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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호 교수의 『박정희 경제신화 해부』를 읽고

남한의 “진보”세력에게 박정희의 경제신화는 일종의 계륵이다. 남한은 전 세계 개발도상국 중에서 거의 유일하게 – 또는 대만과 함께 – 20세기 전간기의 참화를 딛고 기적처럼 경제성장에 성공한 나라라는 것이 정설이다. 그리고 그 고도성장은 박정희의 집권 기간부터 시작된 것이 객관적 사실이다. 즉, 박정희는 경제개발계획 수립, 수출지향형 공업화, 재벌체제 확립 등 경제전반에 대한 강력한 국가통제를 통해 경제성장을 주도하여 온 것으로 알려졌고, 이것을 근거로 보수 세력은 그를 소위 “근대화의 아버지”로 자리매김했고 진보 세력도 그 정도의 사실은 딱히 반박하지 못하고 마지못해 고개를 주억거리면서 ‘그래도 민주주의는 진보 세력에 의해 이루어졌다’ 정도로 항변하곤 했었다.

개인적으로는 『박정희 경제신화 해부』를 쓴 박근호 교수를 “진보” 또는 “보수” 중 어느 것으로 칭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다만 책을 읽고 나서의 느낌은 치밀하고 집요하게 객관적인 경제학자라는 느낌이다. 이 책을 읽는 동안 어느 블로거가 쓴 묵시론 적인 경제전망을 담은 책과 어느 경제지 기자가 쓴 저축은행의 흥망에 관한 책을 읽었는데, 이들 책 내용의 불성실함으로 인해 박 교수의 성실함이 더욱 돋보였다. 이미 1993년에 『한국의 경제발전과 베트남전쟁』이란 책을 출판하면서 한국군의 베트남전 참전이 남한 경제에 미친 영향에 주목한 필자는 2007년 비밀문서에서 해체된 대통령기록물, 美국무성의 한국관련 문서 등을 연구하여 논리를 보강하는 등 치밀한 검증을 거친 결과물이 이 책이다.

1960년대 내내 한국은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미국의 안전보장전략 아래 놓여 있었다. 다만 한국이 ‘미국의 불안정한 의붓자식’이었던 관계는 1965년 한국군의 베트남전 참전을 통해 ‘기브앤테이크’ 관계로 이행했다. 따라서 한미관계의 분기점은 한국의 베트남전 참전이었고, 이를 경계로 미국의 한국정책은 명백히 전환되었다. 미국에게 한국의 전략적 중요성이 커지면서 한국을 공산권진영에 대한 경제적 우위의 증거로 삼으려는 ‘한국모델’ 전략이 행해졌다. 이를 위해 미국이 만든 경제시스템 속에서 개발모델이 된 한국은 우대조치를 받았고, 최대의 수혜자가 되었다. 요컨대 미국이 ‘한국모델’ 정책을 공들여 추진한 결과, 1965년부터 한국의 고도성장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박정희 경제신화 해부, 박근호 지음, 김성칠 옮김, 회화나무, 2017년, p364]

해당 인용문이 책의 전반적인 요지를 담은 문구라 생각되어 인용했다. 박 교수는 박정희가 그 어떤 나라의 위정자보다 더 적극적으로 베트남전에 참전하려 했던 이유를 “한국의 경제성장, 한미관계의 강화, 한국군의 전투력 향상, 그리고 플러스알파”를 노렸기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박의 철저한 계산에 따라 진행된 베트남파병은 이후 박정희의 1965년의 방미로 이어지고 존슨 정부는 남한을 일본과는 다른 공산권에 대한 “자립형 완충지대”이자 “민주주의의 쇼윈도”로 키울 마음을 먹는다. 이를 위한 미국의 지원은 다양한 물질적 지원 이외에도 한국산 제품의 수입확대,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설립을 위한 학술적 지원, 미국기업의 한국 직접투자를 위한 노력 등 다양한 형태로 이루어진다.

그러한 박정희의 미국을 향한 집요한 구애가 성공했다는 점에서 “근대화의 아버지”라 부른다면 달리 반박할 말은 없다. 다만 박 교수가 분석한바, 박 정권이 미국의 요구에 따라 수립한 경제개발계획이 실제 집행에서는 많은 오류가 있었고, 미국의 바텔기념연구소가 전자산업 육성으로 방향을 제시한 후1, 미국기업의 제조업기지화를 위한 투자가 있은 다음에야 경제가 궤도에 올랐다는 사실은 박정희 체제가 미국이라는 외생적 변수 없이는 성공할 가능성이 거의 없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는 점에서 그를 “OOO의 아버지”라 부르는 것은 몰염치한 짓일 것이다. 그리고 이때 기득권층은 미국의 위력을 실감하고 그의 뜻을 거스르는 것은 불경스러운 행동임을 깨달았고2 이런 행태가 오늘날에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따라서 박정희 체제는 대미굴종, 많은 노동자의 희생, 정경유착 및 재벌체제 공고화, 수출지향형 경제성장, 한미일 군사/경제 동맹 등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한 가지씩 곱씹어보면 아직도 이러한 모순들이 그대로 온존하고 있음을 최근의 많은 사례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새로 들어선 정부가 이러한 모순을 조금이라도 개선하려고 들면 개떼처럼 달려들어 짖어대는 기득권 세력의 저항을 보면 그 썩은 뿌리가 이 나라에 얼마나 깊숙이 박혀 있는 지를 서늘하게 느낄 수 있다. 어쨌든 박근호 교수의 책은 이런 썩은 뿌리의 토대인 “박정희 경제신화”의 허구성을 깨닫게 하는 입문서로서의 자격이 충분한 책이다. 이 연구가 초석이 되어 이 나라의 대안 경제를 꿈꾸고 실천할 그 날이 어서 오길 바란다.

객관성에 대한 절대 신뢰가 초래할 수 있는 위험에 관해

제국중앙보안본부는 친위대의 열두 개 본부 가운데 하나에 불과했고,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오늘의 맥락에서 볼 때 쿠르트 달뤼에게 장군 휘하의 치안담당 경찰본부였는데 유대인의 체포가 그 책무였다. 친위대 행정경제본부(W.V.H.A.)의 수장은 오스발트풀이었는데, 이 기관은 집단수용소를 담당했고, 후에는 유대인 몰살의 ‘경제적’ 측면을 담당했다. 이러한 ‘객관적인’ 태도(집단수용소를 ‘행정’을 중심으로, 죽음의 수용소를 ‘경제’를 중심으로 다루는 태도)는 친위대 정신구조에 전형적인 것으로 아이히만이 법정에서도 여전히 상당한 자부심을 가졌던 것이다. [중략] 세르바티우스는 “유골의 수집, 종족 근절, 가스를 사용한 살인, 그리고 이와 유사한 의학적 문제들”에 대한 책임에 기초한 고소 내용에 대해서는 무죄라고 선언했다. 그러자 할레비 판사는 그의 말을 중지시키고 “세르바티우스 박사, 가스 살인을 의학적 문제라고 말한 것은 말실수라고 생각되는군요”라고 말했다. 여기에 대해 세르바티우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것은 실제로 의학적인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그 일은 의사가 준비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살인의 문제이고, 살인 역시 의학적 문제입니다.”[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서, 한나 아렌트 지음, 김선욱 옮김, 정화열 해제, 한길사, 2014년, pp129~131]

어제 글에서도 언급했던 전범(戰犯)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을 다룬 한나 아렌트 책의 일부분이다. 도덕적으로 악한 행위일지라도 그것이 어떻게 조직적이고 “객관적”인 기구와 절차에 의해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해 잘 설명한 부분이라 인용해보았다. 제3제국은 잘 알다시피 독일을 비롯한 유럽대륙에서 유대인을 몰아내려 했었다. 그래서 이들은 심지어 초기에 시온주의 세력과 협의하여 팔레스타인으로의 집단이주를 돕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협조적 태도는 그 뒤 ‘유대인 제거’라는 뼈대만 남은 채 보다 악랄한 방법으로 그들을 제거하였다. 행정적이고 경제적이고 의학적인 수단을 통해서 말이다.

현대에 들어 인류는 천부인권의 개념 등을 통해 이전사회에서 정당화되기도 했던 각종 반인륜적 행위에 대한 반성과 이를 토대로 한 도덕적 기준을 세워 제반행위를 금지시켜왔다. 하지만 이러한 행위는 곧잘 인류역사에서 언제나 등장하는 조국 또는 여타의 조직을 위한 대의(大義)를 통해 정당화되어왔다. 오히려 인용한 것에서 보는 나치의 행위는 이러한 대의가 현대적인 조직 및 절차에 의해 더더욱 “객관적”이 되어있는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나치의 전체주의 국가기구에서 사용하는 “관청용어”는 감정이 담긴 표현을 말끔하고 냉정한 용어로 대체했다. 담당자는 일처리만 할 뿐이다. 현대화가 가지는 모순의 한 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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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esident Kennedy and Secretary McNamara 1962“. Licensed under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존 F. 케네디와 로버트 맥나마라

인용한 구절을 읽으며 생각난 인물이 있었다. 바로 미국의 국방장관을 역임했던 로버트 S. 맥나마라(Robert Strange McNamara)였다. 1961년 케네디 前 대통령이 기용하여 린든 존슨 행정부 때까지 장관직을 수행한 맥나마라는 하바드 비즈니스스쿨을 졸업한 후, 프라이스워터하우스에서 근무하였고, 美육군항공대에서 복무하기도 했으며, 장관직 직전에는 포드 자동차 회사의 CEO도 역임했다. 참 이색적인(strange) 경력인 셈이다. 이런 이색적인 경력은 그가 본격적으로 관여했던 베트남 전쟁과 그의 부처의 성격을 바꿔놓았다. 바로 전쟁에 “효율성”, “재무적 타당성”과 같은 비즈니스 분석기법이 결합한 것이다.

그는 국방부 내에 ‘시스템스 분석 기관(Institution of Systems Analysis)’을 만들고 민간인 분석가들을 기용하여 각종 문제에 대한 시스템적 분석을 수행하게 하였다. 그는 군사고문의 조언을 듣는 대신 이들 민간분석가들의 분석을 더 신뢰했다. 그는 방위 상황에 대해 시스템적으로 접근하여 계획적인 예산 시스템을 만들었다. 이러한 그의 시도는 오늘날 정책분석이라는 독립된 장르로 존재하게 됐다. 이런 군현대화의 공신은 또한 베트남 전쟁을 ‘객관적’으로 바라본 장본인이기도 했다. 그는 통계적 전략에 근거해 전쟁의 승리를 확신했고 수많은 지상군을 투입하였다. 결과는 알다시피 그의 “과학적” 분석의 결과와 달랐다.

말년에 맥나마라는 전쟁이 잘못된 행동이었다는 사실을 고백했다고 한다. 그의 고백이 그의 과학적 분석의 결과와 달랐다는 점에서 타당하지 않은 것이었는지, 아니면 도덕적으로 잘못된 것이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끝까지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했던 아이히만과는 약간 다른 모습이다. 다만 만행에 대한 ‘객관적’ 시스템에 복무했던 아이히만과 달리 맥나마라는 그 시스템을 고안했다는 점에서 죄질이 더 나쁘달 수 있다는 점에서 그의 고백은 더 빨리 공개적으로 이루어졌어야 했다. 또 다른 시사점이 있다면 유대인 학살은 전체주의 시스템에 의해 수행된 반면 베트남인 학살은 “민주주의” 시스템에 의해 수행됐다는 점이다.

객관성에 대한 절대 신뢰는 모든 정치체제의 적(敵)이다.

전쟁의 안개

케네디 정부에서부터 린든 존슨 정부에 이르기까지 7년여를(1961년~1968년) 美행정부의 국방장관을 역임했던 로버트 S. 맥나마라의 미들네임은 Strange다. 결혼을 앞둔 시절, 그의 미래의 아내가 될 약혼녀가 청첩장을 쓰기 위해 그에게 미들네임을 물어보자 그는 “Strange”라고 대답했다 한다. 그러자 약혼녀 왈 “이상해도(strange) 좋으니까 말해줘요.”

실제로 핵전쟁의 위협이 전 세계를 뒤덮고 있던 시절의 ‘美제국주의 전쟁장관’이라 할 수 있는 사악한(!) 이에게 별로 어울리지 않는 코믹스러운 상황인데, 이 이름이 또 역시 핵을 소재로 하여 당시(1964년) 큰 인기를 끌었던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 캐릭터 ‘스트레인지러브 박사(Dr. Strangelove)’와 묘하게 겹치면서 당시의 부조리한 상황이 낯설지 않게 느껴진다.

에롤 모리스의 다큐멘터리 <전쟁의 안개>(주1) 에 따르면 처음에 케네디는 그에게 재무장관 직을 제안했다가 거절당하자 국방장관 직을 제안했다고 한다. 밀고 당기는 과정에서 결국 세계에서 가장 많은 연봉을 받던 거대기업 포드자동차의 CEO였던 맥나마라는 가족들이 탐탁해하지도 않는 연봉 2만5천 달러의 초라한(!) 국방장관이라는 직책을 수락한다.

어떻게 하버드MBA 출신의 포드자동차 CEO였던 이 경제인이 국방장관이라는 ‘이상한’ 직책을 맡게 되었을까? 그의 미들네임처럼 상황이 약간 이상하긴 하다. 물론 미국권력의 음모론에 관한 책 <제1권력>의 저자 히로세 다카시 에게는 쉬운 답이다. 포드는 미국의 실질적 권력자인 모건-록펠러 연합에 속한 기업이기 때문에 발탁된 것이다.

각설하고, 맥나마라는 한 개인으로서, 그리고 미국이라는 나라의 국방장관으로서 2차 세계대전, 소련과의 핵전쟁 위기, 그리고 베트남 전쟁 등 현대사의 중요한 위기국면을 모두 거쳐 온 흔치 않은 인물이다. 그러면서 수만 명의 살상을 지켜보았고, 수천만 명의 목숨이 달린 의사결정을 했고, 그 자신이 수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명령을 하달했다.

시종 일관 그가 직접 증언하는 형식으로 진행되는 <전쟁의 안개>에서 그는 애써 자기 자신을 변명하려 하지 않지만 자신의 죄과를 참회하는 것도 아니다. ‘11개의 교훈’이라는 소제목으로 정리되는 그의 입장은 국가적 결정을 하는 이에게는 종종 합리성이나 도덕성을 넘어서는 무언가가 있다는 논리로 정리될 수 있다. 마키아벨리식 군주론의 냄새도 난다.

다만 기업의 CEO답게 그는 – 적어도 그의 증언에 따르면 – 강경론도 유화론도 아닌 상황논리에 따른 그만의 합리성을 추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일단 케네디 정부에선 핵전쟁 직전의 상황을 무마시키는데 성공하였다. 국내 어떤 신문의 주필은 이 상황을 해상봉쇄의 강경론의 승리인 것처럼 암시하고 있으나 굳이 말하자면 그것은 중도적 타협이랄 수 있다.

이후 베트남 사태에서도 주전론자가 아니었던 그는 미국이 발을 뺄 것을 케네디에게 건의하여 성공하는 듯 하였으나 케네디의 갑작스런 암살로 그의 시도는 실패하였다고 한다. 이후 주전론자 린든 존슨의 대통령직 승계와 미국의 자작극 ‘통킹만 사건’으로 미국은 베트남전이라는 늪에 빠져든다. ‘히로세 다카시’적 음모론의 냄새가 나는 구석이다.

어쨌든 <전쟁의 안개>는 핵심 당사자인 맥나마라로부터 이 두 중요한 현대사에 대해 직접 증언을 들을 수 있는 기회를 준다. 쿠바 위기 때는 극한의 상황으로 몰렸음에도 미쏘 양 당사자들이 모두 이성적이었고 서로 잘 알았기 때문에 참사를 피할 수 있었던 반면, 베트남 사태는 서로에 대한 이해부족이 전쟁으로 이어졌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우리는 그만큼 핵전쟁의 종말에 다가가고 있었습니다. 이성적인 개인들이 말입니다. 케네디는 이성적이었습니다. 흐루시초프도 이성적이었습니다. 카스트로도 이성적이었습니다. 이성적인 개인들이 우리 사회의 총체적 절멸에 그렇게 가까이 간 것입니다.”
“쿠바 미사일 위기 막판에는 소련인 들의 의중을 정확히 헤아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베트남의 경우는 그들을 충분히 알지 못했고 그 결과 오판이 야기됐죠.”
로버트 S. 맥나마라(전쟁의 안개 中에서)

다시 한 번 앞서 언급한 어느 신문의 칼럼과 이 전쟁의 신(神)의 증언을 비교하여 생각해보자. 개개인이 이성적이고 서로의 의중을 정확히 헤아릴 수 있었기에 최악의 상황에서도 강경론은 꼬리를 내렸다. 베트남에서는 상대방에 대한 몰이해와 오판으로 전쟁의 늪에 빠져들었다. 그 신문의 칼럼은 이 둘 중 지금 어느 길을 가자고 부추기는 것일까?

어쨌든 자연인 맥나마라는 포드자동차의 CEO로서 세계 최강대국의 국방장관으로서 명예를 누리다 작년 유명을 달리했다. 어찌 보면 복 받은 인생이다. 하지만 달리 보면 그는 매우 불행한 인간이다. 자기 눈으로 자기 손으로 수천수만의 생명을 앗아가는 맥락결정의 정점에 서있었던 업(業)이 많은 인간이기 때문이다. 때로 보통사람이 가장 되기 힘든 법이다.

(주1) 이 말은 전쟁은 인간의 이해력과 판단력을 뛰어 넘을 정도로 복잡해서 그릇된 판단을 내리게끔 한다는 의미에서 쓰인 말이다. 어쩌면 현재의 천암함 사태의 상황과도 맥락이 통하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