유권에 대한 고삐를 느슨하게 하면서 이를 걱정하는 공산주의자들에게 ‘커맨딩하이츠에 대한 통제권을 쥐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보내기 위해 사용한 개념이다.

이 용어가 더 유명세를 탄 것은 유명한 저술가 다니엘 예르긴이 그의 저서의 제목으로 사용하면서부터가 아닐까 싶다. 다니엘 예르긴은 그 책에서 커맨딩하이츠에 대한 통제가 역사적으로 시장에 있는 경우와 국가에 있는 경우를 구분하여 분석하여 유명세를 얻었다. 그의 입장은 커맨딩하이츠를 시장이 점령한 경우가 더 바람직하다는 우파적 시각이지만, 그럼에도 레닌의 표현을 제목으로 쓴 것은 그 개념이 간결하고 핵심적이며, 실제 경제의 분석에도 유용한 틀을 제공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기사에서도 마찬가지다. 대형은행들이 “미국 금융업의 커맨딩하이츠를 점령”하고 있다는 표현보다 더 와 닿는 표현도 쉽지 않을 것이다. 미국내 금융업의 비중이 커지고 은행도 대형화되면서, 이제 이들을 배제시키는 것은 불가능하게 되었고, 이를 아는 은행들은 정부에게 고지를 지킬 탄알을 내놓으라고 윽박지르고 있다. 그 탄알은 납세자가 제공하고 있다. 이 정도쯤 되면 국가는 더 이상 커맨딩하이츠를 통제하고 있다고 할 수 없고, 대형은행만을 위한 소위 “유모국가(the nanny state)”가 되었다.

미국과 이란, 그 애증의 관계

미국에게 있어 이란은 두 가지 면에서 중요한 국가였다. 첫째, 과거 소련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나라로서 공산권 확산의 저지선 역할을 수행하는 나라였다. 둘째, 더욱 중요하게 주요 산유국으로서 미국을 비롯한 서구에게 안정적으로 원유를 공급하는 나라였다. 이러한 두 가지 사유로 인해 미국은 무하마드 팔레비 국왕의 독재정치를 배타적으로 지원하는 입장이었다. 이 두 가지 요소가 결합하며 미국은 다음과 같은 또 다른 이익도 향유할 수 있었다.

이란 지도

미국은 산유국으로부터 석유를 얻는 조건으로 대신 거대한 양의 무기를 제공했다. 심지어는 지난 1991년 걸프전쟁 당시 미국의 적이었던 사담 후세인에게 무기를 수출하기도 했다. 무절제한 미국의 무기수출은 이전에도 있었다. 그 예로 1963년부터 73년까지 닉슨 행정부는 이란에 1억2800만 달러의 무기를 판매했고, 73년부터 76년까지는 그 판매액이 110억 달러에 달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쟁의 공포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우리 모두 머리 속으로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만약 소련이 무기를 선적한 배를 멕시코에 보냈다면 우리는 어떤 행동을 취했을 것인가?”[제임스 레스턴 회고록 데드라인, 제임스 레스턴 지음, 송문홍 옮김, 동아일보사, 1992년, p375]

이란 왕정은 반공(反共)을 철저한 국시로 하는 동시에, 과거 페르시아제국의 영광을 되살리겠다는 망상에 사로잡힌 국왕이 지배하는 나라였다. 결코 현대적 의미에서의 민주주의 국가라고 할 수 없었으나 그것은 미국의 관심사항이 아니었다. 팔레비 국왕은 석유국유화를 추진하던 민족주의자 모사데그의 대체재였다. 이란은 그저 중동 공산화의 차단기 및 석유공급지의 역할에 충실하므로 그것으로 만족스러웠으며, 나아가 무기까지 수입해주니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었다.

원래 이란은 – 나아가 중동지역 전반이 – 당초 대규모의 석유가 발견될 즈음에는 영국의 텃밭이었다. 그러나 영국의 석유회사가 모사데그 총리가 주도한 호전적인 민족주의 정치세력에 의해 국유화되고 쫓겨나고부터 그 지역의 주도권은 미국으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당초 자국의 석유생산만으로도 충분했던 미국은 점차 원유공급처 확보의 전략적 중요성을 인식하기 시작하면서, 중동을 그들의 원유공급처 및 무기수요처로 삼아 헤게모니를 장악하여 왔던 것이다.

수구왕정인 사우디와 이란이건 희한한 이슬람식 사회주의를 주장하는 사담 후세인이건 간에 자국 및 자국 석유메이저의 이해관계와 일치하는 정치체제와 정치지도자라면 그것은 크게 문제되지 않았다. 미국은 특히 이 지역에서의 석유 메이저의 이권을 보호하기 위해 그들이 그렇게나 철칙으로 간주하고 있는 – 비록 미법무부는 상당기간 이에 반발하였지만 – 메이저 간의 담합과 협력을 묵인해주곤 했다. 석유는 단일상품으로써는 가장 큰 규모의 무역규모를 자랑하는 상품이자, 경제를 넘어선 정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란을 포함한 중동지역에서의 미국의 절대적 우위는 1950년대 이후 이슬람 민족주의를 주창한 나세르의 등장과 이에 감화된, 또는 내몰린 중동 각국 정권 수뇌부의 대중주의적 움직임, 이스라엘과 중동 간의 갈등격화 등으로 말미암아 점차 흔들리게 된다. 그리고 1970년대 초반 마침내 1960년 설립되었으나 한동안 주목을 받지 못하던 석유수출국기구(OPEC)가 제4차 중동전쟁을 맞아 석유무기화에 성공하면서 수요자 주도의 석유시장과 중동에서의 서구의 – 특히 미국의 – 패권은 도전을 받게 된다. 그리고 그 하이라이트는 분노로 가득 찬 기괴한 얼굴을 한 늙은이 호메이니에 의한 이란 왕정 타도였다.

귀여운 OPEC 마크

대체 이란 왕정은 어떻게 그렇게 허무하게 무너졌을까? ‘황금의 샘(원제 The Prize)’에서 저자 다니엘 예르긴은 이란 왕정의 붕괴가 임박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 정부 내에서 국왕이 패배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고 한다. 더 나쁜 것은 그들에게는 국왕 이외의 다른 대안이 없었다는 점이다. 예르긴의 책에 따르면 미국의 국방부 정보국은 1978년 9월 28일, 국왕이 “향후 10년 이상 권력을 유지할 것으로 예상된다”라고 예측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불과 4개월 후인 1979년 2월 1일 호메이니가 테헤란에 입성한다.

진실은 알 수 없다. 그러나 어쨌든 그것은 미국과 이란의 호시절의 종말이었고 이후 관계는 뚜렷하게 개선되지 않고 있다. 이는 미국에게는 원유확보와 무기수출, 그리고 지정학적 우위 등 여러 면에서 불이익이 되고 있다. 또한 당연히 주변국들에게 미국과 사이가 멀어진 이란은 새로운 구애의 대상이 되고 있다. 다음은 비록 실제로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지정학적으로 이란이 얼마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가를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더군다나 러시아, 이란, 베네수엘라에 이르는 비동맹 산유국의 – 심지어는 중국까지 아우르는 – 연합 가능성은지금도 상존하고 있다.

1996년 초, 옐친 대통령은 서구 중심적 외무장관인 고지레프를 갈아치우고 그보다 경험이 풍부하며, 과거 공산 체제의 정통 국제 분석가였던 예브게니 프리마코프(Evegenniy Primakov)를 그 자리에 앉혔는데, 프리마코프의 장기적 관심 대상은 이란과 중국이었다. 몇몇 러시아 분석가는 프리마코프가 유라시아에서 미국의 일등적 지위를 감소시키는 것을 지정학적 목표로 삼는 세 국가간의 새로운 ‘반패권’ 동맹을 만들고자 조급하게 노력할 것이라고 내다보았다.[거대한 체스판, Z. 브레진스키 지음, 김명섭 옮김, 삼인, 2000년, p155]

나아가 현재 이란 정부는 새로운 중동 역학관계를 위해 자신들만의 핵 프로그램을 꾸준히 진행하고 있어 미국의 골치를 썩이고 있다. 그러고도 보란 듯이 큰 소리다. 이란의 마흐무드 아흐마디네자드 대통령은 “우리가 서방을 필요로 하는 것보다 서방이 우리를 더 필요로 한다”고 호언하고 있다. 세계 네 번째 규모의 석유 수출국이며 세계 최대 규모의 천연가스 매장고를 자랑하는 나라의 수장의 말이니만큼 허언은 아니다.

오바마는 이러한 이란에게 두 가지 선택권을 주었다. “핵 프로그램을 포기하고 그에 상응하는 보상을 받거나 아니면 더 심한 제재를 당할(either give up its nuclear program and get rewarded for doing so, or it will face intensified sanctions)” 것인지에 대한 선택권이다. 이전 정부와 크게 달라진 점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대외적 수사와 물밑 협상은 또 다른 것이다. 아흐마디네자드 역시 미국과의 관계개선을 바라고 있다. 지난 번 글에서 오바마가 이스라엘을 핵보유국으로 언급한 것은 어쩌면 이러한 차원에서의 관계개선의 제스처였을 것이다.

제국주의는 무엇으로 사는가?

9월, 아이젠하워는 편지를 통해 이든에게 <실제보다 훨씬 나세르를 중요한 인물로 만들> 위험이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영국 외무차관 이본 커크페트릭 경은 “대통령이 옳기를 나는 진심으로 바란다. 그러나 나는 대통령이 잘못 알고 있다는 점을 확신한다…… 만약 나세르가 그의 위치를 공고히 하여 점차적으로 산유국들에 대한 통제권을 획득하는 동안 우리가 뒷짐만 지고 있다면 그는 우리를 파멸시킬 수 있으며, 우리의 정보에 따르면 그는 우리를 좌초시킬 마음을 먹고 있다. 만약 중동의 석유가 한두 해 동안 우리에게 공급되지 않는다면 우리의 금보유고는 바닥날 것이다. 그리고 금보유고가 바닥나게 되면 영국 화폐통용 지역은 와해될 것이다. 또 영국 화폐통용 지역이 와해되고 금보유고가 바닥나게 되면 우리는 독일은 물론이고 세계 다른 어떤 지역에도 군대를 파견할 여력을 잃게 될 것이다. 더욱이 우리나라의 방위를 위한 최소한의 방위비조차 지불할 수 있을지 의문스럽다. 그리고 자국을 방위하지 못하는 나라는 결국 소멸될 것이다”라고 격렬히 반론을 제기했다.[황금의 샘(원제 : The Prize), 다니엘 예르긴 지음, 김태유 옮김, 고려원, 1993년,pp321~322]

예전에 ‘여자는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드라마도 있었지만 이 인용문은 제국주의 또는 패권주의 국가가 무엇으로 사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영국은 그들의 식민지인 인도나 사실상의 식민지나 다름없던 중동으로부터의 막대한 무역차익과 석유 자원을 통해 지탱되는 체제였다.

그래서 사실 우리가 위대한 서방의 정치인으로 추앙해마지 않는 윈스턴 처칠마저 뼛속깊이 제국주의자였을 뿐 아니라 식민부 장관직을 수행하기도 했었다. 그러한 입장은 좌우를 가리지 않았다. 위에서 인용하고 있는 사태, 즉 수에즈운하 국유화에 따른 나세르 축출작전이 시도되었던 시기, 영국은 노동당 집권시기였다.

왜 정치적 입장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제국주의 국가의 대외정책은 쉽게 바뀌지 않는가? 그것은 그들의 체제가 정치적으로 세분화되기 이전에 이미 식민지 – 또는 신식민지 – 자원의 수탈을 기초로 공고화되어 있는 체제였기 때문이다. 그러니 좌파가 집권하더라도 가용자원은 역시 식민지로부터 수탈하여야 하는 체제를 바꾸기는 어렵다.

영국 외무차관의 발언은 그 핵심적인 벽돌을 제거할 경우 패권주의가 어떻게 붕괴되는지를 잘 설명해주고 있다. 그리고 실제로 영국은 진작에 빼앗긴 기축통화의 지위와 함께 이 수에즈 사태에서 이집트에 – 사실은 미국에 – 굴복함으로써 소멸까지는 아니더라도 패권을 빼앗기게 되었다.

오늘날의 미국이 당시의 영국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들은 금본위제와 연계되지 않는 달러본위제의 기축통화를 가지고 있다는 점, 미국 스스로 중추적인 산유국이라는 점이다. 이 두 가지 특징은 20세기 형 패권주의의 핵심적인 필요조건이 되었다. 통화와 자원, 이것은 21세기 형 패권주의에도 역시 유의미한 키포인트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석유생산과 포획법규

미국에서 초창기 석유산업의 골격을 형성하고 석유생산에 관한 법규를 제정하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영국 관습법에 기초를 둔 <포획법규(捕獲法規)>였다. 그것은 사냥 중 동물이나 새가 타인 소유지로 옮겨 갔을 때, 그 땅의 소유자만이 그 사냥감을 잡을 수 있는 권리가 있다는 법규였다. 같은 논리로 땅의 소유자는 그 땅 아래에 있는 무엇이라도 파낼 수 있는 권리가 있었다. 그 이유는 영국의 판사가 말했듯이 어느 누구도 지하에 묻혀 있는 광맥에 무엇이 있는지는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포획법규>가 적용됨에 따라, 같은 유전지대에 있는 땅 소유자들은 석유를 월등히 많이 생산하거나 인근 유정의 생산을 감소시킨다 하더라도 그들이 생산하는 만큼을 소유할 수 있었다. 그래서 불가피하게 이웃 유정의 소유자는 다른 사람에 의해 석유가 고갈되기 전에 가능한 한 많은 양을 단시간 내에 퍼올리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여야 했다. 급속생산의 촉진은 생산량과 가격의 불안정을 가져 왔다. 석유는 수렵용 새들이 아니었다. <포획법규>는 주어진 유전에서의 궁극적인 생산량을 감소시키는 엄청난 손해를 입혔다. 그러나 그 규칙의 이면에는 다른 효과도 있었다. 제한적인 규칙에서와는 달리 더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석유산업에 참여하게 하고 필요한 기술을 습득케 하였다. 또 생산이 빨라짐에 따라 더 넓은 판로개척이 가능케 되었다.[황금의 샘(원제 : The Prize), 다니엘 예르긴 지음, 김태유 옮김, 고려원, 1993년, pp44~45]

자본주의의 사적소유체제에서 자원개발의 권리체계가 자리잡아가는 초기과정을 설명해주는 굉장히 흥미로운 사례다. 기술이 발달하지 못하여 아직 지하에 묻혀있는 자원의 규모와 정확한 경계를 가늠할 수 없었던 그 시절, 결국 국가는 고육지책으로 지하권(地下權)을 지상권(地上權)의 소유자에게 부여했다. 마치 석유가 날아다니는 꿩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다. 문제는 본문에도 나와 있다시피 석유는 배타적으로 사냥할 수 있는 꿩이 아니라 광범위하게 퍼져있는 자원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살풍경하고 말이 안 되는 전제조건 때문에 생산업자들은 피 튀기는 경쟁을 벌여야만 했다. 더욱이 아직 유전개발기술이 초기단계인지라 매장량의 확신이 없는 상황에서 석유고갈에 대한 두려움이 컸기에 그들은 노동자들에게 프리미엄을 얹어주고서라도 남들보다 더 빨리 석유를 뽑아내려 안간힘을 썼다. 마르크스가 상품생산 경제에서 자본가는 불변자본(즉 생산기계)의 가치를 최대한 빨리 상품에 이전시키기 위해 노동자의 초과노동도 불사한다고 하였는바, 이 경우엔 그것이 자원채취에 적용된 셈이다.

여하튼 이 사례는 자본주의 생산의 무정부성이 불러올 폐해의 전형적 사례로 뽑을 만 하다. 실제로 그 당시 석유시장에서는 무절제한 생산으로 인한 사회적 비용증가, 공급과잉으로 인한 시장가격 붕괴, 이로 인한 채산성 악화에 따른 시스템 붕괴 등의 악순환이 발생하였고 이에 따른 피해가 엄청났기 때문이다. 결과론일수도 있겠지만 이러한 사태는 아이러니하게도 자본주의의 공적(公敵)으로 간주되는 독점기업 ‘스탠다드 오일’의 등장으로 어느 정도 진정될 수 있었다.

석유산업의 맹주 ‘스탠다드 오일’은 무자비한 사업방식을 통해 시장수요를 초과하는 생산시장을 정리해나갔다. 과잉시설을 소유한 한계사업장을 손아귀에 넣어 정리하고, 스스로는 대형화, 표준화, 품질향상, 구매파워를 이용한 운송가격할인 등을 통해 이익을 증대시켜갔다. 이를 통해 미국의 석유산업은 주먹구구식의 산업분야에서 체계적이고 표준화된 산업분야로 거듭나게 되었다. 물론 그 과정에서는 당연하게도 수많은 희생과 탈법행위가 뒤따랐다.

하지만 시장은 늘 그렇듯이 유기체처럼 역동적이어서 ‘스탠다드 오일’의 독주를 용인하지 않았다. 국내외에서의 독립 석유업자의 등장, 독점에 따른 폐해에 대한 사회고발,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국가에 대한 독점기업의 해체명령에 따라 시장은 또 다시 격렬한 경쟁의 장이 펼쳐진다. 그리고 여전히 포획법규는 석유자원의 무절제한 채취를 부추기고 있었다. 또 다른 조정자가 나설 시점이었다.

도허티는 이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찾아냈다. 그것은 바로 유전을 <공동 운영>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즉, 공동으로 유전을 개발하여 생산된 원유를 각 유전의 소유자에게 배분토록 하는 방법이었다. (중략) 그는 연방정부가 선도적 역할을 하여야 하며, 최소한 업체간의 협력체제를 인정해 주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중략) 많은 석유업계 사람들은 생산기술에 대한 그의 평가에 대해서 의문을 표했고, 연방정부의 개입을 요구한 그를 석유업계의 배신자로 생각하였다. (중략) 텍사스주 최대의 정유회사였던 험블사의 사장 윌리엄 패리시는 1925년에는 도허티의 생각을 비웃었으나, 1928년에는 석유업계가 도허티의 <보다 나은 생산방법>의 덕을 보았다고 감사하였다. 패리시는 유전을 하나의 단위로 묶어 운영하도록 하는 <공동조업>의 주창자가 되었다.[같은 책, pp374~376]

결국 적어도 초기 석유시장에서 생산의 무정부성에 대한 ‘보이지 않는 손’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 당시의 석유업계는 – 다른 모든 자본가들과 마찬가지로 – 정부 규제 없는 야경국가를 꿈꾸었지만 시장의 무정부성으로 말미암아 무절제한 생산, 자원낭비, 이윤율 저하, 독점기업의 출현, 이에 대한 반발, 이합집산 등을 되풀이하였다. 결국 최소한 ‘공동조업’을 하여야 했고 최후조정자로서 연방정부의 필요성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국가산업부흥법에 따라 제정된 석유법에 의거하여, 익스는 각주의 월별 할당량을 정할 수 있는 권한을 갖게 되었다. 몇 년 전 같았으면 그와 같은 할당량 배정은 각지의 석유업자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어려움을 한껏 겪고 있던 석유업계로부터 환영을 받았다. 이러한 일들은 익스의 책임하에 진행되었으며 그는 이를 자랑스럽게 여겼다. 1933년 9월 2일, 미국 석유생산량을 하루 30만 배럴로 줄이기 위해 익스는 각 석유생산주의 주지사에게 각주의 석유생산 할당량을 통보했다. 그것은 매우 획기적인 일이었고 석유산업계 운영방법의 일대 전환이었다.[같은 책, p434]

단어의 취사선택

대처는 이른바 보수주의자들이 영국병이라 지칭한 정체되어 있는 영국을 치유하기 위해 각종 혁신적 조치를 들고 나온다. 그 중 하나가 바로 그 유명한 ‘민영화(privatization)’다. 대처를 비롯한 보수당 정권은 이 말이 가지는 부정적인 뉘앙스 때문에 ‘비국유화(denationalization)’ 등 다른 대체할만한 표현을 생각해보았으나 결국 자신들의 의지를 이만큼 잘 표현해주는 단어가 없었기에 그것을 채택하였다고 한다.[출처]

위와 같은 사연은 다니엘 예르긴(Daniel Yergin)의 ‘시장對국가(원제 The Commanding Heights)’라는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사연이다. 부연하자면 대처와 보수당은 그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이전의 집권당이었던 노동당의 ‘국유화(nationalization)’된 시설뿐만 아니라 신규 시설이나 서비스를 시장을 통해 공급하는 조치 일반을 개념에 포함시키기 위해 ‘민영화’라는 단어를 선택하였다. 이렇듯 세상사에 있어 단어의 선택은 – 특히 정치권에서 – 그것이 가질 뉘앙스와 편견, 그리고 거부감 등을 고려하여 신중하게 취사선택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우리나라의 예를 들자면 ‘노동자’와 ‘근로자’, 두 단어의 사용을 들 수 있다. 오랜 독재시절 ‘노동자’라는 표현은 과격한 진보세력, 그 당시 표현으로 빨갱이들이나 쓰는 표현으로 터부시되었고 ‘근로자’라는 표현이 쓰였다. 문자 그대로 해석하자면 둘 사이에 이념적 뉘앙스의 차이는 전혀 없는데도 말이다. 더 나아가 정권은 5월 1일 노동절(Mayday)을 다분히 고의적으로 3월 10일 ‘근로자의 날’로 대체해버렸다. 그렇게 함으로써 노동절을 노동자들이 자신의 힘으로 쟁취한 권리의 기념일이 아닌 ‘근로자’의 노고를 치하하는 어르신들의 체육관 잔치로 변질시켰다.

위에 예로 든 ‘민영화’라는 단어 역시 어떻게 보면 영어 표현의 부정적 의미를 더욱 탈색시키기 위해 선택된 단어라 할 수 있다. privatization의 동사형인 privatize의 영어해석을 보면 다음과 같다.

to transfer from public or government control or ownership to private enterprise: a campaign promise to privatize some of the public lands.[출처]

여기서 강조되고 있는 것은 control과 ownership이다. 실제로는 ownership, 적어도 그에 상당하는 권리가 민간, 그 중에서도 민간자본에 이양되어야 함을 의미한다면 privatization은 운영에 초점을 둔 민영화(民營化)보다는 소유권에 초점을 둔 사유화(私有化)가 더 합당하다 할 것이다. 그럼에도 사유화가 가지는 부정적 뉘앙스 때문에 그 단어는 선택되지 못하였다 할 수 있다.

어쨌든 신자유주의 사조의 상징인 privatization은 그 신중한 단어선택의 덕이었는지 전 세계를 휩쓸며 하나의 시대적 대세로 자리잡아왔다는 점에서는 성공적인 단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와는 반대로 그 실천이 시급함에도 불구하고 단어 그 자체 때문에 실천이 보류, 또는 거부되고 있는 경제행위가 있는데 ‘국유화(nationalization)’가 바로 그것이다. 특히 그 조치가 시급하다고 전문가들이 지적하고 있는 미국에서 국유화는 단어의 불온함으로 인해 거부당하고 있다.

“And we also have different traditions in this country. Obviously, Sweden has a different set of cultures in terms of how the government relates to markets and America’s different.”[출처]

ABC뉴스와 최근 인터뷰를 가진 오바마 대통령이 왜 은행들을 국유화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대하여 경제규모의 차이와 함께 이유로 거론한 내용이다. 여태 약간은 문화적 차이가 그렇게 큰 장벽일까 하고 생각되기도 했지만 오바마의 저 발언을 보면 국유화는 분명 미국인에게 있어, 특히 정치인에게 있어 하나의 확고한 금칙어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국유화는 미국식의 경제 자유주의의 상극이라는 편견은 매우 견고하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한 가지 재밌는 사실은 미국의 한 경제 블로그의 주인장이 이러한 문화적 거부감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Calcurated Risk의 주인장이 바로 그 분인데 그 분이 신중하게 취사선택한 단어는 바로 ‘preprivatization’이다. 우리말로 굳이 해석하자면 ‘전(前)민영화’ 또는 ‘예비민영화’ 쯤으로 해석할 수 있겠는데 어차피 나중에 다시 민영화할 은행들의 부실자산 정리를 위해 국유화를 시키는 행위를 저렇게 부름으로써 이념적 트라우마를 피해가자는 소리 같다. 왠지 ‘노동절’ 대신 ‘근로자의 날’을 신설한 그 옛날의 관료의 발상이 저 블로거와 같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결국 단어의 취사선택은 그 자체로 정치적 행위다.

“자본 소유의 민주주의”

( A )는 그 단어 자체는 아닐지라도 그 개념만큼은 받아들였다. 그 말 속에서 재무부의 수입을 올리거나 노동조합을 제어할 수 있는 수단 이상의 뭔가를 보았기 때문이다. 바로 사회의 균형을 바꾸는 것과 관련된 것이다. “나는 ( B )를 자본 소유의 민주주의라는 내 야망을 달성하는 데 사용하고자 했다. 그것은 사람들이 자기 집과 주식을 소유하고, 또 사회에 이해 관계를 가진 그런 국가를 말한다. 미래의 세대에게 넘겨줄 부를 가지고 있는 국가이다.” 그녀의 열정은 그 야망에서 나온 것이다. [시장對국가(원제 The Commanding Heights), Daniel Yergin and Joseph Stanislaw, 주명건譯, 세종연구원, 1999, p187]

A와 B는 각각 무엇일까?

답은 ‘대처’와 ‘민영화’(즉 privatization)다. 대처는 이른바 보수주의자들이 영국병이라 지칭한 정체되어 있는 영국을 치유하기 위해 각종 혁신적 조치를 들고 나온다. 그 중 하나가 바로 그 유명한 ‘민영화’다. 대처를 비롯한 보수당 정권은 이 말이 가지는 부정적인 뉘앙스 때문에 ‘비국유화(denationalization)’ 등 다른 대체할만한 표현을 생각해보았으나 결국 자신들의 의지를 이만큼 잘 표현해주는 단어가 없었기에 그것을 채택하였다고 한다.

결국 이후 이른바 ‘신자유주의’는 이전의 고전적 자유주의와는 다른 프로세스, 즉 사회주의 혹은 케인즈주의적 정책실현을 통해 다져진 혼합경제를 해체하는 ‘민영화’라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그리고 이는 80년대와 90년대에 세계 각국에서 일상화된다. 한편으로는 국유기업의 비효율을 제거한 최상의 대안이라고 칭송받는 한편, 이익의 사유화와 공공성의 포기라는 비판을 받는 뜨거운 감자가 된다.

한편 내게는 대처가 민영화를 통해 달성하려 했던 그 목표가 흥미롭다. 민영화를 통해 주식을 공개하여 “자본 소유의 민주주의”(주1) 를 달성하고자 했던 그 지향은 우리가 오늘날 쉽게 볼 수 있는 펀드, 연기금,  각종 금융도구들에서 그 유사점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그것들은 증권화와 유동화 등을 통해 각종 기초자산 – 대표적으로 서브프라임 모기지 채권 -을 나눠가진 “자본 소유의 민주주의(!)”의 아름다운 현태가 아니던가.

민영화를 통해 주식들이 민간에게 분산되는 “소유의 민주주의”가 실제로는 소유의 집중으로 귀결되었고, 적어도 비용 차원에서 보자면 민간기업 역시 국유기업 못지않은 비효율을 자랑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비판은 제켜두고라도, 오늘날 그러한 “소유의 민주주의”가 대처의 당초 목표에서 많이 탈선한 느낌도 없지 않다. 즉 각종 금융도구들의 가치는 바로 요즘 시점 전 세계적인 자산가치 하락에 속절없이 동반하락하고 있다. 이에 따라 “미래의 세대에게 넘겨줄 부”는 고사하고 천문학적인 재정적자를 동반한 국유화의 재등장만 초래하고 말았다.

이 사태를 대처는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지 무척 궁금하다.

(주1) 물론 이 목표가 립서비스였는지 아니면 현실적 한계 때문에 그랬는지 모르지만 대부분의 국유기업들은 대기업들의 손아귀를 벗어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