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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유생산과 포획법규

미국에서 초창기 석유산업의 골격을 형성하고 석유생산에 관한 법규를 제정하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영국 관습법에 기초를 둔 <포획법규(捕獲法規)>였다. 그것은 사냥 중 동물이나 새가 타인 소유지로 옮겨 갔을 때, 그 땅의 소유자만이 그 사냥감을 잡을 수 있는 권리가 있다는 법규였다. 같은 논리로 땅의 소유자는 그 땅 아래에 있는 무엇이라도 파낼 수 있는 권리가 있었다. 그 이유는 영국의 판사가 말했듯이 어느 누구도 지하에 묻혀 있는 광맥에 무엇이 있는지는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포획법규>가 적용됨에 따라, 같은 유전지대에 있는 땅 소유자들은 석유를 월등히 많이 생산하거나 인근 유정의 생산을 감소시킨다 하더라도 그들이 생산하는 만큼을 소유할 수 있었다. 그래서 불가피하게 이웃 유정의 소유자는 다른 사람에 의해 석유가 고갈되기 전에 가능한 한 많은 양을 단시간 내에 퍼올리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여야 했다. 급속생산의 촉진은 생산량과 가격의 불안정을 가져 왔다. 석유는 수렵용 새들이 아니었다. <포획법규>는 주어진 유전에서의 궁극적인 생산량을 감소시키는 엄청난 손해를 입혔다. 그러나 그 규칙의 이면에는 다른 효과도 있었다. 제한적인 규칙에서와는 달리 더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석유산업에 참여하게 하고 필요한 기술을 습득케 하였다. 또 생산이 빨라짐에 따라 더 넓은 판로개척이 가능케 되었다.[황금의 샘(원제 : The Prize), 다니엘 예르긴 지음, 김태유 옮김, 고려원, 1993년, pp44~45]

자본주의의 사적소유체제에서 자원개발의 권리체계가 자리잡아가는 초기과정을 설명해주는 굉장히 흥미로운 사례다. 기술이 발달하지 못하여 아직 지하에 묻혀있는 자원의 규모와 정확한 경계를 가늠할 수 없었던 그 시절, 결국 국가는 고육지책으로 지하권(地下權)을 지상권(地上權)의 소유자에게 부여했다. 마치 석유가 날아다니는 꿩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다. 문제는 본문에도 나와 있다시피 석유는 배타적으로 사냥할 수 있는 꿩이 아니라 광범위하게 퍼져있는 자원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살풍경하고 말이 안 되는 전제조건 때문에 생산업자들은 피 튀기는 경쟁을 벌여야만 했다. 더욱이 아직 유전개발기술이 초기단계인지라 매장량의 확신이 없는 상황에서 석유고갈에 대한 두려움이 컸기에 그들은 노동자들에게 프리미엄을 얹어주고서라도 남들보다 더 빨리 석유를 뽑아내려 안간힘을 썼다. 마르크스가 상품생산 경제에서 자본가는 불변자본(즉 생산기계)의 가치를 최대한 빨리 상품에 이전시키기 위해 노동자의 초과노동도 불사한다고 하였는바, 이 경우엔 그것이 자원채취에 적용된 셈이다.

여하튼 이 사례는 자본주의 생산의 무정부성이 불러올 폐해의 전형적 사례로 뽑을 만 하다. 실제로 그 당시 석유시장에서는 무절제한 생산으로 인한 사회적 비용증가, 공급과잉으로 인한 시장가격 붕괴, 이로 인한 채산성 악화에 따른 시스템 붕괴 등의 악순환이 발생하였고 이에 따른 피해가 엄청났기 때문이다. 결과론일수도 있겠지만 이러한 사태는 아이러니하게도 자본주의의 공적(公敵)으로 간주되는 독점기업 ‘스탠다드 오일’의 등장으로 어느 정도 진정될 수 있었다.

석유산업의 맹주 ‘스탠다드 오일’은 무자비한 사업방식을 통해 시장수요를 초과하는 생산시장을 정리해나갔다. 과잉시설을 소유한 한계사업장을 손아귀에 넣어 정리하고, 스스로는 대형화, 표준화, 품질향상, 구매파워를 이용한 운송가격할인 등을 통해 이익을 증대시켜갔다. 이를 통해 미국의 석유산업은 주먹구구식의 산업분야에서 체계적이고 표준화된 산업분야로 거듭나게 되었다. 물론 그 과정에서는 당연하게도 수많은 희생과 탈법행위가 뒤따랐다.

하지만 시장은 늘 그렇듯이 유기체처럼 역동적이어서 ‘스탠다드 오일’의 독주를 용인하지 않았다. 국내외에서의 독립 석유업자의 등장, 독점에 따른 폐해에 대한 사회고발,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국가에 대한 독점기업의 해체명령에 따라 시장은 또 다시 격렬한 경쟁의 장이 펼쳐진다. 그리고 여전히 포획법규는 석유자원의 무절제한 채취를 부추기고 있었다. 또 다른 조정자가 나설 시점이었다.

도허티는 이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찾아냈다. 그것은 바로 유전을 <공동 운영>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즉, 공동으로 유전을 개발하여 생산된 원유를 각 유전의 소유자에게 배분토록 하는 방법이었다. (중략) 그는 연방정부가 선도적 역할을 하여야 하며, 최소한 업체간의 협력체제를 인정해 주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중략) 많은 석유업계 사람들은 생산기술에 대한 그의 평가에 대해서 의문을 표했고, 연방정부의 개입을 요구한 그를 석유업계의 배신자로 생각하였다. (중략) 텍사스주 최대의 정유회사였던 험블사의 사장 윌리엄 패리시는 1925년에는 도허티의 생각을 비웃었으나, 1928년에는 석유업계가 도허티의 <보다 나은 생산방법>의 덕을 보았다고 감사하였다. 패리시는 유전을 하나의 단위로 묶어 운영하도록 하는 <공동조업>의 주창자가 되었다.[같은 책, pp374~376]

결국 적어도 초기 석유시장에서 생산의 무정부성에 대한 ‘보이지 않는 손’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 당시의 석유업계는 – 다른 모든 자본가들과 마찬가지로 – 정부 규제 없는 야경국가를 꿈꾸었지만 시장의 무정부성으로 말미암아 무절제한 생산, 자원낭비, 이윤율 저하, 독점기업의 출현, 이에 대한 반발, 이합집산 등을 되풀이하였다. 결국 최소한 ‘공동조업’을 하여야 했고 최후조정자로서 연방정부의 필요성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국가산업부흥법에 따라 제정된 석유법에 의거하여, 익스는 각주의 월별 할당량을 정할 수 있는 권한을 갖게 되었다. 몇 년 전 같았으면 그와 같은 할당량 배정은 각지의 석유업자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어려움을 한껏 겪고 있던 석유업계로부터 환영을 받았다. 이러한 일들은 익스의 책임하에 진행되었으며 그는 이를 자랑스럽게 여겼다. 1933년 9월 2일, 미국 석유생산량을 하루 30만 배럴로 줄이기 위해 익스는 각 석유생산주의 주지사에게 각주의 석유생산 할당량을 통보했다. 그것은 매우 획기적인 일이었고 석유산업계 운영방법의 일대 전환이었다.[같은 책, p4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