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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ron이 Moron이 될 뻔한 사연, 그리고….

다름 무엇보다도 엔론 직원들 사이에는 우월의식이 팽배했다. 여러 컨퍼런스에서 스킬링은 공공연히 경쟁 기업들을 조롱했다. 그는 거대 석유기업들은 멸종할 운명을 타고난 공룡에 불과하다고 말하곤 했다. [중략] 1999년 12월 직원회의에서 한 직원이 스킬링에게 모빌Mobil과 같은 회사와의 합병을 고려한 적이 있는지 물었다. 스킬링이 대답했다. “글쎄, 아쉽기는 하지만 모빌은 이미 엑손과 합병했습니다. 이제 더 이상 모빌이 아니죠. 정말로 아쉬웠습니다. 우리가 모빌과 합병했다면 ‘모론Moron’이 되었을 테니 말이에요.”[엔론 스캔들 세상에서 제일 잘난 놈들의 몰락, 베서니 맥린/피터 엘킨드 지음, 방영호 옮김, 서돌, 2010년, p4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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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ron Logo” by Enr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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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가장 혁신적인 기업으로 이름을 날리다가 엄청난 부정부패를 저지르고 망해버린 엔론의 CEO 제프 스킬링의 수준 높은 유머감각이 돋보이는 일화다. 엑손과 모빌이 합쳐져 기껏 엑손모빌이라는 둔탁한 이름보다야 ‘모론’이란 이름이 훨씬 멋있지 않은가? 물론 그의 이 유머에는 인용문의 앞부분에서 언급하였듯이 당시 너무나 잘나가고 있던 혁신적인 기업 엔론의 오만방자함이 잘 드러나 있어 다소 거북하기는 하지만 말이다.

이름 짓는 문제에 대해서 좀 더 이야기하자면 사실 이미 엔론은 이런 농담을 하기 이전에 “모론”스러운 짓을 저지른 바 있다. 당초 ‘휴스턴 내추럴 가스’와 ‘인터노스’가 합쳐져 탄생한 엔론은 1986년 새로운 회사 이름을 짓기 위해 한 컨설팅 회사에 이 작업을 의뢰했다. 4개월간의 고심 끝에 태어난 이름이 ‘엔터론Enteron’이었는데 이 단어는 ‘소화기관인 창자’를 뜻하는 단어로 엄연히 사전에까지 올라와 있는 단어였던 것이다.

사실 요즘 읽고 있는 이 ‘엔론 스캔들’의 추잡한 비화들을 생각해보면 한편으로 ‘창자’라는 그 이름이 썩 어울리는 이름이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수많은 부외금융 거래를 통한 매출 부풀리기, 투자자를 속이기 위한 트레이딩룸 연극(마치 영화 ‘스팅’에서처럼), 적자 상황에 개의치 않는 임원들의 천문학적 보수수령 등 엔론이 저지른 수많은 부정부패를 보면 창자 중에서도 아주 썩어문드러진 창자에 속한다는 생각이 든다.

엔론 사태에서 자본주의 기업 시스템의 여러 기이한 모습을 볼 수 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의아한 점은 어떻게 감독기관, 회계법인, 주주, 신용평가기관 등 자본주의 사회에 존재하는 수많은 눈들의 감시를 피한 채 그런 부정을 저지를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그 의문은 역시 이들 감시자들이 실은 공모자에 가까웠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특히 회계법인 이었던 아더앤더슨은 거의 한 몸이 되어 분식회계를 조장하는 수준이었다.

의사 내지는 검진자의 입장에서 창자를 들여다봐야 할 이런 감시기관이 창자 속에 같이 들어가 함께 분탕질을 한 이유는 역시 엔론이 감시대상인 동시에 수수료를 지불하는 클라이언트라는 모순적 관계에서 찾을 수 있다. 이런 모순은 엔론 사후에도 해결되지 않고 또 다시 더 큰 위기를 불러오는 한 원인을 제공하였다. 그리고 급기야 이번 미국의 신용등급 강등에 이르러서는 신용평가기관의 존재의의에 대한 논란까지 불러일으켰다.

즉, 신용위기 당시에는 이해자와의 모순된 관계로 인해 위기 직전까지 올바른 시그널을 보내지 않았던 신용평가기관이 위기 이후에는 오히려 각 국가들의 신용등급을 선제적으로 또는 적극적으로 변화시키면서 오히려 위기의 한 원인을 제공하고 있고, 이번 S&P의 미국 신용등급에 대한 강등 사태에서도 그러한 징후를 읽을 수 있었다. 그 필요성을 인정해야 하는 상황이면서도 이제는 시스템리스크 자체가 되어버린 괴물이 탄생한 것이다.

일개 기업이나 일개 국가가 엔론 같은 짓을 한다면 옳지 않은 일이지만, 적어도 평가기관과 감독기관이 불편부당하게 처신한다면 시스템리스크로까지는 전염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 기관이 썩으면 미래는 없다. 바로 이 지점에서 경제체제에 대한 자유지상주의적 관점의 모순이 존재한다. 일개 기업이 자기소유권(Self-ownership)에 근거하여 자의적인 결정을 할 자유가 있을지 몰라도, 심판자인 평가기관에게 그런 자유는 없기 때문이다.

그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

그러다가 레이의 로비활동이 레이가 평소에 강조한 자유시장의 해법에는 어긋나 보이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예로, 엔론은 제3세계 개발 프로젝트에 대출과 대출보증을 해주는 해외민간투자공사와 수출입은행과 같은 정부기관에 의존했다. 이런 기관들은 자금을 조성하는데 알맞았다. 대부분의 은행은 잠재된 위험 때문에 제3세계 개발에 한 발 물러섰다. 레베카 마크의 사업도 이런 지지기반이 없었다면 대폭 축소되었을지 모른다. 워싱턴의 한 정부정책 연구기관의 연구에 따르면 1989년에서 2001년 사이에 해외민간투자공사, 수출입은행 등 20개의 정부 혹은 준정부기관 들이 29개국을 개발하는 엔론의 38개 해외 프로젝트에 72억 달러를 투자하기로 했다. 마크와 원수 사이인 스킬링은 자유시장을 숭배한다는 기업이 그런 위선적인 행위를 하느냐며 정부를 등에 업은 자금 조성에 조소를 퍼부었다.[엔론 스캔들 세상에서 제일 잘난 놈들의 몰락, 베서니 맥린/피터 엘킨드 지음, 방영호 옮김, 서돌, 2010년, pp186~187]

먼저 이 글에 등장하는 엔론의 플레이어들의 면면을 살펴보자. “레이”는 엔론의 CEO였던 Kenneth Lay를 말한다. “레베카 마크”는 엔론의 해외 프로젝트 개발사업을 수행한  Enron International의 수장 Rebecca Mark-Jusbasche다. “스킬링”은 천연가스 등에 대한 금융거래를 통해 수익을 창출한 Enron Corporation의 수장 Jeffrey Skilling이다. 레베카 마크가 발전소와 같은 실물에 투자했다면, 제프 스킬링은 파생상품 등 금융상품에 투자하여 투자대상이 서로 달랐고, 인용문에도 언급하고 있듯이 둘은 서로 스타일이 판이하고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한다.

인용문의 내용에 대해 좀 더 들여다보면, 해외수출금융기관(Export Credit Agency)에 의한 대출을 통해 해외사업을 추진하는 과정을 설명한 것이다. 즉, 제3세계의 발전소 프로젝트와 같은 경우 여러 위험이 존재하기 때문에 투자은행의 접근이 어렵고 금리도 높다. 그런데 ECA가 개입할 경우 그들의 직접대출이나 보증을 통해 자금조달도 용이해지고 금리도 낮아지는 일석이조의 효과가 있다. 수출을 장려하기 위한 이런 금융은 이러한 점에서 사실 스킬링이 조소하는 바처럼 “자유시장” 원리와 거리가 먼 국가의 개입을 통한, 특정기업에 대한 특혜에 가까운 성격을 띠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해외사업의 개발과정을 보면 규제완화와 같은 자유시장 원리와 수출금융과 같은 反자유시장 원리가 공존한다는 점이다. 레베카 마크의 전임자 존 윙은 영국의 티스사이드 프로젝트를 실현시키기 위해 노력하는데, 이 프로젝트는 천연가스를 연료로 사용하는 발전소 프로젝트였기에 천연가스 사용을 금지하던 그때까지의 영국 당국의 규제를 완화하지 않고서는 전망이 없는 사업이었다. 하지만 희한하게도 때맞춰 1989년 규제완화 법안이 영국 국회를 통과하였고 그 최대 수혜자는 엔론이었다. 이제 금융조달은 값싼 수출금융을 이용하면 된다.

이와 같은 견지에서 볼 때 기업의 성장은 케네스 레이가 믿었던 것처럼 완전한 규제완화만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다. 해외사업을 영위하는 업체는 수출금융을 활용하여, 미국의 축산업자는 정부보조를 받아 값싸게 재배된 옥수수를 소에게 먹여, 석유화학 업체는 일반가정보다 더 싸게 제공되는 산업용 전력의 이용을 통해 성장을 모색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만약 규제완화 신봉자가 주장하듯 이 모든 보조를 없앤다면 그들은 당장 위기에 처할 것이다. 그런 면에서 사실 기업이 원하는 것은 자신들에게만 차별적으로 유리한 “선택적 규제 혹은 규제완화”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