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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는 복지체제로의 이행이 가능할까?

나는 북구 여러 나라의 경제가 지금 활황을 보여주고 있는 근본적인 이유는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안심감’을 가지고 일하고 있다는 데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인구적으로 봐도 소국인 덴마크와 스웨덴 같은 나라가 서구선진국에 못지않은 국가경쟁력을 가지고 있는 것을 설명할 수 없다. 그것은 이들 나라의 ‘국민부담율’(세 부담과 사회보험료 부담의 합계)이 70퍼센트를 가볍게 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7할을 정부에게 흡수당한다는 것인데, 이것은 미국식 발상에서는 전체주의 국가이고 수탈국가가 되는 것이다. [중략] 덴마크에서는 ‘자기가 투자를 하든가 해서 리스크를 안는 것보다는 정부에게 자금을 맡겨 장래의 생활에 책임을 지도록 하는 편이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으므로 이 같은 제도가 운영되겠지만, 지금의 일본에서는 그 정도로 정부를 신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적어도 징수된 세금의 사용방식이 지금보다 훨씬 투명하고 납득성이 높은 것으로 바뀌지 않는 한 북구와 같은 수준의 사회복지 시스템을 도입할 수는 없을 것이다.[자본주의는 왜 무너졌는가, 나카타니 이와오 지음, 이남규 옮김, 기파랑, 2009년, pp337~339]

미국 자본주의의 최전성기라 할 수 있는 1960년대 말에서부터 1970년대 초까지 하버드 대학에서 수학하며 경제학 박사 학위를 딴 저자는 뼛속깊이 미국식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를 흡수하고 일본사회에 이 구조를 주입시키려 노력하던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2008년 미국의 신용위기를 겪으면서 자신의 신념이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쓴 책이 이 거창한 제목의 책이다. 아무튼 저자는 자본주의 체제를 통째로 부정하기보다는 인용문에서 엿볼 수 있는 것처럼 미국식 자본주의와는 또 다른 자본주의인, 북구식의 국가의 역할이 강조되고 평등이 강화된 그러한 자본주의를 원하는 것 같다.

저자는 미국식 자본주의는 자기책임, 무한경쟁, 시장숭배, 승자독식의 논리가 지배적이며 이런 논리는 전통적으로 신뢰, 계열화, 연공서열, 평등주의 등을 강조하던 일본식 자본주의와는 맞지 않다고 주장하고 있다. 저자는 물론 일본식 자본주의에 내재되어 있던 그런 특징이 무사안일주의나 거대관료화와 같은 부작용으로 이어졌음은 인정하면서도 그러한 부작용을 미국식 자본주의로 고치려 했던 것은 잘못이었음을 반성하고 있다. 이런 주장은 일본사회와 일정 정도 유사한 국내사회와 비교하여도 일정한 시사점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대안 역시 어느 정도 공유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고 본다.

저자가 “덴마크와 스웨덴 같은 나라의 국민부담률이 70퍼센트를 가볍게 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사실 여부는 조금 의심스럽다. 내가 찾아본 바에 따르면 2010년 기준으로 스웨덴의 국민부담률이 45.7% 수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전히 이 나라의 국민부담률은 우리나라와 일본의 그것과 비교해보면 경이적으로 높다. 한국과 일본의 국민부담률은 2012년 현재 각각 25.0%와 26.9%다. 이 수준은 미국의 24.8%와 유사하고 OECD 평균인 33.8%에 크게 미달한다. 한국일보의 8월 12일자 기사에 따르면 박근혜 정부는 향후 4년 내에 국민부담률을 30% 수준으로 올리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

국민부담률을 올리는 주요수단은 세수증대와 국민연금, 건강보험 등의 보험료율을 올리는 방법이 있다. 세수증대는 박 정부가 주장했던 지하경제 양성화나 세무조사 강화 등의 방법이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세율 인상 등의 제도화가 필요하다. 박 정부는 정치적 위험을 무릅쓰고 세제개편안을 내놓았지만 야당과 여론의 비판을 받아 일정 부분 계획을 수정하였다. 분명히 개편안이 만만한 월급생활자의 책임에 집중되어 있었다는 문제가 있긴 했지만 어느 정도 사회적 합의가 필요한 이런 사안조차 강한 반발에 부닥친 것은 이 사회가 개혁을 위한 사회적 자본이 얼마나 일천한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다.

즉, 오랜 군사독재와 지지 기반이 약한 정권교체 등 안정적 정치일정 경험이 부족한 남한 정치의 특성으로 인한 첨예한 갈등은 지속적으로 합리적인 소통의 가능성을 저해하고 있다. 소위 뚝심있는 정책 추진을 위한 정치적 자본이 부족한 것이다. 박근혜 정부가 분명 정치적으로는 수구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경제적으로는 미약하나마 우리가 지향해야 할 내수 위주의 복지체제로 가려는 경향이 있음에도 야당과 그 지지자들은 현 정부의 정당성을 통째로 부정하는 우를 범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보편적 복지”를 지향한다는 민주당이 세제개편안을 “세금폭탄”이라 비난한 것이 그 사례다.

정치적 이념 지향과 경제적 이념 지향의 이러한 모순된 혼란은 소위 “민주화 세력”의 경제적 지향이 자의든 타의든 시장개방과 규제철폐, 그리고 한미FTA 추진 등 오히려 미국식 자본주의에 가까운 성향을 보였고 지지자들도 뚜렷한 경제체제에 대한 고민이 없는 와중에 더욱 강화됐다. 사회는 어느새 승자독식과 약자배제의 이데올로기에 익숙해져 인근 주거지역에 임대 아파트를 짓는 것을 반대하는 등의 이기적인 행동을 거리낌 없이 주장하기도 한다. 수구적인 정치체제는 이러한 토양 속에서 강화된다. 그리고 현 정부는 자신들의 복지강화 정책이 반대에 부닥친다면 바로 그 명분으로 발을 뺄 것이다.

금융거래세가 가지는 경제적/정치적 의미

11월 8일 EU 27개국 경제재무장관회의에서 금융거래세(FTT : Financial Transaction Tax) 도입과 관련한 논의가 이루어졌으나 독일과 프랑스를 주축으로 한 적극 추진 세력과 영국을 중심으로 한 비(非)유로존 간 상반된 이견이 좁혀지지 않아 최종 합의 도달에 실패함. EU 집행위원회는 금융거래세 도입 시 초단타매매 등 금융시장 불안과 투기 증폭 행위를 감소시킬 수 있으며, 유로존 재정위기에 책임이 있는 금융업계 및 투자자들에게 책임을 부과하는 방안이 되며, 시장에 큰 부담 없이 연간 570억 유로의 자금 조달이 가능하다고 설명함. 그러나 영국 재무장관은 금융거래세 도입 취지에는 찬성하나 유럽이 먼저 도입할 경우 금융투자자들이 미국 또는 홍콩 등으로 이전할 것이라며 반대 의견을 피력함.[EU, 금융거래세 도입 합의 불발, 보험연구원, 2011년 11월 10일]

이미 2008년 금융위기 이후 EU에서 논의된 금융거래세는 인용문에서도 설명하듯이 1) 금융위기를 초래한 금융권에 대한 징벌적 성격과 2) 경제에 큰 충격을 주지 않으면서 재정위기를 해소하려는 실용적 목적을 가지고 제안된 세금이다. 환율의 변동을 이용하여 자금의 급격한 유출입에서 발생하는 자금 시장의 문제를 줄이자고 제임스 토빈이 제안한 토빈세와는 달리, 주식∙채권∙외환 등의 금융상품 거래 일반에 부과하는 세금의 개념이다.

이제 금융거래의 세계화는 세계경제에 좋든 나쁘든 엄청난 영향을 미치고 있고, 이를 부정하는 정부는 찾기 힘들다. 금융거래 중 외환거래량을 예로 들어보자. 국제결제은행(BIS)은 3년마다 1일 외환시장의 거래량을 집계하는데, 2010년에는 규모가 4조 달러 정도 된다고 한다. 그럼 전 세계의 상품 수출입 거래량은 얼마나 될까? WTO에 따르면 2010년 기준으로 연간 약 30조 달러다. 8일간의 외환거래량이면 상품의 연간 거래량을 압도한다.

따라서 금융거래에 대한 적절한 통제는 세계경제의 안정성 차원에서 중요하다. 문제는 각국의 이해관계가 극명하게 갈라진다는 점인데, EU 내에서는 독일, 프랑스 진영과 영국의 입장이 첨예하게 다르다. 영국은 독일이나 프랑스보다 경제 규모는 작지만, 금융은 강하다. BIS에 따르면 세계 외환거래 중 36.7%가 영국에서 일어나 미국을 제치고 세계에서 가장 빈번하다. 독일과 프랑스에서 일어나는 외환 거래는 각각 2.1%, 3.0%에 불과하다.

일국 차원에서의 금융거래세 도입은 여러 사례가 있다. 브라질은 1993년에 은행 거래활동에 과세하는 ‘은행거래세’를 도입하여, 비교적 성공적인 모델로 거론되고 있다. 반면 스웨덴은 1984년 금융거래세를 도입한 이후 금융거래가 대거 국외로 빠져나가는 실패를 맛보아야 했다. 이는 각국의 경제성장 및 투자매력도 등에 따른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일국 차원의 과세는 결국 수많은 변수를 초래한다는 점이다.

결국 금융거래세의 성공여부는 개연성이 매우 높은 풍선효과를 극복하고 금융거래를 자국의 테두리 안에 묶어둘 수 있느냐 하는 문제인데, 결국 세금을 내고서라도 해당 국가에서 계속 거래를 할 수 있는 매력적인 요소(금융 인프라의 성숙도, 높은 경제성장으로 인한 자금수요 등)가 존재하는가 하는 등의 변수가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일국 차원의 과세는 경제지형의 변경에 따라 그 효과가 바라질 수 있다는 근본적인 한계를 가지고 있다.

결국 빛의 속도로 진행되는 금융거래를 통제하는 근본적인 대안은 전 세계적인 규모의 일률적인 과세다. 이 방법에 대해서 티모시 가이스너 美재무장관은 진실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는 전 세계 거의 대부분의 국가가 과세를 하더라도 케이맨 군도와 같은 단 하나의 조세피난처만 과세하지 않아도 그쪽으로 거래가 몰릴 것이라고 경고했다. 물론 그의 반대는 이익집단의 로비에 의한 것이긴 하지만 사태를 정확히 바라보고 있기는 하다.

개인적으로 금융거래세 과세의 성공여부는 향후 세계경제의 안정화에 있어 중요한 시금석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기업은 초국적으로 변해가고, 금융거래는 거대화되는 상황임에도 이를 통제할 행정력이 일국 단위에서 국한된다는 상황은 – 협력체를 구성한다 할지라도 – 정상적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FTA 등으로 가속화되는 자본의 세계화는 결국 전 세계 모든 국가가 공동의 이해관계 아래서 촘촘히 대응하지 않으면 풍선효과만 불러올 뿐일 것이다.

환경을 지켜서 돈 버는 스웨덴

많은 영국인들이 고용창출과 환경보호 사이에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는 것으로 믿는 반면에, 이 나라(스웨덴:역자주)의 9백2십만 국민들은 이를 동시에 이룰 수 있다고 믿고 있다. “5년 전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환경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그들은 이를 성장과 고용에 대한 기회라고 생각하지 않았아요. 이제는 그렇게 생각하죠.” Linkoping 대학 환경기술의 교수인 Mats Eklund 의 말이다.

While in the UK many believe that you must choose between creating jobs and saving the environment, this country of 9.2 million inhabitants is convinced it can do both. “Five years ago, when most people heard the word environment, they did not think of it as an opportunity for growth and employment. Now they do,” says Mats Eklund, a professor of environmental technology at the University of Linkoping.

가디언에 실린 기사에 따르면 스웨덴은 1990년과 2006년 사이에 탄소배출을 9%가량 줄였다고 한다. 이는 쿄토 의정서의 달성목표를 초과한 수치인데 놀라운 것은 이 기간 동안 실질 경제성장률은 44%에 달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놀라운 결과에는 위에 인용하였듯이 환경보호와 성장을 자웅동체로 받아들이는 발상의 전환에 힘입은 바 크다. 그리하여 오늘 날 스웨덴에는 이른바 녹색회사(green company)들이 경제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데 이들의 산업분야는 폐기물처리, 재생에너지 생산(주1), 재활용 등의 분야 등을 망라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산업체계의 전환에는 어떠한 동기가 있었을까? 가디언에 따르면 정치적 의지가 한몫했다고 한다. 15년 전 “지방의 정치인들이 녹색 이슈에 대해 솔선수범하게 되고 이후에 그들의 마인드를 바꾸지 않았다(local politicians took the lead in green issues and have not changed their minds since then)”고 한다. 또한 이러한 의지는 그들의 정치적 성향에 상관없이 꾸준히 진행되어 왔다고 한다. 녹색 회사의 대부분의 소유방식이 ‘민관파트너쉽(public-private partnerships)’인 상태에서 정치인에 대한 믿음은 매우 중요하고 Eklund 교수에 따르면 “그들은 당국을 신뢰하고 있다(We also have confidence in authority)”고 한다.

물론 상황이 이 기사에서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마냥 목가적인 것만은 아닐 것이다. 녹색산업이 전체산업에서 차지하는 위치가 과장되어 있을 수도 있고, 그들 산업의 채산성이 일시적일 수도 있고, 결정적으로 정치인에 대한 그들의 신뢰가 오도되어 있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적어도 한 가지 시사점이 있다면 그것은 ‘상호신뢰’와 ‘발상의 전환’이 경제발전과 환경보호라는 두 가지 목표를 동시에 달성할 수 있는 초석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현재 원내정치는 거리의 정치가 별도로 힘을 얻을 만큼 무기력증에 시달리고 있고, 서울시의회는 부정부패로 찌들어 있는가 하면, 경제신문을 비롯한 언론들은 경제위기의 주범이 촛불시위와 과도한 임금인상요구라는 국론분열적인 망발을 서슴지 않고 있다. 상호신뢰는 약으로 쓸래도 찾아볼 수 없는 지경이다.

이렇게 놓고 본다면 경제라는 것이 책임 있고 신뢰할만한 정치세력의 존재에 얼마나 중대한 영향을 받는 것인가를 잘 알 수 있다. 비단 강소국 스웨덴의 사례에서만이 아니라 미국이라는 초강대국에서도 그 교훈을 얻을 수 있다. 부시의 패권주의와 감세를 통한, 발상의 전환도 없고 계급적 화해도 없는 사익추구 형의 경제운용이 미국을 오늘 날 이런 꼴로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현 시점은 이 나라, 또 이 세계에서 실질적이고 진정한 노사정 대화합이 언제 가능할는지, 그리고 이를 통해 산업체계를 어떻게 선순환적인 체계로 전환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방법론을 모색해야 할 시점인 것 같다.

추.

그러나 또 한편으로 걱정스러운 것은 위에 언급한 녹색회사가 엄밀한 의미에서는 지금 우리나라 반정부 세력 중 다수에게 비난받고 있는 바로 ‘민영화’방식을 통해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는 점. 노무현 정부, 아니 그 훨씬 이전부터 추진되어오던 민영화 사업이 이명박 정부 들어 새로 발명된 창작품인양 포장되어 정권의 수구성 또는 독재성을 상징하는 또 하나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이 사업방식이 현실 사회에서는 잘만 구현된다면 – 아주 잘 구현되어야 한다는 전제가 있기는 하지만 – 예산부족이나 관료주의의 한계를 극복할 수도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현재의 각박하고 메마른 한국의 정치지형에서는 양쪽 모두에게 욕먹을 소리이긴 하다.

(주1) 예를 들자면 죽은 가축들의 내장에서의 메탄올의 추출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