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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은행들은 어떻게 우리의 민주주의를 희생시키는가?

재밌는 대담이라 생각되어 퍼왔다. 내용은 이번 JP모건체이스의 대규모 손실에 대한 상원청문회 등 투자은행과 정치권을 둘러싼 구조적인 문제점에 관한 두 경제전문가들의 대담이다. 전체 스크립트는 여기에 가면 있으니 시간 날 때 한번 찬찬히 보시길.

BILL MOYERS: 은행이 보다 더 유틸리티와 같아야 한다고 했는데 무슨 말인가?

YVES SMITH: 다른 어떤 비즈니스나 군대의 계약자들보다도 은행은 정부에 의지해서 살아가고 있다. 그들은 정부지원에 의존하고 있다. 그들은 정부가 면허를 발급해주는 방식으로만 존재하는데, 당신이 오픈엔트리를 얻는다면 훨씬 더 낮은 수수료를 볼 수 있을 것이다.(역자 주 : 오픈엔트리라는 개념은 일종의 진입장벽일텐데 결국 은행업의 허가로 인한 특혜와 같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규제받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대중으로부터 신뢰를 얻는다. 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이 접근할 수 있는 것은 –

MATT TAIBBI: 연방준비제도.

YVES SMITH: 연방준비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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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정위기 극복을 위한 해법인 ‘더 많은 세금’, 그 한계

자본주의를 무릎 꿇리고 있는 것은 좌익들의 주장의 힘이 아니다. 자본주의가 너무 오랫동안 자라면서 민주주의와 양립할 수 없는 지점까지 도달한 것이다. 우리는 소수가 이익을 얻고 다수가 그렇지 못한 시스템에 살고 있다. 그러나 민주주의 하에서 매 수년마다 투표함이 다수를 필요로 한다. 그들은 투표를 할 것으로 기대된다. — 그리고 그 다음엔 침묵을 지키고. 이러한 서비스에 대한 보답으로 국가는 공공 자산을 통해 (그 어느 때보다 적은 양이지만) 혜택을 베푼다. 그러나 부자와 기업이 해마다 더 적게 지불하면서 자신들 주머니에 챙기고, 가난한 이들은 돈이 없어서 세금을 못 낸다면, 돈은 어디에서 나올까?

정답 : 부채. 공공부채는 부자는 더 부유해지고 빈자는 더 가난해지도록 하는 국가가 지불하는 비용이다. 이 시스템은 막다른 길에 몰려 있다.[Debt and Democracy : Why Germany’s Rich Must Pay Higher Taxes]

독일의 경제학자 Jakob Augstein가 슈피겔에 기고한 Debt and Democracy의 일부다. 서문을 보고서는 사회시장경제를 채택하고 있는, 서유럽에서 가장 안정된 것으로 여겨지는 경제 시스템을 갖고 있는 독일이 배부른 소리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Jakob이 말하길, 이러한 인식은 좌익의 선전선동이 아니고 독일 사회가 “빈자에서 부자로 부를 재분배(redistribution of wealth from poor to rich)”하는 시스템으로 가고 있다고 주장하는 보수적인 법학교수 Paul Kirchhof를 비롯한 우익진영에서 나오는 주장이라는 것이다.

Jakob은 재정위기에 몰린 국가가 공공지출을 줄이게 된다면 부자는 개의치 않을 것이나 가난한 이들의 분노는 더욱 커지고, 종내는 전체주의 사회로 나아갈 위험성이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부익부빈익빈 현상이 심해지고, 부자는 세금을 내지 않고, 국가는 재정이 어려워져서, 공공지출을 줄이면 결국 민주주의는 심각한 위협을 받게 된다는 것이 Jakob이 우려하는 악순환 경제 시스템이다. 그가 제안하는 유일한 해결책은 세금을 더 걷는 것이다. 독일의 소득세 최고세율은 그 어느 때보다 낮다고 하는데, 최고세율은 42%다.(우리나라는 35%)

이 주장의 한계는 자본주의 시스템의 한계와 동일한 맥락인데, 과세는 개별 국가의 권한인 반면에 자본은 세계화되어 부자와 기업이 자산을 해외에 분산하는 방법으로 조세권을 무력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이전 글들에서 살펴보았듯이 자본은 합법적인 방법으로 더 많은 이윤을 확보하면서도 더 적은 세금을 내고 있다. 정부의 지속적인 감세는 우익의 왜곡된 경제관을 반영한 것일 수도 있으나, 어쩌면 일종의 자본에 대한 국가 간의 세율 경쟁입찰의 결과일 수도 있는 것이다. 자본이 국가를 경쟁시키는 일종의 逆자유경쟁시장이 된 것이다.

결국 전 세계적인 규모의 동일과세라는 이상주의적인 대안이외에 뾰족한 대안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참고할 글들

 

“공공의 정신(public-spiritedness)”

Vaughan ignored the remark. “I don’t want you to close the beaches,” he said.
“So I see.”
“You know why. The Fourth of July isn’t far off. and that’s the make-or-break weekend. We’d be cutting our own throats.”
“I know the argument, and I’m sure you know my reasons for wanting to close the beaches. It’s not as if I have anything to gain.”
[중략]
Brody sighed. “Shit,” he said. “I don’t like it. it doesn’t smell good. But okay, if it’s that important.”
“It’s that important.” For the first time since he had arrived, Vaughan smiled. “Thanks, Martin,” he said, and he stood up. “Now I have the rather unpleasant task of visiting the Footes.”
“How are you going to keep them from shooting off their mouth to the Times of the News?”
“I hope to be able to appeal to their public-spiritedness,” Vaughan siad, “just as I appealed to yours”
[Jaws, Peter Benchley, 三志社, 1984년, pp 86~92]

Steven Spielberg의 걸작 영화로 잘 알려진 Jaws의 원작 소설 중 일부분이다. 뜨내기 여인이 해변에서 상어의 습격으로 추정되는 공격을 당해 온 몸이 찢긴 채 해변에서 발견된 다음 날, 이에 해변을 폐쇄하려는 경찰서장 Martin Brody와 이를 말리는 읍장 Larry Vaughan의 설전을 묘사한 장면이다.

읍장의 논리는 여름 한철 장사로 그 해를 탈 없이 지내는 조그만 휴양지촌인 Amity가 뜨내기 여자의 죽음 때문에 망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경찰서장 Brody는 공공의 안녕을 위해 2~3일 간 해안을 폐쇄하겠다고 고집을 부렸으나 자치조례에 따라 자신을 해임할 수도 있다는 읍장의 협박에 굴복하여 자신의 주장을 철회한다.

그런데 묘하게도 읍장이 서장의 입을 막으려는 또 다른 논리 역시 서장의 논리와 유사하다. 즉, 그것은 바로 “공공의 정신(public-spiritedness)”이다. 서장의 논리가 불특정 다수인 공공의 안전을 보장하려는 목적이라면, 읍장의 논리가 공공, 즉 Amity 읍민들의 경제적 이해를 해치지 않겠다는 – 더불어 스스로 부동산 개발업자인 자신의 경제적 이해도 – 의지라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물론 서장에게 가장 큰 위협은 읍장의 해임 협박이었지만 그 역시도 읍민들이 공유하고 있는 정서, 즉 ‘다수의 이익을 위한 소수의 희생’이라는 정서에 공감한 바도 크다. 소설에서는 그 해 여름 장사를 망칠 경우 Amity읍민의 1/3이 생활보호 수당을 받아야 할 정도의 가난한 읍으로 그리고 있다. 투표에 의한 선출직인 서장 역시 이러한 압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던 것이다.

현실 세계에서 동일한 문제에 봉착할 경우 우리는 어떠한 선택을 하여야 할까? 경제적 피해는 다수에게 미치지만 상어의 습격은 극소수, 그 또한 지극히 희박한 확률 상의 문제이기 때문에 전자의 보호가 더 시급한 문제라고 판단하면 될까? 원작에서 Amity읍은 전자로 결정하였다. 하지만 이어지는 상어의 습격으로 말미암아 결국 후자의 결정으로 선회하였다. 우리 역시, 특히 ‘경제적 이익’과 결부된 의사결정에서는 ‘경제적 요소’가 일차적인 고려사항이 되는 경우가 많다.

FTA에서 그러했고, 환경문제와 경제적 이익이 상충할 때에 그러했고, 지난 선거철 뉴타운 이슈가 그러했고, 기업 및 공공기관의 구조조정 시에 경쟁력 강화라는 슬로건을 채택할 때에 그러했다. 하지만 때로 불특정 다수에 대한 적은 확률적 문제에 불과하기에 간과되었던 ‘상어의 습격’으로 인해 그간 얻었던 경제적 이익보다 더 많은 비용을 지불할 때도 있었고, 지불할 개연성도 있는 상황이 많다.

이는 또한 소수자의 보호의 이슈일수도 있다. 즉, 다수자의 이익을 보호하는 것과 소수자의 이익을 보호하여야 하는 것이 있을 때에 우리는 다수결의 원칙이 민주주의라는 논리를 들어 소수자의 이익(또는 권리)을 쉽게 포기하곤 한다. 하지만 다수의 이익을 관철하는 것이 대의민주제에 반드시 합치하는 것은 아니다. 해변의 안정이 보호되어야 하는 이유는 어느 누구든지 해변에 나가서 수영하는 한 상어의 습격은 무차별적이기 때문이니 말이다.

요컨대 “공공의 정신(public-spiritedness)”이라는 개념은 고정불변의 진리가 내포되어 있다기보다는 우리가 공화제를 채택한 이래로 시대와 장소에 따라 그 크기와 내포하는 의미가 변화되어 온 것이라 할 수 있다. 과거 왕이나 귀족이 누리던 특혜를 공공(public)이 함께 누린다는 이상향의 큰 틀은 당연시되지만 세세한 항목은 때때로 정치적으로 악용되기도 했고 공공 스스로에 의해 수정되기도 했던 것이다. 이전의 공공성 개념이 그랬듯 21세기 형 공공성은 어떠해야 할지는 결국 현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손에 달려있다고 할 수 있다.

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

그가 받은 오해는 인권말살로 악명 높은 피노체트를 만나 경제자문을 했다는 것이었다. [중략] 그러나 칠레를 방문해 피노체트를 만나기는 했지만, 프리드먼 교수가 피노체트에게 이야기한 요지는 사실 ‘민주주의 없는 자유시장경제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따끔한 충고였다.[FTA후 한국, 곽수종, 콜로세움, 2007, p68]

이 문단을 읽고 한 2초간 웃었다. 밀턴 프리드먼이 독재자 피노체트의 경제자문을 해주었다는 비난을 변호해주는 내용이다. 진짜 프리드먼이 그런 말을 했는지 여부야 알 수 없지만 저자까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면 곤란한 문제다. 오히려 역사는 ‘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는 별 상관이 없다는 데이터를 많이 제공하고 있다. 이 데이터는 심지어 같은 책의 바로 밑의 문단에서도 확인된다.

쿠테타로 집권한 지 17년, 철권통치기간 동안 3천 명 이상의 사망자와 실종자를 만들어내며 [중략] 지금의 칠레 경제는 남미 국가 중 최고의 경제성장률과 대외신인도를 지니고 있다.[같은 책, 같은 페이지]

저자가 말하는 ‘자유시장경제’가 어느 범위까지 아우르는지의 여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여하튼 ‘자본주의 시장경제’라고 일반적으로 일컬어지는 한에 있어서는 피노체트의 칠레는 모범국가였다. 프리드먼이 칠레를 간 이유는 피노체트가 선택한 경제팀이 소위 ‘시카고 보이’라고 불리는 일군의 시장지향의 경제학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은 독재와 시장경제는 잘 어울려 지냈던 것이다. 그리고 행인지 불행인지 칠레의 경제는 독재시절에도 잘 굴러갔다.

그러므로 우리는 ‘민주주의 없는 자유시장경제’가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상기하고 세상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리경제가 바로 그 예다. 박정희 시절 소위 경제개발계획과 같은 국가주도의 혼합경제 시스템을 유지하기는 했지만 대외적으로 표방하고 있는 것은 분명히 자유시장경제였다. 곽수종씨가 책을 쓴 이유 한미FTA가 자유시장경제의 징검다리라면 그 징검다리를 건너는 과정에서 – 참여정부 때나 지금이나 – 민주주의는 존재하지 않고 있다.

헨리 브랜즈 Henry Brands 는 그의 저서 머니맨(The Money Men)에서 심지어 미국 금융의 역사는 ‘민주주의’ 세력과 ‘자본주의’ 세력의 권력투쟁이라고까지 묘사하고 있다.

화폐 문제는 민주주의의 원리와 자본주의의 원리가 충돌하면서 생기는 모순의 한 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다. 민주주의를 부르짖는 사람들은 평등사상에 입각하여 국민들이 화폐공급의 주도권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중략] 반면 자본가들은 민주적 평등만 주장하는 순진무구한 사람들이 화폐를 다루기 시작하면 경제가 혼란에 빠진다고 생각했다. [중략] 그래서 화폐 문제는 특별한 재능을 가진 소수가 다루는 것이 옳다고 믿었다.[머니맨, 헨리 브랜즈, 쳐현진 譯, 청림출판, pp6~7]

물론 이 책의 전반을 읽어보면 역설적으로 자본가들을 ‘자유시장경제’론자들과 동일시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일반적으로 순수한 열정을 지닌 시장지향의 경제학자들이 꿈꾸는 세상은 독점이 사라진 완전한 자유경쟁의 시장경제인 반면 화폐 문제를 손아귀에 쥐고자 하는 이들은 독점자본가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그러한 간극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헨리 브랜즈의 설명이 주는 함의는 유효하다. 즉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또는 자유시장경제)는 어느 정도는 대립관계였다는 사실이다.

어릴 적 도덕 또는 국민윤리 시간에 민주주의의 반대말이 공산주의라고 배웠던 이들에게는 적잖이 충격적인 사실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조악한 이분법을 별개로 하고 생각하더라도 현실 세계에서는 옳던 그르던 민주주의 원칙이 도달하지 않는 분야가 – 특히 경제에서 – 너무 많다. 소위 대의제에 의해 선출되지 않는 권력이 시장에서 어느 정도까지 위세를 떨치고 있는 가를 생각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북한의 부자 권력 승계와 삼성의 부자 권력 승계와의 공통점이 바로 민주주의가 영향을 미칠 수 없다는 것 아니겠는가.

일독을 권합니다

“지난 정권에서도 이 나라의 민주주의는 말뿐이었다. 수많은 사람이 거리고 나서고 심지어 분신까지 했어도 한-미 자유무역협정 체결이 강행됐다. 농민들이 두들겨맞아 죽어도, 대통령이라는 자가 진심어린 사과 한번 한 적 없다. 또 비정규직 확산을 재촉할 법률이 힘으로 관철됐다. 이 모두를 정당화하는 데는 말 한마디면 족했다. “국가 경제를 위해서!!!” 경제를 위해서 농민의 희생은 어쩔 수 없었고, 경제를 위해서 자유무역협정은 피할 수 없었으며, 경제를 책임지는 기업들의 부담을 덜어주려면 비정규직들이 희생해야 했다. 또 중소기업들을 살리려고 이주 노동자들의 권리는 뒷전으로 밀렸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암묵적으로 동조했다. 그렇게 ‘경제’ 앞에 ‘민주주의’는 무기력했다. 힘없고 가난한 이들도 당당한 주권자임을 인정하고 그들의 권리를 먼저 보장하는 민주주의는 ‘돈이 안되는’ 장식품일 뿐이었다.”[전문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