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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ff-balance sheet

현재 진행되고 있는 월스트리트의 위기에 대해 차베스나 그린스펀만큼이나 할말이 많으실 것 같은 – 또는 논평을 집요하게 강요당하실 것 같은 – 장하준 교수께서도 한겨레21에서 평소 그의 지론에 입각하여 현 사태를 비판하셨다. 역시 평소의 그답게 깔끔하고 명쾌한 해석이 돋보이므로 일독을 권한다.(포카라님의 글까지 함께 읽을 수 있는 이곳으로 가실 것)

인터뷰 중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와 관련해서는 파생상품·복합상품이 너무 많고 손실 보고가 안 되는 ‘오프 밸런스 시트’ 같은 것도 있어서 금융사 자신도 정확한 피해규모를 모른다.

파생상품이니 복합상품이니 하는 단어는 여기저기서 조금씩 들어보셨을 것으로 판단되어 “오프 밸런스 시트”에 대해 간단하게 설명하겠다. 이 단어는 off-balance sheet, 우리말로 표현하자면 부외금융(簿外金融)이다. 우리말이 더 어렵다.

예를 들어 설명하겠다. A기업이 돈 100억 원을 빌려 부동산 개발 사업을 하고 싶다. 한데 부채비율이 300%여서 돈을 빌리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러면 이 회사는 자본금을 5천만 원의 B라는 부동산 개발 전용 회사를 설립한다. 그리고 C은행에 가서 부동산 사업의 사업성을 담보로 돈을 빌린다. 이른바 ‘프로젝트파이낸싱(project financing)’인 셈이다. 물론 은행이 사업성만을 담보로 돈을 빌려주진 않는다. A의 지급보증 등이 채권보전책으로 강화된다.

이제 한번 살펴보자. A는 C은행으로부터 돈을 빌렸을까? 아니다. B가 차주이고 A는 지급보증만 선 것이다. 그러므로 A의 대차대조표(balance sheet)에는 100억 원이 부채로 잡히지 않는다. 다만 지급보증을 주석에 기록하면 된다. 이것이 바로 off-balance sheet 효과다. 그리고 B라는 부동산 개발 전용 회사는 일종의 도관체(conduit)다. 정작 A가 사업을 한 것인데 B라는 도관을 이용한 것이다.

결국은 ‘뒷구멍으로 호박씨 깐 거네!’라고 비난할 일은 아니다. 신용도가 낮은 회사가 유망한 사업을 시행할 수 있는 좋은 구조이기도 하다. 은행입장으로서는 대출금이 엉뚱한 곳에 쓰이지 않고 – 회장님의 술값 등 – 자신들이 경제성이 있다고 생각되는 사업에 올바르게 쓰일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장치이기도 하다. B라는 회사의 재무제표만 감시하면 되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게 부실한 업체나 투자은행 등에서 남발되면 금번과 같은 대형사고의 진원지가 된다는 것이다. 부실한 업체 D의 부실한 회계감사에서 드러나지 않는 온갖 파생상품과 부실사업들은 곪아 썩어문드러질 때까지 투자자의 시야에 잡히지 않는다. 2000년대 초반에 엔론이 이런 식으로 사세를 고질라처럼 불려나가다가 빵하고 터져버렸다. 물론 이번 월스트리트가 사고 친 걸 보고 있자니 그때의 사건은 자그마한 해프닝처럼 느껴진다.

어쨌든 사후약방문이긴 하지만 회계규칙은 이러한 off-balance sheet를 차단하는 쪽으로 나아가고 있다. 투자은행들의 경우 바젤2 등을 통해 위험가중치를 차별적으로 적용하는 방식으로 규제가 강화되는 추세다. 언제나 하는 말이지만 규제 없는 시장은 없다. 규제가 나쁜 것이 아니라 시대를 못 따라잡거나 비합리적인 규제가 나쁜 것이다.

어쩌면 이미 사회주의 세계일지도?

유명한 경영학자 피터 드러거가 주식회사의 공개는 사회주의 세상을 불러올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자본주의에서 기업의 지배권이 바로 주식인데 이를 대중에게 팔면(특히 연기금에) 그게 바로 자본이 사회화되는 것이고 바로 그것이 사회주의 아니냐는 소리다.

딴에는 일리 있다. 삼성이 누구 것인가? 이건희 것도 아니고 이재용 것도 아니다. 주주의 것이고 주주는 바로 기관 투자자에서부터 소액투자자에 이르기까지 말 그대로 사회화되어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삼성이 이건희 것이라고 생각한다. 마치 만리장성을 진시황제가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 부분 좀 있다 이야기하기로 하고….

오늘날 금융계는 더 이상 기업대출을 통해 이자만 따먹는 장사가 아니다. 소위 투자은행(investment bank)은 전통적인 은행업의 영역을 넘어서 개발사업, 발전사업, M&A, IPO 등 다양한 수익원을 통해 이윤을 창출하고 있다. 미국 등 서구에서는 투자은행 부문이 상업은행 부문을 압도한지가 한참 되었고 우리나라는 IMF 이후 은행의 대형화를 통해 이제 투자은행으로 크겠다고 내부공사가 한창이다.

그런데 이 투자은행의 투자형태가 재미있다. 바로 서브프라임 모기지에서도 그대로 써먹었던 방식인데 부동산, 원자재, 사회간접자본 등의 자산의 현금흐름을 담보로 대출하는 프로젝트파이낸싱을 일으키거나 이들 자산을 담보로 자산담보부증권(ABS : Asset Backed Securities)을 발행하여 자금을 모집하는 방식이다. 이 과정에서 흔히 해당 사업만을 사업목적으로 하는 특수목적법인(SPC : Special Purpose Company)을 설립하는데 이를 자금의 도랑 역할을 한다 하여 도관체(conduit)라 부르기도 한다.

그러니까 투자의 진행방식을 보면 하나의 기업이 세워지고 성장하고, 이를 통해 주주들이나 다른 투자자들이 이득을 취하는 기업의 생애주기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예전에는 개별기업이 다양한 사업을 자기의 기업대출이나 증자를 통해 자금조달을 하였다면 이제는 사회의 모든 자산들이 이렇게 개별사업 단위로 펀딩되고 증권화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투자형태가 아직까지는 사모(私募)형태가 주를 이루기는 하지만 부동산투자신탁(REITs)의 경우 공모(公募)를 의무화하고 있기도 하다. 여하튼 작년에 열풍이 불었던 주식펀드도 일종의 간접투자펀드이고 위에 언급한 사업들도 넓은 의미에서 간접투자펀드의 형태다. 그리고 그 소유주는 기관투자자와 개인투자자다. 그리고 기관투자자 역시 비공개기업을 제외하고는 계속 파고들다보면 다수의 개인투자자들로 쪼개진다.

자 이렇게 보면 주식의 소유가 편중되었다 뿐이지 결국 현대 자본주의 기업, 혹은 개개의 사업들은 인민들의 소유가 아닌가 말이다. 그러면 앞서 언급한 피터 드러거의 말이 맞는 것이 아닐까? 이 세상은 이미 사회주의 세상이 되었다. 이건희나 이재용은 사회주의 세상에서 사회화된 기업의 대리인, 또는 도관체에 불과한 것이다. 멋져부러~(이말 한번 쓰고 싶었다)

문제는 이런 사실에 동의하는 이가 얼마 안 된다는 것이다. 자본가들도 뭔 소리? 할 것이고 사회주의 혁명가도 무슨 자다 봉창 뜯는 소리냐고 할 것이다. 회사 앞에서 농성 중인 해고노동자분들이 이 글 보면 열 받아서 날 찾아올지도 모른다. 왜 이럴까? 어떤 의미에서는 이미 기업은 사회의 것이 되었는데 왜 아직까지 사회구성원 절대 다수는 기업은 자본가의 것이라고 생각할까?

결국은 경제에 정치가 끼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스스로도 자신을 대리인으로 생각하지 않는 대리인이 가지는 파워가 모래알처럼 흩어져 있는 주주 전체의 파워를 압도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사회구성원이 암묵적으로 동의를 하고 있는 것이다. 기업의 총수가 되었든 펀드의 펀드매니저가 되었든 이들이 가지는 사적이익은 이해관계가 저마다 틀린 주주 또는 투자자의 공적이익을 압도한다. 그래서 대리인의 사모님은 ‘행복한 눈물’을 벽에 걸어 놓고 감상하고 주인은 손가락 빨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있다고 생각하는 공적이익은 투자단계에서 개입되지 않는다. 가장 핵심적인 이유는 사적이익은 투자이익률로 환산이 가능하지만 공적이익은 수치로 환원되기가 쉽지 않다. 그런 것을 도입하고자 하는 것이 예를 들면 사회책임투자인데 이것도 사실 수치로 검증되지 않는다. 군수산업이 식목산업보다 돈이 더 되는 데야 공적이익이 끼어들 여지가 적어진다.

결국 도관체에서 특정소수집단의 이익이 관철될 확률이 높다. 흔히 다수가 소수를 지배한다고 생각하는 이 세상에는 그러한 상식을 깨는 일이 비일비재하고 바로 자본주의에서 자본이 돌아가는 이치가 그렇다. 기업을 공개하면 사회주의 세상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고 노동자에게 투표권을 주면 사회주의 세상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렇게 되지 않는 이유가 그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진정 ‘공공의 이익(public interest)’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알아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