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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이 더 적은 인력을 고용하기 위해 노력했던 적이 일찍이 없었다”

요즘만큼 미국의 기업이 더 적은 인력을 고용하기 위해 노력했던 적이 일찍이 없었다. 의류업 일자리를 중국으로 옮기고 콜센터 운영을 인도로 넘기던 아웃소싱의 물결은 이제 거의 모든 업계 차원에서 미국 내의 회사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인 것 같다. [중략] 계약 모델(contractor model)이 너무 일반적이어서 포춘誌에서 10년 중 7년 동안 가장 일하기 좋은 직장으로 꼽힌 구글의 모기업 알파벳에서도 대략 정규직에 준하는 정도의 외주 노동자가 근무하고 있다고 이 이슈에 대해 잘 아는 이가 전했다. 대략 7만의 TVC가 – 임시직(temps), 판매자(vendors), 계약자(contractors)의 줄임말 – 구글의 자동운전 승용차를 시험하고, 법률서류를 검토하고, 생산품을 더 사용하기 쉽게 만들고, 마아케팅과 데이터 프로젝트들을 관리하고, 또 다른 많은 일들을 수행하고 있다. 그들은 근무 중에 빨간 배지를 착용하고 알파벳 직원들은 하얀 것을 착용한다. [중략] 얼마나 많은 미국의 노동자가 계약자로 일하는지는 알 수 없다. 왜냐하면 이들 직업군이 정부부처에서 집계하는 직업군에 깔끔하게 들어맞지 않기 때문이다. 경제학자들의 추산에 따르면 대략 국가 노동력의 3~14%까지가 또는 2천만 명의 인구가 이 직종에 종사한다고 추산하고 있다. [중략] 궁극적으로 몇몇 대기업들은 가장 핵심적인 고용 인력을 제외하고는 모두 가지치기 당할 수 있다. 컨설팅 회사인 액센추어는 10년 내에 세계에서 가장 큰 2천 개의 회사 중 한 곳은 “중역실 이외에는 풀타임 고용인이 아무도 없는” 상황이 될 것이라고 작년에 예측했다.[The End of Employees]1

기업은 확실히 20세기 최대의 발명품이다. 물론 그보다 훨씬 전에도 오늘날 우리가 기업이라고 부르고 있는 그 무언가가 존재하고 있었지만, 그런 기업이 지구 단위로 우리 삶을 지배하게 된 것은 20세기가 되어서부터다. 문명이 발달하면서 사람들이 깨달은 것은 분업이 생산성을 높이고 이 과정이 한데 모이면 한층 효율적이 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매뉴팩처가 등장했고, 소규모의 매뉴팩처는 점차 대공장으로 흡수된다. 칼 맑스는 이러한 대공장 기업이 자본주의를 융성하게 만드는 장소가 되는 동시에 노동자들이 조직화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기업 스스로와 자본주의를 패퇴시키는 장소가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21세기 들어 이제 기업이 기업 스스로를 해체시키려 하고 있다. 액센추어의 예언처럼 중역실 이외의 모든 고용이 사라진다면, 이는 기업이 변신 프라모델처럼 여러 부속품이 결합됐다가 필요에 따라 또 다른 무언가로 변신하는 존재가 될 것이라는 의미고, 그것을 우리가 알던 기업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생기는 상황이다. 물론 이런 조짐은 이전 세기에도 있었다. 기업은 주식시장과 LBO를 통해 소유주와 자본가의 개념을 해체하는가 하면, 아웃소싱을 통해 노동력의 형태를 다양화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게 이제는 전 업종, 전 업무에서 일상화되고 있다는 점에서 이전의 아웃소싱과 다르다 하겠다.


자동차인 줄 알았더니 로봇(출처 : 영토이)

앞서 말했듯이 20세기형 기업은 비교적 동질의 노동력을 지닌 노동자를 한데 모아 분업화된 공정에 참여시킴으로써 생산성을 극대화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20세기형 기업은 “또 하나의 가족” 혹은 유사 군대조직과 비슷한 규율과 가부장적 질서에 익숙하다. 이런 질서는 심지어 그 기업에서 태어난 반항아 노동조합에서도 유지됐다. 그런데 이제 社內 노동력은 더 이상 가족도 군대도 아니다. 운전사는 빨간 배지를 단 A 파견회사 소속이고 프로그래머는 노란 배지를 단 B 파견회사 소속이다. 20세기 자본주의가 소규모 매뉴팩처를 합병 또는 해체시키는 과정을 겪었다면 21세기 자본주의는 이를 다시 해체시키는 과정을 겪고 있는 것이다.

다만 이 과정은 20세기 이전의 그것처럼 뭔가 목가적인 뉘앙스의 자영업자의 형성과정과는 거리가 멀 것이다. 개별 부속품을 담당하는 파견회사는 파견회사대로 하나의 거대화된 새로운 형태의 기업으로 성장할 것이다. 1970년대 SF영화인 Rollerball에서는 기업의 독점이 완성되어 회사명이 그저 “기업(Corporation)”이라 불릴 따름이라는 설정인데, 파견회사 역시 비서 파견이 전문인 거대기업은 그저 “비서 회사”로 불릴 따름인 세상이 21세기형 기업의 해체과정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더불어 그 과정은 궁극적으로 자동화를 통한 인간 노동의 배제 자체를2 염두에 두고 있다는 점에서 보다 디스토피아적인 모습을 띄게 될 가능성이 크다.

샌프란시스코에 등장했다는 무인(無人) 레스토랑에 대한 단상

지난주에 난 빠르게 움직이는 줄에 서서 평면 모니터에 나오는 각각 6.95달러(브리토 볼, 벤토 볼, 발사믹 비트)인 여덟 개의 퀴노아볼(quinoa bowls) 메뉴를 보고 있었다. 그리고 아이패드로 내 주문을 눌러 메뉴를 고른 후 지불했다. 신용카드에서 취한 내 이름이 다른 스크린에 뜨고 음식이 준비된 후 다른 화면에 번호가 떴다. 그 번호는 내 음식이 곧 나타날 칸의 번호였다. 그 칸들은 음식이 비축되면 어두워지는 투명한 LCD 스크린들 뒤에 위치해있다. 인간이 개입한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손가락으로 두 번 두드리자 칸막이가 열렸고 음식이 기다리고 있었다.[Restaurant of the Future? Service With an Impersonal Touch]

최근 샌프란시스코에 문을 연 퀴노아 식당인 잇사(Eatsa)라는 곳에 대한 뉴욕타임스 기사 일부다. 고대 마야인이 먹었다는 곡물인 퀴노아가 자연식을 추구하는 서구의 힙스터들에게 인기를 얻게 된 지는 꽤 된다. 그래서 새로운 퀴노아 식당이 생겼다고 해서 그리 새로울 것은 없지만, 그럼에도 이 식당이 주목을 받고 있는 이유는 이곳이 무인(無人)시설로 운영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식당의 설립자 David Friedberg는 식당이라기보다는 음식배달 시스템이라 여겨달라고 했다지만 주문된 음식을 상업공간에서 함께 먹는다면 그건 누가 뭐래도 식당이지 배달서비스는 아닐 것 같다.

자동화에 따른 식당 등 각종 서비스의 무인화는 사실 새로운 개념은 아니다. 20세기 초의 공상과학적 상상력을 가지고 있던 대중문화 예술인들은 이런 개념을 큰 어려움 없이 상상하여 자신들의 작품에서 묘사하기도 했고, 폭넓게는 아니지만, 극소수 혁신적인 미래주의적 기업가에 의해 현실에서 실현되기도 한 적이 있다. 이후 실제로도 많은 식당 서비스가 자동화되어 대량생산과 대량소비의 사회를 선도해나갔다. 대표적인 서비스 및 상품이 바로 맥도날드로 대표되는 햄버거 푸드체인이다. 일관화되고 표준화된 생산 매뉴얼에 따라 만들어지는 – 요리라기 하기에는 어색한 – 그 곳 말이다.


1900년대 초 베를린에서 있었다는 자동화 식당의 풍경. 지금의 Eatsa의 모습과 그리 다르지 않다.

직접 가보지 않아 모르겠지만 잇사는 이미 상당히 무인화된 카페테리아와 같은 곳에서 그나마 인간노동의 영역으로 남아있던 조리, 주문, 계산, 청소와 같은 노동마저 자동화시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것이 가능하게 된 데에는 짐작건대, 조리 과정 단순화 및 무인화, 아이패드 등 전자기기를 통한 주문 및 계산 서비스 자동화, 별도의 설비작업을 통한 청소 서비스 무인화 등의 요소가 있을 것이다. 이러한 서비스는 앞으로 가격과 품질의 조화만 이룬다면 입맛이 까다로운 고객이나 사람과의 소통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고객을 제외하고는 상당수 고객을 유치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얼마 전 사석에서 만난 한 기자가 말해줬는데 인간과 컴퓨터가 각각 스포츠 경기 결과에 관한 기사를 작성하여 기자들에게 기사 작성주체가 누구인지 짐작하게 했는데, 상당수 기자들이 누가 작성한 기사인지를 제대로 맞히지 못했다고 한다. 이렇듯 기계의 발전이 이런 추세로 나아간다면 장래에 제조업 프로세싱이나 식당 등 반복적인 단순 노동뿐만 아니라 스포츠 기사 작성, 금전 출납, 운전과 같은 좀 더 복잡한 노동, 나아가 비평 칼럼 작성, 의료 진찰, 법률 상담과 같은 고도의 정신적 판단을 요구한다고 여겨지는 노동에까지 기계의 작동이 인간의 노동을 대체하지 말란 법이 없을지도 모른다.

인간이 노동으로부터 해방된다는 것은 나쁜 소식이 아니다. 문제는 대다수 노동자에게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은 곧 임금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한다는 점이다. 잇사와 같은 개별자본의 입장에선 노동자가 직업을 잃어 소비활동을 하지 못한다는 점은 중요하지 않다. 광범위한 자동화와 이로 인한 소비자층의 붕괴는 아마도 정치인, 총자본, 노조 등에서나 신경 쓸 의제가 될 것이다. 이나마도 자동화에 의한 노동시장의 붕괴는 마치 기후변화처럼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를 옥죄어 오는 것이기에 난민, 복지, 최저임금 등 보다 급박한 현안에 의해 우선순위에서 밀려있게 될 것 같다.

대다수 노동이 자동화에 의해 대체된다면? 기본소득이 답일 듯.

로봇이 내 일자리를 빼앗는 것인가? 노동으로부터 해방시켜 주는 것인가?

NPR은 최근 시장보고서를 내고 향후 20년 내 로봇에 의해 대체될 가능성이 높은 직업군 20개를 선정하였다. 이 직업군에는 전기전자제품 조립공, 보석가공연마사, 계산대 점원 등 단순반복 작업이 주를 이루는 제조업 및 서비스업의 직종이 다수를 이루고 있다. 하지만 의외로 회계 장부 담당자나 은행원과 같이 상대적으로 복잡한 작업을 하는 서비스업 직종도 포함되어 있으며, 패션모델과 같은 의외의 직종도 포함되어 있다.

▲11위, 차량운전사=운전사,개인운전사들이 자동화될 가능성은 97.8%다. 운전자들은 더 이상 필요치 않을 것이다. 구글의 자율주행차는 인간이 개입 없이 수천마일을 시험해 왔다. 또한 트래비스 캘러닉 우버 최고 경영자(CEO)도 궁극적으로 모든 자동차가 운전자들을 대체하게 될 것이라고 발표했다.[로봇이 내 일자리 뺏는다. 안전한 직업군은?]

특히 운전사는 이미 구글의 무인운전차량 개발 프로젝트 등을 통해 끊임없이 무인화의 도전을 받고 있는 대표적인 직종이다. 머지않은 시대에 우리는 SF영화 토털리콜에서나 보던 피노키오처럼 생긴 로봇 운전자가 행선지를 묻는 택시에 승차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런 상용화 시대를 앞당기고 있는 주체는 당연히 인용기사에 언급된 구글이나 우버와 같은 사적기업이다. 특히 우버는 구글보다 더욱 더 상용화에 목을 매고 있다.

우버는 언젠가 자사의 계약 운전사 수만 명을 대체할 수 있을 무인차를 꿈꾼다. 하지만 내부적으로 무인차 개발 역량을 전혀 갖추지 못한 우버는 곧바로 ‘드림팀’ 구성을 할 수 있는 곳으로 눈을 돌렸다. 바로 카네기멜론대의 국립로봇공학센터(NREC)다. 투자자들에게서 조달한 50억 달러의 현금으로 무장한 우버는 일부 NREC 소속 과학자들에게 수십만 달러의 보너스와 현재 연봉의 두 배를 제시했다. [우버, 산학협력 맺은 카네기멜론大 연구진 빼가]

처음에 “공유경제”라는 그럴듯한 이름을 달았던 우버가 번창하는 실제 이유는 “주문형(On-Demand) 경제”나 “하인(Concierge) 경제” 모델에 기반을 두었기 때문임은 이 블로그에서도 몇 번 말한 바 있다. 즉 우버는 운전이라는 서비스 노동에 활용할 노동력을 비정규/비정형화하여 비용을 절감하여 수익을 창출하고 있다. 이러한 모델에 대한 비판도 적잖은 상황이지만, 우버는 사실 그 상황마저 뛰어넘는 궁극의 무인화의 길로 가려하고 있다.

잠깐 옆길로 새자면 처음에 대리운전 업체 비슷하게 시작한 우버가 학교의 연구 인력을 빼나가는 블랙홀이 된 과정이 참 흥미롭다. 결국 우버는 앞서 말한 비용 절감 모델을 스마트폰 앱이라는 수단을 통해 ‘규모의 경제’ 化하여 성공하였다. 벤처캐피탈은 그 가능성에 베팅하여 투자를 했고, 우버는 그 잉여자금을 현재 수익모형의 다음 단계에 베팅하기 시작하였다. 미국이 아니고서는 볼 수 없는 역동적인 투자환경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각설하고, 관건은 우버가 이렇게 산학협력을 빙자한 인력 빼오기를 해올 정도로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프로젝트가 성공할 수 있을 것인가의 여부일 것이다. 사견으로 우버가 성공하지 못하더라도 어느 기업인가는 그 비즈니스 모델을 구현해낼 것이라 여겨진다. 그리고 가까운 미래에 우리는 Siri에게 “차 좀 불러줘”라고 주문하면 집 앞에 무인운전차량이 대기해 있는 장면을 목도할 것이다. 인간은 이렇게 노동으로부터 해방되어 가는 것이다.

문제는 우리 대부분이 노동자라는 사실이다. 텔레마케터인 24세 여성인 미선 씨는 무인택시라면 운전사의 성희롱이나 난폭운전이 없어질 것이라며 좋아할지도 모른다. 문제는 본인의 직종이야말로 로봇化로 인해 없어질 직종 1위라는 점이다. 언젠가 그는 출퇴근을 위해 무인택시를 탈 필요도, 택시비를 지불할 돈도 없을지도 모른다.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노동자는 로봇化로 인해 노동뿐 아니라 월급으로부터도 해방되는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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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biddenplanetposter” by Copyrighted by Loew’s International. Artists(s) not known. – http://wrongsideoftheart.com/wp-content/gallery/posters-f/forbidden_planet_poster_01.jpg. Licensed under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이렇듯 사적소유에 의해 지탱되는 자본주의는 기술발전 등으로 인한 자동화 혜택의 절대다수가 주주에게 귀속되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한편 칼 맑스는 자본을 “가변자본”과 “불변자본”으로 나누고, 개별 자본은 가변자본인 인간의 노동을 가치의 변화가 없는 불변자본인 기계로 대치하여 상품의 가치를 전유하려는 속성이 있음을 설명한 바 있다. 그리고 개별 자본에게 있어 합리적인 이러한 의사결정이 사회의 이윤율을 하락시킬 것이라 예측하였다.

말인즉슨, 우버 등 개별자본이 로봇化를 통해 경쟁력을 가져 상대적 고수익을 누리는 것은 자본주의 고유 속성이고 이런 자동화가 차츰 일반화되면 노동자로부터의 착취율이 떨어져 사회 전체의 이윤율이 감소한다는 것이 칼 맑스의 논리다. 이 법칙이 “경향적 저하의 법칙”이란 희한한 이름을 가지고 있는 만큼 애매한 구석이 있긴 하지만 시사점은 있다. 노동자는 이제 착취당할 여지도 없게 되고 무인택시를 이용할 소비자도 사라진다는 점이다.

이러한 경향이 바로 오늘날 미국이나 일본과 같은 첨단 자본주의 국가의 지도자들이 기업에게 노동자의 임금 인상을 요구하는 이유다. 개별 자본은 자동화를 통해서든 구조조정을 통해서든 계속 수익극대화를 추구하고 제도는 이를 정당화하고 있지만, 그로 인해 총자본이나 사회전체는 성장이 둔화되거나 심지어 정지할 수 있는 위기로 몰리기 때문이다. 오바마는 다만 노동자라는 생산자가 동시에 소비자라는 평범한 사실을 상기시키고 있을 뿐이다.

이 모델에서 랑게는 신고전파의 전통 특히 바로네가 정식화해놓은 전제들을 그대로 따랐다. 이러한 형태의 사회주의는 생산수단의 국가 소유를 기초로 하고 있다. 개인들은 각자 자신의 직업과 소비재를 자유롭게 선택하며, 이것들은 “진짜 시장”에서 매매된다. [중략] 피고용자들은 소득을 얻고 또 추가로 “사회적 배당금” 즉 “사회가 소유하는 자본 및 천연자원에서 나온 소득의 개인 몫”을 얻게 되어 있다.[신자유주의의 좌파적 기원, 조하나 보크만 지음, 홍기빈 옮김, 글항아리, 2015년, pp75~76]

칼 맑스 등 사회주의 사상가들이 꿈꾼 생산력이 극대화된 미래에 인간은 고통스러운 노동으로부터 해방될 것이다. 그리고 시장 사회주의자 오스카르 랑게가 꿈꾼 사회는 어쩌면 칼 맑스도 이야기한 “자유로운 생산자 연합”의 보다 구체적인 로드맵일 수도 있다. 문제는 노동자가 무인택시를 즐기며 “사회적 배당”을 받으려면 노동자 스스로가 기업의 주주가 되어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현재 우리는 그런 길이 제한된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고 있다.

현실에서 “사회적 배당”의 특징을 지닌 존재는 연기금으로부터의 연금 정도다.

안드로이드는 기본소득을 꿈꾸는가?

안드로이드(Android)는 구글이 내놓은 모빌 기기들을 위한 운영체제다. 그렇지만 원래 이 호칭은 인간의 형태를 지닌 기계, 즉 봇과 같은 기계장치를 일컫는 말이다. 이 단어는 이미 1863년에 인간의 모습을 지닌 장난감에 관한 미국 특허장에 언급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 호칭이 유명해지게 된 것은 상상력을 자극하는 SF소설에 안드로이드가 등장하면서부터라 할 수 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영화 ‘Blade Runner’의 원작인 필립 K. 딕의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꿈꾸는가?’가 있다.

소설에서 안드로이드의 역할은 인간의 노예다. 전쟁으로 황폐화되어 정상적인 생활이 어려운 지구 대신 우주의 식민지로 이주해가는 인간들을 위해 제공되는 것이 바로 안드로이드였다. 안드로이드는 노예이기 때문에 당연히 자유가 허락되지 않았고 자유를 찾아 지구로 탈출해온 안드로이드는 주인공 릭 데카드와 같은 사냥꾼에 의해 “은퇴”당해야 했다. 인간 수준의 지능을 지닌 안드로이드로서는 억울한 일이었지만 어쨌든 안드로이드는 철저히 인간의 이익을 위해 봉사해야 하는 존재였다.

한편 현실의 안드로이드는 어떠할까? 인간의 이익을 위해 봉사하는 것일까? 현실의 안드로이드는 제조업, 농업, 광업과 같은 분야에서의 자동화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다. 증기기관, 트랙터, 드릴기계 등이 바로 현실에서의 안드로이드다. 이들 안드로이드는 물질문명의 생산성을 비약적으로 증가시켜 인류를 미증유의 풍요의 시대 속에서 살게 해주었다. 안드로이드는 분명 인간의 이익을 위해 봉사한 셈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개별 산업 그 자체에서는 반드시 좋은 반응을 얻은 것은 아니었다.

기계사용을 통한 대량생산은 전통적인 수공업자들을 몰락시켰다. 더 발전된 기계가 등장하면서는 대공장의 숙련노동자들의 일자리까지 빼앗았다. 이를 통해 산업사회는 거대한 실업자 집단을 낳았고 이것이 러다이트 운동과 같은 사회갈등을 증폭시켰다. 칼 맑스는 이러한 상황이 “자본의 유기적 구성 고도화”로 인한 이윤율 저하 경향과 맞물려 혁명적 상황으로 내몰릴 것이라고 예언했다. 대단한 통찰력을 지닌 관찰이었지만 현실은 어쨌든 아직 지구적 혁명적 상황에 몰리진 않았다.

그렇다 하더라도 여전히 기계화, 자동화로 인한 사회적 영향은 현재진행형이다. 스마트폰의 등장은 수많은 사람들의 생산성을 극적으로 향상시켰지만 그로 인해 일자리를 잃은 전통적인 산업분야 종사자도 많았을 것이다. 전기자동차 업체인 테슬라는 GM과 비교해 시가총액이 절반 수준에 달하지만 직원은 30분의 1 수준이라고 한다. 공장자동화의 영향이다. 게다가 딜러를 통한 판매가 아닌 온라인 판매 방식이라 딜러도 필요 없다. 딜러 연합은 강하게 반발하며 현대의 러다이트가 되었다.

분명 생산성의 향상은 사회적으로 긍정적일 텐데 왜 일부는 저항하는가? 기득권을 뺏기기 때문이다. 비록 궁극적으로 쇠퇴할 기득권일지라도 당사자에게는 심각한 일임은 분명하다. 사회적으로 노동시간 단축으로 이어지겠지만 특정인에게는 노동시간의 몰수이자 소득의 몰수이기 때문이다. 현실에서의 안드로이드는 이주자 전체의 노예가 아니라 기업주와 같은 소수의 노예다. 기업주가 안드로이드로부터 이득을 또 다른 노예와 공유할 생각이 없는 한 인간노예는 기계노예에게 분노감을 갖게 된다.

지난 주말 텍사스주 오스틴에서 열린 IT행사 사우스바이사우스웨스트(SXSW) 인터랙티브에서는 로봇이 노동시장을 차지할 것인가가 중요한 토론주제였다고 한다. 논의 내용 중 상당수는 로봇이 멀지 않은 미래에 인간의 노동력을 대체할 것이라 내다봤다고 한다. 칼 배스 오토데스크 CEO는 30년이 지나면 똑똑한 기계와 로봇들의 수가 인간의 수를 넘어설 것이라는 다소 성급한 예언도 내놓았다. 그의 예언이 실현된다면 정말 인간의 모습을 지닌 안드로이드 노동자가 등장하지 말란 법도 없을 것 같다.

하지만 여전히 그 기계화로 인해 노동자들이 피해를 입는다면 러다이즘은 더 오랜 생명력을 지니게 될 것이다. 그런데 칼 배스가 이런 갈등을 해소할 흥미로운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소득이 아닌 경제 생산에 세금을 부과하거나 소득 수준을 보장하기 위해 시민들에게 수당을 지급하는 ‘역소득세’를 실시하는 방안이 그것이다. 전자는 미루어 짐작하건데 개인에 대한 소득세는 없애고 기업에 대한 법인세를 강화하는 방안이다. 후자의 방법은 어느 정도 익숙한 기본소득이다. 소득세 폐지, 법인세 강화, 기본소득.

물론 이것은 스스로 자동화를 통해 돈을 벌어야 하는 업체의 대표의 말이다. 이런 정책이 현실화된다면 그의 비즈니스는 더욱 탄력을 얻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 유의미하다. 사회전체의 자동화 이로 인한 노동시간 단축이 특정분야 특정인의 도태로 이어진다면 사회의 유지를 위해 보조를 한다는 개념은 수긍할만하다. 그리고 그것이 선별적인 보조가 아닌 사회유지를 위한 패러다임의 전환적 조치로서 기본소득과 같은 아이디어로 이어진다는 아이디어도 나쁘지 않아 보인다. 안드로이드는 기본소득을 꿈꾸는가?

영화 Blade Runner의 시간적 배경은 2019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