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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주의는 무엇으로 사는가?

9월, 아이젠하워는 편지를 통해 이든에게 <실제보다 훨씬 나세르를 중요한 인물로 만들> 위험이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영국 외무차관 이본 커크페트릭 경은 “대통령이 옳기를 나는 진심으로 바란다. 그러나 나는 대통령이 잘못 알고 있다는 점을 확신한다…… 만약 나세르가 그의 위치를 공고히 하여 점차적으로 산유국들에 대한 통제권을 획득하는 동안 우리가 뒷짐만 지고 있다면 그는 우리를 파멸시킬 수 있으며, 우리의 정보에 따르면 그는 우리를 좌초시킬 마음을 먹고 있다. 만약 중동의 석유가 한두 해 동안 우리에게 공급되지 않는다면 우리의 금보유고는 바닥날 것이다. 그리고 금보유고가 바닥나게 되면 영국 화폐통용 지역은 와해될 것이다. 또 영국 화폐통용 지역이 와해되고 금보유고가 바닥나게 되면 우리는 독일은 물론이고 세계 다른 어떤 지역에도 군대를 파견할 여력을 잃게 될 것이다. 더욱이 우리나라의 방위를 위한 최소한의 방위비조차 지불할 수 있을지 의문스럽다. 그리고 자국을 방위하지 못하는 나라는 결국 소멸될 것이다”라고 격렬히 반론을 제기했다.[황금의 샘(원제 : The Prize), 다니엘 예르긴 지음, 김태유 옮김, 고려원, 1993년,pp321~322]

예전에 ‘여자는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드라마도 있었지만 이 인용문은 제국주의 또는 패권주의 국가가 무엇으로 사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영국은 그들의 식민지인 인도나 사실상의 식민지나 다름없던 중동으로부터의 막대한 무역차익과 석유 자원을 통해 지탱되는 체제였다.

그래서 사실 우리가 위대한 서방의 정치인으로 추앙해마지 않는 윈스턴 처칠마저 뼛속깊이 제국주의자였을 뿐 아니라 식민부 장관직을 수행하기도 했었다. 그러한 입장은 좌우를 가리지 않았다. 위에서 인용하고 있는 사태, 즉 수에즈운하 국유화에 따른 나세르 축출작전이 시도되었던 시기, 영국은 노동당 집권시기였다.

왜 정치적 입장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제국주의 국가의 대외정책은 쉽게 바뀌지 않는가? 그것은 그들의 체제가 정치적으로 세분화되기 이전에 이미 식민지 – 또는 신식민지 – 자원의 수탈을 기초로 공고화되어 있는 체제였기 때문이다. 그러니 좌파가 집권하더라도 가용자원은 역시 식민지로부터 수탈하여야 하는 체제를 바꾸기는 어렵다.

영국 외무차관의 발언은 그 핵심적인 벽돌을 제거할 경우 패권주의가 어떻게 붕괴되는지를 잘 설명해주고 있다. 그리고 실제로 영국은 진작에 빼앗긴 기축통화의 지위와 함께 이 수에즈 사태에서 이집트에 – 사실은 미국에 – 굴복함으로써 소멸까지는 아니더라도 패권을 빼앗기게 되었다.

오늘날의 미국이 당시의 영국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들은 금본위제와 연계되지 않는 달러본위제의 기축통화를 가지고 있다는 점, 미국 스스로 중추적인 산유국이라는 점이다. 이 두 가지 특징은 20세기 형 패권주의의 핵심적인 필요조건이 되었다. 통화와 자원, 이것은 21세기 형 패권주의에도 역시 유의미한 키포인트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