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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바나나 공화국 이야기

1983년에 국무원은 「도시 비농업 개체 공상업(工商業)의 몇 가지 규정」을 발표했다. 이 「규정」에 따르면, 도시의 개체 공상업은 7명 이상의 직원을 고용할 수 없다. 이는 카를 마르크스(Karl Marx)의 저술에 근거한 규정이다. 『자본론』에서 마르크스는 잉여가치론을 설명하기 위해 8명의 노동자를 고용한 가상의 공장을 예로 들었는데, 중국 당국은 이를 ‘노동착취’의 기준으로 삼았다. 즉 중국 정부가 보기에 자영업이 7명 이상의 사람을 고용하면 사영기업이 되고, 사영기업은 노동자를 착취하기 때문에 허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개혁과 개방 : 덩샤오핑 시대의 중국 I, 조영남 지음, 민음사, 2016년, p228]

현실 사회주의 블록의 이념적 경직성 내지는 이념적 조악함을 설명하는데 좋은 사례인 것 같아 인용해보았다. 언뜻 보아도 이는 자본론을 마치 종교경전 마냥 기계적으로 해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경직적이고 자의적인 해석이 큐란에 그렇게 나온다는 이유로 여성의 몸을 위아래로 감싸고 순종을 강조하는 무슬림의 해석이나, 성경에 그렇게 나온다는 이유로 극악하게 동성애를 반대하는 개신교도의 해석과 크게 다를 바 없는 것 같다. 경전을 지킴으로써 현실을 개선하는 데에는 기여한 바는 없으나 그 교리를 강요한 이의 권력이나 도덕적 순결성은 유지할 수 있다는 점에서 특히 그러하다.

하지만 어쨌든 중국은 공산당 일당체제를 유지한 채 시장경제를 성공리에 – 많은 시행착오와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 도입하여, 오늘날 미국을 위협할 다음 국가로 평가받는 등의 전성기를 맞고 있다. 단순히 인용문에서처럼 「규정」이 교조적으로 끝까지 관철됐더라면 달성하지 못했을 위치라 할만하다. 중국이 경제에 있어 교조주의를 극복하고 유연성을 가질 수 있도록 추동했던 개념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지만,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바로 정치체제는 유지하면서도 경제체제는 바꿀 수 있다는 – 1992년 10월 공산당 14차 당대회에서 채택된 – “사회주의 시장경제론”이라 할 수 있다.1

중국 공산당이 “사회주의 = 계획경제”라는 도식을 포기한 것은 여러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계획경제/자원동원경제는 사실 戰後 경제개발을 가속화하여야 하는 대다수 국가들에서 체제와 관계없이 시도했던 개발전략이랄 수 있다. 혁명 후의 소비에트가 그랬고, 대공황을 겪은 미국이 그랬고, 10억 인구의 중국이 그랬고, 도시국가로서 살아남아야 할 싱가포르가 그랬고, 북괴와 체제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할 남한이 그랬다. 국가 스스로가 하나의 거대기업으로 기능하는 것은 일종의 戰時경제체제랄 수 있고 체제경쟁에 직면한 많은 나라들은 어느 기간까지는 계획경제 요소를 띠었다고 할 수 있다.2


“제국주의 전쟁의 음모를 분쇄하고 평화롭고 행복한 삶을 위하여 용감하게 나아가자!”(출처)

하지만 경제가 전간기와 질적으로 다른 고도화 단계에 들어서면서 상명하달식의 행정기능만으로 경제 시스템 전체를 좌지우지하는 것은 이제 어려운 일이 됐다. 빅데이터 혹은 인공지능이 진정 시스템 전체의 원인과 결과를 예측하여 투입-산출을 조정할 수 있는 세상이 오면 모를까 현재로서는 시장에서의 개별 경제단위가 경쟁하며 우열을 평가받고 진화-퇴보를 거듭하는 것 이외에는 딱히 더 좋은 대안이 없는 상황이다. 국가는 경제발전의 역사적 경험을 통해 “가부장적인 아버지”의 역할에서 “정의로운 심판”의 역할로 자리매김하는 것이 시대적 흐름과 합당하다는 것이 어느 정도 공유된 개념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최근 트럼프의 행보는 역사의 퇴보를 초래할 우려스러운 상황이다. 멕시코 국경에 장벽을 설치하겠다느니, 그 재원을 멕시코로부터의 수입관세로 마련하겠다느니 하는 경제원론에도 안 맞는 소리를 해대는 것은 가장 천박한 수준의 “가부장적 아버지” 역할이다. 더욱 불행하게도 트럼프는 일당독재를 통해서가 아닌 대의적 민주제를 통해 선출된 지도자라는 점이다. 즉, 그는 선거를 통해 일당독재 지도자보다 더 많은 정치적 자본을 얻게 됐지만, 적어도 중국 공산당이 그랬던 것처럼 집단적 논의를 통해 시행착오를 수정할 정치적 의지는 가지지도 가지려 하지도 않은 상태기 때문이다.

금융위기를 통해서 교훈을 얻었어야 한다면 대량생산-대량소비의 현대사회에서 국가는 기간산업과 핵심 산업(예를 들면 금융업)은 공공적 기능이 관철되도록 “사령탑”적인3 통제를 강화하되 전 세계적 시장경제는 정의롭게 유지되도록 심판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수술이 잘못된 시장경제는 경제격차와 이념적 편견의 격차만 벌려놓아 보호주의, 인종주의, 독자주의 노선만을 강화시켰고, 그 가장 흉악한 결과가 트럼프의 당선이다. 그는 개별기업에 입지를 지정하고, 도드-프랭크법 규정을 무력화시키고, 이민을 통제한다. 7인 이하의 사영기업 허용이 희극이라면 이번 버전은 비극인가?

80년대 중국이 일당독재 바나나 공화국이었다면 현재의 미국은 민주적 바나나 공화국이다.

“기업이 더 적은 인력을 고용하기 위해 노력했던 적이 일찍이 없었다”

요즘만큼 미국의 기업이 더 적은 인력을 고용하기 위해 노력했던 적이 일찍이 없었다. 의류업 일자리를 중국으로 옮기고 콜센터 운영을 인도로 넘기던 아웃소싱의 물결은 이제 거의 모든 업계 차원에서 미국 내의 회사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인 것 같다. [중략] 계약 모델(contractor model)이 너무 일반적이어서 포춘誌에서 10년 중 7년 동안 가장 일하기 좋은 직장으로 꼽힌 구글의 모기업 알파벳에서도 대략 정규직에 준하는 정도의 외주 노동자가 근무하고 있다고 이 이슈에 대해 잘 아는 이가 전했다. 대략 7만의 TVC가 – 임시직(temps), 판매자(vendors), 계약자(contractors)의 줄임말 – 구글의 자동운전 승용차를 시험하고, 법률서류를 검토하고, 생산품을 더 사용하기 쉽게 만들고, 마아케팅과 데이터 프로젝트들을 관리하고, 또 다른 많은 일들을 수행하고 있다. 그들은 근무 중에 빨간 배지를 착용하고 알파벳 직원들은 하얀 것을 착용한다. [중략] 얼마나 많은 미국의 노동자가 계약자로 일하는지는 알 수 없다. 왜냐하면 이들 직업군이 정부부처에서 집계하는 직업군에 깔끔하게 들어맞지 않기 때문이다. 경제학자들의 추산에 따르면 대략 국가 노동력의 3~14%까지가 또는 2천만 명의 인구가 이 직종에 종사한다고 추산하고 있다. [중략] 궁극적으로 몇몇 대기업들은 가장 핵심적인 고용 인력을 제외하고는 모두 가지치기 당할 수 있다. 컨설팅 회사인 액센추어는 10년 내에 세계에서 가장 큰 2천 개의 회사 중 한 곳은 “중역실 이외에는 풀타임 고용인이 아무도 없는” 상황이 될 것이라고 작년에 예측했다.[The End of Employees]1

기업은 확실히 20세기 최대의 발명품이다. 물론 그보다 훨씬 전에도 오늘날 우리가 기업이라고 부르고 있는 그 무언가가 존재하고 있었지만, 그런 기업이 지구 단위로 우리 삶을 지배하게 된 것은 20세기가 되어서부터다. 문명이 발달하면서 사람들이 깨달은 것은 분업이 생산성을 높이고 이 과정이 한데 모이면 한층 효율적이 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매뉴팩처가 등장했고, 소규모의 매뉴팩처는 점차 대공장으로 흡수된다. 칼 맑스는 이러한 대공장 기업이 자본주의를 융성하게 만드는 장소가 되는 동시에 노동자들이 조직화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기업 스스로와 자본주의를 패퇴시키는 장소가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21세기 들어 이제 기업이 기업 스스로를 해체시키려 하고 있다. 액센추어의 예언처럼 중역실 이외의 모든 고용이 사라진다면, 이는 기업이 변신 프라모델처럼 여러 부속품이 결합됐다가 필요에 따라 또 다른 무언가로 변신하는 존재가 될 것이라는 의미고, 그것을 우리가 알던 기업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생기는 상황이다. 물론 이런 조짐은 이전 세기에도 있었다. 기업은 주식시장과 LBO를 통해 소유주와 자본가의 개념을 해체하는가 하면, 아웃소싱을 통해 노동력의 형태를 다양화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게 이제는 전 업종, 전 업무에서 일상화되고 있다는 점에서 이전의 아웃소싱과 다르다 하겠다.


자동차인 줄 알았더니 로봇(출처 : 영토이)

앞서 말했듯이 20세기형 기업은 비교적 동질의 노동력을 지닌 노동자를 한데 모아 분업화된 공정에 참여시킴으로써 생산성을 극대화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20세기형 기업은 “또 하나의 가족” 혹은 유사 군대조직과 비슷한 규율과 가부장적 질서에 익숙하다. 이런 질서는 심지어 그 기업에서 태어난 반항아 노동조합에서도 유지됐다. 그런데 이제 社內 노동력은 더 이상 가족도 군대도 아니다. 운전사는 빨간 배지를 단 A 파견회사 소속이고 프로그래머는 노란 배지를 단 B 파견회사 소속이다. 20세기 자본주의가 소규모 매뉴팩처를 합병 또는 해체시키는 과정을 겪었다면 21세기 자본주의는 이를 다시 해체시키는 과정을 겪고 있는 것이다.

다만 이 과정은 20세기 이전의 그것처럼 뭔가 목가적인 뉘앙스의 자영업자의 형성과정과는 거리가 멀 것이다. 개별 부속품을 담당하는 파견회사는 파견회사대로 하나의 거대화된 새로운 형태의 기업으로 성장할 것이다. 1970년대 SF영화인 Rollerball에서는 기업의 독점이 완성되어 회사명이 그저 “기업(Corporation)”이라 불릴 따름이라는 설정인데, 파견회사 역시 비서 파견이 전문인 거대기업은 그저 “비서 회사”로 불릴 따름인 세상이 21세기형 기업의 해체과정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더불어 그 과정은 궁극적으로 자동화를 통한 인간 노동의 배제 자체를2 염두에 두고 있다는 점에서 보다 디스토피아적인 모습을 띄게 될 가능성이 크다.

금융위기의 진원지에 존재하는 여전한 위기

26조 달러에 달하는 미국의 주택 재고는 이 나라의 주식시장의 총액보다 약간 더 많은, 세계에서 가장 큰 자산 층이다. 11조 달러에 달하는 부채의 미국 모기지 금융 시스템은 여느 곳에서나 볼 수 있는 금융 리스크가 가장 크게 집중된 곳일 것이다. 이 시스템은 여전히 약 1조 달러의 모기지 부채를 해외에서 보유하고 있어 국제 금융 시스템과 긴밀히 연계되어 있다. 이 시스템은 현대사회에서 가장 가혹한 경기침체기에 폭발한 이래 10여년이 지나도록 개선되지 않고 있는 곳이다.[Comradely capitalism]

전 세계의 자본주의 경제의 부침이 미국 자본주의 경제의 부침 여부에 긴밀하게 연계되어 있다면, 그 미국 자본주의 경제의 부침은 미국 주택시장의 부침과 긴밀하게 연계되어 있다. 그리고 인용문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 미국 주택시장의 자산 규모는 단일 시장으로서 전 세계에서 가장 큰 시장이다.. 따라서 이 시장에는 당연히 수많은 투자자들과 그들을 돕는 여러 이해당사자들이 몰려들 것이다. 그 풍경이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이전까지의 풍경이었고, 그 이후의 상황은 잘 아는 바와 같다.

두 번째의 큰 변화는 2008년 12월의 시스템에 대한 정부의 긴급 구제조치가 정부의 더 커다란 역할로 귀결되었다는 점이다. 정부는 이 전에는 민간이 운영했던(비록 암묵적으로 보증은 하고 있었지만) 모기지 회사들인 프레디맥과 패니메의 대주주가 됐다. 이들은 이제 “후견체제(conservatorship)”, 종결될 기미가 거의 보이지 않는 일종의 명목상의 한시적인 국유화 체제 하에 있다. 다른 증권화 업자들은 퇴출했거나 파산하였다. 이는 대부분 민간 부문에서 이루어졌던 부채의 증권화가 이제 거의 완전히 국영화됐음을 의미한다.[같은 글]

이코노미스트의 저 기사 제목을 뭐라고 해석할 수 있을까? 인용문의 맥락에서 보자면 저 제목은 “동지적 자본주의”로 해석할 수 있을 것 같다. 즉, 이코노미스트는 자본주의 형태를 띠고 있는 현 체제의 상류에 거슬러 올라가면, 즉 전 세계 자본주의 경제의 부침을 좌우하는 그 시장은 국유화됐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이 상황을 묘사한 기사의 제목을 저렇게 지은 것이다. 요컨대 2008년 이후 자본주의 체제의 유지가 가능하게 해주고 있는 체제는 사회주의라는 게 기사의 논지다.

한편 “동지적 자본주의” 성향은 채권자 현황을 보면 더욱 실감할 수 있는데, 정부 모기지 채권의 27%에 해당하는 1조8천억 달러의 채권을 Fed가 매입했기 때문이다. 즉, 이는 국영 모기지 회사들이 금융위기 이후 전체 채권 중 60% 이상의 – 심지어는 80% 이상까지 – 보증부 채권을 발행했고, 이를 다시 Fed가 매입하여 가동시킨 시장이 바로 미국의 주택 모기지 시장이란 의미다. 시장은 존재하는데 그 시장의 주요 공급자와 주요 수요자가 정부부문인 시장, 그렇다면 이 체제는 “시장 사회주의”인가?


미국의 모기지 신규 발행분 조달 재원(출처 : 이코노미스트)

사실 그동안 미국정부는 국영 모기지 회사들을 다시 민영화시키려했지만 번번이 무산되었다.1 Fed도 한시적으로 채권을 매입하겠다는 심산이었지만 상시적 조치가 되었다. “국유화”란 표현조차 “후견체제”라는 표현으로 세탁하였지만, 근시일 내에 이런 한시적 체제가 해소될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그 와중에 미국 주택시장이 다시 호조를 보인다는 뉴스는 큰 의미가 없다. 리스크가 노출돼 폭락한 시장을 정부보증의 리스크 제로로 둔갑시킨 것은 닷컴버블의 변이인 닷거브버블(dot gov bubble) 이기 때문이다.

이코노미스트의 대안은 어쨌든 이들 국영 모기지 회사를 증자 및 수수료 인상 등의 방법으로 건전화시켜 민영화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방법은 정치적으로 인기가 없을 것이고 또다시 주택시장을 깊은 악순환의 수렁에 빠트릴 수 있다. 그리고 금융위기 이전부터 이미 프레디맥과 패니메는 “정부보증기업(government-sponsored enterprise : GSE)”이란 이름의 국유기업이나 다름없었기에, 그리고 그들의 보증부 채권이 시장의 반 이상을 차지하였었기에 민영화라는 대안도 사실 허상인 것이다.

미국의 주택시장은 민영화시키기에는 너무 크다.

“Too Big To Privatize.”

바다에 빠진 노동자라도 빚은 갚아야 한다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이 고용주에게 제공하는) 노동생산성이 계속 증가해온 이래 1970년대 이후의 역사상 가장 높은 이윤을 향유했다. (고용주가 노동자들에게 제공하는) 임금은 그렇지 못했다. 은행에 쌓인 증가일로의 이윤은 대부분 소비자 대출이 되었다. 1970년대 이후 소비자 신용의 분출은 고전적인 자본주의 모순을 이연시켰다. 그것은 급속히 확대되었을 때 나빠졌을 수도 있는 소비자 수요를 지탱해주었다. 자본가는 지구화된 노동력 덕분에 그들의 월급명세를 절약할 수 있었다. 그러나 2008년, 정체되어온 실질임금에 기반을 둔 점증해온 소비자 부채의 25년은 예상할 수 있던 한계에 도달했다. 노동자의 소득이 부풀어 오른 채무를 감당해내기에는 부족하다는 사실이 증명되었을 때, 그들의 파산은 – 소비자 부채에 투자한 금융회사들의 파산과 함께 – 2008년의 붕괴에 일조했다.[Capitalism – Not China – Is to Blame for the Current Global Economic Decline]

2008년의 금융위기가 단기적으로 미국의 부동산 시장의 거품뿐만 아니라 중기적으로 1970년대 이후 증가일로에 있었던 소비자 신용이 그 한계에 도달하여 유발되었다는 설명을 인용해보았다. 이글의 서론에도 언급하듯이 자본주의에는 다양한 형태가 현존하고 있다. 하지만 그 다양한 자본주의 형태의 현재시점에서의 공통점은 인용한 부분의 설명처럼 소비의 상당부분이 노동자이기도 한 소비자의 부채를 통해 채워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특성은 확실히 이전 세기 초반의 자본주의와는 확연히 다른 특성이다.

이러한, 소득과 소비의 불일치를 소비자 신용으로 채워온 자본주의 형태의 선두주자에서 한국을 빼놓을 수 없다. 예로 한국은 아파트라는 주거형태를 국가 규모의 거대한 소비자 신용을 통해 집단적으로 소비해온 소비자 신용 선진국이다. 이름도 걸맞게 “주택담보 집단대출”이다. 최근 몇 년간 진행되어온 아파트 개발 사업은 전형적으로 개발업자가 “부동산PF”를 통해 자금을 조달하여 아파트를 짓고, 이를 사들일 소비자는 자기 돈 일부에 “주택담보 집단대출”을 통해 자금을 조달하여 아파트를 사는 과정을 밟아왔다.

그래서 작년에 전국경제인연합회가 내놓은 『민간소비 부진의 원인 및 시사점』이라는 보고서에서 나열한 여러 원인 중 첫 번째가 바로 “가계부채”다. 보고서는 최근의 민간소비 부진이 “경기적 요인으로 보기 어려운 구조적인 문제가 있음을 암시”한다고 지적하며, “가계부채가 임계점에 도달”하였다고 단언하고 있다. 가계부채는 그 절대적 규모도 규모거니와 원리금 상환능력이 중요한데, 우리의 가계부문의 원리금 상환능력을 나타내는 개인가처분소득 대비 가계부채 비율은 2012년 말 163.8%로 매우 높은 수준이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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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 Austria shipwreck” by Unknownhcandersen-homepage.dk. Licensed under Public Domain via Commons.

한편 정부는 지난 12월 16일 “경제혁신 3개년 계획의 성과를 구체화”하고자 할 목적으로 『2016년 경제정책방향』을 내놓았다. 이 발표에서 제시한 가계부채에 관한 정책방향은 “주담대 분할상환 관행 정착”과 “집단대출의 건전성 관리”다. 즉, 만기 일시상환 위주의 대출을 분할상환으로 유도하고 집단대출이 실수요자 위주로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겠다는 정책인데, 이 정도면 근본적인 부채대책이라기보다는 미세조정에 가깝다. 이는 전경련조차 “임계점”이라고 규정한 심각한 가계부채의 근본대책이라 보기에 미흡하다.

『2016년 경제정책방향』에서 실질적으로 가계부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편인 가처분소득을 늘릴 수 있는 대책으로는 “정규직 전환 및 근로자 임금증가액에 추가 세액공제 부여” 등이 있다. 실제로 기획재정부는 이미 작년에 ‘가계소득 증대세제’ 3대 패키지를 도입한 바 있고, 그 덕인지 2015년 국내총소득 증가율도 전년기 동기 대비 경제성장률을 상회하였다.2 하지만 여전히 중기적으로 세금·사회보험료 등 비소비지출 부문의 부담 증가3, 전월세 가격의 폭등4은 가처분소득을 감소시키고 있어 그 실효성이 의심스럽다.

보다 근본적으로 부채에 허덕이는 가계에 직격탄을 날리는 상황은 부족한 소득마저 빼앗아가는 실업이다. 인용문에서도 지적하듯 자본주의 체제에서의 지구화된 노동력은 노동자가 언제라도 직업을 잃을 수 있는 전제를 제공하고 있는 한편으로, 국내 경기의 장기침체 조짐에 따른 상시적 인력감축은 노동자를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다. 신입사원마저 “희망퇴직”의 희생양으로 만드는 기업의 인력감축정부의 일반해고 요건 완화 시도는 체제적 위기의 풍파에 시달리는 배에서 노동자들을 우선 바다에 던져 넣겠다는 것이다.

물론 바다에 빠진 노동자라도 빚은 갚아야 한다.

자본주의는 계속 발전하고 있다는 이코노미스트의 칼럼에 대해

그러나 당신이 만약 자본주의를 시장경제에서의 개인의 상호작용으로 정의한다면, 이 시스템은 후퇴하지 않고 전진하고 있다. Airbnb와 Etsy와 같은 신경제 웹사이트들에서 사람들은 그들의 휴가기간 동안 집을 빌려주거나 예술품과 공예품을 파는 등 새로운 방식으로 돈을 벌고 있다. 과거에 집주인들은 임차인을 찾는데, 취미생활자는 구매자를 찾는데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다. 집합적인 웹사이트들에서는 이런 일들이 훨씬 쉬워졌다.[Advancing, not retreating]

분명히 Airbnb와 Etsy는 이전에 없던 새로운 시장을 창출하거나 발전시키면서 사회적 효용을 증가시킨 측면이 있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을 근거로 ‘자본주의가 전진하고 있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무리가 있어 보인다. 이는 글쓴이가 “자본주의 = 시장경제에서의 개인의 상호작용” 등식 자체가 무리가 있기 때문이다. 이 사이트에서도 몇 번 살펴보았듯이 시장이라는 것이 역사적으로 자본주의에서만 존재한 것이 아니며, 심지어 구(舊)사회주의 블록 일부에서는 이른바 “시장 사회주의” 실험을 시도한 나라들도 있을 정도로 시장이란 제도는 다양한 경제체제에서 존재가능하다.1 심지어 어떤 이는 계획경제는 자본주의의 특징이며 칼 맑스가 지향한 것은 “자유로운 생산자들의 연합”의 시장경제라는 뉘앙스의 급진적인 주장을 하는 이도 있다.

흔한 오해와는 달리 맑스는 ‘위로부터의’ 계획은 사회주의가 아니라 자본주의의 특성이라고 보았고, 그 ‘전제적’ 성격을 비판했다. 맑스는 자본주의의 전제적인 계획생산에 대해 “자유로운 생산사들의 연합”(‘코뮌주의’)을 대치시켰고, 후자로부터 생산의 진정한 재조직과 ‘아래로부터의 참여계획’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런 점에서 맑스의 코뮈니즘은 전제적 계획에 따른 공동생산의 의미를 지닌 ‘공산주의(共産主義, 국가자본주의)’와는 무관하다.[맑스적 코뮌주의의 생태문화사회적 성격]

몇 번 주장하였듯이 자본주의 체제의 중추기능을 하는 기업은 거의 대부분 계획경제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것도 위 인용문의 글쓴이가 이야기하듯 ‘전제적’ 성격이 상당히 강하다.(이번 엘리엇 사태나 롯데 사태에서의 행태를 보라) 시장 사회주의자들은 이러한 소유의 집중이나 – 또는 그 소유보다도 더 왜곡된 권력 집중이 – 진정한 시장경제의 발전을 방해한다고 보는 입장이었고, 인용문의 글쓴이가 주장하는 ‘코뮌주의’ 역시 비슷한 맥락에서의 주장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코노미스트가 “자본주의 발전”의 사례로 든 애어비앤비는 적어도 현재까지의 모습으로 봐서는 대기업보다 덜 위계적이고 수혜자가 폭넓다는 측면에서 덜 ‘전제적’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자유로운 생산자들의 연합”의 초기형태일지도?

자본주의 시스템이면 봉건적 세습은 막아야 하지 않겠는가?

지난주 발표된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은 복잡한 계열사들을 정비하고 핵심 계열사인 삼성전자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고자 총수 일가가 세운 계획의 핵심이다. 그러나 제시된 합병 가액은 오너 일가에게만 득이 된다. 이 전주식거래방식의 합병 계획에 따르면 사실상의 지주회사인 제일모직이 삼성물산을 1:0.35의 비율로 흡수합병하게 된다. 그러나 이 합병안에서 삼성물산은 과소평가된 반면 제일모직의 주가는 지금과 같이 높은 수준으로 과대평가됐다. [중략] 합병이 발표되기 앞서 지난해 삼성물산의 주가는 25% 가까이 하락해 주가순자산비율(PBR)이 0.62배를 기록했다. 지난 10년 평균(1.17배)을 크게 밑도는 수준이다.[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주주 반대로 무산될까]

월스트리트저널의 최근 기사는 최근 발표된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 계획이 “오너 일가(원문은 ”the Lee family“)에게만 득이 된다”는 사실을 단정적으로 말하고 있다. 삼성 “그룹”의 지주회사의 역할을 하고 있던 제일모직이 일시적으로 저평가된 삼성물산과 합병함으로써 그룹의 “핵심 계열사(원문은 “crown jewel”)“인 삼성전자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는 시나리오는 겉으로 보기에는 삼성 그룹 내의 건설 업종의 시너지 효과를 노리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보다 ”오너 일가“, 보다 직설적으로 3세 세습의 핵인 이재용 개인을 위해서일 것이다.

시장이 균형가격을 찾아줄 것이라는 신고전파 경제학의 이론이 요 며칠 동안 이 블로그의 주요 화두인데 효율적 시장가설의 상황에서의 주식시장이야말로 이 균형가격을 탐색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라 간주되고 있었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하지만 실제로는 주식시장이 그 기능을 하는 것인가에 대해서 케인스 주의나 행동 경제학 등에서 많은 의문을 제기해 왔다.1 WSJ역시 이번 합병 시나리오에서 삼성물산 주주들이 “적정 가격”보다 낮은 이익을 얻게 될 것이라고 확언하고 있다. 그렇다면 삼성이 제시한 물산의 가격이 균형가격에서 일탈해 있는 셈이다.

바로 그 차익거래 가능성의 틈새시장을 엘리엇 매니지먼트가 파고들었다. 엘리엇은 전에 아르헨티나의 국채 헤어컷 해프닝에서 아르헨티나 정부에게 엿 먹인 전력이 있는 투자자다. 한 국가의 고유권리(?)일 수도 있는 채권 헤어컷을 훼방 놓을 만큼의 실력을 갖춘 투자자니 만큼 ‘이재용 vs 엘리엇’의 승부는 만만치 않아 보인다. 삼성물산 주주는 현재 엘리엇 7.12%를 비롯하여 외국인이 32.11%를 점유하고 있다. 주총에서 참석 주주 의결권의 3분의 2이상, 발행 주식 총수의 3분의 1이상 동의여서 어느 누구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팽팽한 상황이다.

이 상황에서 주목할 만한 주주가 9.98%의 주식을 소유한 2대 주주 국민연금이다. WSJ의 해당 기사도 지적하듯 한국 기업의 주주들은 주주권 행사에 소극적이었고 국민연금도 예외가 아니었다. 일종의 “사회적 배당”이랄 수 있는 국민연금은 여태 정부의 경기부양을 위한 또 하나의 예산 행세를 하며 거수기 역할에 만족해왔기 때문이다. 최근 몇 년간 국민연금의 행태를 볼 때 보다 적극적 자세를 보일 수도 있을 것이지만 – 사회적 배당의 주주의 한 사람으로써 연금이 보다 적극적인 행동을 취하길 기대해보지만 – 그 행보는 쉽게 가늠하기 어렵다.

자본주의 시스템이면 주주 자본주의를 가동해서라도 봉건적 세습은 막아야 하지 않겠는가?

로봇이 내 일자리를 빼앗는 것인가? 노동으로부터 해방시켜 주는 것인가?

NPR은 최근 시장보고서를 내고 향후 20년 내 로봇에 의해 대체될 가능성이 높은 직업군 20개를 선정하였다. 이 직업군에는 전기전자제품 조립공, 보석가공연마사, 계산대 점원 등 단순반복 작업이 주를 이루는 제조업 및 서비스업의 직종이 다수를 이루고 있다. 하지만 의외로 회계 장부 담당자나 은행원과 같이 상대적으로 복잡한 작업을 하는 서비스업 직종도 포함되어 있으며, 패션모델과 같은 의외의 직종도 포함되어 있다.

▲11위, 차량운전사=운전사,개인운전사들이 자동화될 가능성은 97.8%다. 운전자들은 더 이상 필요치 않을 것이다. 구글의 자율주행차는 인간이 개입 없이 수천마일을 시험해 왔다. 또한 트래비스 캘러닉 우버 최고 경영자(CEO)도 궁극적으로 모든 자동차가 운전자들을 대체하게 될 것이라고 발표했다.[로봇이 내 일자리 뺏는다. 안전한 직업군은?]

특히 운전사는 이미 구글의 무인운전차량 개발 프로젝트 등을 통해 끊임없이 무인화의 도전을 받고 있는 대표적인 직종이다. 머지않은 시대에 우리는 SF영화 토털리콜에서나 보던 피노키오처럼 생긴 로봇 운전자가 행선지를 묻는 택시에 승차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런 상용화 시대를 앞당기고 있는 주체는 당연히 인용기사에 언급된 구글이나 우버와 같은 사적기업이다. 특히 우버는 구글보다 더욱 더 상용화에 목을 매고 있다.

우버는 언젠가 자사의 계약 운전사 수만 명을 대체할 수 있을 무인차를 꿈꾼다. 하지만 내부적으로 무인차 개발 역량을 전혀 갖추지 못한 우버는 곧바로 ‘드림팀’ 구성을 할 수 있는 곳으로 눈을 돌렸다. 바로 카네기멜론대의 국립로봇공학센터(NREC)다. 투자자들에게서 조달한 50억 달러의 현금으로 무장한 우버는 일부 NREC 소속 과학자들에게 수십만 달러의 보너스와 현재 연봉의 두 배를 제시했다. [우버, 산학협력 맺은 카네기멜론大 연구진 빼가]

처음에 “공유경제”라는 그럴듯한 이름을 달았던 우버가 번창하는 실제 이유는 “주문형(On-Demand) 경제”나 “하인(Concierge) 경제” 모델에 기반을 두었기 때문임은 이 블로그에서도 몇 번 말한 바 있다. 즉 우버는 운전이라는 서비스 노동에 활용할 노동력을 비정규/비정형화하여 비용을 절감하여 수익을 창출하고 있다. 이러한 모델에 대한 비판도 적잖은 상황이지만, 우버는 사실 그 상황마저 뛰어넘는 궁극의 무인화의 길로 가려하고 있다.

잠깐 옆길로 새자면 처음에 대리운전 업체 비슷하게 시작한 우버가 학교의 연구 인력을 빼나가는 블랙홀이 된 과정이 참 흥미롭다. 결국 우버는 앞서 말한 비용 절감 모델을 스마트폰 앱이라는 수단을 통해 ‘규모의 경제’ 化하여 성공하였다. 벤처캐피탈은 그 가능성에 베팅하여 투자를 했고, 우버는 그 잉여자금을 현재 수익모형의 다음 단계에 베팅하기 시작하였다. 미국이 아니고서는 볼 수 없는 역동적인 투자환경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각설하고, 관건은 우버가 이렇게 산학협력을 빙자한 인력 빼오기를 해올 정도로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프로젝트가 성공할 수 있을 것인가의 여부일 것이다. 사견으로 우버가 성공하지 못하더라도 어느 기업인가는 그 비즈니스 모델을 구현해낼 것이라 여겨진다. 그리고 가까운 미래에 우리는 Siri에게 “차 좀 불러줘”라고 주문하면 집 앞에 무인운전차량이 대기해 있는 장면을 목도할 것이다. 인간은 이렇게 노동으로부터 해방되어 가는 것이다.

문제는 우리 대부분이 노동자라는 사실이다. 텔레마케터인 24세 여성인 미선 씨는 무인택시라면 운전사의 성희롱이나 난폭운전이 없어질 것이라며 좋아할지도 모른다. 문제는 본인의 직종이야말로 로봇化로 인해 없어질 직종 1위라는 점이다. 언젠가 그는 출퇴근을 위해 무인택시를 탈 필요도, 택시비를 지불할 돈도 없을지도 모른다.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노동자는 로봇化로 인해 노동뿐 아니라 월급으로부터도 해방되는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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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biddenplanetposter” by Copyrighted by Loew’s International. Artists(s) not known. – http://wrongsideoftheart.com/wp-content/gallery/posters-f/forbidden_planet_poster_01.jpg. Licensed under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이렇듯 사적소유에 의해 지탱되는 자본주의는 기술발전 등으로 인한 자동화 혜택의 절대다수가 주주에게 귀속되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한편 칼 맑스는 자본을 “가변자본”과 “불변자본”으로 나누고, 개별 자본은 가변자본인 인간의 노동을 가치의 변화가 없는 불변자본인 기계로 대치하여 상품의 가치를 전유하려는 속성이 있음을 설명한 바 있다. 그리고 개별 자본에게 있어 합리적인 이러한 의사결정이 사회의 이윤율을 하락시킬 것이라 예측하였다.

말인즉슨, 우버 등 개별자본이 로봇化를 통해 경쟁력을 가져 상대적 고수익을 누리는 것은 자본주의 고유 속성이고 이런 자동화가 차츰 일반화되면 노동자로부터의 착취율이 떨어져 사회 전체의 이윤율이 감소한다는 것이 칼 맑스의 논리다. 이 법칙이 “경향적 저하의 법칙”이란 희한한 이름을 가지고 있는 만큼 애매한 구석이 있긴 하지만 시사점은 있다. 노동자는 이제 착취당할 여지도 없게 되고 무인택시를 이용할 소비자도 사라진다는 점이다.

이러한 경향이 바로 오늘날 미국이나 일본과 같은 첨단 자본주의 국가의 지도자들이 기업에게 노동자의 임금 인상을 요구하는 이유다. 개별 자본은 자동화를 통해서든 구조조정을 통해서든 계속 수익극대화를 추구하고 제도는 이를 정당화하고 있지만, 그로 인해 총자본이나 사회전체는 성장이 둔화되거나 심지어 정지할 수 있는 위기로 몰리기 때문이다. 오바마는 다만 노동자라는 생산자가 동시에 소비자라는 평범한 사실을 상기시키고 있을 뿐이다.

이 모델에서 랑게는 신고전파의 전통 특히 바로네가 정식화해놓은 전제들을 그대로 따랐다. 이러한 형태의 사회주의는 생산수단의 국가 소유를 기초로 하고 있다. 개인들은 각자 자신의 직업과 소비재를 자유롭게 선택하며, 이것들은 “진짜 시장”에서 매매된다. [중략] 피고용자들은 소득을 얻고 또 추가로 “사회적 배당금” 즉 “사회가 소유하는 자본 및 천연자원에서 나온 소득의 개인 몫”을 얻게 되어 있다.[신자유주의의 좌파적 기원, 조하나 보크만 지음, 홍기빈 옮김, 글항아리, 2015년, pp75~76]

칼 맑스 등 사회주의 사상가들이 꿈꾼 생산력이 극대화된 미래에 인간은 고통스러운 노동으로부터 해방될 것이다. 그리고 시장 사회주의자 오스카르 랑게가 꿈꾼 사회는 어쩌면 칼 맑스도 이야기한 “자유로운 생산자 연합”의 보다 구체적인 로드맵일 수도 있다. 문제는 노동자가 무인택시를 즐기며 “사회적 배당”을 받으려면 노동자 스스로가 기업의 주주가 되어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현재 우리는 그런 길이 제한된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고 있다.

현실에서 “사회적 배당”의 특징을 지닌 존재는 연기금으로부터의 연금 정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