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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맨딩하이츠”를 점령한 대형은행, 이들을 먹여 살리는 “유모국가”

최근 경제학자들은 얼마나 많은 보조가 대형은행들의 차입비용을 낮추고 있는지에 대해 정확히 밝혀내려고 노력하고 있다. 상대적으로 더 철저한 노력으로는, IMF의 Kenichi Ueda와 메인즈 대학의 Beatrice Weder di Mauro라는 두 연구자들이 약 0.8퍼센티지 포인트라는 숫자를 잡아낸 바 있다. 이 할인가는 채권과 고객들의 위탁금 등을 포함한 전체 부채에 적용되는 것이다. 작아보일지 몰라도 0.8퍼센티지 포인트는 큰 차이를 가져온다. 자산 순위로 미국내 10대 은행들의 부채에 곱하면, 납세자들이 1년에 830억 달러를 지원하는 셈이다. 이 수치를 비교하자면 정부는 세금으로 걷히는 1달러마다 은행들에게 3센트를 지불하고 있는 것과 맞먹는다. 상위 5개 은행들이 — JP모건, 뱅크오브아메리카, 시티그룹, 웰스파고, 골드만삭스 — 총 640억 달러의 보조금을 구성하는데, 얼추 그들의 연간 이윤에 맞먹는다. 다른 말로 하자면, 이들 은행은 미국의 금융업의 커맨딩하이츠(the commanding heights)를 점령하고서 — 미국경제 사이즈의 절반도 넘는 9조 달러의 자산으로 — 기업지원책이 없는 때에 본전치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크게 봐서 그들이 보도한 이윤은 궁극적으로 납세자들로부터 주주에게로 옮겨지고 있다.[Why Should Taxpayers Give Big Banks $83 Billion a Year?]

“커맨딩하이츠”는 군사용어로 “전망 좋은 고지”를 의미하지만, 경제용어로서는 그 의미가 넘어와서 국가경제에 필수적인 기간산업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이 용어는 소비에트 정부의 수반이었던 레닌이 집권 초기인 1922년 시행했던 신경제정책을 소개하면서 처음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즉, 신경제정책에서 토지의 소유권에 대한 고삐를 느슨하게 하면서 이를 걱정하는 공산주의자들에게 ‘커맨딩하이츠에 대한 통제권을 쥐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보내기 위해 사용한 개념이다.

이 용어가 더 유명세를 탄 것은 유명한 저술가 다니엘 예르긴이 그의 저서의 제목으로 사용하면서부터가 아닐까 싶다. 다니엘 예르긴은 그 책에서 커맨딩하이츠에 대한 통제가 역사적으로 시장에 있는 경우와 국가에 있는 경우를 구분하여 분석하여 유명세를 얻었다. 그의 입장은 커맨딩하이츠를 시장이 점령한 경우가 더 바람직하다는 우파적 시각이지만, 그럼에도 레닌의 표현을 제목으로 쓴 것은 그 개념이 간결하고 핵심적이며, 실제 경제의 분석에도 유용한 틀을 제공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기사에서도 마찬가지다. 대형은행들이 “미국 금융업의 커맨딩하이츠를 점령”하고 있다는 표현보다 더 와 닿는 표현도 쉽지 않을 것이다. 미국내 금융업의 비중이 커지고 은행도 대형화되면서, 이제 이들을 배제시키는 것은 불가능하게 되었고, 이를 아는 은행들은 정부에게 고지를 지킬 탄알을 내놓으라고 윽박지르고 있다. 그 탄알은 납세자가 제공하고 있다. 이 정도쯤 되면 국가는 더 이상 커맨딩하이츠를 통제하고 있다고 할 수 없고, 대형은행만을 위한 소위 “유모국가(the nanny state)”가 되었다.

국가자본주의의 대두와 그 의미

국가주도의 자본주의가 새로운 아이디어는 아니다. : 서인도회사를 보라. 그러나 이번 주 우리의 특별 보고서가 지적하듯, 이 아이디어는 드라마틱할 정도로 되살아나고 있다. 1990년대 대부분의 국유회사들은 이머징마켓에서의 정부부처들 이상에 지나지 않았다. 그 기본전제들은 경제가 성숙하게 되면 정부가 이들을 폐쇄하거나 민영화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주요 산업에서건(매장량 기준으로 세계에서 제일 큰 10개의 원유/가스 회사는 모두 국유회사다), 주요 시장에서건(중국 주식시장 총가치의 80%, 러시아의 60%가 국유회사의 몫이다) ‘전망 좋은 고지(the commanding heights)’를 포기할 의사를 보이지 않고 있다. 그리고 이들은 선제공격을 가하고 있다. 거의 모든 새로운 산업을 보면 새로운 거인들이 나타나고 있다. : 예를 들어 차이나모바일은 6억 명의 소비자를 거느리고 있다. 2003년과 2010년 사이에 있었던 신흥지역의 해외투자의 3분의 1은 국가가 지원하는 회사들의 몫이었다.[The rise of state capitalism]

이코노미스트가 레닌의 이미지까지 동원하여 새로이 대두되는 ‘국가자본주의’의 기류에 관한 소식을 전하고 있다. 이코노미스트가 굳이 레닌을 다시 호출한 이유는 인용문에서 사용한 ‘전망 좋은 고지(the commanding heights)’라는 표현을 그가 즐겨 썼기 때문이다. 즉, 국가가 경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통제권을 쥐기 위하여 ’전망 좋은 고지‘를 장악함으로써 국가경제를 신흥 지배계급이 의도하는 대로 끌어나가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사령탑’이란 표현으로 의역하면 더 의미를 잘 전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각설하고, 굳이 이코노미스트가 이러한 기류를 주목하고 있는 이유는 인용문에서도 지적하고 있다시피 국유회사의 활동이 한시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강화되고 있는 듯한 양상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즉, 舊 사회주의 블록의 거인이었던 중국과 러시아 등이 자본주의에 편입되었지만, 이들이 1980년대 이후의 서구에서의 신자유주의적 민영화의 흐름과는 다른 스탠스를 유지하면서, 그리고 그들의 경제력이 전체 자본주의 경제권에서 무시할 수 없는 지분을 차지하면서 전체 흐름마저도 변하는 듯한 양상을 보이고 있는 것을 주목하고 있는 것이다.

기사의 나머지 부분은 이러한 흐름의 장단점을 서술하고 있는데, 여태 쭉 논의되어 왔던 주장들이다. 효율성, 비효율성, 안정성, 정실인사, 관료주의 등등. 어쨌든 개인적으로는 ‘국가자본주의’의 대두가 하나의 흐름을 형성하고 있다는 이코노미스트에 시각에 동의하는 한편으로, 그 흐름 자체가 ‘기업의 자유’를 신조처럼 여기고 있는 시장주의적인 서구의 시각을 위협할 정도의 (아직까지는) 이념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보지는 않는다. 기업들이 국가가 소유하고 유지한다는 것과 소위 이념적으로 ‘인민에 봉사한다’는 의미가 정확히 등치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현재까지의 양상으로는 이들 국유기업들이 좌익이 지향하는 ‘계획적’ 운영을 통한 ‘시장의 실패’의 보완이랄지, 공익에로의 기여랄지 – 예로 베네수엘라의 국영 석유회사는 직접 빈민의 복지를 지원한다 – 하는 장점과 달리, 자본주의 경쟁에서의 효율성을 위한 ‘국유(state owned)’의 장점이 더 부각되는 상황으로 이해된다. 이들은 자유화된 해외시장에서는 국가가 아닌 또 하나의 ‘독립적인 공급자’로서 기능한다. 이는 그들이 신자유주의적 흐름에 반하는 반골이 아니란 사실을 말해준다. 기업경영의 형태가 여태의 형태와 질적으로 달라지는 것은 아닌 셈이다.

하지만 분명 새로운 변화의 기운은 감지된다. 민영화/국유화를 가르는 몇몇 학문적 주장들로 포장된 선입견 들은 신흥시장의 대두에 따른 국유기업들의 선전, 경제위기를 거치면서 드러난 서구기업들의 후진적 경영행태 들이 알려지면서 적어도 기업의 의사결정은 어떤 만고불변의 진리가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재확인시켜 준 셈이다. 미국에서는 최근 한 공공부문 노조가 월스트리트의 주요 금융회사들의 CEO와 이사회의 의장을 별도로 두어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등 기업의 의사결정 구조에 대한 변화요구가 높아지고 있다. 기업은 살아 움직이는 생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