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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은 왜 경제적인 것은 탈정치적이라고 생각할까?

이전 글에서도 언급했지만 특히나 남한 땅에서는 보통사람들뿐 아니라 심지어 민주화 세력들조차 경제의 문제를 탈정치적인 것이라 간주하는 경향이 강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든다. 즉 해방 후의 비약적인 경제발전과 그에 따른 일정정도의 삶의 질 개선이 보통사람들에게 탈정치적인 ‘박정희 신화’로 뿌리내렸다면, 민주화 세력은 자신들의 상대적으로 우월한 정치적 정당성을 경제에서 검증받는데 있어 박정희의 그것과 비슷한 경제만능론으로 경제를 ‘정치’로부터 탈색시키는데 동참했다는 점에서 그렇다.

보통사람들에게 ‘박정희 신화’가 자리 잡게 된 주된 이유는 보통사람들이 박정희의 개발독재 시절과 이후 5,6공 시절의 3저 호황에 따른 뜻밖의 수혜기간 동안 실제로 누렸던 일종의 트리클다운(trickle-down) 효과 때문일 것이다. 그 시절은 사회의 계급분화가 아직 본격화되지 않은 시기였다. 가난한 집안 아이도 공부만 열심히 하면 서울대에 갈 수 있었고, 청약통장으로 아파트 한 채 얻어둔 것이 어떻게 하여 가격이 폭등했고, 회사에서 큰 과오만 없으면 정년까지 버텨서 연금을 탈 수 있었던 시기였다. 이른바 나름의 코리안드림이랄 수 있다.

선진소비국에 종속되는 수출주도형 모델이 남한 땅에서 예외적으로 훌륭하게 구현되면서 누린 풍요는 실제로 탈정치적인 모습을 띠어왔던 것도 사실이다. 박정희의 개발계획 등 각종 경제정책을 입안한 이들이 탈계급적이라고는 할 수 없으나 적어도 일정부분 국부(國富)의 총증분에 관심을 기울인 것도 사실이고, 그러한 관료주의는 일본의 그것과 함께 아시아형 경제모형의 한 특성을 이루었다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그것은 그 근본에 있어 정치적이었는데 그 기간 동안 오늘날 남한자본주의의 근본모순 중 하나가 되고 있는 재벌체제가 완성되었다는 점이 그 한 사례다.

한편 이들 경제 관료들은 그들을 보호하는 정치가들과 경제에 관한 이데올로기를 공유하였다. 즉, 무엇보다 가난에서 벗어나는 것이 시급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정정도 정치적 자유를 제약하여야 하는 것이 불가피하다, 파이가 커지면 결국 나눠먹을 몫이 커지는 것이다 등등. 일정부분 진심으로 믿었고 일정 부분 정치적으로 이용해먹었다. 그리고 독재의 정당성이 힘을 잃어가게 되자 ‘민주화 세력’이라 칭해지는 재야(在野)에 대비하여 자신들을 ‘근대화 세력’으로 자리매김한다. 뜻밖에도 민주화 세력은 이런 비교에 별로 저항하지 않으면서 이제 그들 스스로는 ‘현대화 세력’으로 변모하려는 노력을 하게 된다.

이러한 노력의 최신 버전이 바로 한미FTA라 할 수 있다. 그들은 이전의 근대화 세력이 시도했던 종속적이고 승자독식형인 한국형 자본주의 모델 자체는 거의 비판하지 않았다. 다만 그것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부패 등에 관심을 기울여, 실질적인 계급갈등의 해소보다는 ‘금융실명제’, ‘생산적 복지’ 등 이른바 경제 민주화에만 힘을 쏟는다. 그리고 노무현 정부 들어서는 급기야 ‘사회양극화 해소’와 ‘한미FTA’라는 상호 모순된 정책을 통해 경제위기를 돌파하려 한다. 한미FTA의 홍보논리는 박정희의 ‘잘 살아보세’ 논리에서 거의 진전된 것이 없다. 그것의 트리클다운의 기대치는 박정희 시대에 비해 훨씬 떨어질 것임이 자명함에도 말이다.

결국 ‘탈정치적인 경제’를 경험하였던 보통사람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선택의 이유를 거리낌 없이 ‘이전 정권이 경제를 망쳤기 때문’이고 ‘어떤 후보가 경제를 살릴 것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라고 말하지만, 그것이 누구의 경제를 망쳤고 누구의 경제를 살리기 위한 것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큰 고민을 한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일단 경제가 살면 언젠가는 자신들에게 혜택이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서울대 신입생의 절대다수가 강남 출신이라는 사실이 상징하듯이 계급구조는 고착화되어 ‘누구를 위한 경제’인가가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경제의 계급성에 대한 몰이해의 대표적인 사례가 지난번 종합부동산세의 폐지시의 논쟁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 당시 종합부동산세가 폐지되어야 하는가 하는 설문에 상당수가 반대하였지만, 나를 놀라게 한 것은 거의 과반수에 육박하는 수가 폐지에 찬성하였다는 점이다. 그들 대부분이 평생 가도 종합부동산세를 낼 처지가 안 될 것임이 뻔한데도 그들 상당수는 종부세 피해자(?)의 정서와 자신의 그것을 동일시한 것이라는 의심을 지울 수 없었다. 이런 정서는 또한 서울 집값 폭등의 소외계층(?) 노원구에서 노회찬 대신 홍종욱이 당선된 사례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결국 우리 사회의 민주화 세력 내지는 진보 세력은 가장 정치적인 의제인 경제를 ‘정치적인’ 것으로 이슈화시키는 데 실패한 탓에 집권세력으로서의 생명력을 이어갈 수 없는 한계를 보이고 있다 할 수 있다. ‘도대체 누구를 위한 경제인가’와 ‘공동체를 위한 경제 로드맵’을 보통사람에게 설득하여야 하는데 ‘일단 경제를 살리고 보자’라는 우익들의 총공세에 별다른 저항도 없이 투항하는 형국을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가장 좌파적이라는 노무현 정부조차 삼성경제연구소의 보고서를 정책입안의 텍스트로 삼았고, 민주노동당 등 좌파의 경제대안을 현실을 모르는 철없는 소리로 폄하한 것이 그 한 예다.

결국 이 과정에서 집권초기에 자리를 차지했던 이정우, 정태인 등 진보적인 경제 관료들은 밀려나고 한미FTA를 적극 주장했던 김종훈, 그 스스로가 부동산 투기세력인 김진표 등이 관료직을 차지하고 앉아서 진보적인 대안을 무력화시키면서 경제정책을 한층 보수화시켜버리는 상황이 되었다. 그러한 패배의 경험으로 말미암아 이제 보통사람들에게 경제와 정치의 상관관계에 대한 연결고리는 점점 더 희미해지고 있다. 보통사람들이 지배 엘리트의 정치적 압박에는 강하게 반발하면서 경제적 압박에는 갈피를 제대로 못 잡는 형국이 현재의 한국정치의 현 주소다.

탈정치적이었던 한미FTA의 정치적 윤색 과정

우리 정부가 한미FTA를 한미동맹의 강화의 수단으로 간주한다는 증거는 – 참여정부도 그러한 관점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 곳곳에서 감지되지만 사실 미국은 남한을 ‘동맹’의 ‘파트너’로 간주하고 있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미국에 있어 남한, 더 큰 개념에서 한반도는 미일 동맹의 군사적 부담을 덜어주는 주체, 중국 영향력의 확대저지선 정도의 역할일 뿐이다.[북한의 핵도발에 대한 단상 中에서]

알려진 바에 따르면 한미FTA는 미국의 부시 정부에서보다는 한국의 노무현 정부에서 더 적극적으로 추진되어온 사안이다. 즉 우리 측에서 먼저 양국간 FTA에 미온적이던 미국의 무역대표부 등에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하였고, 이에 미국 측은 자동차 및 의약품 수입장벽, 미국산 소고기 금지, 스크린쿼터 등의 선결되어야 할 장벽철폐를 조건을 내세우면서 협상이 진행되어 온 것이다.

위 인용문에서도 썼다시피 나는 노무현 정부가 과연 당초 우리의 FTA 주요목표가 중국이나 일본 등 아시아 주요국이었고, ‘동북아균형자론’을 주장하는 등 아시아에서의 자리매김에 열중하다가, 어떻게 난데없이 한미FTA를 꺼내들게 되었는가에 대한 궁금증을 가지고 있다. 그렇지만 귀차니즘에 무능력함까지 겹쳐서 그 탄생비화를 아직 소상히 알지 못한다.

짐작컨대 집권 초 전체적인 로드맵을 그리는 과정에서 지배엘리트 내에서 이에 관해 활발한 의견교환이 있었고 결국은 한중간이나 한일간보다는 한미간의 무역장벽 해소가 더 큰 경제적 이득을 가져올 것이라는 자본가들의 계산이 있었든지, 아니면 여하한의 아시아 블록의 형성이 한미간의 경색을 더 심화시킬 것이라는 두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무릇 모든 의사결정이 그렇듯이 이 결정도 복합적인 동기가 작용하였겠지만, “권력이 시장에 넘어갔다는” 노무현 前 대통령의 발언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나는 주로 전자의 입장에 방점을 두는 의견이다. 초기 과정에서 안보가 주요 변수가 아니었을 것이라는 심증은 다음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실제로는 안보 문제 등과 관련되어서는 한미FTA가 추진되지 않았다. 내가 추적해봤는데 NSC[국가안전보장회의]의 개입 흔적이 없다. 한미FTA에 관련해서 통상교섭 본부하고 NSC가 단 한번도 회의를 하지 않았다. 그냥 간 거다.[“한미 FTA는 참여정부 업적조급증 탓, 대연정 제안에 이어 제2의 패착될 것”]

정태인 前 청와대 비서관이 오마이뉴스와 가진 인터뷰 중 일부이다. 즉 그에 따르면 한미FTA는 “YS 하면 금융실명제와 하나회 척결, DJ 하면 6·15 정상회담 등이 떠오르는데, 노 대통령은 이것이 없다”며 “남은 임기 안에 무엇인가 업적을 남겨보려는 노무현 대통령의 조급증이 원인”이라는 것이었다.그랬던 순수한(?) 경제적 동기가 미국의 외보안보전략, 그리고 이명박 정부로의 집권이양과 결합되면서 정치적 양상을 띠게 되었다는 것이 내가 보는 한미FTA의 진행과정이다.

노대통령은 이미 대연정 화두를 제시했을 때부터 한국의 미래전략 정립에 매우 강한 집착을 보여 왔고 한미FTA를 미래 선진 국가로 도약하는 중심고리이자 탈정치적 이슈로 인식해왔다. 다시 말해 미국정부의 관심이 외교안보적 차원이라면 노대통령의 주된 관심은 경제적인 것이다. 이런 노대통령의 탈정치적 인식은 부시 행정부의 외교안보 전략의 자장 안에 급속히 편입되는 결과를 초래하며, 이미 한미FTA 제안과 그의 동북아 균형자론 간의 조화될 수 없는 모순에 대해 많은 이들이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한미FTA 국민보고서, 한미FTA저지 범국민운동본부 정책기획연구단 엮음, 그린비, 2006년, pp72~73]

결국 한미FTA는 시민의 정치적 자유를 추구하는 ‘정치적 자유주의’와 시민의 경제적 자유를 옭매고 자본의 경제적 자유를 보장하는 ‘경제적 자유주의’가 큰 모순 없이 상호 공존하던 노무현 정부의 작품으로서 큰 손색이 없는 작품이었다. 또한 이는 당연히 미국의 안보전략에 순응하며 ‘경제적 자유주의’를 위해서라면 ‘정치적 자유주의’쯤 은 쉽게 무시해버리는 한나라당의 열렬한 호응을 얻게 되었다.그리고 이후 한미FTA의 한미동맹 강화론은 빠지지 않는 소재다.

한미 FTA가 발효되면 ….. 미사일 발사 이후 거세진 북한의 위협에 공동대처하는 한미동맹에도 활력을 줄 것이다.[한미 FTA, 이제는 美정부와 의회가 답할 차례, 동아일보, 2009년 4월 23일]

요컨대 우리는 경제에 대한 국정철학이 갈팡질팡했던 한 정치적인 리버럴 정부가 탈정치적으로 추진했던 FTA가 권력이양 및 국제정세의 변화와 결합하면서 가장 정치적인 레토릭이 되어버리는 과정을 목격하고 있는 것이다. 어쨌든 이제 지배 엘리트에게 한미FTA는 포기할 수 없는 떡밥이 된 셈이다. 문제는 그 떡밥을 어떻게 ‘안보공포증’ 및 ‘경제만능론’(주1)과 결합하여 국민적 저항을 최소화하느냐 하는 점일 것이다.

(주1) 예를 들자면 지난 대선과 총선에서의 정서였던 ‘나라를 망쳐도 좋다. 경제만 살려다오(내 집값만 올려다오)’식의

잡담

얼마 전에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그랜토리노’를 봤다. 합리적인 보수주의의 모범을 보여준 영화라는 호평들도 있긴 하지만 생각해보면 어찌되었든 나는 그의 작위적인 상황설정이 맘에 들지 않는다. 감동을 쥐어짜려는 느낌이랄까? 오스카가 좋아할 영화인데 희한하게 이번엔 오스카가 그를 천대했다. 암튼 난 슬럼독밀리어네어를 보길 원했고 아내는 그랜토리노를 보길 원했다. 당연히 나는 아내의 편을 들었다. 아내의 선택을 보고 후회하는 편이 내 선택을 보고 후회하는 편보다 훨씬 덜 후회스럽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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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Rock에 이은 새로 즐기는 미드는 The Office. 무개념 상사(boss)의 끝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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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前) 대통령이 자신의 혐의사실에 대한 변론을 인터넷 홈페이지를 통해서 하고 있는 재미있는(?) 상황이 연출되고 있다. 오바마가 만약 퇴임 후 비슷한 혐의를 받게 된다면 그는 무엇을 통해 변론을 할까? Twitter? 그나저나 나는 스티브 부세미의 follower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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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RSS 구독자수가 조중동을 모두 제켰다. 그래서 우쭐거리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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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의 집값이 다시 기지개를 펴고 있다고, 주가가 오른다고 언론에서 호들갑을 떤다. 암튼 무엇을 하든 참 싸이클이 빠른 나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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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읽고 있는 책은 ‘사막의 반란(T. E. 로렌스)’, ‘황금의 샘(다니엘 예르긴)’,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더글러스 애덤스)’, ‘노동가치론의 역사(로날드 L 미크)’ 등이다. 역시 진도가 제일 빠른 것은 ‘은하수~’다. ‘사막의 반란’은 예상 밖으로 지루한 편이다. 하지만 T. E. 로렌스의 생생한 증언으로 듣는 사막의 역사와 꼼꼼하고 사실적인 인물화들이 즐길 만하다.

일독을 권합니다

“지난 정권에서도 이 나라의 민주주의는 말뿐이었다. 수많은 사람이 거리고 나서고 심지어 분신까지 했어도 한-미 자유무역협정 체결이 강행됐다. 농민들이 두들겨맞아 죽어도, 대통령이라는 자가 진심어린 사과 한번 한 적 없다. 또 비정규직 확산을 재촉할 법률이 힘으로 관철됐다. 이 모두를 정당화하는 데는 말 한마디면 족했다. “국가 경제를 위해서!!!” 경제를 위해서 농민의 희생은 어쩔 수 없었고, 경제를 위해서 자유무역협정은 피할 수 없었으며, 경제를 책임지는 기업들의 부담을 덜어주려면 비정규직들이 희생해야 했다. 또 중소기업들을 살리려고 이주 노동자들의 권리는 뒷전으로 밀렸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암묵적으로 동조했다. 그렇게 ‘경제’ 앞에 ‘민주주의’는 무기력했다. 힘없고 가난한 이들도 당당한 주권자임을 인정하고 그들의 권리를 먼저 보장하는 민주주의는 ‘돈이 안되는’ 장식품일 뿐이었다.”[전문보기]

부동산과 곡물법

tomahawk님 왈. “지금 사람들은 원래 땅파는게 취미였다 치더라도… 전에 있던 사람들은 왜 그렇게 미련을 못버렸을까요” 라는 댓글을 보고 또 문득 생각나는 글이 있다. 참여정부 초기 그들의 부동산 철학의 단편을 살펴보고 적은 단상이다. 참고하시길.

부동산과 관련해서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집이나 땅이 거주나 생산적인 경제활동과 거리가 먼 투기를 통한 자산증식의 수단이 되고 있다는 점이라고 봅니다. 특히 부동산 투기로 집값이 오르게 되면 당장 서민과 중산층의 주거비가 오르게 되고, 이는 집 없는 사람들의 내집 마련에 대한 불안감과 근로의욕 상실, 상대적 위화감으로 이어지게 됩니다.또한 전세값이나 집값이 오르게 되면 이것이 근로자의 임금인상 요구로 이어져 경제의 경쟁력 저하요인이 되는 등 그 부작용이 매우 큽니다. 그래서 부동산 가격안정을 최우선 정책과제 가운데 하나로 삼아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코자 하는 것입니다. [머니투데이, 2003.12.08, 盧 “성장잠재력 붕괴 없다” 중에서]

참여정부의 수반 노무현 대통령의 부동산에 대한 인식이다. 일단 그의 무주택 서민들을 위한 부동산 안정화에 대한 의지는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한가지 주의할 점은 그의 부동산 대책이 서민들의 주거안정을 통한 사회안정이나 약자보호 의지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집값 안정을 통한 경쟁력 확보 내지는 임금상승 욕구 억제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는 점이다. 필자는 그의 이러한 상황인식을 바라보면서 엉뚱하게도 바다 건너 영국에서 한 시절을 풍미했던 ‘곡물법’이 떠올랐다.

‘곡물법(穀物法 , Corn Law)’이란 무엇인가? 이 법은 곡물의 수출입을 규제하기 위한 법률로 같은 이름의 법이 중세에서부터 있었지만 19세기 초반의 영국 법률이 대표적이다. 이 법은 소맥의 가격이 일정 정도가 되기 전까지는 수입을 금지함으로써 표면상의 목적은 곡물 가격의 등락에 대해 자국의 농업을 보호하고자 하는 것이었으나 그 속을 들여다보면 영국 지주계급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한 대표적인 보호무역주의 악법이었다. 그 당시 자유무역의 선봉장 리카도(David Ricardo)를 비롯한 여러 명망가들이 법의 폐지를 주장하였으나 의회의 다수파를 이뤘던 지주계급은 이 법을 강력히 옹호하여 결국 1846년이 되어서야 법이 폐지되었다. 리카도는 생전에 법의 폐지를 볼 수 없었다.

그렇다면 왜 고전경제학의 창시자 중 하나인 리카도는 이 법을 그토록 반대하였을까? 그의 주장은 무엇보다도 곡물법은 그의 자유무역 신념에 위배되는 악법이었다는 것이 첫 번째 이유거니와 그와 맞물려 지나치게 높은 곡물가격은 임금상승의 요인이 되어 산업경쟁력을 해친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당시 지주계급에 대항하는 신흥 부르주아의 일반적인 정서였다고 할 수 있다. 노동자의 생계비용의 큰 몫을 차지하는 곡물가격의 앙등은 좀더 낮은 임금으로 노동자를 부려먹어야 하는 자본가 계급의 계급이해에 합치하지 않는 것이었다. 오늘날 우리는 21세기 대한민국 대통령의 부동산에 관한 언급에서 리카도의 논리가 부활하고 있음을 본다.

‘집값이 오르게 되면 이것이 근로자의 임금인상 요구로 이어져 경제의 경쟁력 저하요인이 된다. 그러므로 집값이 안정(또는 하락)되어야 한다.

여기서 잠시 곡물법의 경우와 부동산의 경우의 중요한 차이점을 살펴보기로 하자. 무엇보다도 이해집단에서 차이가 난다. 곡물법 경우에는 여전히 막강하지만 한편으로는 얼마 안 있어 역사 속으로 퇴장할 지주계급이 자리잡고 있다. 이들은 다른 계급과 열매를 향유할 생각이 터럭만큼도 없었다. 부동산의 경우에는 이해집단이 좀더 복잡하다. 우선 비업무용 부동산을 다수 소유하고 있는 자본가 계급이 그 정점에 있다. 지난 세기 그들의 선배들이 반대했던 토지를 통한 불로소득은 오늘날의 자본가 계급에게는 알짜배기 수익원이다. 또한 병렬선상에 건설자본과 부동산 재벌이 있다. 이들은 부동산 생애주기의 흐름과 법과 제도의 맹점을 활용하여 단 기간에 높은 수익률을 올렸다. 다음으로 먹이사슬의 하층부에 자리한 쁘띠부르조아들이 있다. 이들은 부동산을 재산증식수단으로 활용하여 자신의 재산을 불림으로써 부도덕한 체제에 기꺼이 포섭되었다. 얼마 전 매일경제신문에서 확인한 바, 대다수의 부동산 관련 관료들이 강남에 집을 소유하고 있었고 이들은 체제포섭된 쁘띠부르조아의 대표적 계층이라 할 수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지배계급의 부동산 안정화 논리는 더할 나위 없이 단순 명쾌하지만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그 명쾌한 논리로도 풀 수 없는 복잡한 실타래가 존재하고 있다. 이에 따라 저항은 그 이해관계자가 복잡하고 다양한 계층의 성향을 띠는 것만큼이나 의회에서뿐만 아니라 행정부, 지방자치제, 언론 등 다방면에서 진행되는 양상을 띠고 있다.

수도권 개발부담금 제도가 폐지됨으로써 명맥만 유지해오던 토지공개념은 역사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서울시가 각 구청의 반발이 심하다는 이유로 정부에게 부동산 보유 재산세율 인하를 요구하고 있다. 재정경제부는 다주택 보유자에 대한 양도소득세 중과세의 지역범위도 대도시에 국한시키겠다고 한다. 경제신문들은 정부의 부동산 안정의지를 기사화 하는 한편으로 기획기사를 통해 은근히 부동산 경기가 곧 살아날 것이라고 부추긴다. 한겨레21 최근호가 ‘부동산 전쟁’이라고까지 표현한 현재의 국면에서 만만찮은 저항이 존재하고 있음을 알려주는 사례들이다.

토지의 공유화를 통한 사회정의를 추구했던 헨리조지의 추종자가 청와대 정책실장을 차지하고 있다. 빈민운동을 했던 이는 청와대 비서관이다. 이들은 한겨레21이 부동산 전쟁의 ‘5인의 주역’으로 지목한 이들에 속해있다. 노무현 정부에서 가장 잘한 일은 부동산 정책이라는 설문조사도 발표되었다. 현재까지는 그런 대로 잘하고 있다. 하지만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저항은 만만치 않다. 영국의 자유주의자들이 곡물법을 폐지시키는 데에 30여 년이 걸렸다. 우리는 해방이후 지속되어온 이 부동산 투전판이 언제 끝날지 감도 잡을 수 없다. 자유주의 정권의 역사가 짧은 만큼 전쟁은 이제 막 시작이라고 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들이 그들의 선배 자유주의자 만큼만이라도 할 수 있기를 바란다. 부동산 폭등은 곡물법이 그러했던 것처럼 경쟁력 저하의 요인이 된다는 꼭 그 논리만큼이라도 관철시키기를 바란다.

그 후에 진보세력은 그 철학과 집행수단에서 그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갈 것이다.

국적성

‘시험이 내일모레’ 라는 표현이나 ‘주식이 반값’ 이라는 표현은 상황이 그만큼 절박할 때 쓰는 과장법인 경우가 많다. 하지만 적어도 이 두 표현 중에 하나는 당장 현실이 되고 말았다. 주가 2000 시대를 부르짖은 지 1년 만에 반 토막이 되고 말았다. 높은 수익률에 마음이 풍족했던 간접투자펀드 가입자들의 가슴에는 지금 찬바람이 몰아치고 있다.

신흥국가들 중에서도 특히 남한의 주가하락은 두드러진다. 이에 여러 가지 설명이 따라붙는다. 수출주도형 경제시스템이어서 세계 경기침체에 특히 허약해서 그렇다, 리만브라더스가 집권하고 있어서 그렇다, 서구 언론의 한국 때리기가 지나치다, 공포감이 지나쳐서 그렇다… 등등 분석이 난무하고 있다. 상당부분 일리 있는 말들이다.

또 하나의 핵심적인 원인으로 지적될 수 있는 것은 자본시장 개방이다. 우리나라는 외환위기 이후 반강제적으로 외국인 주식투자 한도가 확대되었고 1998년 8월 마침내 외국인의 유가증권 취득이 완전 자유화되었다. 이후 외국인의 주가비중은 코스피 시장을 예로 보자면 1997년 11.9%에서 2004년 42%까지 확대되었다.

양적인 면뿐만 아니라 질적인 면에서도 그 영향력은 커졌는데 한때 외국인이 매수 또는 매도했다는 주식에 대해서는 동조세력이 따라붙는 등 줏대 없는 거래행위가 성행하여왔다. 또한 서구의 주가추이와도 동조현상, 소위 커플링 현상도 심화되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서 대부분은 우리나라 자본시장이 선진 자본시장으로 거듭나고 있는 과정이라고 해석하였다.

이번 주식폭락의 – 그리고 환율급등의 – 배경은 외국인들의 투매현상이 한 몫하고 있다. 본국 기업의 디레버리징에 대한 절박한 요구로 말미암아 대외투자를 – 그 중에서도 상당히 신빙성 있게 남한에 대한 투자를 – 매우 빠르게 청산하였기 때문이다. 언론보도에 따르면 “외국인들의 연간 주식 순매도규모는 총 42조6천91억 원으로 1992년 증시 개방 이후 최대치”다.

늘 있어왔던 주장은 개방과 자유화는 헤저(hedger)와 리스크 감수자(risk taker)의 풀(pool)을 늘려 시장위험을 최소화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린스펀이 파생상품에 대해 그렇게 주장했고,(주1) 노무현이 FTA에 대해 그렇게 주장했고, 이명박이 공기업 민영화 – 아니 선진화 – 에 대해 그렇게 주장하고 있는 중이다. 현실은 그들이 주장하는 것만큼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은 것 같다. 결국 자본시장 개방은 시장의 변동폭을 확대하지 않았는가 말이다.

이제 쓴 맛을 봤으니 다시 자본시장을 닫을까? 그렇게 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어쨌든 우리의 경제 체질도 시장개방에 조율되어 왔다. 그리고 개방에 대한 일방적인 맞대응으로 폐쇄를 고려하는 것은 답이 아니다. 개방반대자들 중에서 일부가 꾸준히 요구하였듯이 개방의 부작용을 최소화할 수 있는 규범이 마련되어야 한다.

일단은 무한 개방이 최고라고 주장하는 한미FTA는 재고되어야 하고(주2) 거래비용이 극히 적게 드는 무한자유의 국가간 자본이동은 토빈세가 지향하고 있는 목표에 부합한 무엇인가의 장치를 통해 형상화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또 한 번 가슴에 새겨야 할 것은 ‘자본의 국적성’이다. 세계화 시대에도 여전히 국경은 존재하고 있다.

(주1) 최근 그는 이러한 지나친 낙관이 ‘partially’ 잘못 되었다고 마지못해 인정했다고 한다.

(주2) 노무현씨가 최근 어느 사이트에서 신자유주의를 비판했다는 소리 듣고 난 뭐라 할 말을 잃었다.

제헌절이 더 이상 휴일이 아닌 이유

오랜만에 한미FTA에 대해 글을 올리니 손이 근질근질하여 몇 자 더 적어야겠다. 이전 글에서도 잠깐 언급했듯이 한미FTA는 FTA 초유의 발명품 ‘투자자의 정부제소권’ 조항이 있다. 이에 따라 자신의 투자의 정당한 권리가 침해받았다고 여겨지는 투자자는 정부를 제소하여 제3국에서 중재에 참가하게끔 강제할 수 있다. 이는 위헌의 소지가 많은 조항임은 이미 설명하였다.

그런데 또 하나의 문제는 이때 중재부는 어떠한 판단기준에 의하여 그 건을 판정하는가이다.

“중재부는 이 협정과 적용가능한 국제법에 따라 분쟁을 판정한다.”[한미FTA 11.22조 1항]

언뜻 보면 별 문제없는 조항으로 여겨진다. 문제는 이 조항은 그 판정기준에 국내법이 배제된다는 의미라는 점이다. 송기호 변호사에 따르면 국제중재 판정에서 피소된 국가의 국내법 적용을 ‘원천적으로 배제’하는 국제조약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사실 우리나라 헌법은 공공의 복리를 위해 사유재산권에 일정정도 제한을 가하는 취지의 내용이 꽤 있다. 이러한 법취지는 무한경쟁의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그나마 인간적인 모습의 행정권을 발휘할 수 있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그 한 예가 얼마 전 뉴라이트 이하 보수주의자들이 삭제하자고 주장한 헌법 제119조 2항이다.

②국가는 균형있는 국민경제의 성장 및 안정과 적정한 소득의 분배를 유지하고, 시장의 지배와 경제력의 남용을 방지하며, 경제주체간의 조화를 통한 경제의 민주화를 위하여 경제에 관한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경제민주화라는 미명 하에 행정행위가 남용되는 것도 문제지만 자유주의 시장경제라는 미명 하에 행정권이 봉쇄당하는 것 또한 심각한 문제다. 그런데 뉴라이트 주장은 꼴통들의 주장으로 웃어넘길 수 있을지 몰라도 한미FTA는 그렇지 않다. 그것은 비준 발효되는 순간 위와 같은 판단근거에 의해 이루어진 행정행위가 정체불명의 ‘국제법’에 의해 투자이익침해행위로 간주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논의를 진행하다보면 혹자는 한미FTA는 한국과 미국 정부가 똑같이 적용되는 자유무역협정이므로 미국에게도 우리가 그렇게 하여 이득을 취하면 될 것 아니냐고 이야기할 수도 있다. 이 주장은 두 가지 측면에서 문제가 있다. 첫째, 한미FTA는 어찌 보면 미국식의 재산권에 대한 절대적인 보호가치를 우리나라에 적용한다는 것이고, 둘째, 결국 이득을 얻는 것은 해당 조항을 유용할 수 있는 양 국의 거대자본인데 이들의 이윤동기 아래 양쪽의 국가, 나아가 그 국가의 보호 하에 있는 국민들의 공익향유권은 침해당해도 상관없다는 신자유주의 논리라는 점이 문제다.

둘째 이의제기에 대해서는 따로 설명할 것이 없을 것 같고, 첫째 이의제기에 대해 좀더 이야기하겠다.

“정당한 보상 없이, 사유재산을 공용으로 취득당하지 아니한다.”[미국 헌법 수정 5조]

송기호 변호사에 따르면 미국 헌법에서 재산권 조항은 오로지 한 조항뿐이라 한다. 그리고 미국의 재판정은 이 조항을 근거로 재산권에 있어서만큼은 공익의 침해 여부와 상관없이 그 권리를 절대적으로 – 적어도 다른 나라에 비해서는 훨씬 많은 비율로 – 인정해주곤 한다고 한다. 그러므로 한미FTA는 미국의 법취지와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주1)

자 이제 여러분은 왜 제헌절이 휴일에서 제외되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물론 농담이다. 과연 농담인가?) 그 이유는 한미FTA가 비준 발효되면 그간 우리나라 사법권과 헌법은 별로 효용성 없는 기관과 문서조각으로 전락해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사법기관이나 헌법은 가끔 ‘아주 순수하게’ 해외법인이나 외국인이 전혀 섞이지 않은 상투 튼 사람들끼리의 송사에나 관여할 것이다. 이명박이 달리 영어 몰입교육을 하자고 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나는 다른 어떠한 이유를 떠나서라도 이러한 개떡같은 FTA를 자신의 치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누무현을 꼴통이라고 생각한다.

“한미 FTA는 그것을 통해 물건을 더 파는 것보다는 제도를 미국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하는 것이다.(주2) 각 분야의 세계의 제도와 뒤섞이지 않으면 수준이 올라가지 않기 때문이다”(노무현 前대통령, 2007년 5월14일, 두바이 동포간담회)

“다음 어느 쪽이 정권을 잡아도 안할 것 같았는데, 저는 해야 된다고 생각했다. 정치적 손해 가는 일을 하는 대통령은 노무현 밖에 없다고 스스로 믿고 있기 때문에 특단의 의지로 결정했다”(노무현 前대통령, 2007년 3월20일 농어업분야 업무보고)

(주1) 보다 복잡한 방식에 따라 한미FTA가 국내법을 무력화시킬 수 있는 국내 헌법상의 조항이 있어 논란의 여지가 있고, 미국의 경우 한미FTA는 별도의 이행법으로 처리되어 여타 법이 저촉을 받지 않는다는 논리가 있는데 이 글에서는 생략하기로 하겠다. 이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으신 분은 이 글에서 전반적으로 인용하고 있는 송기호 변호사의 ‘한미FTA 핸드북’(녹색평론사)을 참고하기 바란다.

(주2) 수준을 끌어올린 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앞에 간단히 설명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