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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은 왜 경제적인 것은 탈정치적이라고 생각할까?

이전 글에서도 언급했지만 특히나 남한 땅에서는 보통사람들뿐 아니라 심지어 민주화 세력들조차 경제의 문제를 탈정치적인 것이라 간주하는 경향이 강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든다. 즉 해방 후의 비약적인 경제발전과 그에 따른 일정정도의 삶의 질 개선이 보통사람들에게 탈정치적인 ‘박정희 신화’로 뿌리내렸다면, 민주화 세력은 자신들의 상대적으로 우월한 정치적 정당성을 경제에서 검증받는데 있어 박정희의 그것과 비슷한 경제만능론으로 경제를 ‘정치’로부터 탈색시키는데 동참했다는 점에서 그렇다.

보통사람들에게 ‘박정희 신화’가 자리 잡게 된 주된 이유는 보통사람들이 박정희의 개발독재 시절과 이후 5,6공 시절의 3저 호황에 따른 뜻밖의 수혜기간 동안 실제로 누렸던 일종의 트리클다운(trickle-down) 효과 때문일 것이다. 그 시절은 사회의 계급분화가 아직 본격화되지 않은 시기였다. 가난한 집안 아이도 공부만 열심히 하면 서울대에 갈 수 있었고, 청약통장으로 아파트 한 채 얻어둔 것이 어떻게 하여 가격이 폭등했고, 회사에서 큰 과오만 없으면 정년까지 버텨서 연금을 탈 수 있었던 시기였다. 이른바 나름의 코리안드림이랄 수 있다.

선진소비국에 종속되는 수출주도형 모델이 남한 땅에서 예외적으로 훌륭하게 구현되면서 누린 풍요는 실제로 탈정치적인 모습을 띠어왔던 것도 사실이다. 박정희의 개발계획 등 각종 경제정책을 입안한 이들이 탈계급적이라고는 할 수 없으나 적어도 일정부분 국부(國富)의 총증분에 관심을 기울인 것도 사실이고, 그러한 관료주의는 일본의 그것과 함께 아시아형 경제모형의 한 특성을 이루었다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그것은 그 근본에 있어 정치적이었는데 그 기간 동안 오늘날 남한자본주의의 근본모순 중 하나가 되고 있는 재벌체제가 완성되었다는 점이 그 한 사례다.

한편 이들 경제 관료들은 그들을 보호하는 정치가들과 경제에 관한 이데올로기를 공유하였다. 즉, 무엇보다 가난에서 벗어나는 것이 시급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정정도 정치적 자유를 제약하여야 하는 것이 불가피하다, 파이가 커지면 결국 나눠먹을 몫이 커지는 것이다 등등. 일정부분 진심으로 믿었고 일정 부분 정치적으로 이용해먹었다. 그리고 독재의 정당성이 힘을 잃어가게 되자 ‘민주화 세력’이라 칭해지는 재야(在野)에 대비하여 자신들을 ‘근대화 세력’으로 자리매김한다. 뜻밖에도 민주화 세력은 이런 비교에 별로 저항하지 않으면서 이제 그들 스스로는 ‘현대화 세력’으로 변모하려는 노력을 하게 된다.

이러한 노력의 최신 버전이 바로 한미FTA라 할 수 있다. 그들은 이전의 근대화 세력이 시도했던 종속적이고 승자독식형인 한국형 자본주의 모델 자체는 거의 비판하지 않았다. 다만 그것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부패 등에 관심을 기울여, 실질적인 계급갈등의 해소보다는 ‘금융실명제’, ‘생산적 복지’ 등 이른바 경제 민주화에만 힘을 쏟는다. 그리고 노무현 정부 들어서는 급기야 ‘사회양극화 해소’와 ‘한미FTA’라는 상호 모순된 정책을 통해 경제위기를 돌파하려 한다. 한미FTA의 홍보논리는 박정희의 ‘잘 살아보세’ 논리에서 거의 진전된 것이 없다. 그것의 트리클다운의 기대치는 박정희 시대에 비해 훨씬 떨어질 것임이 자명함에도 말이다.

결국 ‘탈정치적인 경제’를 경험하였던 보통사람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선택의 이유를 거리낌 없이 ‘이전 정권이 경제를 망쳤기 때문’이고 ‘어떤 후보가 경제를 살릴 것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라고 말하지만, 그것이 누구의 경제를 망쳤고 누구의 경제를 살리기 위한 것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큰 고민을 한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일단 경제가 살면 언젠가는 자신들에게 혜택이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서울대 신입생의 절대다수가 강남 출신이라는 사실이 상징하듯이 계급구조는 고착화되어 ‘누구를 위한 경제’인가가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경제의 계급성에 대한 몰이해의 대표적인 사례가 지난번 종합부동산세의 폐지시의 논쟁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 당시 종합부동산세가 폐지되어야 하는가 하는 설문에 상당수가 반대하였지만, 나를 놀라게 한 것은 거의 과반수에 육박하는 수가 폐지에 찬성하였다는 점이다. 그들 대부분이 평생 가도 종합부동산세를 낼 처지가 안 될 것임이 뻔한데도 그들 상당수는 종부세 피해자(?)의 정서와 자신의 그것을 동일시한 것이라는 의심을 지울 수 없었다. 이런 정서는 또한 서울 집값 폭등의 소외계층(?) 노원구에서 노회찬 대신 홍종욱이 당선된 사례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결국 우리 사회의 민주화 세력 내지는 진보 세력은 가장 정치적인 의제인 경제를 ‘정치적인’ 것으로 이슈화시키는 데 실패한 탓에 집권세력으로서의 생명력을 이어갈 수 없는 한계를 보이고 있다 할 수 있다. ‘도대체 누구를 위한 경제인가’와 ‘공동체를 위한 경제 로드맵’을 보통사람에게 설득하여야 하는데 ‘일단 경제를 살리고 보자’라는 우익들의 총공세에 별다른 저항도 없이 투항하는 형국을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가장 좌파적이라는 노무현 정부조차 삼성경제연구소의 보고서를 정책입안의 텍스트로 삼았고, 민주노동당 등 좌파의 경제대안을 현실을 모르는 철없는 소리로 폄하한 것이 그 한 예다.

결국 이 과정에서 집권초기에 자리를 차지했던 이정우, 정태인 등 진보적인 경제 관료들은 밀려나고 한미FTA를 적극 주장했던 김종훈, 그 스스로가 부동산 투기세력인 김진표 등이 관료직을 차지하고 앉아서 진보적인 대안을 무력화시키면서 경제정책을 한층 보수화시켜버리는 상황이 되었다. 그러한 패배의 경험으로 말미암아 이제 보통사람들에게 경제와 정치의 상관관계에 대한 연결고리는 점점 더 희미해지고 있다. 보통사람들이 지배 엘리트의 정치적 압박에는 강하게 반발하면서 경제적 압박에는 갈피를 제대로 못 잡는 형국이 현재의 한국정치의 현 주소다.

부동산과 곡물법

tomahawk님 왈. “지금 사람들은 원래 땅파는게 취미였다 치더라도… 전에 있던 사람들은 왜 그렇게 미련을 못버렸을까요” 라는 댓글을 보고 또 문득 생각나는 글이 있다. 참여정부 초기 그들의 부동산 철학의 단편을 살펴보고 적은 단상이다. 참고하시길.

부동산과 관련해서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집이나 땅이 거주나 생산적인 경제활동과 거리가 먼 투기를 통한 자산증식의 수단이 되고 있다는 점이라고 봅니다. 특히 부동산 투기로 집값이 오르게 되면 당장 서민과 중산층의 주거비가 오르게 되고, 이는 집 없는 사람들의 내집 마련에 대한 불안감과 근로의욕 상실, 상대적 위화감으로 이어지게 됩니다.또한 전세값이나 집값이 오르게 되면 이것이 근로자의 임금인상 요구로 이어져 경제의 경쟁력 저하요인이 되는 등 그 부작용이 매우 큽니다. 그래서 부동산 가격안정을 최우선 정책과제 가운데 하나로 삼아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코자 하는 것입니다. [머니투데이, 2003.12.08, 盧 “성장잠재력 붕괴 없다” 중에서]

참여정부의 수반 노무현 대통령의 부동산에 대한 인식이다. 일단 그의 무주택 서민들을 위한 부동산 안정화에 대한 의지는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한가지 주의할 점은 그의 부동산 대책이 서민들의 주거안정을 통한 사회안정이나 약자보호 의지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집값 안정을 통한 경쟁력 확보 내지는 임금상승 욕구 억제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는 점이다. 필자는 그의 이러한 상황인식을 바라보면서 엉뚱하게도 바다 건너 영국에서 한 시절을 풍미했던 ‘곡물법’이 떠올랐다.

‘곡물법(穀物法 , Corn Law)’이란 무엇인가? 이 법은 곡물의 수출입을 규제하기 위한 법률로 같은 이름의 법이 중세에서부터 있었지만 19세기 초반의 영국 법률이 대표적이다. 이 법은 소맥의 가격이 일정 정도가 되기 전까지는 수입을 금지함으로써 표면상의 목적은 곡물 가격의 등락에 대해 자국의 농업을 보호하고자 하는 것이었으나 그 속을 들여다보면 영국 지주계급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한 대표적인 보호무역주의 악법이었다. 그 당시 자유무역의 선봉장 리카도(David Ricardo)를 비롯한 여러 명망가들이 법의 폐지를 주장하였으나 의회의 다수파를 이뤘던 지주계급은 이 법을 강력히 옹호하여 결국 1846년이 되어서야 법이 폐지되었다. 리카도는 생전에 법의 폐지를 볼 수 없었다.

그렇다면 왜 고전경제학의 창시자 중 하나인 리카도는 이 법을 그토록 반대하였을까? 그의 주장은 무엇보다도 곡물법은 그의 자유무역 신념에 위배되는 악법이었다는 것이 첫 번째 이유거니와 그와 맞물려 지나치게 높은 곡물가격은 임금상승의 요인이 되어 산업경쟁력을 해친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당시 지주계급에 대항하는 신흥 부르주아의 일반적인 정서였다고 할 수 있다. 노동자의 생계비용의 큰 몫을 차지하는 곡물가격의 앙등은 좀더 낮은 임금으로 노동자를 부려먹어야 하는 자본가 계급의 계급이해에 합치하지 않는 것이었다. 오늘날 우리는 21세기 대한민국 대통령의 부동산에 관한 언급에서 리카도의 논리가 부활하고 있음을 본다.

‘집값이 오르게 되면 이것이 근로자의 임금인상 요구로 이어져 경제의 경쟁력 저하요인이 된다. 그러므로 집값이 안정(또는 하락)되어야 한다.

여기서 잠시 곡물법의 경우와 부동산의 경우의 중요한 차이점을 살펴보기로 하자. 무엇보다도 이해집단에서 차이가 난다. 곡물법 경우에는 여전히 막강하지만 한편으로는 얼마 안 있어 역사 속으로 퇴장할 지주계급이 자리잡고 있다. 이들은 다른 계급과 열매를 향유할 생각이 터럭만큼도 없었다. 부동산의 경우에는 이해집단이 좀더 복잡하다. 우선 비업무용 부동산을 다수 소유하고 있는 자본가 계급이 그 정점에 있다. 지난 세기 그들의 선배들이 반대했던 토지를 통한 불로소득은 오늘날의 자본가 계급에게는 알짜배기 수익원이다. 또한 병렬선상에 건설자본과 부동산 재벌이 있다. 이들은 부동산 생애주기의 흐름과 법과 제도의 맹점을 활용하여 단 기간에 높은 수익률을 올렸다. 다음으로 먹이사슬의 하층부에 자리한 쁘띠부르조아들이 있다. 이들은 부동산을 재산증식수단으로 활용하여 자신의 재산을 불림으로써 부도덕한 체제에 기꺼이 포섭되었다. 얼마 전 매일경제신문에서 확인한 바, 대다수의 부동산 관련 관료들이 강남에 집을 소유하고 있었고 이들은 체제포섭된 쁘띠부르조아의 대표적 계층이라 할 수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지배계급의 부동산 안정화 논리는 더할 나위 없이 단순 명쾌하지만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그 명쾌한 논리로도 풀 수 없는 복잡한 실타래가 존재하고 있다. 이에 따라 저항은 그 이해관계자가 복잡하고 다양한 계층의 성향을 띠는 것만큼이나 의회에서뿐만 아니라 행정부, 지방자치제, 언론 등 다방면에서 진행되는 양상을 띠고 있다.

수도권 개발부담금 제도가 폐지됨으로써 명맥만 유지해오던 토지공개념은 역사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서울시가 각 구청의 반발이 심하다는 이유로 정부에게 부동산 보유 재산세율 인하를 요구하고 있다. 재정경제부는 다주택 보유자에 대한 양도소득세 중과세의 지역범위도 대도시에 국한시키겠다고 한다. 경제신문들은 정부의 부동산 안정의지를 기사화 하는 한편으로 기획기사를 통해 은근히 부동산 경기가 곧 살아날 것이라고 부추긴다. 한겨레21 최근호가 ‘부동산 전쟁’이라고까지 표현한 현재의 국면에서 만만찮은 저항이 존재하고 있음을 알려주는 사례들이다.

토지의 공유화를 통한 사회정의를 추구했던 헨리조지의 추종자가 청와대 정책실장을 차지하고 있다. 빈민운동을 했던 이는 청와대 비서관이다. 이들은 한겨레21이 부동산 전쟁의 ‘5인의 주역’으로 지목한 이들에 속해있다. 노무현 정부에서 가장 잘한 일은 부동산 정책이라는 설문조사도 발표되었다. 현재까지는 그런 대로 잘하고 있다. 하지만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저항은 만만치 않다. 영국의 자유주의자들이 곡물법을 폐지시키는 데에 30여 년이 걸렸다. 우리는 해방이후 지속되어온 이 부동산 투전판이 언제 끝날지 감도 잡을 수 없다. 자유주의 정권의 역사가 짧은 만큼 전쟁은 이제 막 시작이라고 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들이 그들의 선배 자유주의자 만큼만이라도 할 수 있기를 바란다. 부동산 폭등은 곡물법이 그러했던 것처럼 경쟁력 저하의 요인이 된다는 꼭 그 논리만큼이라도 관철시키기를 바란다.

그 후에 진보세력은 그 철학과 집행수단에서 그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갈 것이다.

정부 정책도 삼성경제연구소의 보고서를 베끼는 나라

필자도 삼성경제연구소(SERI, 이하 삼성연)를 좋아한다. 삼성연의 보고서를 이메일로 받아보고 있다. 가끔 글을 쓸 때 참고도 한다.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은 그들의 인적자원이 국내 최고급이라는 사실이다. 아는 선배도 그곳에서 고액연봉 받아가며 일한다. 선거 때만 되면 각 캠프에서 이런 저런 주문이 많이 들어와서 써준다고 하니 요즘 바쁠 거다.(이걸 정학유착이라고 해야 하나?)

그 정도면 양반일 텐데 오늘자 경향신문이 전하는 소식은 (어쩌면 이미 상식에 속하는 이야길지 모르지만) 또 한 번 필자를 우울하게 한다. 기사에 따르면 참여연대 사무처장은 “노무현 당선자 책상에는 인수위 보고서와 삼성연 보고서가 같이 놓여 있었다. 386 측근 참모가 SERI와 같이 만든 보고서였다”면서 “핵심 내용이 ‘대미·대북관계는 진보적으로, 사회경제 정책은 보수적으로’였다”고 회고하였다 한다.

‘대북관계에서의 (상대적인) 진보성과 사회경제에 있어서의 보수성’

이것이 정확하게 참여정부의 스탠스였다. 앞서의 언급에 있어 대미관계는 대북관계와의 종속성으로 인해 레토릭만 자주를 외치다 제 풀에 스러져버린 굴종적인 것이었음은 이미 증명되었다.

사회경제적인 측면에서 있어서는 집권초기 약간이나마 진보적 시도가 있었다. 토지공유론으로 유명한 헨리조지 주의자로 알려졌던 이정우 씨의 대통령 정책기획위원장 기용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그는 김수현 청와대 국민경제비서관 등 진보적 인사들과 함께 토지문제에 메스를 가하려 하였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이에 대해 기사는 “개혁적 소신을 유지한 이정우 전 대통령 정책기획위원장, 이동걸 박사 등의 조기퇴진 배경에는 삼성생명 상장과 개혁정책을 둘러싼 청와대 386 및 관료들과의 파워게임이 있다”는 정태인 전 청와대 국민경제비서관의 증언을 전하고 있다.

가장 충격적인 것은 삼성연이 한·미 FTA의 논리적 기반도 제공했다는 평가다. 삼성연은 한·미 FTA 개시선언 직후인 지난해 3월 ‘도대체 왜 한·미 FTA를 해야 하는가’라는 보고서에서 ‘서비스시장 개방론’을 처음 이슈화했다고 한다. 이후 노대통령은 FTA 대책과 양극화 해법으로 강조해온 ‘지식서비스업 강화론’을 강조한다. 삼성연이 대통령 이하 국민의 상투머리에서 놀고 있다는 말이다.

앞서 말했듯이 삼성연의 연구원들은 훌륭한 인적자원들이다. 그들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니 만큼 아이디어도 상당하고 쓸 만하다. 문제는 그들의 계급성이다. 그들 스스로는 지식 ‘노동자’일지 모르나 그들의 머리에서 나온 아이디어는 ‘삼성 자본’의 프레임을 통해 필터링된 아이디어들이다. 연구원 개인적으로 FTA를 찬성하든 말든 연구소의 보고서는 FTA 찬성으로 나온다. 삼성의 수많은 천재적인 머리들이 불법세습을 위해 전환사채 발행을 고안해냈듯이 사주와 자본을 위해 머리가 움직일 수밖에 없는 구조라는 것이다.

그리고 참여정부는 뻔뻔하게도, 또는 무능하게도 자신의 머리를 비워둔 채 민간기업의 경제연구소의 머리를 빌어다 썼다. 그러고서는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간 것 같다”고 선언했다. 이런 무기력증을 무어라 표현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그런 한편으로 또 NLL에 대한 하나마나한 발언으로 구설수에 오른다. 보수적 경제 운용으로 서민들의 분노를 자아내고 진보적 대북관계로 우익적인 시민들의 분노를 자아내는 일거양득의 효과를 노린 것인가? 그러니 “사람을 죽였대도 이명박을 찍겠다는” 사람들이 나오지 않겠는가?

이것은 어쩌면 참여정부만의 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 이 사회는 가만 보면 알량한 지식 쪼가리 몇 개를 가지고 지식인이나 전문가 행세를 하는 사회다. 그런데 정작 써먹으려면 알맹이가 없다. 청와대 386이란 치들이 그랬을 것이고 그것이 희극 버전으로 일어난 사건이 신정아 사건이다. 사회가 바로 서려면 정말 똑똑한 이가 우대받아야 한다. 그런데 새치기와 거짓으로 행세하는 이가 너무 많은 이 세상엔 헛똑똑이들이 너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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