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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모론이 꾸미고 있는 음모

인공강우 전문가들은 성공을 증명할 길이 없어 어려움을 겪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인공강우가 엄청난 악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믿는 대중의 공포도 감당해야만 한다. 인공강우가 불법 침략행위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도 있다. 미국은 1960년대에 몬순 기간 동안 게릴라의 보급로가 물에 잠기게 하기 위해 비밀리에 라오스와 북베트남에 인공강우를 실시했다. 또 인공강우는 예기치 못한 홍수를 일으킨다는 의심을 받기도 한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이 ‘뭉게구름 계획Operation Cumulus’이다. 뭉게구름 계획은 영국남부에서 실시되었던 영국군의 비밀 강우실험으로, 1952년 여름에 익스무어를 강타한 대홍수를 일으켰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영국군에서 단 한차례 구름 씨를 뿌리고 몇 시간이 지난 뒤, 엄청난 기세로 밀려든 흙탕물이 데번 주 린머스를 덮쳐 35명이 목숨을 잃었다. 인과관계에 관한 진실은 결코 알 수 없지만 공문서 보관소에서 나온 기록에 따르면, 대홍수가 일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뭉게구름 계획이 갑자기 중단되었다. 어쩌면 이들은 상황을 충분히 파악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강의 죽음, 프레드 피어스 지음, 김정은 옮김, 브렌즈, pp415~416]

음모론의 대부분은 세계의 정치경제의 뒷면에 있는 거대한 어둠의 그림자를 소재로 하고 있기에 결코 유쾌한 것이 아니지만, – 폴매카트니가 애비로드 앨범사진에서 맨발이기 때문에 이미 죽었다는 정도는 발랄한 유머이고 – 그럼에도 불구하고 확실히 재미는 있다. 그러니 인류의 삶의 뿌리인 물, 더 정확히는 강의 죽음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는 이 진지한 책에서도 유난히 이런 대목이 눈에 들어온다.

뭉게구름 계획에 대해서 좀더 알아보자. 위키피디어에 따르면 이 프로젝트는 1949년에서 1952년까지 존재하였는데 주된 목적은 적의 움직임을 저지하거나 공항의 안개를 걷어내는 것 등이었다고 한다. 물론 뭉게구름 계획이 실제로 린머스의 비극을 초래했다는 소리는 터무니없는 것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인공강우를 적들의 목숨을 앗아가기 위한 살상의 목적으로 활용하려 했던 의도만큼은 비난받아 마땅해보인다.

기후무기에 관한 음모론은 위와 같은 인공강우 이외에도 꽤 된다. 인도네시아 쓰나미, 아이티 지진 등 최근의 재앙들에는 예외 없이 기후무기 음모론이 끼어든다. 즉, 전자기파를 이용해서 원격으로 날씨를 바꾸고 지진을 일으키고 화산을 폭발시키는 식의 환경 테러리즘이 등장하고 있다는 식의 주장까지도 있다. 이 주장의 최신판은 21세기 사회주의 영도자 중 한분이신 베네수엘라 차베스 대통령이다.[또 다른 관련 글]

한편 음모론을 꼭 핍박받는 좌익만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 잘 알려진 음모론 중 프리메이슨이 전 세계를 장악하고 있다는 주장의 배경 이론(?)은 밀턴 프리드먼의 경제이론이라는 점에서 오히려 우익적이다. 또 최근 천안함의 비극적인 사고의 배후를 음모론으로 떡칠하고 있는 이들은 조중동이다. 그런 의미에서 음모론은 좌우에 관계없이 자신의 세계관과 사실관계 사이의 빈틈을 채우는 자신만의 편견일 따름이다.

요즘 조중동을 읽으면 북한은 우리가 도저히 못이길 엄청난 군사력을 지니고 있는 나라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나 역시도 때로는 ‘핵무기가 발명된 지 언젠데 그게 최신무기일까. 지금은 무슨 첨단무기가 있을까?’랄지 ‘1969년에 달에 갔다 온 기술로 지금쯤 토성까지는 갔어야 되는 거 아냐?’라는 생각을 가끔 하지만, 결국 진실은 사실관계가 촘촘히 맞춰지기 전까지는 섣불리 재단해서는 안 된다는, 소극적인 자세로 돌아오곤 한다. 음모론에 지나치게 적극적인 이는 대개 다른 의도가 있기 때문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떤 찌라시들처럼.

잡담

얼마 전에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그랜토리노’를 봤다. 합리적인 보수주의의 모범을 보여준 영화라는 호평들도 있긴 하지만 생각해보면 어찌되었든 나는 그의 작위적인 상황설정이 맘에 들지 않는다. 감동을 쥐어짜려는 느낌이랄까? 오스카가 좋아할 영화인데 희한하게 이번엔 오스카가 그를 천대했다. 암튼 난 슬럼독밀리어네어를 보길 원했고 아내는 그랜토리노를 보길 원했다. 당연히 나는 아내의 편을 들었다. 아내의 선택을 보고 후회하는 편이 내 선택을 보고 후회하는 편보다 훨씬 덜 후회스럽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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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Rock에 이은 새로 즐기는 미드는 The Office. 무개념 상사(boss)의 끝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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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前) 대통령이 자신의 혐의사실에 대한 변론을 인터넷 홈페이지를 통해서 하고 있는 재미있는(?) 상황이 연출되고 있다. 오바마가 만약 퇴임 후 비슷한 혐의를 받게 된다면 그는 무엇을 통해 변론을 할까? Twitter? 그나저나 나는 스티브 부세미의 follower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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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RSS 구독자수가 조중동을 모두 제켰다. 그래서 우쭐거리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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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의 집값이 다시 기지개를 펴고 있다고, 주가가 오른다고 언론에서 호들갑을 떤다. 암튼 무엇을 하든 참 싸이클이 빠른 나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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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읽고 있는 책은 ‘사막의 반란(T. E. 로렌스)’, ‘황금의 샘(다니엘 예르긴)’,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더글러스 애덤스)’, ‘노동가치론의 역사(로날드 L 미크)’ 등이다. 역시 진도가 제일 빠른 것은 ‘은하수~’다. ‘사막의 반란’은 예상 밖으로 지루한 편이다. 하지만 T. E. 로렌스의 생생한 증언으로 듣는 사막의 역사와 꼼꼼하고 사실적인 인물화들이 즐길 만하다.

조중동의 패착

 

위 그래프는 미국에서의 조사결과지만 우리나라라고 사정이 그렇게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소위 언론(言論)이라 일컬어지는 것들의 대표 주자였던 신문이 이제 인터넷에도 그 대표성을 내주고 있는 상황이다. 물론 그 인터넷의 뉴스 공급주체가 여전히 신문이 압도적이긴 하지만 블로그 등 독자적인 정보공급원이 등장하면서 그 지위마저 위협받고 있다.

따라서 정말 순수하게 비즈니스적인 입장에서 바라본다면 조중동으로 대표되는 신문사들의 방송겸영에 대한 욕구, 더 큰 틀에서 미디어 컨버전스에 대한 욕구는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것이 가능하지 않다면 사실 그들에게 미래는 없다. 잘해봐야 인터넷의 하위 정보제공업체쯤으로 전락해버릴지도 모를 일이다. 어쩌면 기자는 이미 여론형성자에서 정보제공 기술자의 지위로 전락해가고 있는 중일지도 모른다.

조중동의 패착은, 그리고 우리나라 언론의 불행은 결국 이러한 기술혁신과 제도혁신의 과제를 보수우익 권력집단의 언론장악 의도에 편승하여 실현하려 하였다는 것에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정치지형과 언론시장의 독점구조에서는 순수하게 비즈니스적인 접근이 가능하지 않았겠지만, 그들이 조금만 더 영리하였더라면 조금은 덜 정치색을 띈 시도를 하였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 편(?)의 당파성을 객관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곤란하다

현재 거의 육박전으로 치닫고 있는 언론전쟁에 대해 다룬 글 중 가장 맘에 드는 글. 역시 pearl님~!

그런데 21세기 한국 언론 상황을 들여다 보면 마치 19세기 말 미국으로 돌아간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미디어 간 전쟁이 너무나 격렬하게 진행되고 있고, 전선도 대 의 단순구도를 한층 벗어나 ‘조중동’ 대 ‘한겨레경향’, ‘올드미디어’ 대 ‘뉴미디어’, ‘신문’ 대 ‘방송’ 등 여러 구도로 형성됐다. 사설이나 칼럼과 구분이 안 되는 신문 1면, 입맛대로 사실을 과장하거나 축소하고 연출 사진 논란에 상대방에 대한 낯뜨거운 비난까지, 지독한 전투 속에 현대 저널리즘의 가장 중요한 가치인 ‘신뢰’라는 단어는 완전히 실종됐다.

똑같은 촛불집회 기사를 보도하면서 조중동은 전경차에 망치를 들고 있는 시위대의 사진을 내보내고 한겨레나 경향은 시위대에 소화기를 분사하는 전경의 사진을 내보낸다. 모두 시위에서 찍은 사진은 맞지만 다른쪽에 대해서는 일부러 눈을 감는다. 한쪽은 촛불 때문에 경제위기가 온다는 황당한 주장을 펴고 한쪽은 촛불을 계속 들어야 한다고 선동한다. 물론 사실 왜곡이나 주장의 당파성이 더 심하게 나타나는 것은 조중동 쪽이지만 한겨레 경향도 그동안의 보도태도에 비해 훨씬 당파적이라는 비판이 내부에서도 제기되고 있는 판이다.[미디어 대전, 최후의 승자는 누가 될까, 2008.7.9, pearl]

이래서 내가 박노자 씨를 좋아한다

이래서 내가 박노자 씨를 좋아한다. 평소 그의 점잖은 선비풍의 글을 읽다가 이렇게 단어는 얌전하게 쓰면서도 속 내용은 신랄한 비아냥거림을 접하게 되면 평소 얌전한 사람이 노래방에서 노래빨날리는 광경을 보는 듯한 신선함을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평소의 글투에도 약간 장난기가 섞여 있는 진중권 씨나 우석훈 씨의 글이나 말과는 또 다른 쾌감을 제공한다.

박노자 씨 말마따나 우리나라의 신자유주의 노선의 관철은 역설적으로 정치적 레토릭의 급진화와 경제적 노선의 보수화의 교묘한 줄타기를 했던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에 의해 가속화될 수 있었다. 막 독재의 틀을 벗어난 인민에게 몇몇 탈권위적 정치행태를 보여주면 경제적으로는 충실한 우파 노선을 걷기에 편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중동으로 대표되는 보수언론은 그들을 ‘좌파’라고 부르기 서슴지 않았다. 물론 그 정부들의 하부 추종자들 중에서는 ‘나름 좌파’도 섞여있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박노자 씨도 그렇게 봤는지 모르지만 나도 솔직히 그들이 이전의 두 정부를 ‘좌파’정부로 몰아세운 것은 말이 그렇다는 것이지 뜻이 그렇다는 것은 아닐 거라 생각했다. 적어도 그들이 그런 정도의 머리는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요즘 그 친구들 하는 행동을 보면 진정으로 그 시절을 ‘상종 못할 빨갱이 놈들의 세상’이었고 지금은 ‘사람 사는 정의로운 세상’으로 상정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째서 이들이 자신들 스스로가 노무현 정부 시절 득달같이 비판하던 미국산 쇠고기의 안정성에 대한 의문제기를 이제 시민들이나 네티즌들이 주장하자 이들을 마치 ‘돌아온 반도(叛徒)’ 대하듯이 대하고 있는지 설명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들의 좌파/우파 구분법이 진정성이 없고서야 어떻게 그렇게 나폴레옹 귀양 갈 때와 파리 입성할 때의 헛소리가 이렇게 차이가 나겠는가 말이다. 머리가 어느 정도 있었다면 양쪽의 주장 간에 수위조절을 했어야 할 것이다.

여하튼 이런 꼴을 보고 있자면 이 세상이 진짜 메트릭스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렇게 제 정신도 아니고 정치이념의 ABC도 모르는 것들이 기자질을 하고 있고 하버드 수석 졸업했다고 뻥치는 과대망상증 환자가 국회에 입성하겠는가 말이다. 하긴 학살자 부시가 세상의 지배자인 세상이니 그 정도는 약과인지도 모르겠다.(주1)

박노자 씨의 ‘조중동의 치명적 실수’ 읽기

 

(주1) 부시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오늘자 동아일보는 부시 측근의 부시 재임시절의 비리와 오판에 대한 폭로에 대해 “뒤늦은 정의감? 두둑한 인세?”라는 제목으로 그것들을 폄하하면서 관련사진에는 생뚱맞게 부시의 인간적인(?) 면모가 담긴 사진을 첨부하였다. 전형적인 용비어천가적인 기사였다. 남의 나라 대통령에게까지 이렇게 사탕발림을 하는 신문이니 정말 할말 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